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의 고쇼 그라운드
마키메 마나부 지음, 김소연 옮김 / 문예출판사 / 2025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때는 2025 늦여름, 잔여경기 일정을 소화하고 있는 9월이었다. 표제를 따라 8월에 읽었어야 했는데, 하는 아쉬움이 없진 않지만 아직 가을이 오기 전이라 우리팀의 시즌이 끝나지 않은 상황에서 '8월의 고쇼 그라운드'를 읽을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가을, 벌써 야구팬들 한숨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물론 우리팀은 가을에도 야구를 한다. 할 것이다. 안한다고는 하지 않았다, 그 가을이 어느 가을인지도 말하지 않았지만. 처음 '8월의 고쇼 그라운드' 소개를 읽다가 눈을 의심했다. "여름, 우리는 패자였고 그래서 더 빛났다." 무슨, 소리인지. 단체로 삭발이라도 하고 바로 훈련이라도 떠났나. 삭발. 패자라서 더 빛날 수 있는 방법은 그것 밖에 없다. 하지만 이건 우리팀일때 얘기고, 청춘들의 그라운드는 또 다른 방법으로 빛날지도 모른다. 비소식에 경기도, 순위 싸움도 잠시 소강된 지금 새로운 그라운드로 잠시 다녀왔다. 

 그라운드로 떠나기 전 가볍게 몸을 풀기 위한 이야기가 있었다. '역전'이라는 대회 이름은 처음 들어본 것 같은데, 설명을 보니 이어달리기나 다름 없었다. 한참 경기 내용을 흥미진진하게 보고 있는데 사카토가 왼쪽이라고 하는 순간 탄식이 나왔다. 이렇게까지 못찾는다고? 정신차려, 임마. 개인전도 아니고 단체 경기를 그런 식으로 할거야? 그 한마디를 기억 못 할 거라면 장갑으로라도 표시를 할 것이지, 미스터리고 뭐고 환장할 노릇이었다. 경기와는 별개로 사카토의 어리지만 순수한 마음과 사오리의 솔직한 마음이 교차되는 동안 귀엽고 한편으로는 안타깝기도 했는데, 때마침 나타난 아라가키 선수가 너무 멋있어서 또 탄식이 나왔다. 
" "사과보다, 네가 해야 할 일은 하나야."
"네?" 
"내년에 다시, 여기에 오는 거야. 네가 달리고, 저 친구도 데려오는 거야. 그리고 미야코오지를 함께 달리는거지. 그게 전부야." 74" 160년 전의 신센구미의 흔적조차 떠오르지 않을만큼 멋있는데 고등학교 2학년이라니, 청춘판타지가 여기에 그대로 담겨 있었다. 표제작보다 더 좋았다. 

 갑자기 달리기 이야기로 시작했기 때문에 번갈아 이어지는 두개의 연작인가 싶었는데, 그 뒤로는 쭉 야구이야기다. 사실 야구를 하긴 하지만 야구를 함께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에 더 중심이 맞춰져 있다. 게다가 갑자기 대학 졸업반 정도로 연령대가 올라가면서 반짝이는 청춘의 느낌보다 졸업을 앞둔 막 학년의 찌듦, 교수님의 야구 시합 아바타의 기운이 물씬 느껴져서 기대가 무너졌다. 대학-사회인 야구말고 고시엔 가는 반짝반짝 열정 청춘 야구물로 다시 끓여오시라. 거기에 샤오 씨의 등장과 에이짱의 영입으로 달아오른 승부마저 한순간 싸늘하게 가라앉을만한 '가설과 검증'이 드러나면서 이야기가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되는데, 이 문제 역시 이쪽 입장에선 여러 생각이 들게 만든다. 야구 이야기를 더 기대하긴 했지만 마라톤 경기가 속도감이나 등장 인물들이 더 인상적인 면이 많아서 재밌었다. 

 '기묘하고 찬란한 청춘 판타지'라는 표현이 그대로 잘 어울리는 내용이었다. 일본의 한 도시를 배경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여행을 다녀온 적 있는 독자라면 좀 더 현장감을 느끼며 읽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아쉽게도 교토에 다녀온 적이 없어 지도를 보면서도, 지역에 대한 묘사를 읽으면서도 구체적으로 장소를 떠올릴 수 없어 아쉬웠다. 가벼운 스포츠와 미스터리를 곁들인 소설로 속도감있게 잘 읽히는 편이니 경기가 없는 날, 잠시 머리를 식히고 싶은 날 부담없이 읽을 수 있는 책이다. 여름이 지나기 전에 마지막으로 계절과 함께 즐겨볼만한 시즌책이니 9월 한낮의 더위가 다 꺾이기 전에 '8월의 고쇼 그라운드'를 만나보자.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오늘도 이혼주례를 했습니다 - 가정법원 부장판사의 이혼법정 이야기
정현숙 지음 / 푸른향기 / 2024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 인생에서 가장 열정적으로 서로를 아끼며 사랑해야 할 그때보다 상대방이 더 좋은 사람으로 변화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는 것은 누구나 알 수 있는 진리에 가까운 사실인데, 웬일인지 희한하게 그 중요한 시점에서 많은 사람이 눈을 감고 생각하기를 멈추어버립니다. 15"

 요즘 이혼은 결혼보다 흔해서 흠도 아니라는 말을 자주 듣는다. 이혼과 관련된 소재로 방영되는 텔레비전 프로그램도 흔하다. 흔하고 흠도 아닐지라도 그 과정은 분명 순탄하지도 괜찮지도 않았을 것이다. 이 책을 '더 행복한 부부생활을 원하는 부부와, 언젠가 부부가 될 사람들'에게 권한다는 표지 문구를 보며 한동안 궁금했다. 왜 이런 사람들에게 이 책을 권하는 것일까, 하고. 이혼과 관련된 내용들이 이어질텐데, 타인의 불행을 보며 자신의 상황을 비교해보라는 것일까? 결혼생활의 가장 어두운 부분을 보여주며 각오를 다지라는 것일까? 어느 쪽도 좋게 느껴지지 않았다. 거기다 책을 읽는 초반, 판사의 입장이 어느 한 쪽으로 기울어져 있는 듯한 느낌을 받을 때나, 혼인 관계를 유지하려는 쪽의 입장에 서려고 하는 상황을 볼 때 마음이 불편했다. 

 " 결혼한 남자가 아내 이외의 다른 여자와 부정행위를 한 것은 너무나 잘못된 행동임이 분명합니다. 평생 아내에게 속죄하는 마음으로 살아야 하는 큰 잘못입니다. 그것과는 별개로 판사의 눈에 보이는 남편의 속마음이 아내에게는 전혀 보이지가 않는 듯해 안타까웠습니다. 분명 쉽지는 않겠지만 한 번 쯤 용서해 주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들면서 애꿎은 카카오톡이 원망스럽기까지 했습니다. 80"

 특히 이런 내용을 볼 때, 생각의 결이 다른 부분이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저자는 어차피 남편은 가정으로 돌아올 것인데, 이혼을 해버리면 그 자리를 상간녀가 꿰차고 들어와 아내만 손해일 것이라며 상간녀가 최종 승리자가 되었다며 안타까워 했다. 하지만 내 생각은 이 상간녀와의 관계가 끝나면 또 다른 여자와 바람을 필 것이고 아내의 고통은 반복될 것이라 여겨졌다. 게다가 이미 신뢰가 무너지고 함께 있을수록 고통스러운 사람과 누가 이기고 지는 기싸움으로 버티고 살아보았자 마음이 괴로운 시간만 지나지 보상은 될 것 같지 않았다. 이렇게 생각이 다르다보니 불편함을 느끼던 부분에서 왜 법대로 하지 않지, 왜 참고 조정하라고 하지 궁금해하다 보니 처음엔 답답하기만 했다가 점차 내가 그동안 너무 사이다적인 해결 방안만 쫓았던 것은 아닐까 생각해보게 되었다. 

 이혼 사건들을 다루고 있다보니 부부 두 사람의 상황도 다루고 있지만 그들이 꾸린 가정의 자녀들 양육 문제도 심심치 않게 등장한다. 이런 내용들은 부모 모두 양육을 거부하여 상대방에게 양육을 떠넘기기 위해 버리다시피 두고 가거나, 심각한 폭력을 가한 학대 사건마저 있어 읽기 조차 안타깝고 괴로운 일들이 많아 한동안 덮어두고 말았던 부분도 있었다. 일로 사건을 접하더라도 타인의 일일 뿐이라고 거리를 두더라도 이런 괴로운 갈등의 면면을 살피며 지낸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그저 몇몇 사건이 마음을 어지럽히고 마는 동안 얼마나 많고 다양한, 차마 글로도 풀어내지 못할 사연들을 봐왔을까 생각이 미치니 다르게 보였던 면이 달리 보이기 시작했다. 저자가 그럼에도 '포기하지 말라'고 말하기 위해, 법리적으로 가장 최선의 답안을 내어주어야 한다는 판단이 때로는 나와 다른 생각을 만들어냈던 것은 아닐까, 읽으며 천천히 이해의 폭을 넓혀갔다.  

 타인의 감정과 주변 환경은 분명 사람에게 영향을 준다. 그것이 그 사람의 모든 것을 구성하거나, 구속하는 것은 아니지만 적게는 그때의 기분, 크게는 가치관에도 영향을 줄 수 있다. 그 생각을 하기 전까지 이혼 사건을 판결하는 판사가 무엇을 느끼고 생각할지 염두에 두지 않았었다. 이혼을 하는 사람들과 그들의 사정은 주위에서 찾아볼 수 있지만, 가정법원에서 이혼주례를 하는 판사의 사정을 들어볼 경우가 주위에 좀처럼 없었기 때문에 이상하게도 판사의 존재는 마치 NPC*처럼 여겼다. 하지만 '오늘도 이혼주례를 했습니다'의 저자는 첫 판결을 내리기 전에 어떻게 해야 할지 수없이 고민했고, 내리고 나서는 허무함과 충격을 느꼈다고 한다. 누구보다 사랑과 가정의 종말을 가까이에서 바라봐야 했을 '사람'이 거기 있었다. 그 사람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일 수 있는 시간이었다.  

*‘Non-Player Character’의 약자로, 비디오 게임에서 플레이어가 직접 조종하지 않는 캐릭터를 의미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대전환
앨러스테어 레이놀즈 지음, 이동윤 옮김 / 푸른숲 / 2025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당신도 거기 있었고, 나도 거기 있었고, 다른 사람들도 거기 있었지만,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었습니다." 222 

 읽는 동안 손에 쥐었다고 생각했던 티켓이 이게 맞았는지 몇번이나 생각해보게 만들었다. 책을 읽기 전에 나도 책을 읽고 나서 다음 탑승자들을 유혹할 수 있는 세이렌이 되어 보겠다 했는데, 그게 복선이었을까. 우주로 나갈 것이라 생각했는데, 탑승하고 보니 배였다. 어긋나는 디테일과 어딘지 모르게 찜찜한 대화들 속에서 성격이 급한 사람은 책장이 느리게 넘어가는 것만 같아 조급했다. 이게 넷플릭스라면 배속을 했을텐데, 궁금한 마음을 읽는 속도가 따라가지 못해 원통했다. 먼저 '대전환'을 읽은 사람들의 후기를 보면서 정말, 그렇게 재밌다고? 싶었는데 흐름의 '대전환'을 맞이하는 순간부터 정말, 그렇게 재밌어졌다. 

 "이번에는 그 때문에 죽을 것 같지 않습니다." 155 

 세계의 균열을 몇번이나 반복하는 동안 기묘한 불쾌감이 신경을 자극한다. 처음엔 타임리프 장르일거라 생각했는데, 게임 속 가상 현실인가 싶기도 했다. 게임을 많이 해보지 못해서 잘 모르지만 이야기 흐름이 있고 캐릭터가 퀘스트를 따르며 엔딩을 깨는 류의 게임에선 자유도에 따라 멀티 엔딩을 볼 수 있는 게임이 있는데, '캐릭터-사일러스'가 죽으면 새로 이야기가 반복되면서 진 엔딩을 향해 전개되는 것이 비슷하게 느껴졌다. 그도 아니라면 여러번 반복되며 업을 끊어야만 벗어날 수 있는 삶의 윤회인가 싶기도 했다. 한명씩 같은 것을 느끼는 인물을 골라내고, 단어 하나가 다르게 쓰인 대사를 골라내면서 이들의 차이점이 뭘까, 구조물과 반복 사이에는 대체 어떤 연결점이 있는 것일까 파고들면 파고들수록 궁금했다. 

 이 세계의 반복과 변주는 멀티버스 세계관을 보여주는 영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를 떠올리게 한다. 각기 다른 멀티버스에 존재하는 사일러스들의 파멸을 지켜보다, 세계의 '균열'과 함께 느껴지는 위화감이 다층구조가 아닌 [매트릭스]**의 가상현실 속에 있는 것 같은 의심을 품게 한다. 사일러스를 끊임없이 자극하는 불편함-코실과 위화감-라모스의 존재가 무의식을 일깨우며 독자를 향해 메시지를 보내오는 것도 같다. 이 반복은 무엇을 위한 장치일까? 진실로 인도하기 위해서? 진실을 가리기 위해서? 진실을 파헤쳐가는 항로 위에서 독자는 진실 그 자체를 의심한다. 같은 것을 보고도 우리는 다르게 해석한다. 내가 보는 것과 남이 보는 것이 반드시-대부분 일치하지 않는다. 진실은 그대로이지만 진실을 해석하는 시선에 따라 달라진다. 다만 같은 것을 보고 있다는 믿음-합의가 이 왜곡을 왜곡하여 같게 만든다. 심지어 요즘 사용하기 시작하는 챗gpt의 인공지능마저 자신의 빈 공간을 채우기 위해 거짓 정보***를 섞는다. 대전환 안에는 그런 오류와 오작동이 들어있다. 그리고 책에서 주는 정보를 독자가 해석하는 동안 같은 일이 다시 발생한다. 

 내용을 잘 모르고 읽을수록 재미가 보장되리라 확언할 수 있는 것이, 우주선 티켓인줄 알았는데 타고보니 배여서 어리둥절했다가 '아!'하는 순간부터 싸악 도파민이 돌았다. 이게 무슨 말인가 싶어지는 사람은 바로 그 마음 그대로 '대전환'을 읽어보길 바란다. 바라기로는 반드시 영화로 만들어졌으면 좋겠는 영화 2025년 선정 세 손가락 안에 꼽는다. 이 내용을 영화로 만들지 않으면 대체 무슨 작품을 원작으로 삼아 영화를 만들겠는가. 탄탄한 스토리에 영상으로 만들었을때 매력이 더욱 살아날 상황들이 많고 한국인 관객들이 좋아할만한 요소가 가득이라, 이건 된다 싶은데 책표지에 영화화 관련 문구가 없어서 오늘부터 영화화 확정되길 기도 시작하기로 했다. 같이 기도할 파티원 구합니다. 자세한 내용은 말 못하니 빨리 '대전환'하시길.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Everything Everywhere All at Once, 2022
**매트릭스 The Matrix, 1999
***인공지능 환각 AI Hallucination 인공지능이 실제 데이터나 사실에 근거하지 않는 정보를 생성, 제공하는 현상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말뚝들 - 제30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
김홍 지음 / 한겨레출판 / 2025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바다에서 도시로, 도시에서 내 앞으로 말뚝이 왔다" 

 처음 '말뚝들'에 대한 짧은 소개를 보고 이토 준지의 '속박인'*을 떠올린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속박인'은 어느날부터 각지에서 움직이지 않고 똑같은 자세로 계속 서 있는 사람들이 곳곳에서 발견되며 시작한다. 말하지도 먹지도 않고 같은 장소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속박인'들이 왜 생기는지 정확한 이유가 밝혀지지 않은 채 점점 몸이 굳어 끝내 부서져가는 기묘한 이야기를 그려냈다. '말뚝들'의 불가사의한 발생은 이 '속박인'의 등장을 떠올리게 만드는데 이 말뚝들은 이동한다,는 차이점이 있긴 하다. 속박인이 발생하는 이유와 말뚝들이 등장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밝혀지는 것이 두 작품의 핵심인데 어떤점이 다를까 궁금했다. 괴이한 그림과 내용에 거부감이 없고 '말뚝들'이 흥미로웠다면 '속박인'도 읽어보면 좋을 것이다.

 어쨌든 어떤 내용인지, 어떤 점이 다른지 호기심이 생기는 바람에 한번 훑어본다는 것이 단숨에 그대로 끝까지 다 읽게 되었다. 사건 전개가 빠르고, 곳곳에 특유의 유머 감각을 배치해놓아 이 다음 상황이 어떻게 되는지만 봐야지, 하고 웃으면서 읽다가 정신을 차려보니 책을 다 읽은 채로 시간이 훌쩍 지나있었다. 납치, 불가사의한 말뚝들의 등장, 엉망으로 돌아가는 회사생활, 친구의 죽음, 좁혀오는 수사망 등 사건들이 주인공 장을 화려하게 휘감아 전개된다. 장만 보더라도 작가가 평범한 직장인의 삶을 녹록치 않게 만드는데 재주가 있구나 싶은데, 그냥 잠깐 살펴보려던 사람마저 늦은 시간까지 책을 붙잡고 있게 만드는 것을 보니 독자의 다음날도 몹시 피곤하게 만든다. 그러니 시작할 때 시간을 여유있게 잡아두고 읽어야한다. 

 말뚝이 언제 나올까 어떤 의미일까 조금만 보려다가 갑자기 자동차 트렁크에 실려 납치되는 장을 보는 순간, 자신이 왜 납치되었는가 합리적인 생각을 몇 가지나 떠올리는 이 평범한 직장인이 겪을 수 있는 규모의 사건이 맞나 얼이 빠졌다. 동시에 요즘같이 더운 때에 갇혔다면 꼼짝없이 주인공이 죽고 '말뚝들'은 들까지도 가지 못하고 말뚝에서 그친 단편으로 마감했겠다 싶었다. 하지만 우리의 주인공은 무사히 풀려나게 되었고, 다시 평범하게 직장으로 돌아가 급작스러운 무단 결근의 사유를 '납치'로 보고하게 된다. 처음엔 그래도 출근이 계속되는 것을 보고 직장인의 찐광기라 생각했는데, 평일에 납치된 직장인이라면 출근 걱정을 안했을리 없으니 K직장인의 삶을 현실적으로 담아내 웃펐다. 

 거기에 더해 회사 동료인 아정씨가 우동집에서 밥 먹자더니 갑자기 개인사를 털어놓는 것도 당황스러운데, 그 내용이 심지어 불륜 고백이고, 상대방을 밝힐 수 없어 남편에게는 장이라고 거짓말했다며 아니라고 해봤자 소용없을거라 말하는 내용에서는 잠시 사고가 멈췄다. 아침드라마 급 전개가 아닌가. 그와중에 전아정씨네 족보가 양반은 되려나 헤아리는 장도 어이없었는데, 애먼 사람에게 상간남 혐의를 뒤집어씌우는 인성이라면 아정씨의 족보는 6두품은 커녕 불가촉천민이라 해도 될 법하지 않은가. 아정씨는 무슨 그런 머리채 잡힐 말을 자가제면 우동 면발 들어올릴때 하시니? 투덜거리다 그래도 우동은 맛있었다는 장의 말은 또 입이 벌어졌다. 그래, 어이가 없는 거지 입맛이 없는 건 아니니까. 내용이 자극적이라 우동은 간도 필요 없을 것 같았다.

 어찌되었든 장의 매콤한 일상에서 다시 그 문제의 말뚝으로 돌아가자면 어느 날 뉴스에 보도된 서해안의 말뚝들부터(25), 부천 시장 한복판에(120), 광화문에(131), 사무실 빌딩 로비에(158), 베란다 창문 앞에(169), 심지어 호텔 프런트까지 쫓아오는 말뚝(179)까지, 말뚝은 계속해서 발견된다. 사람들은 말뚝 앞에서 자신도 모르게 눈물을 흘리게 되는데, 이 눈물의 의미를 헤아리다 보면 어쩐지 친숙하고 안타까운 얼굴을 닮은 말뚝을 나도 떠올리게 된다. 어쩌면 우리 삶에서 가슴에 말뚝처럼 박혀들어간 누군가가, 순간이, 하나씩은 있기 때문에 말뚝 앞에서 자신도 모르게 눈물을 흘리게 되는 것이 아닐까. 재미 안에 슥 밀어넣은 숨겨진 말뚝의 의미와 진실을 밝힐 수는 없으나 이 책 안에 준비되어 있으니 꼭 만나보길 바란다. 

 매콤짜릿한 현실을 제대로 담아낸 '말뚝들'은 30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으로 선정되었는데, 웃음과 의미를 모두 잡아낸 작품임에 공감했다. 특히 인상적이었던 장치는 현실의 인물들을 소설속에 갑자기 등장시켜 환상의 경계를 넘나들며 의외성과 재미를 준다는 것이다. 우동집 백종원(166)의 등장이나, 파일즈(말뚝들) 때문에 취소된 데이식스 콘서트(174), 무한도전이 방송되던 시절을 그리워하는 내용은 너무 현실적이라 진짜 장이란 사람이 존재하고 있나 주위를 두리번거리게 만든다. 반대로 움직이는 말뚝을 생각하면 그럴 일 없다는 현실을 자각하게 되지만. 사진 찍을 때 나도 모르게 브이를 해버리는 탓에 제대로 긁힌 구린 독자(249)도 몰입해 순식간에 마지막 장까지 달려가게 만들어버리는 매력 넘치는 파란만장 미스터리 활극, 장편인줄 알았는데 읽다보면 단편같은 장편 '말뚝들'을 추천한다. 재미와 감동을 가지고 독자앞에 '말뚝들'처럼 나타나 다가올 것이다.


*이토 준지 <어둠의 목소리> 2004 시공사.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창문 너머 예술 - 창을 품은 그림, 나를 비춘 풍경에 대하여
박소현 지음 / 문예춘추사 / 2025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 작은 창문으로 본 세상은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 와닿지 않는다. 나이가 들수록 창문은 커지고, 시야도 넓어진다. 예전에 보이지 않던 것들이 점점 눈에 들어오면서 내가 경험한 세상보다 더 큰 세상이 있음을 감지하게 된다. 마침내 창문 너머에서 벗어나 진짜 세상으로 걸어 나가면, 이 방대한 세상에서 자신이 얼마나 아무것도 아니었는지 깨닫게 된다. 모든 것들에 그저 감사한 마음만 남는다. 170" 

 어릴 적 살던 주택의 창문은 이런저런 스티커를 붙여놓아 빛이 비스듬히 들어오는 어느 오후면 알록달록한 색이 방바닥에 번져나가곤 했다. 요즘식으로 말하면 창꾸를 했던 셈이다. 그렇게 꾸며진 창문틀은 겨울이 되면 나만의 냉장고가 되곤 했다. 창틀에 올려두어 차가워진 커피우유나 탄산음료를 따뜻한 방에서 바로 꺼내 마시는 것이 좋아 덜 닫힌 겉창으로 찬바람이 새어들어오는 것도 몰랐다. 특히 방에서 나와 부엌 냉장고까지 가지 않아도 된다는 점이 좋았다.
 지금 사는 집을 보러 왔을때 바깥에서 이리저리 둘러보며 확인했던 것이 창을 통해 집안이 얼마나 잘 들여다보이는가 였다. 불 켜진 집 안은 웬만한 고층이 아니고서야 밖을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의외로 훤히 들여다보이기 때문에 어떻게 조심해서 생활해야 할지 확인해보고 싶었다. 창 밖의 시선이 덜 신경쓰이는 낮에는 반대로 블라인드를 열어두고 창 안에서 밖을 바라보곤 하는데 그때 보이는 풍경이 마치 그림같단 생각을 종종 하곤 한다.
 이렇듯 창을 의식하고 있었던 오래된 기억들과 일상의 순간들이 모여, 어디에든 철학이나 예술이란 말이 붙으면 괜히 더 궁금하고 알고 싶어지는 마음과 얽힌 덕분에 '창문 너머 예술'이란 제목이 한눈에 들어왔다. 

 혹시나 어렵거나 낯선 작품들을 만나게 될까 싶었는데, 금방 샤갈의 그림을 발견하고 그 친숙함에 반가움을 느끼며 시작할 수 있었다. 특히 그가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억압을 받으며 러시아에서 파리로, 파리에서 미국으로 이동할 수 밖에 없었던 상황들을 얼마 전에 읽었던 '여행 면허(패트릭 빅스비 저)'라는 책에서 상세히 봤었기 때문에 그 기억이 되살아 나 도움이 되었다. 더불어 요즘 한가람 미술관에서 샤갈의 특별전*도 진행하고 있으니 '창문 너머 예술'을 인상깊게 본 독자라면 발걸음을 옮길 곳이 분명해질 것이다. 

   " 마티스는 아멜리의 초상화도 여러 번 그렸지만 한 번도 그녀의 마음에 들게 그린 적이 없었다. 자신의 본모습보다도 못하게 묘사되는 초상화를 보면서 어쩌면 남편이 자신을 아름답게 여기지 않거나, 혹은 사랑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은 당연하지 않을까. 78" 

 사진을 잘 찍는 법에 대해 말할 때 대상을 이해하고 사랑하는 마음을 꼽는다. 물론 기술과 타고난 미감, 마땅한 순간을 찾는 인내같은 점들도 중요하겠지만 애정을 바탕으로 대상의 장점을 끌어내야 함을 강조하는 가르침은 잘 알려져있다. 현대의 사진처럼 과거 그림으로 대상을 표현하던 때에도 비슷한 요소들이 필요하지 않았을까. 남편이 그린 자신의 초상화를 보고 애정을 의심하던 아멜리의 마음이 짐작된다.
 고등학교 시절 미술 시간 두명이 짝을 지어 상대방의 얼굴을 그리는 실기 과제가 있었다. 내 짝은 그리 친하지 않았지만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귀여운 미인이었는데, 그 애의 얼굴을 최대한 비슷하게 그려냈더니 '지나치게 예쁘게 그렸다'는 이유로 그리 좋은 점수를 받지 못했다. 그 애를 예쁘다고 생각했고, 실제로도 예쁜 모델이었는데 예쁜애를 예쁘게 그렸다는 이유로 점수가 깎였던 것이 꽤 분했던 앙금이 있다.
 점수야 어찌되었든 그 애는 자신을 그린 그림을 마음에 들어했었고, 고마워했었다. 그 애의 이름은 잊었어도 그때 그림을 그리기 위해 유심히 바라보았던 그 얼굴만은 아직도 기억이 난다. 마티스 역시 아멜리와의 불화, 사소한 다툼들은 시간이 지나 잊었어도 그녀를 그리며 바라봤던 얼굴, 그 날의 공간들은 계속해서 기억하지 않았을까. 예쁘게 그렸다고 점수를 깎일 일도 없는데 왜 굳이 아내의 얼굴을 실물보다 더 못나게 그렸는지 그 마음은 모르겠지만. 

 '창문 너머 예술'은 저자의 일상과 다양한 생각들이 작품과 엮여 마치 일기를 보는 듯한 느낌을 받을 때도 있다. 그림과 예술작품에 대한 설명만이 주를 이루는 형식이 아니고 방송과 관련된 일을 해온 사람이라 SNS와 유명인, 대중들과 관련된 생각을 담아낸 내용들도 자주 등장한다. 어떤 문장에선 적지 않은 압박감과 괴로움이 아직도 풀어지지 않은 채 고스란히 묻어나는 듯해 많은 생각이 오갔다. 
 
 " 누군지도 모르는 존재들에 휘둘려 내 마음을 감옥으로 만드는 것이야말로 정말 어리석은 일이다. 그러나 우리는 제 발로 그 감옥에 들어가기도 하고, 몇 글자의 댓글로 누군가를 그 감옥으로 보내 버리기도 한다. 의도가 의심스러운 한심한 댓글을 보며 비웃다가도, 다른 사람들도 이렇게 생각하고 있구나 싶은 마음에 우쭐해지기도 한다. ...중략... 가감 없이 감정을 표출하는 사람들은 상처 따위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 투사처럼 보인다. 위로받으려고 올린 글에도 돌을 던지는 사람들, 누군가를 흠집 내려고 올린 글에 신나서 몰려드는 사람들, 그런 에너지는 어디서 나오는 건지, 그걸 읽는 나도 있긴 하지만. 누군지 모르는 존재들에 끊임없이 휩쓸린다. 가끔은 나도 그들과 우르르 몰려다니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섬뜩하다. 39" 

 " 우리는 매일 핸드폰을 들여다보며 세상과 소통한다고 믿지만, 그 안에만 머물기에 세상으로부터 고립되어 온 셈이다. 59" 

 아무런 이름도 대단한 방문자들도 없는, 별 볼일 없이 소소한 나의 SNS에도 본인의 오해로 굳이 무례하고 원색적인 말을 남겨두는 사람이 간혹 있다. 하물며 더 많이 불특정한 타인에게 노출되고, 관심에 기민히 반응 해야하는 이런 유명인들은 또 얼마나 고단한 일들을 겪었을까 싶었다. 요가(145)를 통해 자신의 몸을 일깨우고, 그림을 보고 글을 쓰는 시간을 통해 내면을 살펴보며 채워온 시간들이 책에 함께 녹아있어 공감하며 읽었다.  

 책에서 소개된 수많은 작품들 중 가장 마음에 남은 작품은 빌헬름 하메르스회의 <햇살에 춤추는 먼지 티클>이란 그림(105)이다. 왜 이 그림이었을까 생각해보니 책을 읽는 동안 반복된 '우리는 어떤 공간을 꿈꾸는가? (180)', '"어떤 풍경을 마음속에 품고 살아가는가?"라고 하이데거가 물었다. (177)'는 질문에 대한 답을 염두에 두고 있었던 듯 하다. 아무것도 없는 공간, 물건들로 차있지 않은 넓고  조용한 공간에 대한 바람이 투영된 끌림이었다.
 <햇살에 춤추는 먼지 티클>은 그저 창과 창을 통해서 들어오는 빛이 그려진 그림인데, 사실적인 빛에 대한 묘사도 좋았지만 그 공간이 비어있다는 점이 마음을 편안하게 해준다. 그가 표현한 다른 실내 공간들도 정적이고 정갈한 것을 보면, 미니멀리스트의 삶을 추구했는지 모르겠다. 또다른 작품인 <달빛, 스트렝게제 30번지>는 햇살이 들어오던 창의 그림과 같은 공간을 두고 시간적 배경이 달라진 것만으로도 한층 무거운 분위기를 자아내는데, 다른 인상으로 공간의 감상을 변주하는 점이 재밌다.   

 '창문 너머 예술'은 하나의 주제를 가지고 다양한 작품들을 만나볼 수 있는 내용이어서 흥미롭게 읽을 수 있다. 예술 작품과 예술가에 대해, 그리고 저자의 생활까지 함께 녹아들어간 글이라 부담없이 감상을 나눌 수 있는 책이다. 예술이란 말에 거리감이 느껴져 망설이던 독자라도, 그저 어느 날 블라인드를 걷어 창문 밖을 바라보듯 일상적이고 자연스러운 시선으로 책장 안의 예술 작품들을 넘겨 보아도 좋겠다. 


*마르크 샤갈 특별전: BEYOND TIME 5월 23일(금) ~ 9월 21일(일) 한가람미술관 제1,2전시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