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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뚝들 - 제30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
김홍 지음 / 한겨레출판 / 2025년 8월
평점 :
"바다에서 도시로, 도시에서 내 앞으로 말뚝이 왔다"
처음 '말뚝들'에 대한 짧은 소개를 보고 이토 준지의 '속박인'*을 떠올린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속박인'은 어느날부터 각지에서 움직이지 않고 똑같은 자세로 계속 서 있는 사람들이 곳곳에서 발견되며 시작한다. 말하지도 먹지도 않고 같은 장소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속박인'들이 왜 생기는지 정확한 이유가 밝혀지지 않은 채 점점 몸이 굳어 끝내 부서져가는 기묘한 이야기를 그려냈다. '말뚝들'의 불가사의한 발생은 이 '속박인'의 등장을 떠올리게 만드는데 이 말뚝들은 이동한다,는 차이점이 있긴 하다. 속박인이 발생하는 이유와 말뚝들이 등장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밝혀지는 것이 두 작품의 핵심인데 어떤점이 다를까 궁금했다. 괴이한 그림과 내용에 거부감이 없고 '말뚝들'이 흥미로웠다면 '속박인'도 읽어보면 좋을 것이다.
어쨌든 어떤 내용인지, 어떤 점이 다른지 호기심이 생기는 바람에 한번 훑어본다는 것이 단숨에 그대로 끝까지 다 읽게 되었다. 사건 전개가 빠르고, 곳곳에 특유의 유머 감각을 배치해놓아 이 다음 상황이 어떻게 되는지만 봐야지, 하고 웃으면서 읽다가 정신을 차려보니 책을 다 읽은 채로 시간이 훌쩍 지나있었다. 납치, 불가사의한 말뚝들의 등장, 엉망으로 돌아가는 회사생활, 친구의 죽음, 좁혀오는 수사망 등 사건들이 주인공 장을 화려하게 휘감아 전개된다. 장만 보더라도 작가가 평범한 직장인의 삶을 녹록치 않게 만드는데 재주가 있구나 싶은데, 그냥 잠깐 살펴보려던 사람마저 늦은 시간까지 책을 붙잡고 있게 만드는 것을 보니 독자의 다음날도 몹시 피곤하게 만든다. 그러니 시작할 때 시간을 여유있게 잡아두고 읽어야한다.
말뚝이 언제 나올까 어떤 의미일까 조금만 보려다가 갑자기 자동차 트렁크에 실려 납치되는 장을 보는 순간, 자신이 왜 납치되었는가 합리적인 생각을 몇 가지나 떠올리는 이 평범한 직장인이 겪을 수 있는 규모의 사건이 맞나 얼이 빠졌다. 동시에 요즘같이 더운 때에 갇혔다면 꼼짝없이 주인공이 죽고 '말뚝들'은 들까지도 가지 못하고 말뚝에서 그친 단편으로 마감했겠다 싶었다. 하지만 우리의 주인공은 무사히 풀려나게 되었고, 다시 평범하게 직장으로 돌아가 급작스러운 무단 결근의 사유를 '납치'로 보고하게 된다. 처음엔 그래도 출근이 계속되는 것을 보고 직장인의 찐광기라 생각했는데, 평일에 납치된 직장인이라면 출근 걱정을 안했을리 없으니 K직장인의 삶을 현실적으로 담아내 웃펐다.
거기에 더해 회사 동료인 아정씨가 우동집에서 밥 먹자더니 갑자기 개인사를 털어놓는 것도 당황스러운데, 그 내용이 심지어 불륜 고백이고, 상대방을 밝힐 수 없어 남편에게는 장이라고 거짓말했다며 아니라고 해봤자 소용없을거라 말하는 내용에서는 잠시 사고가 멈췄다. 아침드라마 급 전개가 아닌가. 그와중에 전아정씨네 족보가 양반은 되려나 헤아리는 장도 어이없었는데, 애먼 사람에게 상간남 혐의를 뒤집어씌우는 인성이라면 아정씨의 족보는 6두품은 커녕 불가촉천민이라 해도 될 법하지 않은가. 아정씨는 무슨 그런 머리채 잡힐 말을 자가제면 우동 면발 들어올릴때 하시니? 투덜거리다 그래도 우동은 맛있었다는 장의 말은 또 입이 벌어졌다. 그래, 어이가 없는 거지 입맛이 없는 건 아니니까. 내용이 자극적이라 우동은 간도 필요 없을 것 같았다.
어찌되었든 장의 매콤한 일상에서 다시 그 문제의 말뚝으로 돌아가자면 어느 날 뉴스에 보도된 서해안의 말뚝들부터(25), 부천 시장 한복판에(120), 광화문에(131), 사무실 빌딩 로비에(158), 베란다 창문 앞에(169), 심지어 호텔 프런트까지 쫓아오는 말뚝(179)까지, 말뚝은 계속해서 발견된다. 사람들은 말뚝 앞에서 자신도 모르게 눈물을 흘리게 되는데, 이 눈물의 의미를 헤아리다 보면 어쩐지 친숙하고 안타까운 얼굴을 닮은 말뚝을 나도 떠올리게 된다. 어쩌면 우리 삶에서 가슴에 말뚝처럼 박혀들어간 누군가가, 순간이, 하나씩은 있기 때문에 말뚝 앞에서 자신도 모르게 눈물을 흘리게 되는 것이 아닐까. 재미 안에 슥 밀어넣은 숨겨진 말뚝의 의미와 진실을 밝힐 수는 없으나 이 책 안에 준비되어 있으니 꼭 만나보길 바란다.
매콤짜릿한 현실을 제대로 담아낸 '말뚝들'은 30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으로 선정되었는데, 웃음과 의미를 모두 잡아낸 작품임에 공감했다. 특히 인상적이었던 장치는 현실의 인물들을 소설속에 갑자기 등장시켜 환상의 경계를 넘나들며 의외성과 재미를 준다는 것이다. 우동집 백종원(166)의 등장이나, 파일즈(말뚝들) 때문에 취소된 데이식스 콘서트(174), 무한도전이 방송되던 시절을 그리워하는 내용은 너무 현실적이라 진짜 장이란 사람이 존재하고 있나 주위를 두리번거리게 만든다. 반대로 움직이는 말뚝을 생각하면 그럴 일 없다는 현실을 자각하게 되지만. 사진 찍을 때 나도 모르게 브이를 해버리는 탓에 제대로 긁힌 구린 독자(249)도 몰입해 순식간에 마지막 장까지 달려가게 만들어버리는 매력 넘치는 파란만장 미스터리 활극, 장편인줄 알았는데 읽다보면 단편같은 장편 '말뚝들'을 추천한다. 재미와 감동을 가지고 독자앞에 '말뚝들'처럼 나타나 다가올 것이다.
*이토 준지 <어둠의 목소리> 2004 시공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