한국의 학벌, 또 하나의 카스트인가 책세상문고 우리시대 37
김동훈 지음 / 책세상 / 200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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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김동훈, <한국의 학벌, 또 하나의 카스트인가>, 2001. 책세상



바로 그것이다. 문제가 심각함에도 불구하고 전혀 의제화되지 않았던 학벌, 저자 김동훈은 그 이유를 밝히고 질타하는 데서부터 글을 시작한다. 바로 사회의 의제설정을 맡은 지식인들이 학벌의 수혜자들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나는 어떠한가? 성골이 아닌 진골이니, 문제를 제기할 법도 한가? 아니면 학벌의 그 더러운 인연을 일찌감치 잘라버리려고 노력했기 때문에(예를 들어 인터넷 신문 제주의 소리 컬럼자 소개에서 나는 과감히 학벌을 무시하는 자세로 임했다) 조금은 자유로울 수 있을까?
하지만 솔직히 어려움이 닥칠 때면 대학 동문을, 잘 나가는 동문들을 찾고 싶어진다. 그것마저도 탓해야 한다면, 정글 속에서 살아가기가 정말 무섭다. 그러나 나와 같은 처지에도 있지 못한 사람은? 하긴 그들 중 일부는 부지런히 술자리를 따라다니며 연을 맺긴 하더라.

각설하고, 김동훈의 책을 검토해보자.
학벌은 한국만의 특이한 현상이다. 물론 다른 나라도 학력이나 학연에 따라 무리 짓는 현상이 없지는 않겠지만 한국만큼 심각하지는 않다는 것이다. 그러니 재벌처럼 학벌도 영어로 따로 번역할 게 마땅치 않다.
지극히 한국적 현상이라는 뜻이다. "아직 개인 중심의 시민사회가 정착되지 못하고 집단 소속에 의해 개인의 사회적 위상이 정해지는 집단적 사회에서 나타나는 특수 현상"이다. 이걸 사회학적, 정치학적, 경제학적, 문화적 측면에서 접근했다. 그에 따른 결론은 학벌은 신분이다. 학벌은 붕당이다. 학벌은 독점이다. 학벌은 편견이다 라는 것이다.
이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는 분, 물론 많다. 저자는 그들의 논리를 소개한 후 하나씩 격파해나간다.
먼저 경쟁동기론, 학벌이 있어야 경쟁이 활발해진다는 것이다. 천만에, 한번 서울대는 영원한 서울대이기 때문에 성취 이후에는 경쟁이 사라진다.
기회균등론, 대학입시야말로 가장 공평한 기회 배분이라는 말이다. 역시, 천만에다. 이미 서울 강남지역 출신 아이들이 서울대 입학생의 반을 점거하고 있는 현실에서 대학입시는 사회이동의 수단이 아니라 고착화의 도구일 뿐이다.
마지막으로 꽤 위력이 있는 능력지표론, 이건 꼬우면 출세하라는 말이다. 누가 서울대 들어오지 말래? 열심히 공부해봐. 서울대 간 사람이 다른 것도 잘해. 뭐 이런 싸가지 없는 논리다. 그렇게 잘난 사람들이 외교협상에 가서 한 짓이 지금의 현실이다. 물론 서울대는 국내 최고다. 하지만 세계무대에 가면 팡팡 깨진다. 그런데도 능력지표라고? 아니다. 권력 독점의 정당화 수단일 뿐이다.
통쾌하다. 소위 서울대 이데올로그들을 손쉽게 박살낸다. 하지만, 그가 제시하는 대안을 보면 솔직히 신뢰하기가 어렵다. 아! 학벌 극복, 이건 정말 어려운 일인가?
그가 제시하는 대안이라는 건 너무 안이하다. 현실성이 너무 없다. 그냥 프랑스의 예처럼 대학평준화 같은 이야기만 한다. 전형을 비공개로 하여 순수 '교육적' 목적으로 학생을 선발하나는 말이다. 여기서 중요한 건 공정성이 아니라 '교육적 가치'다.
이게 문제다. 강준만 같은 현실성이 없다. 만약 전형을 비공개로 해 봐라. 대한민국이 남아나겠는가? 아마 학부모들이 벌떼같이 들고 일어날 것이다. 그걸 어떻게 감당하려고. 대학 여구실에 앉아서 글로써 막아보시게.
아니다. 문제의 본질은 따로 있다. 그가 이야기하는 교육적 가치에 의한 선발이 되려면, 대학입학 자체가 가지는 사회경제적 메리트 자체를 없애야 한다. 대졸에게 떡이 훨씬 많이 떨어지는데, 어떻게 공정성 문제가 부차적일 수 있겠는가. 그러니 대졸-고졸 입금차 완전 철폐가 우선이다. 대학은 말 그대로 출세의 수단이 아니라, 학문의 전당으로 바꾸어 놓는 게 순서다. 이게 될 때 비공개 전형이 되고, 교육적 가치가 살아난다. 저가 김동훈은 이 절차를 생략했다. 그게 결정적 과오다.
그래도 어디냐? 이런 문제제기가 있기에, 정운찬 총장 같은 사람이 서울대 폐지 불가라는 발언이라도 나오는 게 아닌가? 일단 의제 설정까지는 성공했다는 말이다. 그러면, 이제는? 여기서는 김경근의 제안, 즉 학부모가 나서야 한다. 국민투표를 요구해야 한다. 대학서열철폐 국민투표 말이다.
아! 내 딸들이 중고등학생이 되었을 때도, 지금같은 불지옥이면 어떡하지? 생각만해도 끔찍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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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서열 깨기
김경근 지음 / 개마고원 / 199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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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근, <대학서열깨기>, 1999, 개마고원.


"죽어가는 우리 아이들을 살려야 한다"
이 책의 부제다. 서울대를 나와서 국립대학에서 교수생활을 하는 김경근이 한 말이다. 일류 코스를 달려온 그도 지금의 입시경쟁이 살벌하게 느껴진 걸까?
그랬던 모양이다. 단순한 문제의식이 피부에 와 닿은 건 그의 어린 자녀들이 숨막히는 정글 속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던 모양이다. 그러고 보면 서울대를 나온 기득권층 부모 역시 피해자인 것 같다.

그럼 그가 내린 결론은 무엇일까?
책 표지에 써 있다. 이것도 하나의 부제인 모양인데, 답은 이렇다.
"대학입시 평준화만이 살 길이다"

18세 때 단 한번의 시험으로 인생이 결정되는 사회, 신분이 결정되는 사회. 그렇다고 해서 기회가 모두에게 공정한 건 아니다. 강남 부유층 자제들이 당연히 좋은 기회를 잡는다.

잘못된 대학서열제 때문에 애들은 죽어가고, 대학 역시 망가져왔다. 서울대의 세계적 위치를 보면 안다. 800등에도 못낀단다.

그렇다면 대안은 무엇인가?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대학입시평준화이다. 혹 그렇다면 그 모순이 대학원으로 옮겨가 단지 시기만 늦춰지는 건 아닐까? 그는 아니라고 한다. 대학원 단계면 유학길도 있고, 진짜 공부할 놈들만이 남는다는 것이다. 어차피 대학은 간판에 불과하니까. 그럴만도 하다.
그러나 사실 이 부분은 솔직히 장담하기 쉽지 않다.

물론 그의 문제제기는 옳다. 땜질식 입시제도 개혁은 백 날 해봐야 소용이 엇다. 근본이 바뀌어야 한다.
하지만 내가 생각하는 근본은 김경근과는 조금 다르다. 대학 서열깨기에 앞서 고졸.대졸자의 임금격차를 완전히 없애는 것이다. 그리고 모든 입사원서에 학력란을 없애는 것이다. 즉 고졸과 대졸이 '계급장'의 힘이 아니라 직무 수행 능력을 가지고 경쟁하자는 것이다. 이게 오히려 더 근본적이자 현실적인 대안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되면 굳이 대학에 몰릴 일도 없을 것이며, 그래야 대학은 공부하는 공간이 될 것이다.
어쨌거나 서울대 출신이 스스로의 기득권을 버리고 본질적인 문제제기를 하는 용기와 대안 제시 능력, 고맙고도 존경스러운 인물이다.
글이 읽기 쉬운 점, 이것도 미덕이다. 그러니 그의 요구 처럼 많은 학부모들이 앞장 섰으면 좋겠다. 행정수도 이전 문제를 가지고 국민투표를 할 것이 아니라 서울대 폐지, 대학평준화 등 이런 걸 가지고 했으면 좋겠다.
현대판 신분제, 새로운 씨족 해체를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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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회의 교육열 - 기원과 심화
오욱환 지음 / 교육과학사 / 200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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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욱환의 <한국사회의 교육열: 기원과 심화>, 2001, 교육과학사.


사회불평등론 기말 리포트를 준비하다가 읽은 책이다. 한 학기 동안 불평등에 관한 이론만 공부했을 뿐, 정작 내가 살고 있는 한국사회에서 어쩌면 가장 심한 불평등을 야기하고 있는 교육문제 등에 대해서는 따로 고민하질 못했다. 그러니 이젠 이론에서 구체적 현상으로 내려와야 할 때.

오욱환의 이 책은 차분하다. 그리고 진지하다. 고려와 조선시대 과거로부터 시작해서 오늘에 이르기까지의 한국사회 교육열의 기원 그리고 그 심화를 살핀다.
여기에 동원된 이론은 우선 서구이론이다. 인적자본론, 지위획득론, 선별이돈, 계층경쟁론, 계급배제론 등이다. 하지만 한국사회 교육열이 워낙 특이한 만큼 그 이론도 서구의 것으로는 한계가 있겠다.
그래서 저자가 시도한 것이 한국적 이론이다. 그 핵심은 '교육출세론'
이쯤이면 더 할말이 없다. 교육이 출세의 지름길이라는 한국사회 내에서는 너무도 상식적이고 당연한 걸 이론적으로 잡아내었기 때문이다. 정직하다. 그리고 정확하다. 더하여 외국어 능력이 중시된다는 점, 온 가족이 매달린 전쟁이라는 점 등에 대한 지적도 타당하다.
다만 아쉬운 건,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내놓은 대안이다. 저자는 서문에서 그 음울한 전망을 미리 피력했다. 별다른 대안이 있을 수 없다는 암시다. 그러면서도 문제의 심각함을 드러내는 것만으로도 큰 몫은 했다는 것이다. 맞다.
그래도 아쉽다. 시민이 주체가 되는 문화운동, 의식개혁운동이 교육열을 잡아갈 수 있을 것이라는 건, 아무래도 맥빠지게 하고 만다.
제도적 개혁은 왜 언급하지 못했을까. 그도 역시 서울대 출신이라서?
그러고 보면 같은 서울대 출신이면서도 강력하게 그걸 부정하는 김경근의 <대학서열깨기>가 기다려진다. 바로 그 책을 잡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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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회의 학력 학벌주의
이정규 지음 / 집문당 / 200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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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규, <한국사회의 학력, 학벌주의: 근원과 발달>, 집문당, 2003.


새로울 건 없다. 우리사회의 학벌, 학력주의의 폐해를 객관적 데이터를 제시했다는 장점만이다. 아니 그것이 크다. 큰 미덕이다.
예를 들면 역대 국회의원의 출신대학 통계 같은 게 그렇다.

학력은 직종 선별 기능, 산업별 선택의 기회, 학력간 임금격차, 통혼권 형성 등을 이야기하면서 제시한 임금의 구체적 데이터도 같은 예다.

그러면서 준신분화라고 말한다. 사실 이전에 이를 극단적으로 표현한, '카스트'라는 말이 헛말이 아닌 것 같다.

더 이상 학력과 학벌이 계층 이동의 수단이 아니라, 사회경제적 지위를 대물림 혹은 확대재생산 하는 도구라는 말이 맞다. 즉 사회경제적 기득권의 확대 재생산을 위한 도구로 혹은 새로운 신분의 세습화를 위한 통로의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대안으로 제시한 것도 사실 새로운 건 아니다. 인재할당제, 평가방법의 개선, 실력중시 사회구축, 서울대 폐지 등이다.

문제는 실천이다. 하지만 쉽지가 않다. 기득권층의 반발 때문이다. 때문에 그도 지적하고 있지만 기득권 층의 양보, 즉 기득권을 누리고 있는 사람들은 소아적이고 이기적인 출세지향성을 지양하고 모든 사람이 공생공영할 수 있도록 학력과 학벌로 획득한 기득권을 과감히 양보하거나 포기해야 할 것이다. 이 책의 저자 이정규의 말이다.

쉽지 않지만 가야할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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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금꽃나무 우리시대의 논리 5
김진숙 지음 / 후마니타스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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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숙, 회피하고 싶은 그러나 그럴수록 나를 붙들어 매는 사람>

김진숙, <소금꽃 나무>, 후마니타스, 2007.



김진숙, 그를 보면 나는 아프다. 몹시도 아프다. 작년 그러니까 206년 1월 부산에서 있었던 전국역사교사모임 자주연수에서 그를 처음 봤다. 당당함, 해맑음, 도대체 저런 몸에서 어떻게 그런 깡다구가 나왔을까 싶었다. 고향 강화도에서 돈 벌러 나간 부산. 공장에서, 시내버스 문간에서, 그리고 한진중공업에서, 그 아슬아슬한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그는 잘도 버텼다. 그 힘이 어디서 나왔을까 싶을 정도로.
그가 안기부에서 취조 받던 이야기, 감옥 안에서 만난 살인범 이야기 등을 듣고 있을 때, 나는 그냥 울기만 했다. 주변에 동료 교사들이 죽 있었건만 전혀 그런 것은 들어오지 않았다. 하염없이 눈물만, 눈물만 흘렀다.
강연을 마치고 강당을 나갈 때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 살짝 봤다. 멀리서 보았던 그 생생함만은 아니었다. 멀리서 볼 땐 그렇게도 맑고 어여쁜(?) 사람이더니, 가까이서 보니까 그 맑음 속에 고생 자욱이 가득했다. 그리곤 이내 나는 고개를 돌렸다. 더 이상 그를 쳐다볼 용기가 없었다.
부끄러움, 자책, 부채감. 시대의 모순에 누구보다 민감하고 아파하고 해결을 위해 실천적으로 나서야 하는 지식인으로서의 모습을 나에게서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나 역시 이제 많이 등이 따뜻해졌고, 배에도 적당히 살이 붙었나 보다. 그를 피하고만 싶었다. “고무 공장에서 신발 밑창에 풀칠을 해대느라 갈라 터진 아내의 손바닥을 볼 때마다 죄스러움으로 외면”하는 심정과 다르면서도 비슷한, 어쩌지 못하는 괴로움 때문에 생긴 기피였다.
그렇게 그를 잊었다. 그런데 올해 그가 쓴 책이 나왔다는 소식을 접했다. 피하고 싶었다. 다시 그 아픔 속으로 들어가고 싶지가 않았다. 그러면서도 나는 그의 책을 살 수밖에 없었다. 무슨 힘인지 모르겠다. 책을 손에 넣고 읽어 가는데, 아픔은 이전보다 배로 다가왔다. 그때 강연했던 내용도 책에 더러 나왔다. 자꾸만 면도칼이 내 눈 앞을 지나가는 느낌이다. 덮고 싶었으나 그래도 마치긴 했다. 책을 놓고 한 동안 멍할 수밖에 없었다.
강한 사람, 아니 진솔한 사람. 그는 그 험한 현장에서 노동자로써 단련된 줄만 알았는데, 글도 참 잘 썼다. 기교가 아니다. 예쁜 수식어가 아니다. 그저 투박한 언어뿐이다. 그런데도 심장을 향해 날이 팍팍 찍혀 온다. 진실의 힘이다. 진실하게 삶에 대응했기에 나오는 몸의 언어다. 프랑스 지식인들이 말하는 관념으로서의 몸이 아니다. 욕망의 주체로서의 몸이 아니다. 절규다. 생존을 향한, 그리고 최소한의 상식이 통하는 사회를 향한 피울음이었다.
특히 요즘은 비정규직 문제로 노조가 어렵다. 노조가 단결하면 자본은 비정규직으로 갈아 버린다. 비정규직은 노조를 만들기가 어렵다. 이런 제기랄. 정규직은 비정규직이 자신들의 일자리를 빼앗을까봐 경계한다. 거의 두 배의 급여를 받으면서, 아니 받기에 비정규직을 더 멀리한다. 하지만 비정규직은 정규직의 미래일 뿐이다. 그런데도 자기만 살겠다고 난리다. 이런 현실이 몹시도 그를 아프게 했던 모양이다. ‘비정규직은 울고 정규직은 잔업과 성과급에 영혼을 파는’ 현실이기 때문이다.
“정규직의 적은 비정규직이 아니라 자본입니다. 우리가 맞장을 떠야할 건 약자가 아니라 구조조정이라는 사시미 칼을 든 깡패입니다. 자본의 발밑에 짓밟혀 파들파들 떨고 있는 민들레를 한 번 더 짓밟는 게 아니라 그 발을 치워 줘야 합니다. 민들레에게 너희도 소나무가 되라고 요구할 게 아니라 민들레에게 숨 쉬고 씨앗 흩날릴 영토와 햇볕을 나눠 줘야 합니다. 민들레가 죽어 가는 땅에선 어떤 나무도 살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구조조정의 끝은 정규직의 비정규직화입니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을 갈라 서로 대립하게 만들고, 자본이 해야 할 말을 같은 노동자가 하게 되는 이 기가 막히는 상황이야말로 신자유주의의 본질일 것입니다.”
“부디 저 고운 영혼들이 꽃보다 먼저 환해지는 봄이길. 봄마저 쟁취해야 하는 신자유주의 세상에서 그런 봄이 부디 저들의 것이길 간절히 바랍니다.”
“천 원이 남으면 순대 한 봉지에 젓가락 여덟 개가 꽂히던 그 가난한 사랑은 얼마나 눈물겨웠는가. 남루했으나 아무도 부끄럽지 않았고 더러 울기는 했으나 아무도 외롭지 않았던 그 때 우리는 얼마나 당당했는가.” 그래 그 땐 외롭진 않았다. 비록 아프긴 했지만 외롭진 않았다. 그런데 지금은. 나 역시 많이 외로움을 느낀다. 다들 떠나가기 때문이다. 그리고 ‘남루했으나 부끄럽지도 않았다.’ 그러나 지금은 남루하지 않다. 하지만 많이 너무 많이도 부끄럽게 산다. 그래서 나는 김진숙의 글을 피하고 싶었던 게다.
그는 그래서 말한다. “민들레에게 올라오라고 할 게 아니라 기꺼이 몸을 낮추는 게 연대입니다. 낮아져야 평평해지고 평평해져야 넓어집니다.” 그는 선생님들에게도 비정규직에 대해 관심 가지라며 어려운 충고를 한다. ‘아이들에게 인사도 채 못하고 떠나는 기간제 선생님의 소리 없는 눈물에는 상처를 받아야 한다’고 말이다. 그러고 보니 나 역시 주변의 기간제 선생님께 전혀 관심을 못 가졌다는 생각이 든다.
나를 아프게 하는 글들은 많았다. 특히 노동현장에서 희생된 사람들과 그 가족들의 이야기에서 나는 한 동안 멍하니 하늘만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내가 있던 포철 학교에서도 그런 분위기를 간혹 접하긴 한다. 워낙 큰 규모의 작업장이라 사고가 났다 하면 말 그대로 ‘뼈도 못 추리는’ 대형 사고다. 형체 자체가 없어진다. 그런 사고가 늘 있었다. 수업을 하다가 갑자가 담임이 어느 학생을 부른다. 가방을 싸고 나오라는 부름이다. 순간 교실은 싸늘해진다. 대개가 그런 사고를 당한 노동자의 아들의 경우다. “누군가는 어이없는 사고로 목숨을 잃었다면, 그 원인에 대해 사고보고서보다 더 정확하게 알고, 그 원인에 분노하며, 남일 같지 않은 죽음 앞에 가슴 쓸어내리며, 마누라에게도 차마 말 못할 자기 설움을 술잔에나 털어 부으며 꺼이꺼이 기막혀 했을 사람들.” 맞다. 그런 설움은 마누라에게도 말 못한다. 그저 꺼이꺼이 기막혀 하는 게 고작이다. 김현승 시인이 그리 말했다던가. “아버지의 눈에 눈물은 보이지 않으나 아버지가 마시는 술잔의 절반은 눈물이다”라고.
희생자의 자식들을 생각하면 더 그렇다. “백인의 열사보다 단 하나의 아빠가 아직은 더 절실한 아이들”이기에 그 고통과 아픔은 감당하기 어렵다. 이 아이들이 컸을 때 무슨 생각을 할까. 자기의 아빠에 대해, 그리고 그 시대에 대해, 그리고 그 시대의 지식인들에 대해 무슨 생각을 할까. 혹시라도 그 자식 중 하나가 훗날 내게 당신은 뭘 했냐고 한다면 나는 뭐라 답할까.
절망감만 밀려온다. “분노가 조직이 되지 못하는 현실, 통곡조차 투쟁으로 이어지지 못하는 현실, 모여 있는 동안은 동지지만 흩어져 일하는 대부분의 시간은 적이 되고, 경쟁 상대가 되는 현실” 이 현실 앞에 우리는 한 없이 작아져만 왔다. 그저 제 살길 찾아 나서기 만에 급급해 왔다.
이건 부채감이다. 그도 그랬다고 한다. “말당을 키운 건 8할이 바람이었을지 모를 일이나 나를 여기까지 꾸역꾸역 떠메고 온 9할은 사실 부채감이었다. 저들이 저 자리를 지키고 있는 한 내가 먼저 떠날 수는 없는, 그러면 어디 가서 뭔 일을 하고 살더라도 필시 응징을 당하고야 말 것 같은·····.” 나 역시 부채감 때문이다.
하지만 내가 김진숙을 외면하지 못하는 건 단지 부채감 때문만은 아니다. 그에게서 희망을 보기 때문이다. “이제 아무도 기적을 말하지 않을 때 온 몸으로 기적을 만들어 가는 사람들. 우리가 단지 역사를 추억할 때 스스로 역사가 되어 가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눈물이 남아 있다는 건 아직 열정이 남아 있다는 증거다”라고.
그도 그 스스로의 나약함을 말한다. 그런 고백 속에 오히려 더 강하게 태어나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법정에 섰을 때의 글이다. “사법부가 권력의 시녀니 어쩌니 해도 전 막상 법 앞에 서면 겉으론 안 그런 척 해도 속으론 많이 떨려요.” 그러면서 그는 “법이 곧 정의였으면 좋겠습니다. 우리같이 가진 것 없고 배운 것 없는 사람들이 배가 등가죽에 붙어 가면서 정의를 소리 높여 외치지 않더라도 그저 법이 정의이기만 한다면. 그렇다면······.”라고.
“20년 가까이 초지일관 불굴의 신념으로만 버텼겠습니까? 그 폭력 앞에서 한 없이 비굴해지던, 살려만 준다면 글마들 발톱의 때라도 핥을 만큼 비굴해지던 스물여섯의 제 모습이 떠오르면 지금도 소름 끼칩니다. 오히려 그런 모습들 때문에 용기라는 게 얼마나 소중한지, 용기야 말로 얼마나 찬란한 자유인지, 뼈가 시리지요. 스스로에게 부끄러워지지 않는 것. 그것만큼 소중한 게 또 있을까요.”
다시 나를 추스른다. 거창한 일 못해도, 그저 스스로에게 부끄럽지 않을 것. 이렇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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