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션 블루스 ㅣ B사이드 아카이브 1
슬리만 카데르 지음, 이수원 옮김 / 니케북스 / 2026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아, 바로 이런 이야기였구나. 

" 하지만 난 뒤로 물러서지 않았어. 언젠가는 하늘과 새, 그리고 엄마를 다시 볼 수 있을 거란 희망을 간직하고 있었으니까. 진짜로! 81" 

솔직히 말해 배꼽 빠지게 웃기진 않는다. 아마 프랑스 식 유머가 일일이 약간의 해석을 붙여서 전달되어야만 했기 때문일 것이다. 유명한 인물이나, 지역, 비슷한 발음 같은 것들을 이용한 말장난들은 바로 알아채서 이해한다면 재미를 느끼지만 (발음이 비슷한 점을 이용한 농담) 이런 식으로 설명을 통해서 읽게 되면 웃을 수 있을만한 포인트를 잃어버리고 전달되기 때문이다. 좀 아쉽긴 하지만 왐은 상당히 정신사납고 수다스러운 주인공이기 때문에 그가 풀어내는 이야기를 따라가는 것만으로도 금새 바쁘다. 

자신이 어디에서 어떤 위치에 있던 일단 뭐든지 하고, 또 한번쯤은 배에 힘을 주고 앞으로 나서봐야 뭔가를 손에 쥘 수 있다는 걸 왐이 증명한다. 처음 영어를 할 줄 모르면서 덮어놓고 '예스, 예스'할 때부터, 아 주인공이라고 믿고 보기에 좀 찝찝한 느낌인데? 싶다가도 가진 능력도 없이 말도 통하지 않으면서 유람선 '오션킹'을 타기로 결정한 배짱과 자신이 꽤나 매력있다고 믿는 밑도 끝도 없는 자신감이 흥미를 끌었다. 그리고 왐과 함께 유람선에 오르자마자 바보같고 어리석은 언행만 보이는 그의 트롤력에 붙여보지도 못한 정이 다 떨어지는 기분을 맛본다. 

여권 숨기기, 여자와 눈만 마주쳐도 착각하거나 느끼하게 굴기, 작업복 투정부리기, 작업시간 펑크내고 자기, 근무 빠지고 식당가기 같은 일들을 단기간에 해치우면서 한국인을 답답하게 만든다. 겉으로는 쎈 척하며 허세를 부리지만 속으로 진땀을 흘리고 때로는 남몰래 눈물마저 흘리다 잠드는 온갖 찌질한 모습을 다 보고 있자면, 얘는 그냥 여권 돌려주고 '오션킹'에서 그냥 쫓아내는게 나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관리자 뽀빠이의 밀착 관리를 통해 시키면 모든 일을 다 해치우는 어엿한 '조커'가 되어가는 왐의 성장을 보다보면 왠지모를 기특함을 느끼게 된다. 

대체 이 정신사나운 사람의 이야기가 언제 웃겨지지? 얘 때문에 나도 유람선 가장 밑바닥 칸에서 50리터 쓰레기 봉투 세 개를 가득 채울만큼 많은 바퀴벌레가 드글거리는 열악함을 강제 체험하고 있는데, 책의 절반이 넘어가도록 햇빛이라곤 더이상 찾아볼 수 없는 거대한 배의 바닥층에서 벗어날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있으니 내리기 전에 갑판 위로 올라가 볼 수나 있을지 조급해진다. 이대로 물이나 푸고, 바퀴벌레 치우고, 로봇의 쓰레기를 비우고, 형광초록 마운틴 듀나 마시다 어느날 왐의 항해는 끝났습니다, 하고 하선하게 되려나 싶어지는 것이다. 

하지만 인내심이 다 마를 것 같은 때에 드디어 왐에게도 볕들 날이 온다. 그리고 왐이 보여준 밑도 끝도 없이 일단 질러보는 배짱, 그리고 하면 하고, 가면 간다는 과감함이 긴 시간 시키는 일은 다 한다는 '조커'가 쌓아온 쓸모와 섞이면서 상승효과를 가져오기 시작한다. 거기에 약간의 우연한 행운들이 살을 더해 쓸모는 없는데 쓸데는 많았던 왐을 쓸모가 많고 쓸데는 적어지도록 만들어줬다. 더 나은 평판과 더 나은 근무 환경으로, 나름 성장해나가는 모습을 볼 수 있는 것이다. 처음부터 영 못마땅했던 주인공이지만 그래도 유람선 타서 일할 생각을 한 거 보면 애가 영 띠리하기만 한건 아니었다며 슬그머니 재평가하게 된다. 

왐의 환경이 개선되면서 읽는 사람의 마음도 조금은 풀어진다. 어쩜 이렇게 수다스러운가 싶었던 왐의 세세하고 생생한 설명 탓에 정말 같은 선실 안에서 상대방이 만들어내는 사소한 소음, 풍기는 땀냄새 같은 것 마저도 짜증을 유발하는 피곤을 함께 쌓는 마음으로 몰입해서 지켜봤던 것 같다. 그래서 조금은 함께 고생해야 하는 시간이 필요하지만 마지막에 가서는, 결국엔 같이 웃게 되는 이야기다. 웃기다기 보다는 재미있다는 감상이 더 어울렸다. <오션 블루스>의 생생함 덕분에 생에 첫 크루즈 체험을 바닥층에서 시작한 기분이다. 그리고 바퀴벌레 얘기를 읽은 탓에 두번째 탑승은 하고 싶지 않아질 것 같다. 

너무 더워서 바다로 여름휴가 가는 것조차 망설여지는 때, 가장 가깝게 찾을 수 있는 여행지가 되어줄 소설이다. 다만 바다가 보이는 창을 가진 깨끗하고 조용한 객실이 아니라 배의 가장 밑바닥, 이층침대 두개가 놓여진 좁은 공간에서 수다스러운 빌런과 함께하며 얘 언제 사람되긴 하겠지, 응원하는 마음으로 함께해야 한다. 그럼 왐이 당신에게 절묘한 운명과도 같은 이야기와 웃음으로 보답할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자력 구제 금지
김성민 지음 / 황금가지 / 2026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 "불량한 사람만 살인하는 거 아니거든요?" 48" 

소연의 아빠이자, 아동학대범인 박민철이 죽었다. 초등학교 교사인 은아는 사정상 잠시 보호하고 있는 소연의 부탁을 받아 소연의 할머니네 집 마당에 살고 있는 고양이 밥을 챙겨주기 위해 들렀다가 현장을 목격, 최초 발견자가 된다. 박민철의 죽음을 수사하기 위해 은아를 찾아온 형사 장경준과 사건 때문에 마주할 일이 생길 때마다 둘은 은근한 신경전을 벌인다. 자신이 임시로 보호 중인 소연의 일이기에, 평소 추리소설을 즐겨 읽는 성향인 탓에 은아는 박민철의 죽음을 단순한 사고가 아닌 사건으로 보았고, 경준은 그런 은아의 관심을 지나치다 여기면서 호기심에서 비롯된 참견이라 탐탁지 않게 여긴다. 박민철 사건에 관한 의문점들을 해소하는 동안 은아와 경준 사이에 얽히는 사소한 오해와 짧은 입씨름이 두 사람을 전형적인, 하지만 그래서 더욱 풋풋한 관계로 만들어간다. 

로맨틱 코미디 장르에서 전형적으로 나올법한 바로 그 단어, '어? 그 싸가지?'(144) 가 나오면 처음엔 서로 손가락질 하다 나중엔 둘이 손잡고 다닌다는 것 아니겠나. 근데 경준아 은아야, 사람이 죽었는데 지금 너희 아는 길 자꾸 돌아서 가자고 해야겠니. 물론 보는 나는 광대가 너무 올라가서 코보다 높아졌지만. 철벽으로 유명한 은아가 처음 본 순간부터 얼평부터 하게 만들었던 해리 홀레*가 누군지도 찾아봤지만. 넷플릭스에서 발견한 그의 얼굴을 보고는 티존과 광대를 보니 한국 사람 중에서 닮은 꼴을 찾기는 어려울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장경준 형사에게 끌리고 있는가, 왜 끌리는가 고민할 이유가 어디있단 말인가, 은아 선생님 남자 얼굴 보는 거 같으신데. 

어찌됐든 중요한 건 '자력 구제 금지'안에서 이미 사람이 하나 죽고, 또 소연의 할머니인 최금례씨는 실종됐고, 은아의 과거도 뭔가 심상치 않은 느낌을 주는 바람에 신경 쓰이는데, 자꾸만 경준과 은아가 성큼성큼 가까워져 연애하려는 걸 보니 눈앞에 쌓여있는 사건이 자꾸만 흐릿하게 뒷전으로 간다. 사건의 비밀을 파헤치고 싶은 독자는 정신 꼭 붙들고 사건을 살펴봐야 한다. 처음엔 <백야행>*과 비슷한 내용이 아닐까 소연이와 우형의 관계가 나이에 비해서 성숙하고 끈끈해보여서 의심했다가, 역시 이럴 땐 사건 수사에 어떤 진척이 있는지 캐묻는 은아같은 사람이 범인이겠지 의심했다가, 실종됐다던 민철의 모친 최금례 할머니가 아들 앞으로 보험을 들어놨다길래 의심하게 되었다. 나만 빼고 다 수상해보이는 상황이다. 불량한 사람만 살인하는게 아니라면 또 어떤 사람이 살인하게 되는 것일까. 

" 집 안에서 괴물을 키우고 있을 여자가, 지친 몸으로 돌아와 편히 쉬어야 할 자신의 집에서 얻어맞고 욕을 먹으며 사는, 그러면서도 그 관계를 끊지 못하는 어리석고 한심한 여자가 자꾸 떠올랐다. 고요한 가운데 흐느끼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짜증이 났다. 123" 

책을 읽기 전, '로코풍 헤어질 결심'이라는 평을 보고 대체 어떤 내용이길래 이런 강력한 수를 던졌을까 궁금했다. <헤어질 결심>*의 결말이 인상적이기도 했고, 워낙 깊은 애정을 가진 팬층이 많은 작품이라 웬만해선 공감하기 어려울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했다. 마침 형사인 지환과 '박민철 관계자 2(109)'인 은아가 사건을 통해 얽혀들어가는 과정이 영화와 비슷하게 느껴지기도 하고, 밀물처럼 모르는 사이에 성큼 밀려들었다 썰물처럼 잡을 수도 없이 쓸려나가는 감정과 관계를 바라보다보니 과연 그렇구나 공감이 됐다. 그럼 '자력 구제 금지'도 <헤어질 결심>처럼 영화로 만들어져도 좋지 않을까. 누가 어떤 인물을 하면 좋을까 생각해본다. 

공사가 분명한 형사의 마음도 흔들어버리는 은아는 얼마나 매력적인 사람인걸까, 지환이 쥐고 있는 은아의 과거에는 어떤 사건이 있었던걸까, 최금례 할머니는 대체 어디 계신걸까, 박민철 사망 사건의 진실은 뭘까, 경준과 은아는 사건을 해결하고 무사히 사건 관계자와 형사 말고 그냥 아는 사람(194)으로 관계를 발전시켜 나갈 수 있을까, 보호자 없이 남겨진 소연의 미래는 어떻게 될까, 그리고 범근아 안됐지만 너도 좋은 일 생길거야. 너무 나쁜 놈의 죽음엔 자연사도 아깝다며 사건 안으로 성큼 들어서는 은아와 평소엔 나뭇가지 잘 피해다니는 경준의 러브, 스릴, 서스펜스가 한가득 담긴 매력적인 로맨스릴러 '자력 구제 금지'를 추천한다. 


* 요 네스뵈 범죄소설 <해리 홀레 시리즈> 주인공 해리 홀레 형사
* 히가시노 게이고 추리소설 (1999) 
* 박찬욱 2022년 개봉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내가 없는 세계 - 제6회 넥서스 작가상 대상 수상작 ㅣ 넥서스 작가상
이태희 지음 / &(앤드) / 2026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사라지는 사람들에 관한 책을 읽은 적 있다. 찾아보니 약 10년 전 <인간 증발>이라는 제목으로 된 책이었는데, 매년 10만명의 사람들이 말 그대로 없어져, 증발되어버리는 일본의 사회현상에 대한 내용이었다. 실패와 관계 압박이 강한 분위기의 일본 사회에서 스스로의 존재를 지워버리고자 하는 사람들이 있고, 갈수록 늘어나지만 이를 개인의 문제로 치부하기 때문에 어떠한 조치없이 방치되고 있는 문제를 독특하게도 프랑스인 저자가 파고든 책이었다. 자의로 자신의 삶 밖으로 나가버린다는 선택을 하는 사람들이 있고, 또 그 수가 상당하다는 사실에 당시 꽤 놀라서 '내가 없는 세계'의 소개글을 보자마자 <인간 증발>이 떠올랐다. 

'내가 없는 세계' 안의 사람들 역시 세계의 밖으로 걸어 나간다. '걸어나가다'(13)라고 되어 있지만, 갑자기 사라진, 증발되어버린 현상인지 알 수 없다. 그저 어느날 갑자기 모든 것을 두고 사라져버린다. 많은 사람들이 갑자기 사라지는 통에 국가에서는 걸어나간 사람들을 신고할 수 있는 사이트도 구비해두었다. 주로 혼자 있을때 '걸어나가기' 때문에 숙박업소의 1인 숙박을 금지하는 권고를 내린다. 왜, 어디로 가는지, 돌아오긴 하는지, 돌아온다면 얼마나 지나야 돌아오는지 아무것도 밝혀지지 않은 '걸어나가다' 현상은 사람을 불안하게도, 반대로 평온하게도 만든다. 

" "그렇게 생각하면 혼자 있어도 괜찮은 거 아니에요? 걸어나가지 않기를 선택하면 그만인데......"
"그러게요. 내심은 기회가 오면 걸어나가고 싶은가 봐요." 39" 

민정이 어떤 사람일까 생각하며 읽는다. 오래 사귄 남자친구 경현과 권태로운 헤어짐을 앞두고 있고, 3년 정도 같이 동거하던 가족같은 은서언니가 있고, 담배를 끊은지도 3년,  꽃가루 알레르기, 약간의 우울 증세와 적당히 예민하고 무던하다. 하지만 나와는 절대 맞지 않는 면이 침대에 외출했던 그대로 눕는 사람이라는 점(24)이었다. 경현과 6주년 기념 데이트가 있던 날, 민정에게서 은서와 경현이 '걸어나갔다'. 언젠가 잃게 될 것을 예감했지만, 걸어나가는 방식으로 사라지리라 예상하지 못했던 상실 앞에서 민정은 조금씩 이들의 걸어나감에 접근하기 시작한다. 

은서가 사라지던 날 샀던 책이면서 유일하게 은서와 함께 사라진 물건인 [걷거나 가라앉기], 우연히 찾아 들어가게 된 레코드 가게, 843번의 익숙함 같은 것들이 경현의 사라짐과도 조금씩 아주 오랜 시간을 두고 겹쳐들어간다. 어쩌면 이렇게 조용히 걸어나가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은서와 경현이 같은 날 사라진 이유가 사실은 뻔하고 추잡한 남녀 사이의 이야기였다면 그래서 차라리 폭발시키고 복수하고 다 정리해버리는 과정이 있었다면 오히려 나았을까. 결국은 이렇게 되려고 이 모든 것들을 쌓아왔던 걸까 생각하면 조금 섭섭함이 남는다. 

걸어나간 수많은 사람들은 대체 어떤 시간을 보내고 있을까, 검색창을 열어 [걷거나 가라앉기]를 입력해보고 없구나 안심한다. 누군가 걸어나가 사라질 걱정은 없겠구나. 아니, 그런데 아주 오래전부터 정말 자신의 삶에서부터 '걸어나간' 사람들이 있었다는 걸 다시 깨닫는다. 그렇다면 이 '증발'은 겹겹이 쌓인 '증발'의 신호가 될까? 어쩌면 일상적인 안녕을 나눈 뒤로 더는 서로 만나지도, 연락하지도 않고 영영 다시 닿을 일 없이 기억 속에 접어둔 수많은 사람들이 사실은 전부 걸어나갔던 것은 아닐까 생각한다. '내가 없는 세계'가 남기는 진짜 레몬보다 더 레몬같은 레몬 사탕의 묘한 단맛을 추천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이자만큼 성실하게 - 교유서가 소설
이소호 지음 / 교유서가 / 2026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 미래의 내가 24개월 동안 매달 조금씩 도살당할 거라는 사실 같은 건 내 명석한 두뇌에 끼어들 틈이 없었다. 그저 총액을 24로 나누면 나오는 그 가벼운 숫자, 한 달에 밥 몇 번과 커피 몇 잔 값을 아끼면 되니까. 그 만만한 금액이 내 눈앞에 선명한 마법처럼 떠올랐을 뿐이다. 당장 내 수중에는 십 원 한 장 없어도 세상을 24조각으로 쪼개서 살 수 있다니, 이 얼마나 완벽하고 경이로운 경제학인가. 41" 

아, 이 얼마나 날카롭고 지저분하고 잔인한 이야기인가. 

어떤 이야기는 마치 쓰는 사람의 생을 적나라하게 보고 있는 것은 아닐까 겁이 나서 마음이 불안해질 때가 있다. '이자만큼 성실하게'가 그런 이야기였다. 수진이라는 인물의 속내와 행동, 배경을 고스란히 봐도 어떻게 왜 이럴 수 있을지 모르겠는데 어떻게 수진을 책 속에 담아냈을까, 뭘 알아야 써도 쓸 것 아닌가. 혹시 지금 내가 보고 있는 '이자만큼 성실하게' 역시 한번에 쭉 써내려간 글은 아니겠지. 아무래도 저자와의 만남이 있다면 한번 쫓아가서 손을 들어 질문을 해야할까, 바보같은 생각이지 그럼 추리소설 작가들은 다 지하실 있는 집에 살게? 한번도 가본 적 없는 도시를 샅샅이 둘러볼 수 있는 구글맵을 켠 것처럼, 한번도 살아본 적 없는 누군가의 삶도 검색해볼 수 있었을거야. 불안을 잠재우며 읽었다. 지나치게 현실적이고 생생해서 재미있는데 재미를 느낄 수 없다니. 그런데 작가님 정말 아니죠, 덮인 책 표지를 보다 어딘가를 향해 괜히 간절한 눈빛을 보내본다. 너무 몰입해서 생긴 부작용이다. 

항상 주인공에게 가장 이입하고, 좋아하는 인물을 고를 땐 주인공을 선택하곤 하는데 수진이는 글쎄, 사랑할 수 없을 것 같다. 그렇다고 미워할 수도 없었지만, 복잡한 생각이 들게 만드는 인물인 것만큼은 맞다. 너도 잘못하긴 했는데 세상도 너한테 나빴던 것 같기도 하고, 안아주고 싶다가도 뺨을 때리고 싶어지기도 했다. 수진이를 볼 때면 예전에 인터넷에서 봤던 <도박중독자의 가족>*이라는 웹툰이 떠올랐다. 아주 예전에 조금씩 연재가 될 때 봤었는데 보는 것만으로도 상식이 무너지는 기분이 들만큼 부담이 됐던 기억이 있다. 계속해서 도박을 하고 빚을 내고 또 도박을 하고 가족들의 돈까지 끌어다 쓰고 울고 고통받고 화내고 반성하다가 또 도박을 하는 지독한 굴레가 수진의 쇼핑 중독에서도 보였다. 게다가 자꾸만 빚을 갚아주고 돈을 보내주는 가족들마저 같았다. 중독자 본인이 아닌 가족/주변인의 입장에서 중독된 삶을 보고 싶다면 <도박중독자의 가족>도 추천한다. 

" "100걸음당 1캐시."
사람들은 이 숫자를 비웃겠지. 고작 1원을 위해 무릎 연골을 소모하는 나를 비천하다 할 것이다. 하지만 보라, 이것이야말로 니체가 그토록 갈구했던 힘에의 의지가 아니고 무엇인가! 나는 지금 1원을 줍는 것이 아니다. 나는 나의 노동을 수치화하고, 그 비루한 수치를 다시 예술적 숭고함으로 치환하는 모든 가치의 전도를 수행중이다. 138" 

읽으면서 자꾸만 돈쓰고 다니는 수진이도 싫었지만, 돈을 갚아주는 엄마도 싫고, 수진이를 까내리면서도 지금 연애하고 있을 때가 아닌 애를 데리고 결혼은 못하겠고 연애나 하자는 도윤은 더 싫었는데, 잘난 것도 없는 내가, 다를 것도 없으면서 그래도 수진이보다는 내가 낫지, 하고 걱정을 담은 척 수진이라는 인물을 평가하고 있는 것도 싫었다. 수진이는 정말 열심히 성실하게 살기라도 했지. 돈을 쓰는 일에도, 남들 앞에 서는 일에도, 글을 쓰는 일에도, 1원씩 10원씩 앱테크도 하고, 강의며 원고청탁이며 과외에 심사까지 일도 다, 열심히했다. 수진이란 인물은 그래, 연탄재. 마치 그만큼 뜨거웠던 적 없으면 함부로 차지도 말라던 연탄재*같았다. 불같이 타올랐던 흔적이 가득하지만 글쎄 가까이하면 검댕도 묻을까 굳이 차내버릴 생각도 들지 않는 연탄재였다. 차서도 안되고, 찰 생각도 안드는. 

현실적이고 자극적일수록 소설은 재밌었다. 그런데 그래서 오히려 점점 마음이 술렁이고 불안해지는 소설은 처음 만났다. 너무 적지도 또 많지도 않은 "60만 5,000원 때문에(7)". 괜히 카드어플에 들어가 이번달엔 얼마 썼지, 훑어본다. 혹시 나도 뭐 사는게 중독 아닌가, 가끔 보면 필요없는 걸 보상심리로, 때로는 싸다고 그냥 사버리는 것 같은데 'KCP-NHN링크' 결제 항목이 너무 많아 초조했다. 진짜 망하고싶지만은 않은데 망하지 않고 버티는게 평균 이상은 되어야 가능할 것 같은 세상이니까. 이 초조함이 나만의 것이 아니라 수진의 것이기도 하고 또 어딘가의 누구의 것이기도 한 것 같단 생각이 자꾸만 찾아왔다. 수진을 보다가 너무 남 욕하고 살지 말아야지 한다. 한문철 역대급 갱신이 떠도, A씨의 녹취록이 폭로 되어도, SNS 공론화가 올라와도 한번쯤은 스스로도 자기 자신을 어쩔 수 없었을 순간이 있었을거라 생각해보기로 한다. 

망하지말라는 말은 늦은 것 같고. 죽지는 마, 망할년아. 욕은 하지 않기로 했으니 욕같은 응원을 한다. 숨을 쉬고 있는 것만으로도 돈이 나가는 어른의 삶, 소득과 소비 사이를 험난하게 넘나드는 밥벌이의 험난함을 같이 버텨내는 묘한 연대를 느끼며 이 이상한 소설 '이자만큼 성실하게'를 추천한다. 돈을 벌어도 빚을 지는, 열심히 살수록 막막해지고, 싫은데 안타깝고, 재밌는데 씁쓸한, 반대의 마음을 바쁘게도 오가는 동안 나의 추는 어디로 기울어져 있을까 곰곰히 생각해보게 되는 이야기다. 


*이하진 작가 카카오웹툰
*안도현 <너에게 묻는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신세기 도킹 스테이션 ㅣ 교유서가 시집 8
윤다미 지음 / 교유서가 / 2026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시집을 앞에 두고는 종종 꿈을 꾸곤한다. 꿈을 바라는 마음으로 시집을 대하기 때문이다. 시가 현실과 분리되어 있으리란 법은 없지만 시를 읽으며 현실을 기대하지는 않는다. 현실을 꿈에 이어붙였든, 꿈을 현실에 엮었든 '신세기 도킹 스테이션'은 꿈 같았다. 어느날 새벽 마그네슘을 먹고 이리저리 옮겨간 생생한 꿈의 조각이 씹혔다. 우리는 같은 꿈을 꾸며 어른이 되었던가. 과거의 나에게 연결해 현재의 나를 만들어낸 것들이, 숫자를 거꾸로 세어 바쁘게 되감더라도* 이미 낡은 내가 열셋에 죽었었을지도* 모른다고 예감하면서도, 턱시도 가면 없이도 언니들을 따라 카드를 모으고, 손톱에서 빛이 나는 마법소녀*가 되어 세상과 싸우게 되었음을, 곱씹는 시간이었다. 

 3분 미트볼과 용가리치킨, 토마토 소스로 꾸며낸 파스타 접시 사진을 두고 친구는 그래, 너가 좋아하게 생겼다고 했다. 바싹 구운 베이컨과 계란후라이를 욕심껏 올린 하울정식을 보여줬을 때도 같은 반응이었다. 비싸다는 이유로 식탁에서 멸종을 맞이한 용가리치킨*이 언젠가 다시 돌아오리라 믿는 것처럼 우리는 자라서 당근같은 것은 빼버린 카레를 만들고, 약국에 가서 텐텐을 한가득 사버리는, 어른이 되었다. 
 '신세기 도킹 스테이션'에서 하나둘 제외시킨 항목들을 골라낸다. 콜렉트콜 안내가 끝나자마자 외쳐야했던 한마디*, 부루마불 판 위에 세웠던 호텔*, 한쪽눈을 감고서 들여다보았던 만화경*같은 것들을 후숙이 잘 된 망고를 갈라 먹기 좋게 칼집을 내 건네는*, 퀴즈쇼 상금으로 적금을 넣겠다는*, 넷플릭스를 보는* 능숙함으로 바꿔 끼웠다. 이 교묘한 세계의 교체와 확장을 지우고 채우는 과정이 재미있었다. 
 낡고 낡은 죽음을 이야기하면서도 헤아릴 숫자가 서른개도 채 되지 않아 그래도 아직은 사랑이니 나중을 말하는 것이 더 자연스러워 보였다. 셈을 하는 것보다 성숙은 더 가까이 있을지 모르나 자꾸만 시선이 좋아한다는 게 무엇인지, 터무니 없는 사이즈의 사랑을 감상하는 마음으로 향하는 것을 보니 더욱 그렇다. 그러니 너무 빨리 멀리 가 있지 않기를, 조금 천천히 22세기를 꿈꾸기를 바라며 만남을 마무리했다. 

 시집을 읽는 일은 어떻게 해서든 익숙해지지 않고, 같은 극의 자석끼리 붙여놓은 것처럼 늘 일정한 거리감을 끼고 있는 기분이다. 가까워질 방법을 몰라 혼자서라도 좋아하는 길들여지지 않은 야생의 고양이라도 만난 양, 서로 닿지 않는 언어로 하고싶은 말을 늘어놓으면서, 그래도 너는 내가 싫지 않지, 어쩌면 우리 통했는지도 몰라, 착각같은 순간을 공유한다. 남겨둔 빈칸*을 암호처럼 채우면서 그런데 정말 우리 통했을지도 몰라, 기꺼운 마음으로 읽었다. 밥을 먹을 때면 짱구와 무한도전을 친구삼는 사람에게 가깝게 다가갈만한 시집이 아닐까 싶었다. 아직은 어설프게 남아있는 풋풋함이 매력적이었다. 


*169 시네마토그래피
*168 죽지 않고 계속 살아가기
*152 girlish
*15 신세기공룡생활지침서
*118 1541
*116 랜드마크
*81 Linked Contemporary Lovers
*108 망고를 아세요?
*130 루비 썸머의 실종 
*136 소녀...신세기
*98 노상관찰학의 실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