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더 데레사의 아름다운 선물 (반양장)
마더 데레사 지음, 베키 베니나트 엮음, 이해인 옮김 / 샘터사 / 200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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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한 가닥의 미소가 할 수 있는 그토록 큰 일

마더 데레사 지음, 이해인 옮김, <아름다운 선물>, 샘터, 2001.



‘빈자의 성녀’ 마데 데레사의 마지막 메시지라는 부제가 붙은 책이다. 이런 책을 읽고 나면 ‘책일기’ 쓰기가 힘들다. 책의 거의 모든 부분을 옮겨 놓고 싶어서다. 그건 막노동. 그렇다고 어느 부분만 옮기려니 마음이 편치 않다. 이럴 때 그냥 닥치는대로 쓰는 수밖에.
사실 언제부터인가 이 분의 책을 많이 읽는다. 예전엔 그냥 마음속으로만 존경하고 멀리서 쳐다보았을 뿐인데, 이제는 가까이 하고 싶다. 머리로가 아니라 삶으로.

“평화는 미소로써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대가 도무지 미소짓기 어려운 사람에게 하루 다섯 번 미소짓도록 애쓰십시오.” “우리는 하느님 평화의 빛을 뿜어내는 사람이 됩시다. 그래서 사람들 마음 안에 있는 미움들을 이 빛으로 몰아내고 사랑만을 가져 오도록 합시다. 서로 미소지으십시오.”
-그래도 올해부터는 내 얼굴이 많이 달라졌다. 웃음이 사라지지 않았음 좋겠다.

“서로를 성실하고 진지하게 대하며 있는 그대로의 서로를 받아들일 수 있는 용기를 지니도록 합시다. 다른 이가 비록 실수로 허물로 가득 차 있더라도 놀라지 마십시오. 오히려 서로 좋은 점을 찾아보려 애쓰십시오. 우리 각자는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되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맞다. 그건 용기다. 보통 용기가 아니다.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라니. 쉽겠는가. 아니다. 무척 어렵다. 그래도 그게 답이다.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라. 내 틀로 재단해서 수용하려면 체한다. 그냥 세상의 일로는 이게 힘들었다. 그러나 우리 각자가 모두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되었음을 믿기 시작하면서부터 내게도 변화가 생겼다. 물론 여전히 어렵다. 그래도 그가 하느님이다. 그에게 해 준 것이 곧 주님께 해준 것이다.

데레사 수녀님은 침묵도 많이 강조했다. 당신의 일이 알려져 더 바빠질수록 묵상 시간을 늘렸다고 한다. 침묵하지 않고 묵상하지 않은 상태로 일에 매달려면 주객이 전도될 위험에 빠진다. 하느님 일을 하는 줄 알았는데 지나고 보면 인간의 일, 자신의 일을 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그러면 곧바로 교만에 빠진다. 그러니 침묵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좋은 말을 꺼내 놓기에 급급해서인지 마음 깊은 곳으로 내려가 듣는 시간은 잘 갖지 못하고 있습니다. 마음의 고요 속에서만 하느님은 말씀하시기 때문이지요.”
“중요한 것은 우리가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우리를 통해서 말씀하고자 하시는 바로 그것입니다.(중략)침묵 속에서만 우리는 그분의 음성을 듣습니다. 그대의 마음이 다른 것으로 가득 차 있다면 그대는 하느님의 그 음성을 들을 수 없습니다.”
-이것이었구나. 내 마음에 다른 것이 가득 차 있으니 하느님을 만나기 어려웠던 것이로구나. 비워야 하는 것. 어떻게 뭘 비우지?
“우리가 지닌 책, 생각, 기억과 함께 하는 것이 아니고 오직 그분과 함께여야 합니다. 모두를 온전히 벗어나 그분의 현존, 침묵, 비움, 희망, 동요되지 않는 고요함 안에 사랑스럽게 머무는 것입니다. 야단스럽게 법석을 떠는 곳에서는 그분을 발견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내적 침묵을 연습하라고 하신다.
“눈의 침묵을 지키십시오. 영혼에 방해가 되고 죄가 될 뿐인 타인의 결점 찾기를 그만두고 하느님의 선하심과 아름다우심만을 찾으십시오.”
“귀의 침묵을 지키십시오. 타인의 험담, 소문을 실어 나름, 무자비한 말들처럼 인간 본성을 타락시키는 일체의 모든 소리에는 귀를 막으십시오. 항상 하느님의 음성에, 그대 필요로 하는 가난한 이들의 외침에 귀 기울이십시오.”
“혀의 침묵을 지키십시오. 칙칙한 어둠과 괴로움의 원인이 되는 모든 말과 얄팍한 자기 변호를 삼가고 우리에게 평화, 희망, 기쁨을 가져 오고 마음을 밝혀 주는 생명의 말을 함으로서 하느님을 찬미하십시오.”
“지성의 침묵을 지키십시오. 거짓됨, 산만한 정신, 파괴적인 생각, 타인에 대한 의심과 속단, 복수심과 욕망에 매이지 말고 하느님의 경이에 대해 깊이 관조했던 성모 마리아처럼 기도와 묵상 안에서 주님의 지혜와 진리에 마음을 활짝 여십시오.”
“마음의 침묵을 지키십시오. 온갖 이기심, 미움, 질투, 탐욕을 피하고 온 마음과 영혼과 정성과 힘을 다해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십시오.”
-이렇게만 살면 얼마나 좋을까. 얼마나 기쁠까. 데레사 수녀님은 “사랑에 불타는 마음은 항상 기뻐할 수밖에 없습니다.”라며 그 기쁨의 방법을 말해 주신다. “감사를 표현하는 가장 좋은 방법”도 “모든 것을 기쁨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그렇구나. 그냥 마냥 기뻐하며 살아야하는 거구나. 그래서 테살로니카 1서에도 그런 구절이 있는 것이겠지. “항상 기뻐하십시오.”라는. 늘 떠올리며 살아야겠다.

“기쁨은 감염되기 마련입니다.. 그러니 그대가 가는 곳마다 항상 기쁨이 넘쳐흐르도록 애쓰십시오.” “기쁨은 우리 삶의 축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기쁨은 너그러운 인격의 표현입니다.”


觀想에 대해서도 말씀하신다. “모든 것 안에서, 모든 이 안에서 어디서든지, 어느 때에나 하느님의 모습을 찾는 것. 또한 모든 사건 안에서 그분의 손길을 보는 것. 특별히 초라한 빵의 형상 안에, 그리고 가난한 이들의 모습 안에 신음하시는 예수님의 현존을 알아 뵙고 흠숭하는 것. 이것이 곧 세상 한가운데서의 관상이다.”
-내용적으로 어려운 것은 아니다. 항상 의식하며 살자. 그게 관상이란다.

희생에 대해서는 “사랑이 참되기 위해서는 그 대가를 치러야 합니다. 사랑은 상처를 받아야 하며 자기 자신을 비워 내야 하는 것입니다.”라고 말하신다.
-상처 받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 것.

또 “방관은 가장 두려운 가난입니다. 가난한 사람은 어디에든 있지만 가장 가난한 사람은 사랑받지 못한 사람입니다.”
-그러고 보면 주변에 가난한 이들이 많다. 나의 학생들도 상당히 가난하다. 물질적인 면만이 아니다.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자라고 있다. 애들을 신경 써야 하는데.

다음부터는 옮긴이 이해인 수녀님의 글이다. 이해인 수녀님이 인도에 갔을 때, 그곳에서 본 구절 중에 “침묵의 열매는 기도, 기도의 열매는 사랑, 사랑의 열매는 봉사, 봉사의 열매는 평화”라고 적혀 있었다고 한다. 흔히 주변에서 평화라는 단어를 많이도 말하지만 진작 그 평화가 내 몸에 와 닿기 시작한 것은 얼마 되지 않는다. 요즘에야 아, 이런 게 평화로구나 하는 생각을 조금씩 해 가는데, 여기 소개된 평화도 마찬가지다. 그런 평화라야 하겠다. 침묵하고, 기도하고, 그 결과로 사랑하고, 그 사랑으로 봉사하고 그 봉사로 우리는 평화를 얻는다.
다 좋은 말이다. 새로 듣는 것도 아니다. 다만 여전히 머리로 사랑하고 봉사하는 내 모습에서 언제, 어떻게 탈피하는가 하는 점만이 중요한 과제로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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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눈으로 3
앨런 에임스 지음, 정성호 옮김 / 크리스챤출판사(카톨릭) / 200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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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으로 기도하는 것

앨런 에임스 지음, 정성호 옮김, <예수님의 눈으로 3권>, 가톨릭 크리스챤.


1권 2권과 달리 3권의 옮긴이가 다르다. 읽다 보면 한자어에 괄호를 치고 친절하게 한자를 써 놓은 게 많다. ‘굳이’ 하는 생각을 하며 읽었다. 확인해 보니, 역자가 달랐다. 그랬구나 싶었다. 그래도 내용전달은 별 무리가 없다. 좋은 번역이다.
이번 3권에서도 여전히 와 닿는 대목 옮기고, 약간의 토를 단다. 묵상과 함께. 특히 ‘기도’가 많이 가깝게 다가온 느낌이다. 기도를 일상의 삶으로 가져오는 데 도움이 많이 된 것 같다.

“네가 하는 모든 일에서 하느님께 네 마음을 열어 놓기만 하면 된다. 비록 네가 다른 사람에게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라도, 하느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는 것을 알아라. 하느님께 모든 말과 생각을 다 바친다면 너도 기도하는 것이 된다.”
“모든 것으로 기도하는 것은 모든 것을 사랑하는 것”
“하고 있는 일이 무엇이든 간에, 만일 네가 그 일을 하느님께 바치고 하느님을 위해서 한다면, 그때 그것은 행동의 기도가 되는 것이다. 네가 행한 모든 일이 하느님을 사랑하고 기쁘게 해 드리기 위해서 한 것이라면, 그 때는 모든 것이 기도가 되는 것이다.”
“너는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끊임없이 호흡을 하는데, 그것은 하느님의 선물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따라서 숨을 쉴 때마다 너는 하느님의 선물을 몸 안에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네가 하는 모든 행동을 통해서, 가장 작은 것에서부터 가장 큰 것에 이르기까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그 선물을 활용하여야 한다. 하느님께서 너에게 주신 선물이 너의 봉사에 의해서 하느님의 이름으로 다른 사람들을 돕는 데 사용된다면 그때 행한 모든 봉사활동이 기도가 되는 것이다.”
-기도를 너무 어렵게 생각해 온 것 같다. 그리고 기도와 생활이 많이 분리되어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위의 구절을 읽어 보면 삶이 곧 기도인 것이고, 아니 그렇게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려면 우선 하느님이 항상 함께 하신다는 것을 알고, 내 삶을 모두 하느님 마음에 드는 데 써야 한다는 것이다. 무슨 일을 하든지 하느님의 이름으로 이웃을 돕는데 힘이 사용되어야 한다. 그러면 그게 곧 기도라는 것이다.

“저는 지금 이 순간에도 저의 최후가 될 지도 모른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모든 사물 안에서 하느님의 사랑을 찾아냄으로써 그 순간마다 하느님께 감사드리고 싶습니다.”
-이런 자세라야 한다. 최후가 될 수도 있다는 생각. 그래서 모든 사물 안에서 하느님을 찾는 것. 이럴 때 앞에서 말한 ‘삶이 곧 기도’가 될 것이다.

“네 마음속에 두려움을 가질 때 악이 너를 해칠 것이다. 그러나 나를 믿고 나의 사랑에 믿음을 갖는다면 그때는 악도 너를 해치지 못할 것이다.”
“네가 하느님을 진실로 믿는다면 이 세상에는 두려워 할 것이 없고, 두려움도 존재하지 않는다.”
-악령의 공격은 내가 두려워할 때 심해진다. 그러나 하느님이 항상 함께 함을 믿고 그렇게 살아간다면 어떤 악령도 나를 괴롭히지 못할 것이다.

유다의 행실이 문제가 되어 다른 제자들이 불평을 하고 있을 때의 상황이다. “너희 중 하나가 어떤 면에서 약하다는 것을 알면, 너희는 그 자신의 나약함을 극복하도록 당연히 도와 주어야 할 것이다.(중략) 왜냐 하면 자신의 나약함을 다른 사람들이 얕잡아 보거나 해칠 수 있는 것으로 밖에는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형제인 너희는 서로의 약점을 형제를 돕는 방법으로, 자기 자신을 성장시키는 방법으로 이해해야 한다. 겸손한 사람으로, 너희는 형제가 짊어지지 못하는 짐을 져 주어야 한다. 형제인 너희는 다른 사람한테서 나약함을 보면 그것을 이해하고 도와주어야 한다. 그러면 너희는 자기 자신의 나약함도 극복하게 된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형제 노릇하기가 어렵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너희는 미워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함으로써, 빼앗는 것이 아니라 주는 것으로써, 그리고 시중을 받는 것이 아니라 시중을 들어 주는 것으로써 형제 노릇을 좀 더 보람 있게 할 수 있는 것이다.”
-나는 쉽게 남을 비난한다. 근데 비난할 게 아니라 그의 약점을 극복하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그게 나의 성장이다. 그래야 나의 나약함도 극복될 수 있다. 나는 한없이 작은 인간이기에.

“네가 그러는 것은 남들한테 상처를 입었다고 느끼고, 화가 나 있다는 생각에 집착하고 있기 때문이다. 네가 용서를 할 수 있을 때, 너는 진실로 사랑의 마음을 열 수 있고, 동시에 기쁨이 찾아올 것이다. (중략) 너는 자신의 노여움에 매달려 있기 때문에 그처럼 슬프고 그처럼 불행하고, 그처럼 기분이 상하는 것이다. 그 노여움을 잊어버려라. 그리고 인생에서 행복을 느껴라.”
-용서, 사랑이 넘치면 용서가 빠르다. 그러나 사랑이 부족했기에 ‘내 탓’인 줄 모르고, ‘남 탓’을 했던 것이다. 내 탓이다. 모두가. 그리고 혹 앞의 글처럼 남의 약점이 보이면 그것 때문에 분노하고 상처 입을 것이 아니라, 그가 그것을 극복하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그래서 이 책에 등장하는 어떤 노인은 “너무나 행복해서 미워할 겨를이 없습니다”라고 했다. 사랑이 넘치는 사람이기에 가능했던 말이겠다.

“비록 어떤 상황에 처한다 하더라도 항상 사랑함으로써, 자신에게 사랑하는 힘을 달라고 그때마다 하느님께 열심히 기도하란 말이오!”
-어려울 때, 그때가 사랑이 가장 필요한 때이겠다. 원수에 대한 사랑까지도.

“자신의 잘못을, 어떻게 더 많이 사랑을 하고 어떻게 악을 피하는가를 배우기 위한 은총이라고 생각한다면, 이미 너를 짓누르는 무거운 짐은 아닐 것이다.”
-나는 끊임없이 잘못을 저지른다. 하지만 그것을 은총으로 바꿀 수 있어야 한다. 성찰하고 회개함으로써 전보다 더 사랑 넘치는 사람으로, 전보다 악에 대해 단호하게 대처할 수 있는 사람으로 거듭남으로써.

“시몬아, 먼저 너부터 달라져야 한다. 죄를 보지 말고 죄인이 자신의 약점을 극복하도록 도와주는 길을 찾아라. 죄에 대해 계속 생각을 하면, 너는 그 노여운 생각 때문에 죄로 끌려 들어가게 될 것이다. 이것이 악마의 영리한 점이다. 너에게 악에 초점을 맞추게 함으로써 너를 불쾌하게 만들고”
-분노나 비난이 아니라 계속적인 사랑과 이해를 보여줘야 한다. 인내와 희망을 가지고. 물론 얼마나 힘든 일인가. 그러나 그리스도인이고자 한다면 이런 덕성이 몸에 배어야 한다. 타인의 죄를 보는 것이 아니라 그의 약점을 극복하도록 도와주는 것. 만약 내가 이겨내지 못하고 노여워한다면 그때 악령은 나를 사로잡는다. 이렇게 나는 또 다시 속아 넘어가는 것이다. 현명해야 한다. 그래서 늘 깨어있으라고 한 모양이다. 한계상황이 생기면 분노할 것이 아니라 상대방을 이해하고 그를 도와야 한다. 아무리 꼴통이라도.

“남들을 매도하기 쉽고, 그들을 죄로 이끌어간 약점을 보지 않고, 그들이 그것을 극복하는 데 필요한 도움을 무시해 버리기가 쉬워진다. 사람들에게서 善을 보고, 그들이 죄를 짓거든 그 善을 강화하는 길을 찾아 주고, 그들의 사랑이 위력을 발휘하도록 격려해 주는 것을 잊지 말아라. 이때가 죄인이 변하는 때이고, 내 안에서 악마에게 승리를 거두는 때이다.”
-다시 반복되는 말이다. 군더더기 보다 묵상으로 대신한다. 그 사랑, 지독히도 어려운 사랑이지만 이것 외에 다른 대안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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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눈으로 2
앨런 에임스 지음, 원아영 옮김 / 크리스챤출판사(카톨릭) / 200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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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기도의 기쁨

앨런 에임스 지음, 원아영 옮김, <예수님의 눈으로 2권>, 가톨릭 크리스챤, 2000.



“너도 네 자신을 참고 기다려 주어야 한다. 시간이 걸린다는 것을 알아라. 아무것도 배우는 것이 없고, 제자리걸음만 하고 있다고 느껴질 때도 있을 것이다. 그것이 네 성화(聖化)의 과정이다. 그것을 극복할 도움을 내게 청하여라. 그러면 내가 항상 네 곁에서 너를 도와 줄 것이다.”
-조급함. 나의 약점이다. 책을 통해서 보면 야고보 사도도 그렇게 안달했던 모양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걸 성화의 과정이라고 말씀하신다. 생각해 보면 나도 많이 차근차근 변하고 있다. 믿고 계속 길을 갈 뿐이다. 주님께 청하면 항상 곁에서 도와주신다고 하지 않는가.

“왜냐하면 그들은 무엇인가를 믿고 싶었고, 치유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신들이 살아가는 그런 방식을 인정해 주는 말을 듣고 싶어 했기 때문이다. 많은 탐욕과 이기주의와 자만심으로 살아가는 그들은,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옳다고 누군가가 말해 줄 때 그 말을 믿고 싶어 했다. 진리를 들었을 때 받아들이기 어려운 이유는, 자기 생활 속에서 넘치는 죄를 알아보게 되고, 자기 생활을 바꾸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자기 생활을 바꾼다는 것을 너무 어려운 일로 생각한다. 그래서 자기한테 적당하다고 생각되는 말과 불편하게 느껴지지 않는 말과 ‘네가 살고 싶은 대로 살아라’하는 말만을 잘 받아들이게 된다. 그것이 바로 마귀의 속임수인 것이다.”
-진리 앞에 절대 겸손. 나를 바꾸는 것을 자존심 상하는 일이라 여겨선 안 된다. 앞 문장에서처럼 ‘나의 聖化’로 여길 일이다.

“그러나 하느님의 힘은 사랑입니다. 하느님의 정의는 용서입니다. 여러분 자신을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부르는 것은, 여러분이 하느님의 뜻에 순명한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뜻은 자비입니다.”
-하느님의 힘과 하느님의 정의와 하느님의 뜻이라····. 사랑이 그 힘이며, 용서가 그 정의며, 자비가 그 뜻이로구나. 어려워도 이웃에 대해 심지어는 원수에게도 사랑과 용서와 자비가 전해져야 한다. 그 정도로 나를 다듬어야 한다.

“그러다 보면 하느님을 사랑하기 위해서 기도하기 보다는, 그런 경험을 다시 맛보기 위해서 기도하고, 자기 자신의 만족을 구하려고 기도를 하게 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다른 사람들이 기쁨에 넘쳐서 기도하는 것을 보고 질투하는 사람이 있다. 그것은, 하느님보다 자기 자신을 더 우선으로 두기 때문이다. 하느님을 사랑한다면, 다른 사람이 하느님께 그렇게 기도드릴 수 있는 것을 기뻐하게 될 것이고, 그 사람이 받는 은총에 감사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 하면 너희는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게 되고, 하느님의 사랑에 너희 마음이 열리게 될 것이며 너희에게도 하느님의 사랑이 가득 넘치게 될 것이다. 기도할 때 너희가 하느님께 고압적으로 요구하지 않고, 시기나 질투나 분노를 품지 않고, 오직 사랑으로 기도하면서 하느님께 마음을 열어 드린다면, 너희는 기도의 기쁨을 누릴 것이다.
-경계할 일. 나 역시 어떤 신앙신비 체험을 한 적이 있다. 그 후 한 동안은 그 체험이 이어지기만을 기다렸다. 그러니 기도가 웃기는 꼴이 되었을 것이다. 체험은 한 번이면 족하다. 그것으로 이미 나는 하느님 현존을 확인했다. 그래 놓고 또 그런 신비에만 머무르려고 했다. 사실 일상 삶이 모두 신비이고 기적인 것을.
그리고 나는 아무리 봐도 질투, 시기심이 강한 것 같다. 남이 하느님 사랑을 흠뻑 받을 때 기뻐해야 하는데, 웬걸 엉뚱하게도 질투하고 있었다. 하느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확신이 없을 때 생기는 못된 버릇이다. 그 사랑을 확신하면 오히려 남들을 축복해 줄 수 있다. 더 닦을 일이다. 그럴 때 진정 기도의 기쁨이 다가 온다. 사실 이 책을 읽으면서 내가 변한 것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기도가 기쁨으로 다가온다는 것이다. 주님 안에 깊이 잠겨 머무르는 법을 배웠다고 할까. 암튼 기도의 기쁨을 조금은 맛 본 것 같다.

“원수를 반겨주고 그들에게 사랑과 존경을 보여주면, 원수가 친구로 변하게 되는 것입니다. 때로는 그렇게 하기가 어렵습니다만, 하느님께서 사랑으로 여러분을 창조하신 것처럼, 여러분의 원수들도 똑같은 사랑으로 창조하셨다는 것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어려운 가르침. 머리로는 하나도 어렵지 않은데, 생활에서는 절대 실천 불가능할 것처럼 어렵다. 물론 절대여서는 안 된다. 어렵더라도 차근차근. 사람 중심으로 보면 절대 불가능할 일이다. 그러나 하느님 중심으로 생각하면 이해는 된다. 그리고 원수를 증오해서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다. 그건 내 삶을 통해서도 이미 터득한 바다. 그럼에도 원수를 사랑하는 게 쉽지 않다. 하긴 어디 예수님 따라 가는 삶이 그리 쉽겠는가. 그래도 가야 할 길.

“잠자기 전에 꼭 기도하거라. 그리고 너희 천사들에게 보호해 달라고 부탁학고.”
- 기도의 생활화. 많이 해 간다. 근데 천사들에게 하는 기도는 늘 빼먹는다. 이건 신화나 동화가 아니다. 실제다. 악령을 체험한 나로서는 그 반대의 성령을 함께 체험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악마와 천사가 결코 동화적 개념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항상 잊지 말고 수호천사께 도움을 청해야겠다. 지금 당장부터.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을 지니는 것이 똑똑한 두뇌를 가진 것보다 훨씬 나은 것입니다.”
그 남자가 다시 물었다. “그러면 하느님께서는 무엇 때문에 사람들에게 지성을 갖게 하셨습니까?”
“하느님께서는 주시는 선물은 모든 사람들의 유익을 위한 것이지 선물 받은 사람만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지성을 지녔다면, 그는 다른 사람들을 돕는 데 그 지성을 써야 하는 것입니다.(중략) 하느님께서 주신 것은 하느님께서 언제든지 거두어 가실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예전에 난 잘난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러나 이젠 착한 사람이고자 한다. 많이 변했다. 그리고 나는 배울 만큼 배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배움을 나의 명예욕만을 위해 썼다. 이젠 그 못된 버릇에서 벗어날 생각이다. 예전처럼 제주역사 공부로 돌아갈 수 있을지 없을지는 모르겠지만 만약 다시 돌아가도 그 지식을 다른 사람 돕는데 쓰겠다. 절대로 내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 쓰지는 않겠다. 이게 지난 1년 동안 주님이 허락하신 고통을 겪으면 배운 바다. 정말로 나의 지적 능력은 하느님 거두어 가시고자 하니 한 순간에 날라 갔다. 아무 것도 지적 활동을 할 수 없었던 시간을 겪었다. 그러고서야 깨달은 것이다. 그 모든 것이 내 것이 아니라 주님 것이었음을. 겸허하고 또 겸허해질지어다.

제자 중 하나가 유다의 금풍 횡령 때문에 걱정하며 비난하자 예수님은 “그런 일로 걱정하지 마라. 그렇게 걱정을 하다 보면, 그것이 네 기도를 산만하게 하고, 하느님께 대한 사랑을 약하게 하고 다른 사람에 대한 신뢰를 없어지게 한다. 바로 이런 식으로 한 사람의 죄가 다른 사람을 파괴하면서 퍼져나가는 것이다. 죄를 짓은 사람이 악의 사슬에 얽매여 있다는 것을 알고, 그들을 사랑으로 대해 주어야 한다. 죄인을 위해 기도해 주고, 그들에게 도움을 주어라.”
-나는 비난만 했다. 아니 증오하고 왕따시키고 매장시키려 했었다. 그러니 나의 기도는 산만할 수밖에. 죄인을 위해 기도하라고 하신다. 안 그러면 나까지 그 죄에 감염된다. 어렵더라도 죄인을 위해 기도를.

제자 야고보의 묵상: “주님, 저는 교만이 가득합니다. 제가 어떤 좋은 일을 했다 싶으면, 그런 일을 한 제가 훌륭하다고 생각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사실, 선행을 하게 한 것은 제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당신의 사랑으로 그렇게 하셨다는 것을 문득 기억하게 되면, 자신을 훌륭하게 생각한 제 자신이 아주 싫어집니다.”
-체험하지 않은 사람은 이 말, 이해 못한다. 사람이 교양을 잘 닦아, 덕을 닦아, 인격을 도야해서 겸손해진 것이지, ‘하느님이 그렇게 하셨다’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의 경험으로 이게 동양 종교(철학)과 기독교의 차이다. 동양 종교에서는 무엇보다 인간, 나, 자아, 주체, 진아를 내세운다. 그 자아의 깨달음으로 완성된다. 하지만 기독교는 다르다. 우린 그저 피조물에 불과하다. 절대자 창조주 앞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없다. 그 모든 것이 그분의 작용 없이는 불가능하다. 이것을 인정하기까지 많은 시간이 걸렸다. 체험으로 알 게 되었다. 그래서 동양적 겸손의 한계를 본다. 그래서 예전에 김홍섭 판사는 당신의 수상기 제목을 ‘무상을 넘어서’라고 했나. 무상 너머의 절대자를 묵상한 것이다. 물론 동양 종교의 좋은 점을 무시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궁극에 가다 보면 그것은 한계에 달한다. 결국 창조주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고 보면 내가 아니라 주님이 느껴지기 시작한다. 지금 이 글을 쓰는 것 역시 나의 의지가 아니다. 이끄심 없이는 하나도 못한다.

“너희가 사랑으로 산다면 이런 일을 자주 보게 될 것이다. 하느님 사랑 안에서 모든 피조물이 너희와 일치를 이루게 된다. 모는 피조물은 하느님의 사랑으로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완전히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살게 되면, 짐승들과 새들과 사람들이 서로에게 느끼고 있는 공포가 사라질 것이다. 공포가 없어지면 모든 피조물들은 서로 친구가 될 것이다. 하느님의 사랑을 서로 나누며 함게 살아가는 친구가 될 것이다.”
-그래서 프란치스코 성인이 새들과도 대화를 할 수 있었나 보다. 하긴 모든 피조물이 그렇게 만난다면 가능한 일이겠다. 노래 가사에 있는 사자들이 어린양과 뒹굴고.

기도하면 “너희가 하느님께 더 가까이 갈 수 있게 해 주는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죄가 아닌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그리고 하느님 뜻에 맞는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 “기도는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재물을 다 합친 것보다 더 값진 것이다.” “그것은 기도의 힘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하고 믿지 않지만, 그것을 받아들이기만 한다면, 기도는 온 세상을 바꿀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기도가 단순히 사람 마음 위안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던 시절이 있었다. 교회에 다시 돌아와 ‘통공’이라는 말뜻을 몸으로 느끼게 되면서 이 기도가 참으로 큰 축복임을 알았다. ‘기도의 기쁨.’ 말로 해선 모른다.

“중요한 것은 네 마음이다. 네가 기도할 때 하는 말은, 네 마음을 하느님께 열어드리기 위한 것이다. 네 마음이 기도하는 데에 있다면, 같은 기도를 날마다 되풀이해도 상관없는 것이다. 가끔씩 기도할 마음이 없을 때에는 네가 말하고 싶은 대로 하느님께 사랑의 말씀을 드리고, 마음속으로 느끼는 것을 있는 그대로 말씀드리도록 하여라. 그리고 나서 가능하다면 다시 일상 기도를 바치도록 하여라. 많은 사람들이 매일 같은 기도를 바침으로서, 일정한 시간에 일정한 방식으로 하느님을 생각하도록 자기 마음을 훈련시킨다.”
-기도하기 싫은 땐 그냥 대화하라고 하신다. 이 얼마나 좋은가. 그래, 대화라도 자주 해야지. 솔직하게 있는 그대로의 감정을 말씀드리는 것이다.

부록에 몇몇 성인들이 저자 앨런 에임스에게 계시하신 말씀이 실려 있다. 와 닿는 것 옮긴다.
성토마스: 의혹을 없애기 위해, 기도하여라. 오류에 빠지지 않기 위해, 기도하여라. 평화 속에 머무르기를 원한다면, 기도하여라. 의혹과 오류를 없애고, 평화를 얻게 하는 하느님의 은총이, 바로 기도인 것이다.
성 유다 타대오: 하느님께서 주시는 치유의 힘을 받는 것은, 네 믿음에 달려있고, 하느님께 대한 네 사랑에 달려있다. 너희가 하느님을 사아하고, 그분의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못할 것이 없다는 것을 믿기만 한다면, 무엇이든지 못할 것이 없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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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눈으로 1
앨런 에임스 지음, 원아영 옮김 / 크리스챤출판사(카톨릭) / 2000년 5월
평점 :
품절


일상생활 속에서 준 예수님의 가르침



앨런 에임스 지음, 원아영 옮김, <예수님 눈으로 1권>, 가톨릭 크리스찬, 2000.

지난 1월 왜관 베네딕트 수도원 피정 갔다가 사온 책이다. 그냥 책꽂이에 꽂아 뒀다. 예전처럼 책읽기 속도가 빠르지 않아서다. 예전에 사회과학 서적을 읽을 땐 지식 습득, 논리 다듬기였다. 그런데 지금 신앙 서적은 그게 아니다. 묵상이 주가 된다. 그러다 보니 진도가 더디다.
이 책 저 책 읽다가 책꽂이에 꽂혀 있는 이걸 잡았다. 전체 3권인데 오래 전에 시작했는데 최근에야 끝냈다.

책이 좀 특이하다. 외형이 특이하다는 게 아니라 구성이 그렇다는 말이다. 저자 앨런 에임스라는 분이 영적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들으며 그걸 기록한 것이라고 한다. 1996년에 듣고 기록한 것이라고 한다. 보통 이런 경우 계시 내용이 주를 이뤘던 것 같다. 현 세태에 대한 걱정, 기도 당부, 뭐 그런 것 말이다.
그런데 이 책은 하느님께서 들려주시는 것을 기록했다고 하는데 내용은 전혀 다르다. 예수님께서 공생활 하실 때의 일상생활을 마치 소설 읽듯, 아니면 영화 보듯 전해주는 내용이다.
성서에서 만나는 예수님은 아무래도 우리의 일상생활에 바로 와 닿지 않는 부분이 있다. 과정이 생략되고, 중요한 사건만을 기록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주로 메시지 위주다. 근데 이 책은 스토리로 되어 있다. 소설을 일근 것 같다. 그런데도 그 안에서 메시지를 전한다. 그래서 특이하고 말한 것이다. 소설을 읽으면서 가르침을 받는다. 그리고 예수님의 생활 모습을 보는 것 같은 기분, 이런 게 특이하면서도 편하다. 그래서 좋다.
또 저자 앨런 에임스가 성직자인가 하면 그도 아니다. 평신도이다. 그래도 교회에서는 그분의 그런 활동은 인정했다. 특이한 경우다.
어쨌든 경우야 어찌했던 내겐 읽기 쉬우면서 메시지가 적지 않았음이 좋았다. 뭐 달리 할 말이 없다. 신앙 서적의 경우 ‘책일기’를 쓰면서도 내 의견은 별로 쓰지 않는다. 지당하신 말씀만 있기에 그냥 인용하는 게 전부다. 간혹 그냥 감탄의 동의 표시나 하는 게 나의 코멘트다. 그래서 이번에도 그렇게 한다. 전체 간추리는 것도 없고, 그냥 좋은 구절만을 옮긴다. 스토리는 빼고 그냥 좋은 가르침만을 옮긴다.


“앞으로 무엇을 하든지 사랑으로 하시오. 누구한테도 상처를 주지 말고 남을 도와주시오. 하루하루를 하느님께 드리는 선물로 생각하고 지낸다면, 바로 그것이 나를 따르는 길이고 영원한 기쁨을 얻는 길이 될 것이오.”
- 하루하루를 하느님께 드리는 선물로 생각하라. 그렇게 살면 참 행복하겠다. 늘 의식하고 살아야지.

“점잖게, 사랑하는 마음으로 자기 의견을 토론하는 것이 더 나은 법이다. 그러면 아무도 마음을 상하지 않고 대답을 찾을 수 있게 된다. 친구를 잃는다면 논쟁에서 승리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 논쟁에서 승리한들, 친구를 잃는다면 소용이 없다. 그렇구나. 사람이 더 중요하지. 그 사람 하나하나가 모두 하느님의 모상대로 창조된 존재들인데. 그 동안 나는 어쩌면 과도한 논쟁을 즐겼다. 앞으로 꼭 필요한 논쟁만, 그리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다가서야 하겠다.

“너희는 자아라는 멍에를 너희 영혼 위에 짊어지고 있을 셈이냐? 하느님을 신뢰한다는 것은, 자신을 완전히 하느님께 맡기는 것이다.”
- 자아라는 멍에. 나는 이것을 과도할 정도로 지고 다녔다. 모든 것을 하느님께 의탁하는 것이 우선이다. 참, 어제 신문 읽다가 문동환 목사가 형님 문익환 목사와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하는 대목이 있었는데, 삼촌이 만들어준 팽이가 그렇게 좋았다고 했다. 정신없이 놀았던 모양이다. 근데 형 문익환이 그 좋은 나무 팽이를 불에 집어넣어 태우며, 하느님보다 더 사랑하게 되는 대상은 모두 우상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감동. 맞다. 내가 앞으로 어떤 일을 하든, 그것이 하느님을 향하는 것을 가릴 정도가 되면 안 된다. 나의 ‘자아’보다, 그 자아를 내어 주신 하느님께 먼저 다가설 일이다.

“단순하고, 순수하고, 순결한 그 믿음은 모든 사람들이 지녀야 할 믿음인데, 사람들은 그런 믿음을 거부하며 천국에 갈 때까지 결코 얻지 못할 대답을 끝없이 파헤치고 있는 것이다.”
- 그랬지. 나 역시. 사실 진리는 단순한 것인데, 불필요하게 머리를 많이 굴렸다. 물론 그 과정이 전혀 필요 없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결국 ‘얻지 못할 대답’일 뿐이다. 그래서 불가에서도 “이 뭣고?” 하면 “오직 모를 뿐”이라고 했다. 여기서 겸손을 얻으면 다행이데, 뭔가 깨달았다고 폼 잡으면 그 순간 꽝이다. 그래서 자력 신앙이라는 게 매력적이면서도 위험해 보인다. 물론 우리 계시신앙인 가톨릭도 우리가 정신 바짝 차리지 않으면 교만으로 떨어지긴 하겠지만.

“우리에게 참기 어려운 고통을 허락하실 때에는, 그것을 통해 틀림없이 우리에게 가장 좋고 큰 보상을 받게 하신다.”
-이건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 고통에 대해 불평만 할 것이다. 그러나 그 단계를 넘어서면 확실히 경험한다. 나 같은 탕자가 회개하고 개과천선하는 것, 이거 내 노력으로 한 게 아니다. 주님이 주신 큰 보상이다. 물론 그래도 고통을 피하고 싶다. 하지만, 그것 역시 내가 하는 게 아닌 걸. 그러니 고통을 ‘허락’하신다는 표현이 맞다. 이건 정말 말로 해서 모른다. 겪어보지 않고선.

“때때로 괴로움을 겪게 되면 남을 좀 더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이렇게 고통이 하나의 은총이 될 수 있는 것은, 고통이 우리의 가슴을 사랑과 자비로 채워주기 때문이지요. 때로는 고통이 하느님께로 더 가까이 갈 수 있게 해 주고, 자비하신 하느님께서는 고통당한 사람들에게 천국에서 당신의 영원한 사랑으로 보상해 주십니다.”
“고통을 받으면서도 여전히 사랑할 수 있다면 그 고통은 큰 은총이라는 뜻이다.”
-바로 나온다. 왜 고통이 필요한 것인지에 대한 설명이. 사람을 더 잘 이해하게 된다. 잘 나갈 때는 주변의 아픔을 모른다. 알아도 머리로만 안다. 내가 겪어봐야 이웃의 아픔을 알게 된다. 그러면서 하느님과 더 가까이 가게 된다. 그러니 은총인 것이지.

“영적으로 병든 사람은 대부분 자신이 병들어 있는 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악마는 이러한 사람들의 안팎과 주위에 있다가 다른 사람들에게 퍼져 나가고, 사람들을 악의 소굴로 끌어들이는 것이다. (죄를 짓는, 나쁜 짓을 하는 타인을 보았을 때) 분노하게 되는데(중략) 죄를 지으면서라도 그 사람의 죄악을 멈추게 하고 싶어 한다. 폭행을 하거나 증오심으로 학대하거나, 적개심을 다른 사람에게 퍼뜨리는 등의 죄를 짓고서라도 그 사람의 죄악을 막으려 하는 것이다.
그럴 때 사람들은 자신이 좋은 일을 하고 있다고 믿기 때문에, 그들의 마음속에 스며든 악으로 눈멀게 되는 것이다. 그러한 행동방식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것이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지를 모르고 행동할 때, 착한 사람들도 악마에 이끌려 자신도 모르게 악한 사람으로 변하게 되는 것이다.(중략) 사랑과 평화를 첫째로 앞세워야 하는 것이다.”
- 지난 시간 내 삶의 원천적 힘은 ‘분노’에서 나오기도 했다. 물론 그 바탕에는 조국과 민중에 대한 사랑이라고 생각했다. 그 사랑이 있었기에 부정의가 횡행하는 현실 앞에서 분노했던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을 만나면서 그 분노의 처리 방법을 알게 되었다. 사실, 예전에 그 분노를 그냥 날 것으로 폭발시켰다. 타도를 위해서 노력했고, 응징하려 했다. 나름의 성과도 있었고, 짜릿한 기분을 맛보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이 나의 교만을 강화했고, 내 마음에 사랑보다 증오가 더욱 커져가게 나를 몰아갔던 걸 당시는 깨닫지 못했다. 이건 위험한 상황이었다. 그래서 지금 내가 큰 고통에 빠진 것인지도 모른다.
암튼 그래도 예수님을 만나면서 ‘악을 악으로 누르려는 것’이 얼마나 무모한지 깨달았다. 악을 선으로 이겨야 한다는 가르침이 몸에 다가 왔다. 간디를 만나면서부터 이런 생각을 조금씩 하고 있었으나, 신념화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제 신앙으로 이걸 받아들이게 되면서는 달라졌다.
그런 변화, 깨달음 역시 성령 하느님의 역사하심일 것이다. 그리고 내가 겪어봤다. 증오로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음을. 물론 그렇다고 해서 사회 부정의에 눈을 감겠다는 것은 아니다. 예수님처럼 자기를 내어주면서 문제를 풀어야 함을 새롭게 배웠다는 말이다. 그러니 예전보다 더 어려운 투쟁이다. ‘사랑과 평화를 첫째로 앞세우면서’ 해야 하기 때문이다. 제주사회의 현안인 해군기지, 의료 민영화 등, 많다. 여기에 대해서 사회과학적 인식을 제대로 하되, 그 해결 방법은 예수님의 방식이라야 함을 본다. 훨씬 어려운 방법이다. 그래도 진리는 하나다.

“베드로, 이런 조롱을 무시하기가 힘들다는 것은 잘 안다. 그러나 이런 조롱을 무시할 때, 너는 나에게 깊은 사랑을 보여 주는 것이다.”
-부활 미사 영성체 후 묵상 중에 내면에서부터 이런 소리가 올라왔다. ‘아직도 교만함이 남아 있다. 주변으로부터 어떤 모욕을 하더라도 평화를 잃지 않을 수 있어야 한다.’라고. 주님이 주신 메시지라 생각한다. 더 낮추라는 얘기다. 낮추다 보면 모욕적인 상황도 맞게 될 것이다. 그래도 평화를 잃지 않는 경지까지.

“사람에 대한 판단은 하느님 말고는 아무도 할 수 없다. 사람이 다른 사람을 판단하려고 할 때는, 주로 악의와 증오로 판단을 내리게 된다. 절대로 남을 판단하지 마라. 그러한 일은 하느님께 맡겨라. 다른 사람을 대할 때는 오직, 그들을 도와 줄 수 있는 기회만을 생각하고, 그들을 하느님께 가까이 데리고 올 수 있는 기회만을 찾도록 하여라. 너희가 그 이외의 다른 것을 한다는 것은 하느님의 뜻을 이루려고 하는 게 아니라 사람의 뜻을 이루고자 하는 것이다. 하느님만이 심판관이시라는 것과, 다른 사람이 너희를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 아니라는 것을 잊지 말도로 하여라. 너희의 삶 속에서 하느님의 일을 우선으로 삼아야지, 사람의 일을 우선으로 삼으면 안 된다.”
- 지독히도 어려운 주문이다. 내가 예수님께 돌아오고 나서 삶 속에서 실천하기 가장 어려운 가르침 중의 하나다. 판단하지 마라. 어렵다. 그냥 판단이 되어 버린다. 상대방이 몇 마디 말만 해도. 그가 쓴 글 몇 조각만 읽어 봐도. 그런데도 판단하지 말라고 가르치시니. 참 어렵다. 그래도 낮은 수준에서라도 실천해 보자 노력한다. 악의와 증오가 생기지 않도록. 그리고 그런 판단을 남에게 함부로 이야기 하지 않도록. 그리고 그 상대방을 위해 기도하고 하느님께 데려올 수 있도록 노력할 것이다. 그래도 쉽지 않다. 당장 눈앞에서 벌어지는 각종 사회의 부정의들. 어찌 판단하지 않고 비판하지 않을 것인가. 그래도 노력은 해 봐야지. 그런 상황이 닥칠 때마다 하느님께 기도하면서.

“금식을 하면 너희 영혼이 자유로워져서 기도하기가 더 쉬워진다. 너희가 육신을 단련시킬 때 너희 마음도 단련되기 때문에, 많은 어려움이 닥쳐올 대를 준비하며 자신을 강인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절대로 단식이 필요한 것이다.”
-동양적 수련을 하다가 다시 하느님을 찾아온 나다. 우상숭배의 대가는 상당히 혹독했다. 물론 그 고통 자체가 은총이긴 했다. 암튼 예전에 단식이 익숙했는데, 가톨릭에 와서는 거의 못했다. 별로 반기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몸 축난다. 모든 음식은 하느님이 주신 선물이다. 그러니 기쁘게 먹어라’라는 논리였다. 물론 맞다. 그래도 단식을 필요하다. 성경에도 나온다. 기회가 되면 단식 해야겠다. 뿐 아니라 요즘 영성에 목말라 하는 사람들이 템플 스테이 프로그램에 가서 단식을 하는데, 여기 가톨릭에서도 단식함을 알리고 함께 할 수 있는 기회도 만들어 보는 게 좋겠다.

“기도할 때는 다른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 오직 하느님만을 생각하여라. 모든 분심을 떨쳐 버리고, 너희들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을 생각하면서, 하느님께서 너희들 생애에 무엇을 해 주셨는지를 생각해 보아라. 그 다음 마음에서 우러나는 사랑의 기도를 드려야 한다.”
-엉터리 기도. 분심 속 기도가 많다. 그래도 이 책을 읽는 동안은 이 책의 가르침대로 ‘오직 하느님만을 생각’하면서 기도하려고 노력했다. 늘 깨어 있을 일.

“당신이 죄책감에 사로잡혀 있을 대 마귀를 마음 안에 들어오게 하여(중략). 그러나 앞으로는 하느님만이 유일한 해결책이라는 것과 하느님께서 당신을 용서해 주고자 애타게 기다리신다는 것을 기억하시오. 당신이 하느님의 용서를 받아들인 다음에는, 죄책감을 버려야 하오. 그러나 그 죄는 잊지 말고 기억하여, 다시는 같은 죄를 범하지 않도록 하시오.”
-죄책감 버릴 것. 여기에 매여 있는 것 자체가 하느님의 자비를 믿지 않는 것이고, 내가 나약한 인간임을 인정하지 않는 교만이다. 나는 나약한 인간이다. 그러나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이겨나가고자 한다. 그러니 더 이상의 죄책감이야말로 진짜 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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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몸짓으로 이 사랑을
마더 데레사 지음, 지은정 옮김 / 바오로딸(성바오로딸) / 1998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마더 데레사가 가르쳐준 사랑



마더 데레사 지음, 지은정 옮김, <작은 몸짓으로 이 사랑을>

마음이 급했다. 읽기도 전에 10권 주문했다. 우리 봉사반 학생들 나눠주려고. 일단 마더 데레사의 삶이 묻어 있는 책이라면 봉사반 애들 선물용으론 적합하다 싶은 이유 때문이다. 사서 다 나눠줬다. 아니 한 권 남겼다. 나도 읽어 봐야지.
주문해서 보니 책 사이즈가 한참 작다. 포켓북도 이렇게 작은 것은 처음이다. 손에 넣고 다니긴 편할지 모르지만 읽기엔 좀 불편했다.
하지만 그게 중요한 것은 아니다. 메시지다. 당연 사랑이다. 책 제목처럼. 식상하다고? 물론 식상하다. 그래도 진리는 역시 단순한 것이다. 사랑 이상의 가르침이 어디 있겠나. 근데 잘 보면 그 ‘사랑’ 솔직히 나도 잘 몰랐다. 안다고 해도 한계가 있다.
특히 마더 데라사가 말하는 사랑은 엄청 큰 것인 줄 알았다. 근데 생각 외로 아주 작은 것이었다. 하긴 그 작은 사랑이야 말로 큰 사랑의 바탕일 것이다.
먼저 “사랑은 죽는 날까지 매일매일 삶과 호흡처럼 그렇게 자연스러운 것이 되어야 합니다.” 어쩌다 한 번 나가는 장애인 시설 봉사가 아니라 삶 그 자체가 사랑이어야 한다는 말. 지당하다. 그러면서도 난 찔린다. “분명히 말한다. 너희가 여기 있는 형제들 중에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준 것이다.(마태오 25, 40)”라는 것을 거창하게만 생각해서 그랬다.
근데 마더 데레사는 “우리가 진정으로 세계 평화를 원한다면 가족 안에서 서로서로 사랑하는 것부터 시작합시다. 때때로 서로에게 웃음을 보내는 것이 어렵기도 합니다. 아내가 남편에게, 남편이 아내에게 웃음을 짓기가 가끔은 힘들 때도 있습니다. 사랑이 순수해지려면 우리가 이웃에게 주는 그런 사랑 이상의 것이 되어야만 합니다. 우리에게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 즉 가족 안에 있는 이를 사랑해야 합니다. 사랑은 바로 거기서 우리를 필요로 하는 이들을 향해서 펼쳐집니다.
멀리 있는 이를 사랑하기는 쉽습니다. 그러나 바로 곁에 있는 사람을 사랑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가난한 사람에게 밥 한 끼 제공하기는 쉽지만 우리 집안의 누군가가 사랑받지 못한다고 느끼며 외롭고 힘들어할 때 그를 위로하는 건 참으로 어렵습니다.”
사랑도 폼 잡지 말라고 하는 말씀. 마누라 사랑 못하면서 어디 가서 거창하게 세계 평화 말하지 말라는 말. 지당. 철저히 실천해야 할 일. 그리고 그렇지 못하는 사람은 다시 볼 필요가 있다. 겉과 속이 다른 사람. 일 때문에 사랑 놓고 다니는 사람. 그게 맞을 것이다. 나도 예전엔 그렇게 살았다.
뒤쪽 어린이를 테마로 다룬 장에서도 이 가르침은 이어진다. “사랑은 가정에서 시작된다.” “가정에 사랑이 있을 때만 우리는 그것을 이웃과 나눌 수 있습니다.” 그러니 가정이 먼저다. 이거 못하면서 밖에서 거창한 일하는 사람, 이젠 안 믿을 생각이다. 위선일 수 있다. 몸에서 나오는 사랑이 아니라 머리에서 나온 사랑에 그칠 수가 있다. 사랑이 생활이고 삶이고 호흡이고 보면 먼저 가정에서 시작되어야 한다는 말이 옳아 보인다.
“어머니는 가정의 심장입니다.” 울림이 강하게 온다. 그렇다고 해서 나 같은 아버지가 필요 없다는 말은 아닐 테니까.
“나는 오늘날 세상이 거꾸로 뒤집힌 느낌입니다. 가정과 가족 안에 사랑이 거의 없기 때문에 많은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사랑의 결핍이 바로 이 세상에 그토록 심각한 고통과 불행의 원인이 되는 것입니다” 정확한 진단이다. 가정에 사랑이 넘치면 사회 문제도 그리 심하지 않을 것 같다.
근데 많은 경우 가족을 위한다면서 실제로는 가족을 망치고 있다. 나도 예전에 그랬다. 바빠 살 때, 정신없이 살 때 말이다. 마더 데레사는 그 점도 지적한다. “오늘날 모든 사람이 더 발전하고 싶고, 더 부유해지고 싶은 초조함 때문에 무서울 정도로 서두릅니다. 아이들은 부모에게 시간을 내어줄 수 없고, 부모 또한 아이들에게 시간을 내어주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의 평화가 깨어지는 것은 가정에서부터 시작됩니다.”
다행히 나는 요즘 가정에 돌아왔다. 일보다 가정을 중시하고 있다. 게다가 “당신의 가정을 위해 기도하고, 당신의 어린이를 위해 기도하십시오. 그들에게 기도하기를 가르치십시오. 왜냐하면 기도하는 어린이는 항상 행복한 어린이이기 때문입니다. 기도하는 가정은 일치된 가정입니다.”라는 말도 실천하고 있다. 다행인 것이다. 그래서 이 대목 읽다가 “오 하느님 감사합니다”를 연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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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당신이 주변에서 기쁜 소식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살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내 삶의 모습이 조금이라도 예수님 닮아간다면 좋겠다. 노력해야지. 성찰하고, 기도하고.

사랑에 대한 이야기 외에도 봉사, 용서, 죽음 등에 대한 이야기도 있다. 당연히 사랑은 봉사로 이어질 것이다. 그런데 그 봉사를 하다가 주의할 점. 실망하지 말 것. “당신이 최선을 다했으면 어떤 실패에 대해서도 상심하지 않도록 하십시오. 그리고 당신의 성공과 영광에 대해서도 모두 하느님께 돌려드리십시오. 만약 당신이 실망한다면 자신의 힘을 믿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자만심의 표현입니다.”
“진정한 사랑은 재지 않습니다. 그냥 주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기꺼이 주는 사람을 사랑하십니다. 하느님과 사람들에게 감사를 표현하는 최상의 방법은 모든 것을 기쁨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기쁜 마음은 사랑으로 불타는 가슴의 정상적인 결과입니다. 기쁨은 힘입니다.” “기쁨은 유혹에 대항하는 가장 좋은 파수꾼의 하나입니다.”

용서에 대해서 말한 대목도 좋은 구절이 많다. “죄를 짓거나 실수했을 때, 하느님께 더 가까이 가는 성장의 기회가 되도록 합시다.” 그렇게 한다면 “걸림돌이라고 생각했던 것을 오히려 디딤돌”로 바꿀 수 있다고 한다. 나 요즘 회개하고 이 걸림돌을 디딤돌로 바꾸는 중이다. 앞으로도 한창 회개해야하겠지만.

죽음에 대한 구절. 많이 하는 말이지만 죽음은 하느님께도 가는 것이라는 것. 그래도 나는 아직 기쁘게 받아들이지 못한다. 부족함이 많다. 근데 “죽는 순간 우리는 우리가 행한 일의 양으로 판단 받는 것이 아니라 그 일에 쏟았던 사랑의 무게로 판단 받게 될 것입니다.”라고 한다. 나 잘났다고 열심히 뛰어다녔다고 잘 산 게 아니라 사랑의 실천을 얼마나 했느냐가 중요하다는 말. 앞으론 그렇게 살아야지.

오랜만에 책 읽고 글 써 본다. 남 보이기 위한 것도 아니고 그냥 내 생각 정리다. 좋다. 간간히 이렇게 글 써야겠다. 왜? 사랑 실천을 위해서 나를 닦을 필요가 있으니까.



마더 데레사 지음, 지은정 옮김, <작은 몸짓으로 이 사랑을>

마음이 급했다. 읽기도 전에 10권 주문했다. 우리 봉사반 학생들 나눠주려고. 일단 마더 데레사의 삶이 묻어 있는 책이라면 봉사반 애들 선물용으론 적합하다 싶은 이유 때문이다. 사서 다 나눠줬다. 아니 한 권 남겼다. 나도 읽어 봐야지.
주문해서 보니 책 사이즈가 한참 작다. 포켓북도 이렇게 작은 것은 처음이다. 손에 넣고 다니긴 편할지 모르지만 읽기엔 좀 불편했다.
하지만 그게 중요한 것은 아니다. 메시지다. 당연 사랑이다. 책 제목처럼. 식상하다고? 물론 식상하다. 그래도 진리는 역시 단순한 것이다. 사랑 이상의 가르침이 어디 있겠나. 근데 잘 보면 그 ‘사랑’ 솔직히 나도 잘 몰랐다. 안다고 해도 한계가 있다.
특히 마더 데라사가 말하는 사랑은 엄청 큰 것인 줄 알았다. 근데 생각 외로 아주 작은 것이었다. 하긴 그 작은 사랑이야 말로 큰 사랑의 바탕일 것이다.
먼저 “사랑은 죽는 날까지 매일매일 삶과 호흡처럼 그렇게 자연스러운 것이 되어야 합니다.” 어쩌다 한 번 나가는 장애인 시설 봉사가 아니라 삶 그 자체가 사랑이어야 한다는 말. 지당하다. 그러면서도 난 찔린다. “분명히 말한다. 너희가 여기 있는 형제들 중에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준 것이다.(마태오 25, 40)”라는 것을 거창하게만 생각해서 그랬다.
근데 마더 데레사는 “우리가 진정으로 세계 평화를 원한다면 가족 안에서 서로서로 사랑하는 것부터 시작합시다. 때때로 서로에게 웃음을 보내는 것이 어렵기도 합니다. 아내가 남편에게, 남편이 아내에게 웃음을 짓기가 가끔은 힘들 때도 있습니다. 사랑이 순수해지려면 우리가 이웃에게 주는 그런 사랑 이상의 것이 되어야만 합니다. 우리에게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 즉 가족 안에 있는 이를 사랑해야 합니다. 사랑은 바로 거기서 우리를 필요로 하는 이들을 향해서 펼쳐집니다.
멀리 있는 이를 사랑하기는 쉽습니다. 그러나 바로 곁에 있는 사람을 사랑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가난한 사람에게 밥 한 끼 제공하기는 쉽지만 우리 집안의 누군가가 사랑받지 못한다고 느끼며 외롭고 힘들어할 때 그를 위로하는 건 참으로 어렵습니다.”
사랑도 폼 잡지 말라고 하는 말씀. 마누라 사랑 못하면서 어디 가서 거창하게 세계 평화 말하지 말라는 말. 지당. 철저히 실천해야 할 일. 그리고 그렇지 못하는 사람은 다시 볼 필요가 있다. 겉과 속이 다른 사람. 일 때문에 사랑 놓고 다니는 사람. 그게 맞을 것이다. 나도 예전엔 그렇게 살았다.
뒤쪽 어린이를 테마로 다룬 장에서도 이 가르침은 이어진다. “사랑은 가정에서 시작된다.” “가정에 사랑이 있을 때만 우리는 그것을 이웃과 나눌 수 있습니다.” 그러니 가정이 먼저다. 이거 못하면서 밖에서 거창한 일하는 사람, 이젠 안 믿을 생각이다. 위선일 수 있다. 몸에서 나오는 사랑이 아니라 머리에서 나온 사랑에 그칠 수가 있다. 사랑이 생활이고 삶이고 호흡이고 보면 먼저 가정에서 시작되어야 한다는 말이 옳아 보인다.
“어머니는 가정의 심장입니다.” 울림이 강하게 온다. 그렇다고 해서 나 같은 아버지가 필요 없다는 말은 아닐 테니까.
“나는 오늘날 세상이 거꾸로 뒤집힌 느낌입니다. 가정과 가족 안에 사랑이 거의 없기 때문에 많은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사랑의 결핍이 바로 이 세상에 그토록 심각한 고통과 불행의 원인이 되는 것입니다” 정확한 진단이다. 가정에 사랑이 넘치면 사회 문제도 그리 심하지 않을 것 같다.
근데 많은 경우 가족을 위한다면서 실제로는 가족을 망치고 있다. 나도 예전에 그랬다. 바빠 살 때, 정신없이 살 때 말이다. 마더 데레사는 그 점도 지적한다. “오늘날 모든 사람이 더 발전하고 싶고, 더 부유해지고 싶은 초조함 때문에 무서울 정도로 서두릅니다. 아이들은 부모에게 시간을 내어줄 수 없고, 부모 또한 아이들에게 시간을 내어주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의 평화가 깨어지는 것은 가정에서부터 시작됩니다.”
다행히 나는 요즘 가정에 돌아왔다. 일보다 가정을 중시하고 있다. 게다가 “당신의 가정을 위해 기도하고, 당신의 어린이를 위해 기도하십시오. 그들에게 기도하기를 가르치십시오. 왜냐하면 기도하는 어린이는 항상 행복한 어린이이기 때문입니다. 기도하는 가정은 일치된 가정입니다.”라는 말도 실천하고 있다. 다행인 것이다. 그래서 이 대목 읽다가 “오 하느님 감사합니다”를 연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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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당신이 주변에서 기쁜 소식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살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내 삶의 모습이 조금이라도 예수님 닮아간다면 좋겠다. 노력해야지. 성찰하고, 기도하고.

사랑에 대한 이야기 외에도 봉사, 용서, 죽음 등에 대한 이야기도 있다. 당연히 사랑은 봉사로 이어질 것이다. 그런데 그 봉사를 하다가 주의할 점. 실망하지 말 것. “당신이 최선을 다했으면 어떤 실패에 대해서도 상심하지 않도록 하십시오. 그리고 당신의 성공과 영광에 대해서도 모두 하느님께 돌려드리십시오. 만약 당신이 실망한다면 자신의 힘을 믿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자만심의 표현입니다.”
“진정한 사랑은 재지 않습니다. 그냥 주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기꺼이 주는 사람을 사랑하십니다. 하느님과 사람들에게 감사를 표현하는 최상의 방법은 모든 것을 기쁨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기쁜 마음은 사랑으로 불타는 가슴의 정상적인 결과입니다. 기쁨은 힘입니다.” “기쁨은 유혹에 대항하는 가장 좋은 파수꾼의 하나입니다.”

용서에 대해서 말한 대목도 좋은 구절이 많다. “죄를 짓거나 실수했을 때, 하느님께 더 가까이 가는 성장의 기회가 되도록 합시다.” 그렇게 한다면 “걸림돌이라고 생각했던 것을 오히려 디딤돌”로 바꿀 수 있다고 한다. 나 요즘 회개하고 이 걸림돌을 디딤돌로 바꾸는 중이다. 앞으로도 한창 회개해야하겠지만.

죽음에 대한 구절. 많이 하는 말이지만 죽음은 하느님께도 가는 것이라는 것. 그래도 나는 아직 기쁘게 받아들이지 못한다. 부족함이 많다. 근데 “죽는 순간 우리는 우리가 행한 일의 양으로 판단 받는 것이 아니라 그 일에 쏟았던 사랑의 무게로 판단 받게 될 것입니다.”라고 한다. 나 잘났다고 열심히 뛰어다녔다고 잘 산 게 아니라 사랑의 실천을 얼마나 했느냐가 중요하다는 말. 앞으론 그렇게 살아야지.

오랜만에 책 읽고 글 써 본다. 남 보이기 위한 것도 아니고 그냥 내 생각 정리다. 좋다. 간간히 이렇게 글 써야겠다. 왜? 사랑 실천을 위해서 나를 닦을 필요가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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