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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으로서의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윤옥 옮김 / 현대문학 / 2016년 4월
평점 :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좋은 독자입니다.
어떤 문학상도 훈장도 호의적인 서평도 내 책을 자기 돈 들여 사주는 독자에 비하면 실질적인 의미는 없습니다˝ (....) 문학상은 특정한 작품을 각광받게 하는 건 가능하지만 그 작품에 생명을 불어넣지는 못합니다. 일일히 말할 것도 없는 얘기지요.-73,75쪽》
독자층을 분석해서 그들 입맛에 맞는 글을 쓰는 풍조를 경계하면서도 총체적인 독자로서의 힘을 믿고 있는 하루키만의 신념, 아니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쓰다보니 알게되더라 정도의 ˝실감˝
근데 가만히 읽다 보면 흔하디 흔한 교과서같은 말이다.
당장 먹고 살기에 빠듯한 작가의 입장에선 피지컬한 문제가 우선이다. 그들에게 (신인)문학상이란 각광받는 문제이전에 겨우 수능시험 합격 통지서를 받고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첫 단추를 꿴 셈이다.
물론 하루키도 이 부분에 대해서 공감했지만 역시나 사람의 가치판단과 방향성은 현재 상황의 수준이 어떠하냐에 따라 어느 정도 좌우되는 듯하다.(물론 다 그렇다는 얘기는 아니다).
하루키의 수준(?)에선 문학상에 그다지 관심없다는 차원높은 자세를 견지하는 게 독자로서도 흐뭇한 일이니 말이다.
하지만!!
나의 이런 자질구레한 반감이 하루키의 문학상에 대한 자유롭고 진정성있는 견해를 의심하거나 폄하하는 건 아니니
오해는 말자. 누구보다 그의 열성팬이니.
《나는 누군가에게서 비판을 받을 때마다 되도록 긍정적으로 그렇게 생각하려고 노력했습니다. 뜨뜻미지근한 흔한 반발밖에 불러일으키지 못하는 것보다는 설령 네거티브라고 해도 분명한 반응을 이끌어내는 게 더 좋을 것이다,라고-102쪽》
하루키는 초창기, 아니 지금도 여전히 문단에서는 혹평을 많이 받는다고 한다.
아웃사이더 스타일(?), 또는 비주류 행보의 그에게 어쩌면 기득권층의 질투심은 당연한 것이리라.
그러나 그가 이룬 35년간의 오리지낼러티에 열광하는 전세계 독자들의 힘은 마치 난공불락 독재의 권력이 민중들의 거대한 함성에 무너지듯이 문단의 고압적이고 비판적인 평가는 그의 오리지낼러티에 addict가 된 팬들의 힘앞에 찻잔속의 태풍 정도처럼 무의미한 것이다.
《만일 당신이 소설을 쓰기로 마음먹었다면 주위를 주의깊게 둘러보십시오-라는것이 이번 이야기의 결론입니다.
세계는 따분하고 시시한 듯 보이면서도 실로 수많은 매력적이고 수수께끼 같은 원석이 가득합니다. 소설가란 그것을 알아보는 눈을 가진 사람을 사람을 말합니다.그리고 또 하나 멋진 것은 그런게 기본적으로 공짜라는 점입니다. 당신이 올바른 한 쌍의 눈만 갖고 있다면 그런 귀중한 원석은 무엇이든 선택 무제한, 채집 무제한입니다.
이런 멋진 직업, 이거 말고는 별로 없는거 아닌가요?-140쪽》
김훈의 ˝들여다보기˝의 특징을 말하고자 함이리라.
특히나 소설 나부랭이쯤은 영화로 때우는게 시간적, 비용적 측면에서 효율적이다라는 근간의 내 신념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관점이다.
지금은 다행스럽게도 소설의 가치를 높이 사지만 말이다.
(불행하게도 읽어야 할 책들이 무진장 늘었다)
소설을 읽게 됨으로써, 아니 오히려 반대로, 사물을 들여다보는 습관을 가짐으로써 소설을 읽는 재미가 쏠쏠해졌다.
나에게 소위 ˝들여다보기˝는 사물이나 다른 이의 입장을 새로운 관점에서 바라본다는 의미외에도
의식적인 고찰이 아닌 직관의 생경함(!!), 가령 성석제님의 책 제목처럼 ˝번쩍하는 황홀한 순간˝을 맛보는 그 짜릿함에
더 큰 매력이 있지 않을까?
《가능하면 보름에서 한달쯤 작품을 서랍 속에 넣어두고 그런 게 있다는 것조차 잊어버립니다.(...) 그렇게 작품을 진득하게 재운 다음에 다시 세세한 부분의 철저한 고쳐쓰기에 들어갑니다.
진득하게 재운 부분은 나에게 이전과는 상당히 다른 느낌으로 다가옵니다. 깊이가 있는지 없는지 판단이 됩니다. 작품이 `양생`을 한 것과 마찬가지로 내 머리도 다시 멋지게 `양생`이 된 것입니다.-155쪽》
˝양생˝을 하며 글을 진득하게 재워둔다.
얼마나 멋진 비유인가!
집중하면서 쓰는 순간에는 다소 격앙된 상태라 ˝아! 이 정도면 꽤 괜찮은 글이다˝라고 스스로 만족하더라도
양생의 기간이 지나면 그 글은 순간의 열정적인 거품이 쏙 빠져 마치 과한 화장을 지운 민낯처럼 앙상함을 드러내고 만다.
거울을 보며 차분히 내 얼굴에, 내 차림새에, 내 스타일에 어울리는 화장으로 다시 고치듯이 양생은 내 글을 누구보다 객관적으로 바라보게 만드는 신기한 마법이다.
비단 글쓰기만 국한되는 건 아니다.
인간관계-말하자면 사랑을 고백하거나 분노가 생겼을 때..또는 중요한 가치판단을 할때에는 양생의 슬기로움이 빛을 발할 것이다. 하루키 말마따나 이전과는 상당히 다른 느낌일테니.
《작품에 대한 판단은, 말할 것도 없이, 독자 한 사람 한 사람이 내립니다. 그리고 그 가치를 명확하게 판정해주는 것은 시간입니다.-169쪽》
독자 한사람 한사람이 모여 총체적 평가를 만들어 내고
생자필멸의 시간속에서 담금질이 된 이후라야 비로소
작품에 대한 진정한 평가가 이루어진다는 뜻일게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고전˝이 바로 여기에 해당된다.
작가는 당시의 시대적 상황이 내포하는 가치들을 쓰게 마련이다
반대로 동시대 사람들이 해당작품을 평가할 때는 작품이 말하고자 하는 복잡다단한 문제들을 그 시대가 지향하는 맞춤형 가치에만 끼워맞출려고 하는 편협한 실수를 저지른다.
이러한 오류를 최소화하려면 수많은 시간들을 작품의 낱장낱장에 통과시켜 인류 보편화된 가치들을 추출하는 작업을 거쳐야만 비로서 정당한, 아니 그나마 균형있는 판단을 할 수있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해본다.
그렇다고 해서 현 시대의 비평가나 독자들의 소소한 평가를 폄하하는 건 아니다.
각양각색의 흙들이 모여 서로 뒤섞여야만 거대한 지층을 이루니까 말이다.
《즉 현재 내가 서 있는 지점에서 세계를 바라보는 것뿐만이 아니라 조금 떨어진 다른 지점에서 세계를 바라보는 나 자신의 모습까지 나름대로 객관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는 게 가능해진 것입니다.(...) 독서를 통해 그것을 배운 것은 나에게는 큰 수확이었습니다.-225쪽
(...)
그리고 연인끼리, 남녀 그룹이, 혹은 부부가, 부모와 자식이, 내 책에 대해 열띤 대화를 나눠준다면 그보다 더 기쁜 일은 없겠지요. 소설이란, 스토리란, 남녀와 세대 간의 대립이나 그 밖에 다양한 스테레오타입의 대립을 누그러뜨리고 그 날카로운 칼끝을 완화하는 기능을 가진 것이라고 나는 항상 생각하기 때문입니다.-280쪽》
시야가 넓어져 객관적인 시선으로 세계를 바라볼 수 있다는 글쓰기의 장점은 사실 우려스럽게도 모두에게 해당되는 이야기가 아니라고 본다.
오히려 자기만의 지적영주가 되어버려 오만해지기도 하고,
남의 얘기를 듣지 않는 편협한 이가 되는 경우도 무수히 많다.
어쩌면 작가나 독서가들이 많이 쓰고 많이 읽었다는 이유만으로 도 책과 친하지 않은(?) 이들에게 때론 질투심어린 별종취급을 받고 있지 않나 하는 억울한 심정도 토로해본다.
한편으로는 위험한 발상중 하나로 아는 것이 많다고 시야가 넓어진다는 어처구니없는 얘기도 물론 아닐 것이다.
나도 책을 읽고 짧게나마 생각을 풀어쓰는 이유중 하나가 역설적이게도 타자의 입장에서 날 객관적으로 보고자 함이다.
이렇듯 소설이란건 내가 무수한 등장인물의 입장이 되어 때론 바닥의 비참함도 경험해보고 때론 상류층의 고뇌도 느껴보며
아주 다양한 군상들이 빚어내는 불협화음속에서 ˝공감˝의 힘을 축적해나가는 것이리라.
특히나 돈벌이 또는 성적향상의 자본주의적 효율성에만 치중하여 삶의 본질적인 가치를 잊어버리고 사는 불행한 가정들이 조금이나마 그 공감의 힘을 실천해나간다면,
˝행복한 삶˝이란 결코 난해한 철학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