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눈으로 3
앨런 에임스 지음, 정성호 옮김 / 크리스챤출판사(카톨릭) / 200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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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으로 기도하는 것

앨런 에임스 지음, 정성호 옮김, <예수님의 눈으로 3권>, 가톨릭 크리스챤.


1권 2권과 달리 3권의 옮긴이가 다르다. 읽다 보면 한자어에 괄호를 치고 친절하게 한자를 써 놓은 게 많다. ‘굳이’ 하는 생각을 하며 읽었다. 확인해 보니, 역자가 달랐다. 그랬구나 싶었다. 그래도 내용전달은 별 무리가 없다. 좋은 번역이다.
이번 3권에서도 여전히 와 닿는 대목 옮기고, 약간의 토를 단다. 묵상과 함께. 특히 ‘기도’가 많이 가깝게 다가온 느낌이다. 기도를 일상의 삶으로 가져오는 데 도움이 많이 된 것 같다.

“네가 하는 모든 일에서 하느님께 네 마음을 열어 놓기만 하면 된다. 비록 네가 다른 사람에게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라도, 하느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는 것을 알아라. 하느님께 모든 말과 생각을 다 바친다면 너도 기도하는 것이 된다.”
“모든 것으로 기도하는 것은 모든 것을 사랑하는 것”
“하고 있는 일이 무엇이든 간에, 만일 네가 그 일을 하느님께 바치고 하느님을 위해서 한다면, 그때 그것은 행동의 기도가 되는 것이다. 네가 행한 모든 일이 하느님을 사랑하고 기쁘게 해 드리기 위해서 한 것이라면, 그 때는 모든 것이 기도가 되는 것이다.”
“너는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끊임없이 호흡을 하는데, 그것은 하느님의 선물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따라서 숨을 쉴 때마다 너는 하느님의 선물을 몸 안에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네가 하는 모든 행동을 통해서, 가장 작은 것에서부터 가장 큰 것에 이르기까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그 선물을 활용하여야 한다. 하느님께서 너에게 주신 선물이 너의 봉사에 의해서 하느님의 이름으로 다른 사람들을 돕는 데 사용된다면 그때 행한 모든 봉사활동이 기도가 되는 것이다.”
-기도를 너무 어렵게 생각해 온 것 같다. 그리고 기도와 생활이 많이 분리되어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위의 구절을 읽어 보면 삶이 곧 기도인 것이고, 아니 그렇게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려면 우선 하느님이 항상 함께 하신다는 것을 알고, 내 삶을 모두 하느님 마음에 드는 데 써야 한다는 것이다. 무슨 일을 하든지 하느님의 이름으로 이웃을 돕는데 힘이 사용되어야 한다. 그러면 그게 곧 기도라는 것이다.

“저는 지금 이 순간에도 저의 최후가 될 지도 모른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모든 사물 안에서 하느님의 사랑을 찾아냄으로써 그 순간마다 하느님께 감사드리고 싶습니다.”
-이런 자세라야 한다. 최후가 될 수도 있다는 생각. 그래서 모든 사물 안에서 하느님을 찾는 것. 이럴 때 앞에서 말한 ‘삶이 곧 기도’가 될 것이다.

“네 마음속에 두려움을 가질 때 악이 너를 해칠 것이다. 그러나 나를 믿고 나의 사랑에 믿음을 갖는다면 그때는 악도 너를 해치지 못할 것이다.”
“네가 하느님을 진실로 믿는다면 이 세상에는 두려워 할 것이 없고, 두려움도 존재하지 않는다.”
-악령의 공격은 내가 두려워할 때 심해진다. 그러나 하느님이 항상 함께 함을 믿고 그렇게 살아간다면 어떤 악령도 나를 괴롭히지 못할 것이다.

유다의 행실이 문제가 되어 다른 제자들이 불평을 하고 있을 때의 상황이다. “너희 중 하나가 어떤 면에서 약하다는 것을 알면, 너희는 그 자신의 나약함을 극복하도록 당연히 도와 주어야 할 것이다.(중략) 왜냐 하면 자신의 나약함을 다른 사람들이 얕잡아 보거나 해칠 수 있는 것으로 밖에는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형제인 너희는 서로의 약점을 형제를 돕는 방법으로, 자기 자신을 성장시키는 방법으로 이해해야 한다. 겸손한 사람으로, 너희는 형제가 짊어지지 못하는 짐을 져 주어야 한다. 형제인 너희는 다른 사람한테서 나약함을 보면 그것을 이해하고 도와주어야 한다. 그러면 너희는 자기 자신의 나약함도 극복하게 된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형제 노릇하기가 어렵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너희는 미워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함으로써, 빼앗는 것이 아니라 주는 것으로써, 그리고 시중을 받는 것이 아니라 시중을 들어 주는 것으로써 형제 노릇을 좀 더 보람 있게 할 수 있는 것이다.”
-나는 쉽게 남을 비난한다. 근데 비난할 게 아니라 그의 약점을 극복하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그게 나의 성장이다. 그래야 나의 나약함도 극복될 수 있다. 나는 한없이 작은 인간이기에.

“네가 그러는 것은 남들한테 상처를 입었다고 느끼고, 화가 나 있다는 생각에 집착하고 있기 때문이다. 네가 용서를 할 수 있을 때, 너는 진실로 사랑의 마음을 열 수 있고, 동시에 기쁨이 찾아올 것이다. (중략) 너는 자신의 노여움에 매달려 있기 때문에 그처럼 슬프고 그처럼 불행하고, 그처럼 기분이 상하는 것이다. 그 노여움을 잊어버려라. 그리고 인생에서 행복을 느껴라.”
-용서, 사랑이 넘치면 용서가 빠르다. 그러나 사랑이 부족했기에 ‘내 탓’인 줄 모르고, ‘남 탓’을 했던 것이다. 내 탓이다. 모두가. 그리고 혹 앞의 글처럼 남의 약점이 보이면 그것 때문에 분노하고 상처 입을 것이 아니라, 그가 그것을 극복하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그래서 이 책에 등장하는 어떤 노인은 “너무나 행복해서 미워할 겨를이 없습니다”라고 했다. 사랑이 넘치는 사람이기에 가능했던 말이겠다.

“비록 어떤 상황에 처한다 하더라도 항상 사랑함으로써, 자신에게 사랑하는 힘을 달라고 그때마다 하느님께 열심히 기도하란 말이오!”
-어려울 때, 그때가 사랑이 가장 필요한 때이겠다. 원수에 대한 사랑까지도.

“자신의 잘못을, 어떻게 더 많이 사랑을 하고 어떻게 악을 피하는가를 배우기 위한 은총이라고 생각한다면, 이미 너를 짓누르는 무거운 짐은 아닐 것이다.”
-나는 끊임없이 잘못을 저지른다. 하지만 그것을 은총으로 바꿀 수 있어야 한다. 성찰하고 회개함으로써 전보다 더 사랑 넘치는 사람으로, 전보다 악에 대해 단호하게 대처할 수 있는 사람으로 거듭남으로써.

“시몬아, 먼저 너부터 달라져야 한다. 죄를 보지 말고 죄인이 자신의 약점을 극복하도록 도와주는 길을 찾아라. 죄에 대해 계속 생각을 하면, 너는 그 노여운 생각 때문에 죄로 끌려 들어가게 될 것이다. 이것이 악마의 영리한 점이다. 너에게 악에 초점을 맞추게 함으로써 너를 불쾌하게 만들고”
-분노나 비난이 아니라 계속적인 사랑과 이해를 보여줘야 한다. 인내와 희망을 가지고. 물론 얼마나 힘든 일인가. 그러나 그리스도인이고자 한다면 이런 덕성이 몸에 배어야 한다. 타인의 죄를 보는 것이 아니라 그의 약점을 극복하도록 도와주는 것. 만약 내가 이겨내지 못하고 노여워한다면 그때 악령은 나를 사로잡는다. 이렇게 나는 또 다시 속아 넘어가는 것이다. 현명해야 한다. 그래서 늘 깨어있으라고 한 모양이다. 한계상황이 생기면 분노할 것이 아니라 상대방을 이해하고 그를 도와야 한다. 아무리 꼴통이라도.

“남들을 매도하기 쉽고, 그들을 죄로 이끌어간 약점을 보지 않고, 그들이 그것을 극복하는 데 필요한 도움을 무시해 버리기가 쉬워진다. 사람들에게서 善을 보고, 그들이 죄를 짓거든 그 善을 강화하는 길을 찾아 주고, 그들의 사랑이 위력을 발휘하도록 격려해 주는 것을 잊지 말아라. 이때가 죄인이 변하는 때이고, 내 안에서 악마에게 승리를 거두는 때이다.”
-다시 반복되는 말이다. 군더더기 보다 묵상으로 대신한다. 그 사랑, 지독히도 어려운 사랑이지만 이것 외에 다른 대안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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