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눈으로 2
앨런 에임스 지음, 원아영 옮김 / 크리스챤출판사(카톨릭) / 2000년 5월
평점 :
품절


기도의 기쁨

앨런 에임스 지음, 원아영 옮김, <예수님의 눈으로 2권>, 가톨릭 크리스챤, 2000.



“너도 네 자신을 참고 기다려 주어야 한다. 시간이 걸린다는 것을 알아라. 아무것도 배우는 것이 없고, 제자리걸음만 하고 있다고 느껴질 때도 있을 것이다. 그것이 네 성화(聖化)의 과정이다. 그것을 극복할 도움을 내게 청하여라. 그러면 내가 항상 네 곁에서 너를 도와 줄 것이다.”
-조급함. 나의 약점이다. 책을 통해서 보면 야고보 사도도 그렇게 안달했던 모양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걸 성화의 과정이라고 말씀하신다. 생각해 보면 나도 많이 차근차근 변하고 있다. 믿고 계속 길을 갈 뿐이다. 주님께 청하면 항상 곁에서 도와주신다고 하지 않는가.

“왜냐하면 그들은 무엇인가를 믿고 싶었고, 치유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신들이 살아가는 그런 방식을 인정해 주는 말을 듣고 싶어 했기 때문이다. 많은 탐욕과 이기주의와 자만심으로 살아가는 그들은,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옳다고 누군가가 말해 줄 때 그 말을 믿고 싶어 했다. 진리를 들었을 때 받아들이기 어려운 이유는, 자기 생활 속에서 넘치는 죄를 알아보게 되고, 자기 생활을 바꾸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자기 생활을 바꾼다는 것을 너무 어려운 일로 생각한다. 그래서 자기한테 적당하다고 생각되는 말과 불편하게 느껴지지 않는 말과 ‘네가 살고 싶은 대로 살아라’하는 말만을 잘 받아들이게 된다. 그것이 바로 마귀의 속임수인 것이다.”
-진리 앞에 절대 겸손. 나를 바꾸는 것을 자존심 상하는 일이라 여겨선 안 된다. 앞 문장에서처럼 ‘나의 聖化’로 여길 일이다.

“그러나 하느님의 힘은 사랑입니다. 하느님의 정의는 용서입니다. 여러분 자신을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부르는 것은, 여러분이 하느님의 뜻에 순명한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뜻은 자비입니다.”
-하느님의 힘과 하느님의 정의와 하느님의 뜻이라····. 사랑이 그 힘이며, 용서가 그 정의며, 자비가 그 뜻이로구나. 어려워도 이웃에 대해 심지어는 원수에게도 사랑과 용서와 자비가 전해져야 한다. 그 정도로 나를 다듬어야 한다.

“그러다 보면 하느님을 사랑하기 위해서 기도하기 보다는, 그런 경험을 다시 맛보기 위해서 기도하고, 자기 자신의 만족을 구하려고 기도를 하게 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다른 사람들이 기쁨에 넘쳐서 기도하는 것을 보고 질투하는 사람이 있다. 그것은, 하느님보다 자기 자신을 더 우선으로 두기 때문이다. 하느님을 사랑한다면, 다른 사람이 하느님께 그렇게 기도드릴 수 있는 것을 기뻐하게 될 것이고, 그 사람이 받는 은총에 감사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 하면 너희는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게 되고, 하느님의 사랑에 너희 마음이 열리게 될 것이며 너희에게도 하느님의 사랑이 가득 넘치게 될 것이다. 기도할 때 너희가 하느님께 고압적으로 요구하지 않고, 시기나 질투나 분노를 품지 않고, 오직 사랑으로 기도하면서 하느님께 마음을 열어 드린다면, 너희는 기도의 기쁨을 누릴 것이다.
-경계할 일. 나 역시 어떤 신앙신비 체험을 한 적이 있다. 그 후 한 동안은 그 체험이 이어지기만을 기다렸다. 그러니 기도가 웃기는 꼴이 되었을 것이다. 체험은 한 번이면 족하다. 그것으로 이미 나는 하느님 현존을 확인했다. 그래 놓고 또 그런 신비에만 머무르려고 했다. 사실 일상 삶이 모두 신비이고 기적인 것을.
그리고 나는 아무리 봐도 질투, 시기심이 강한 것 같다. 남이 하느님 사랑을 흠뻑 받을 때 기뻐해야 하는데, 웬걸 엉뚱하게도 질투하고 있었다. 하느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확신이 없을 때 생기는 못된 버릇이다. 그 사랑을 확신하면 오히려 남들을 축복해 줄 수 있다. 더 닦을 일이다. 그럴 때 진정 기도의 기쁨이 다가 온다. 사실 이 책을 읽으면서 내가 변한 것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기도가 기쁨으로 다가온다는 것이다. 주님 안에 깊이 잠겨 머무르는 법을 배웠다고 할까. 암튼 기도의 기쁨을 조금은 맛 본 것 같다.

“원수를 반겨주고 그들에게 사랑과 존경을 보여주면, 원수가 친구로 변하게 되는 것입니다. 때로는 그렇게 하기가 어렵습니다만, 하느님께서 사랑으로 여러분을 창조하신 것처럼, 여러분의 원수들도 똑같은 사랑으로 창조하셨다는 것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어려운 가르침. 머리로는 하나도 어렵지 않은데, 생활에서는 절대 실천 불가능할 것처럼 어렵다. 물론 절대여서는 안 된다. 어렵더라도 차근차근. 사람 중심으로 보면 절대 불가능할 일이다. 그러나 하느님 중심으로 생각하면 이해는 된다. 그리고 원수를 증오해서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다. 그건 내 삶을 통해서도 이미 터득한 바다. 그럼에도 원수를 사랑하는 게 쉽지 않다. 하긴 어디 예수님 따라 가는 삶이 그리 쉽겠는가. 그래도 가야 할 길.

“잠자기 전에 꼭 기도하거라. 그리고 너희 천사들에게 보호해 달라고 부탁학고.”
- 기도의 생활화. 많이 해 간다. 근데 천사들에게 하는 기도는 늘 빼먹는다. 이건 신화나 동화가 아니다. 실제다. 악령을 체험한 나로서는 그 반대의 성령을 함께 체험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악마와 천사가 결코 동화적 개념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항상 잊지 말고 수호천사께 도움을 청해야겠다. 지금 당장부터.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을 지니는 것이 똑똑한 두뇌를 가진 것보다 훨씬 나은 것입니다.”
그 남자가 다시 물었다. “그러면 하느님께서는 무엇 때문에 사람들에게 지성을 갖게 하셨습니까?”
“하느님께서는 주시는 선물은 모든 사람들의 유익을 위한 것이지 선물 받은 사람만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지성을 지녔다면, 그는 다른 사람들을 돕는 데 그 지성을 써야 하는 것입니다.(중략) 하느님께서 주신 것은 하느님께서 언제든지 거두어 가실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예전에 난 잘난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러나 이젠 착한 사람이고자 한다. 많이 변했다. 그리고 나는 배울 만큼 배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배움을 나의 명예욕만을 위해 썼다. 이젠 그 못된 버릇에서 벗어날 생각이다. 예전처럼 제주역사 공부로 돌아갈 수 있을지 없을지는 모르겠지만 만약 다시 돌아가도 그 지식을 다른 사람 돕는데 쓰겠다. 절대로 내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 쓰지는 않겠다. 이게 지난 1년 동안 주님이 허락하신 고통을 겪으면 배운 바다. 정말로 나의 지적 능력은 하느님 거두어 가시고자 하니 한 순간에 날라 갔다. 아무 것도 지적 활동을 할 수 없었던 시간을 겪었다. 그러고서야 깨달은 것이다. 그 모든 것이 내 것이 아니라 주님 것이었음을. 겸허하고 또 겸허해질지어다.

제자 중 하나가 유다의 금풍 횡령 때문에 걱정하며 비난하자 예수님은 “그런 일로 걱정하지 마라. 그렇게 걱정을 하다 보면, 그것이 네 기도를 산만하게 하고, 하느님께 대한 사랑을 약하게 하고 다른 사람에 대한 신뢰를 없어지게 한다. 바로 이런 식으로 한 사람의 죄가 다른 사람을 파괴하면서 퍼져나가는 것이다. 죄를 짓은 사람이 악의 사슬에 얽매여 있다는 것을 알고, 그들을 사랑으로 대해 주어야 한다. 죄인을 위해 기도해 주고, 그들에게 도움을 주어라.”
-나는 비난만 했다. 아니 증오하고 왕따시키고 매장시키려 했었다. 그러니 나의 기도는 산만할 수밖에. 죄인을 위해 기도하라고 하신다. 안 그러면 나까지 그 죄에 감염된다. 어렵더라도 죄인을 위해 기도를.

제자 야고보의 묵상: “주님, 저는 교만이 가득합니다. 제가 어떤 좋은 일을 했다 싶으면, 그런 일을 한 제가 훌륭하다고 생각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사실, 선행을 하게 한 것은 제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당신의 사랑으로 그렇게 하셨다는 것을 문득 기억하게 되면, 자신을 훌륭하게 생각한 제 자신이 아주 싫어집니다.”
-체험하지 않은 사람은 이 말, 이해 못한다. 사람이 교양을 잘 닦아, 덕을 닦아, 인격을 도야해서 겸손해진 것이지, ‘하느님이 그렇게 하셨다’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의 경험으로 이게 동양 종교(철학)과 기독교의 차이다. 동양 종교에서는 무엇보다 인간, 나, 자아, 주체, 진아를 내세운다. 그 자아의 깨달음으로 완성된다. 하지만 기독교는 다르다. 우린 그저 피조물에 불과하다. 절대자 창조주 앞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없다. 그 모든 것이 그분의 작용 없이는 불가능하다. 이것을 인정하기까지 많은 시간이 걸렸다. 체험으로 알 게 되었다. 그래서 동양적 겸손의 한계를 본다. 그래서 예전에 김홍섭 판사는 당신의 수상기 제목을 ‘무상을 넘어서’라고 했나. 무상 너머의 절대자를 묵상한 것이다. 물론 동양 종교의 좋은 점을 무시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궁극에 가다 보면 그것은 한계에 달한다. 결국 창조주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고 보면 내가 아니라 주님이 느껴지기 시작한다. 지금 이 글을 쓰는 것 역시 나의 의지가 아니다. 이끄심 없이는 하나도 못한다.

“너희가 사랑으로 산다면 이런 일을 자주 보게 될 것이다. 하느님 사랑 안에서 모든 피조물이 너희와 일치를 이루게 된다. 모는 피조물은 하느님의 사랑으로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완전히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살게 되면, 짐승들과 새들과 사람들이 서로에게 느끼고 있는 공포가 사라질 것이다. 공포가 없어지면 모든 피조물들은 서로 친구가 될 것이다. 하느님의 사랑을 서로 나누며 함게 살아가는 친구가 될 것이다.”
-그래서 프란치스코 성인이 새들과도 대화를 할 수 있었나 보다. 하긴 모든 피조물이 그렇게 만난다면 가능한 일이겠다. 노래 가사에 있는 사자들이 어린양과 뒹굴고.

기도하면 “너희가 하느님께 더 가까이 갈 수 있게 해 주는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죄가 아닌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그리고 하느님 뜻에 맞는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 “기도는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재물을 다 합친 것보다 더 값진 것이다.” “그것은 기도의 힘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하고 믿지 않지만, 그것을 받아들이기만 한다면, 기도는 온 세상을 바꿀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기도가 단순히 사람 마음 위안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던 시절이 있었다. 교회에 다시 돌아와 ‘통공’이라는 말뜻을 몸으로 느끼게 되면서 이 기도가 참으로 큰 축복임을 알았다. ‘기도의 기쁨.’ 말로 해선 모른다.

“중요한 것은 네 마음이다. 네가 기도할 때 하는 말은, 네 마음을 하느님께 열어드리기 위한 것이다. 네 마음이 기도하는 데에 있다면, 같은 기도를 날마다 되풀이해도 상관없는 것이다. 가끔씩 기도할 마음이 없을 때에는 네가 말하고 싶은 대로 하느님께 사랑의 말씀을 드리고, 마음속으로 느끼는 것을 있는 그대로 말씀드리도록 하여라. 그리고 나서 가능하다면 다시 일상 기도를 바치도록 하여라. 많은 사람들이 매일 같은 기도를 바침으로서, 일정한 시간에 일정한 방식으로 하느님을 생각하도록 자기 마음을 훈련시킨다.”
-기도하기 싫은 땐 그냥 대화하라고 하신다. 이 얼마나 좋은가. 그래, 대화라도 자주 해야지. 솔직하게 있는 그대로의 감정을 말씀드리는 것이다.

부록에 몇몇 성인들이 저자 앨런 에임스에게 계시하신 말씀이 실려 있다. 와 닿는 것 옮긴다.
성토마스: 의혹을 없애기 위해, 기도하여라. 오류에 빠지지 않기 위해, 기도하여라. 평화 속에 머무르기를 원한다면, 기도하여라. 의혹과 오류를 없애고, 평화를 얻게 하는 하느님의 은총이, 바로 기도인 것이다.
성 유다 타대오: 하느님께서 주시는 치유의 힘을 받는 것은, 네 믿음에 달려있고, 하느님께 대한 네 사랑에 달려있다. 너희가 하느님을 사아하고, 그분의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못할 것이 없다는 것을 믿기만 한다면, 무엇이든지 못할 것이 없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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