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눈으로 1
앨런 에임스 지음, 원아영 옮김 / 크리스챤출판사(카톨릭) / 2000년 5월
평점 :
품절


일상생활 속에서 준 예수님의 가르침



앨런 에임스 지음, 원아영 옮김, <예수님 눈으로 1권>, 가톨릭 크리스찬, 2000.

지난 1월 왜관 베네딕트 수도원 피정 갔다가 사온 책이다. 그냥 책꽂이에 꽂아 뒀다. 예전처럼 책읽기 속도가 빠르지 않아서다. 예전에 사회과학 서적을 읽을 땐 지식 습득, 논리 다듬기였다. 그런데 지금 신앙 서적은 그게 아니다. 묵상이 주가 된다. 그러다 보니 진도가 더디다.
이 책 저 책 읽다가 책꽂이에 꽂혀 있는 이걸 잡았다. 전체 3권인데 오래 전에 시작했는데 최근에야 끝냈다.

책이 좀 특이하다. 외형이 특이하다는 게 아니라 구성이 그렇다는 말이다. 저자 앨런 에임스라는 분이 영적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들으며 그걸 기록한 것이라고 한다. 1996년에 듣고 기록한 것이라고 한다. 보통 이런 경우 계시 내용이 주를 이뤘던 것 같다. 현 세태에 대한 걱정, 기도 당부, 뭐 그런 것 말이다.
그런데 이 책은 하느님께서 들려주시는 것을 기록했다고 하는데 내용은 전혀 다르다. 예수님께서 공생활 하실 때의 일상생활을 마치 소설 읽듯, 아니면 영화 보듯 전해주는 내용이다.
성서에서 만나는 예수님은 아무래도 우리의 일상생활에 바로 와 닿지 않는 부분이 있다. 과정이 생략되고, 중요한 사건만을 기록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주로 메시지 위주다. 근데 이 책은 스토리로 되어 있다. 소설을 일근 것 같다. 그런데도 그 안에서 메시지를 전한다. 그래서 특이하고 말한 것이다. 소설을 읽으면서 가르침을 받는다. 그리고 예수님의 생활 모습을 보는 것 같은 기분, 이런 게 특이하면서도 편하다. 그래서 좋다.
또 저자 앨런 에임스가 성직자인가 하면 그도 아니다. 평신도이다. 그래도 교회에서는 그분의 그런 활동은 인정했다. 특이한 경우다.
어쨌든 경우야 어찌했던 내겐 읽기 쉬우면서 메시지가 적지 않았음이 좋았다. 뭐 달리 할 말이 없다. 신앙 서적의 경우 ‘책일기’를 쓰면서도 내 의견은 별로 쓰지 않는다. 지당하신 말씀만 있기에 그냥 인용하는 게 전부다. 간혹 그냥 감탄의 동의 표시나 하는 게 나의 코멘트다. 그래서 이번에도 그렇게 한다. 전체 간추리는 것도 없고, 그냥 좋은 구절만을 옮긴다. 스토리는 빼고 그냥 좋은 가르침만을 옮긴다.


“앞으로 무엇을 하든지 사랑으로 하시오. 누구한테도 상처를 주지 말고 남을 도와주시오. 하루하루를 하느님께 드리는 선물로 생각하고 지낸다면, 바로 그것이 나를 따르는 길이고 영원한 기쁨을 얻는 길이 될 것이오.”
- 하루하루를 하느님께 드리는 선물로 생각하라. 그렇게 살면 참 행복하겠다. 늘 의식하고 살아야지.

“점잖게, 사랑하는 마음으로 자기 의견을 토론하는 것이 더 나은 법이다. 그러면 아무도 마음을 상하지 않고 대답을 찾을 수 있게 된다. 친구를 잃는다면 논쟁에서 승리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 논쟁에서 승리한들, 친구를 잃는다면 소용이 없다. 그렇구나. 사람이 더 중요하지. 그 사람 하나하나가 모두 하느님의 모상대로 창조된 존재들인데. 그 동안 나는 어쩌면 과도한 논쟁을 즐겼다. 앞으로 꼭 필요한 논쟁만, 그리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다가서야 하겠다.

“너희는 자아라는 멍에를 너희 영혼 위에 짊어지고 있을 셈이냐? 하느님을 신뢰한다는 것은, 자신을 완전히 하느님께 맡기는 것이다.”
- 자아라는 멍에. 나는 이것을 과도할 정도로 지고 다녔다. 모든 것을 하느님께 의탁하는 것이 우선이다. 참, 어제 신문 읽다가 문동환 목사가 형님 문익환 목사와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하는 대목이 있었는데, 삼촌이 만들어준 팽이가 그렇게 좋았다고 했다. 정신없이 놀았던 모양이다. 근데 형 문익환이 그 좋은 나무 팽이를 불에 집어넣어 태우며, 하느님보다 더 사랑하게 되는 대상은 모두 우상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감동. 맞다. 내가 앞으로 어떤 일을 하든, 그것이 하느님을 향하는 것을 가릴 정도가 되면 안 된다. 나의 ‘자아’보다, 그 자아를 내어 주신 하느님께 먼저 다가설 일이다.

“단순하고, 순수하고, 순결한 그 믿음은 모든 사람들이 지녀야 할 믿음인데, 사람들은 그런 믿음을 거부하며 천국에 갈 때까지 결코 얻지 못할 대답을 끝없이 파헤치고 있는 것이다.”
- 그랬지. 나 역시. 사실 진리는 단순한 것인데, 불필요하게 머리를 많이 굴렸다. 물론 그 과정이 전혀 필요 없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결국 ‘얻지 못할 대답’일 뿐이다. 그래서 불가에서도 “이 뭣고?” 하면 “오직 모를 뿐”이라고 했다. 여기서 겸손을 얻으면 다행이데, 뭔가 깨달았다고 폼 잡으면 그 순간 꽝이다. 그래서 자력 신앙이라는 게 매력적이면서도 위험해 보인다. 물론 우리 계시신앙인 가톨릭도 우리가 정신 바짝 차리지 않으면 교만으로 떨어지긴 하겠지만.

“우리에게 참기 어려운 고통을 허락하실 때에는, 그것을 통해 틀림없이 우리에게 가장 좋고 큰 보상을 받게 하신다.”
-이건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 고통에 대해 불평만 할 것이다. 그러나 그 단계를 넘어서면 확실히 경험한다. 나 같은 탕자가 회개하고 개과천선하는 것, 이거 내 노력으로 한 게 아니다. 주님이 주신 큰 보상이다. 물론 그래도 고통을 피하고 싶다. 하지만, 그것 역시 내가 하는 게 아닌 걸. 그러니 고통을 ‘허락’하신다는 표현이 맞다. 이건 정말 말로 해서 모른다. 겪어보지 않고선.

“때때로 괴로움을 겪게 되면 남을 좀 더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이렇게 고통이 하나의 은총이 될 수 있는 것은, 고통이 우리의 가슴을 사랑과 자비로 채워주기 때문이지요. 때로는 고통이 하느님께로 더 가까이 갈 수 있게 해 주고, 자비하신 하느님께서는 고통당한 사람들에게 천국에서 당신의 영원한 사랑으로 보상해 주십니다.”
“고통을 받으면서도 여전히 사랑할 수 있다면 그 고통은 큰 은총이라는 뜻이다.”
-바로 나온다. 왜 고통이 필요한 것인지에 대한 설명이. 사람을 더 잘 이해하게 된다. 잘 나갈 때는 주변의 아픔을 모른다. 알아도 머리로만 안다. 내가 겪어봐야 이웃의 아픔을 알게 된다. 그러면서 하느님과 더 가까이 가게 된다. 그러니 은총인 것이지.

“영적으로 병든 사람은 대부분 자신이 병들어 있는 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악마는 이러한 사람들의 안팎과 주위에 있다가 다른 사람들에게 퍼져 나가고, 사람들을 악의 소굴로 끌어들이는 것이다. (죄를 짓는, 나쁜 짓을 하는 타인을 보았을 때) 분노하게 되는데(중략) 죄를 지으면서라도 그 사람의 죄악을 멈추게 하고 싶어 한다. 폭행을 하거나 증오심으로 학대하거나, 적개심을 다른 사람에게 퍼뜨리는 등의 죄를 짓고서라도 그 사람의 죄악을 막으려 하는 것이다.
그럴 때 사람들은 자신이 좋은 일을 하고 있다고 믿기 때문에, 그들의 마음속에 스며든 악으로 눈멀게 되는 것이다. 그러한 행동방식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것이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지를 모르고 행동할 때, 착한 사람들도 악마에 이끌려 자신도 모르게 악한 사람으로 변하게 되는 것이다.(중략) 사랑과 평화를 첫째로 앞세워야 하는 것이다.”
- 지난 시간 내 삶의 원천적 힘은 ‘분노’에서 나오기도 했다. 물론 그 바탕에는 조국과 민중에 대한 사랑이라고 생각했다. 그 사랑이 있었기에 부정의가 횡행하는 현실 앞에서 분노했던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을 만나면서 그 분노의 처리 방법을 알게 되었다. 사실, 예전에 그 분노를 그냥 날 것으로 폭발시켰다. 타도를 위해서 노력했고, 응징하려 했다. 나름의 성과도 있었고, 짜릿한 기분을 맛보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이 나의 교만을 강화했고, 내 마음에 사랑보다 증오가 더욱 커져가게 나를 몰아갔던 걸 당시는 깨닫지 못했다. 이건 위험한 상황이었다. 그래서 지금 내가 큰 고통에 빠진 것인지도 모른다.
암튼 그래도 예수님을 만나면서 ‘악을 악으로 누르려는 것’이 얼마나 무모한지 깨달았다. 악을 선으로 이겨야 한다는 가르침이 몸에 다가 왔다. 간디를 만나면서부터 이런 생각을 조금씩 하고 있었으나, 신념화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제 신앙으로 이걸 받아들이게 되면서는 달라졌다.
그런 변화, 깨달음 역시 성령 하느님의 역사하심일 것이다. 그리고 내가 겪어봤다. 증오로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음을. 물론 그렇다고 해서 사회 부정의에 눈을 감겠다는 것은 아니다. 예수님처럼 자기를 내어주면서 문제를 풀어야 함을 새롭게 배웠다는 말이다. 그러니 예전보다 더 어려운 투쟁이다. ‘사랑과 평화를 첫째로 앞세우면서’ 해야 하기 때문이다. 제주사회의 현안인 해군기지, 의료 민영화 등, 많다. 여기에 대해서 사회과학적 인식을 제대로 하되, 그 해결 방법은 예수님의 방식이라야 함을 본다. 훨씬 어려운 방법이다. 그래도 진리는 하나다.

“베드로, 이런 조롱을 무시하기가 힘들다는 것은 잘 안다. 그러나 이런 조롱을 무시할 때, 너는 나에게 깊은 사랑을 보여 주는 것이다.”
-부활 미사 영성체 후 묵상 중에 내면에서부터 이런 소리가 올라왔다. ‘아직도 교만함이 남아 있다. 주변으로부터 어떤 모욕을 하더라도 평화를 잃지 않을 수 있어야 한다.’라고. 주님이 주신 메시지라 생각한다. 더 낮추라는 얘기다. 낮추다 보면 모욕적인 상황도 맞게 될 것이다. 그래도 평화를 잃지 않는 경지까지.

“사람에 대한 판단은 하느님 말고는 아무도 할 수 없다. 사람이 다른 사람을 판단하려고 할 때는, 주로 악의와 증오로 판단을 내리게 된다. 절대로 남을 판단하지 마라. 그러한 일은 하느님께 맡겨라. 다른 사람을 대할 때는 오직, 그들을 도와 줄 수 있는 기회만을 생각하고, 그들을 하느님께 가까이 데리고 올 수 있는 기회만을 찾도록 하여라. 너희가 그 이외의 다른 것을 한다는 것은 하느님의 뜻을 이루려고 하는 게 아니라 사람의 뜻을 이루고자 하는 것이다. 하느님만이 심판관이시라는 것과, 다른 사람이 너희를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 아니라는 것을 잊지 말도로 하여라. 너희의 삶 속에서 하느님의 일을 우선으로 삼아야지, 사람의 일을 우선으로 삼으면 안 된다.”
- 지독히도 어려운 주문이다. 내가 예수님께 돌아오고 나서 삶 속에서 실천하기 가장 어려운 가르침 중의 하나다. 판단하지 마라. 어렵다. 그냥 판단이 되어 버린다. 상대방이 몇 마디 말만 해도. 그가 쓴 글 몇 조각만 읽어 봐도. 그런데도 판단하지 말라고 가르치시니. 참 어렵다. 그래도 낮은 수준에서라도 실천해 보자 노력한다. 악의와 증오가 생기지 않도록. 그리고 그런 판단을 남에게 함부로 이야기 하지 않도록. 그리고 그 상대방을 위해 기도하고 하느님께 데려올 수 있도록 노력할 것이다. 그래도 쉽지 않다. 당장 눈앞에서 벌어지는 각종 사회의 부정의들. 어찌 판단하지 않고 비판하지 않을 것인가. 그래도 노력은 해 봐야지. 그런 상황이 닥칠 때마다 하느님께 기도하면서.

“금식을 하면 너희 영혼이 자유로워져서 기도하기가 더 쉬워진다. 너희가 육신을 단련시킬 때 너희 마음도 단련되기 때문에, 많은 어려움이 닥쳐올 대를 준비하며 자신을 강인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절대로 단식이 필요한 것이다.”
-동양적 수련을 하다가 다시 하느님을 찾아온 나다. 우상숭배의 대가는 상당히 혹독했다. 물론 그 고통 자체가 은총이긴 했다. 암튼 예전에 단식이 익숙했는데, 가톨릭에 와서는 거의 못했다. 별로 반기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몸 축난다. 모든 음식은 하느님이 주신 선물이다. 그러니 기쁘게 먹어라’라는 논리였다. 물론 맞다. 그래도 단식을 필요하다. 성경에도 나온다. 기회가 되면 단식 해야겠다. 뿐 아니라 요즘 영성에 목말라 하는 사람들이 템플 스테이 프로그램에 가서 단식을 하는데, 여기 가톨릭에서도 단식함을 알리고 함께 할 수 있는 기회도 만들어 보는 게 좋겠다.

“기도할 때는 다른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 오직 하느님만을 생각하여라. 모든 분심을 떨쳐 버리고, 너희들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을 생각하면서, 하느님께서 너희들 생애에 무엇을 해 주셨는지를 생각해 보아라. 그 다음 마음에서 우러나는 사랑의 기도를 드려야 한다.”
-엉터리 기도. 분심 속 기도가 많다. 그래도 이 책을 읽는 동안은 이 책의 가르침대로 ‘오직 하느님만을 생각’하면서 기도하려고 노력했다. 늘 깨어 있을 일.

“당신이 죄책감에 사로잡혀 있을 대 마귀를 마음 안에 들어오게 하여(중략). 그러나 앞으로는 하느님만이 유일한 해결책이라는 것과 하느님께서 당신을 용서해 주고자 애타게 기다리신다는 것을 기억하시오. 당신이 하느님의 용서를 받아들인 다음에는, 죄책감을 버려야 하오. 그러나 그 죄는 잊지 말고 기억하여, 다시는 같은 죄를 범하지 않도록 하시오.”
-죄책감 버릴 것. 여기에 매여 있는 것 자체가 하느님의 자비를 믿지 않는 것이고, 내가 나약한 인간임을 인정하지 않는 교만이다. 나는 나약한 인간이다. 그러나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이겨나가고자 한다. 그러니 더 이상의 죄책감이야말로 진짜 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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