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고가 돈 문제에 대처하는 법
루피 소프 지음, 보탬 옮김 / 열림원 / 202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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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스해도 될까?" 22

이 말이 이렇게 역겨운 책이 또 있을까. 30대 후반 유부남이 게다가 선생과 학생 사이라는 위계를 이용해서 19살짜리를 꼬셔서 임신 시키는 관계의 시작이다. 게다가 마크는 임신 사실을 알고 난 뒤에 잠적, 뒷처리를 그의 엄마에게 떠넘기기까지 한다. 나이 차이 나는 남자가 어린 당신에게 이유없이 친절하게 다가온다면 혹은 재능이 있다거나 열심히 하는 모습이 보기 좋다는 말로 접근한다면 그 이유는 당신입니다. '마고가 돈 문제에 대처하는 법'을 읽으면서 여러번 생각했다. 마고의 대처법에 대해 너무 동양적인 시선으로 혹은 보수적이거나 냉소적으로 판단하려 들었나? 미국 감성이란 이런 것일까? 다른 독자들의 생각도 궁금해졌다.

 마고가 이 이야기의 주인공이기 때문에 그녀의 입장을 옆에서 낱낱이 바라보게 되니 일이 어떻게 흘러가든 어쨌든 좀 잘 되기를 응원해주게 되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요즘 여러번 나오는 모 브랜드의 가전광고처럼 영화 <인터스텔라>의 책장 장면을 떠올리며 몇 번이나 책상을 두드리면서 '마쪽아 안돼! 하지마! 다시 생각해!' 외치고 싶었다. 위기감이 없고 충동적인 마고의 성향이 나와는 정반대로 느껴지는 것이 마고 MBTI는 ENPF가 아닐까 싶다. 어쨌든 하나씩 따지다보면 처음 모든 것부터 잘못된 선택이었다고 하고 싶은데 그래도 어떻게든 알아서 살아보겠다고 노력하는 모습을 보면 조금 너그러워진다.

 " 내가 보디를 사랑하는 것만큼 한때 날 사랑했을 나의 엄마까지도 나체 사진 몇 장에, 자기 인생에서 날 몰아내지 않았던가. 그런데 안 그럴 이유도 없지 않을까? 나는 거짓말쟁이에, 창녀인걸. 나는 말 그대로 내 인생에서 사람들에게서 떨어져 나와 고립되었다. 358"
 
 마고의 뒤늦은 후회와 자기 연민에 종종 마음이 쓰이기도 했지만 근본적으로 마고가 뛰어든 '온리팬스'라는 이 구독자 전용 서비스 산업이 사실상 성적인 콘텐츠를 제작 판매하는 부적절하고 역겨운 성질의 것이라는 점, 때문에 이 선택에 대해 마냥 '재치 있다'고 긍정할 수 없다는 문제는 여전히 남아있다. 온리팬스 안의 마고, 헝그리고스트는 마치 프로 레스링 시합의 선수들처럼 일종의 캐릭터이고 역할이며 직업일 뿐이라고 할 수 있지만, 어떤 사정을 대더라도 이 산업에 뛰어들어 돈을 벌기로 했다는 것이 개인적으로는 용납되지 않는다. 여성의 성을 사고 파는 일은 한 개인의 사정으로 국한되지 않고, 여성을 구매 대상으로 전락시키고 다른 여성들의 노력, 노동 가치마저 폄하시킨다. 심지어 마고는 다른 일과 온리팬스를 선택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웨이트리스 일은 비전이 없고 돈이 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온리팬스를 지속하기로 결정한다. 거기엔 다른 이해나 사정이 들어갈 여지가 없다.

 '마고가 돈 문제에 대처하는 법'은 현대판 동화나 먼치킨 주인공이 등장하는 만화 같다. 이야기의 초반 모든 것에 서툴고 어렸던 마고의 어설픔, 실수와 결핍 같은 것들을 위태롭게 쌓아올린다. 하지만 보디를 낳고 난 뒤 깨닫게 된 '책임'의 무게와 냉정한 현실 앞에서 마고는 좌절하되 주저앉지 않는다.기죽지 않고 자기만의 방법으로 문제에 돌진해버리는 마고의 태도와 점차 단단하고 재기발랄한 모습으로 성숙해지는 내면이 그 전에 쌓아올린 것들을 날려버리는 것 같은 쾌감을 스트라이크로 준다. 거기다 온리팬스 안에서 정상인을 찾아 진솔한 마음을 나누는 상대를 만나게 된다는 것은 현실에서도 사실 허구에서도 있을 수 없는 일이다. '20달러에 포켓몬 평가서'를 보내주겠다는 사람과 그 평가서가 흥미롭다는 사람의 만남에서는 더더욱.

 " 마고는 지금까지 자신에게 일어났던 일들과 이런 처지에 이르기까지 했던 일련의 결정들과 그 의미들을 돌이켜보면서 한 시간이 넘도록 플러턴 거리를 걸어 다녔다. 바로 이 순간의 친절이 얼마나 큰 의미인데, 친절을 베풀려고 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기도 하고, 아기는 자기에게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성스러운 존재인데, 다른 사람들에겐 그저 식상하고 성가신 존재일 뿐이라는 사실들을. 67"

 이 책의 흥미로운 점 중 하나는 마고의 상황이 아이를 가진 사람들이 겪는 내면적 혼란과 사회적 문제를 고스란히 보여준다는 것이다. 임신을 하면서 받은 축하와 호의, 긍정적 감정들이 계속해서 이어지면서 주변인들도 자신의 상황에 함께 공감하고 특별하게 여겨줄 것이란 판단을 하는 경우가 있다. SNS나 메신저에 아기 사진을 시도때도 없이 올리는 지인에 대한 불평을 보게 되거나, 차가운 지인들의 반응에 섭섭한 마음을 토로하는 글을 종종 보게 되는 것처럼. 마고가 플러턴 거리를 걸으며 깨달았던 사실이 실제적이고 씁쓸하면서도, 마고가 점차 현실적인 감각을 되찾고 있다는 것을 느꼈던 부분이다. 

 더불어 '마고가 돈 문제에 대처하는 법'이 "너무나 재치 있고 사랑스러운" 싱글맘 고군분투기처럼 그려졌지만 사실 일부 남성들이 여성의 삶과 노동력의 가치를 폄하하는 주장-'자신의 성을 팔면 인생 난이도가 쉬워지니 좋겠다'-을 주체적으로 보이는 포장으로 덮어 내놓은 것과 다름 없다는 점은 아쉽다. '유쾌하고 다정한' 마고의 이야기가 적당히 비참하고 사실은 웃기지 않은 이 불편함이 어디에서 왔을까 생각하며 읽었다. 처음 생각한대로 문화가 달라서인지 사고나 성향의 차이 때문인지 스스로를 검열했다. 여성의 주체적, 자발적 선택과 참여, 금전적인 보상 같은 것이 이유가 될 수 있을까, 여전히? 작은 모욕을 견딘 사람에게는 더 큰 모욕이 주어지게 된다는 말이 떠오른다. 주인공을 응원했지만 좋아할 수는 없었다. 아쉬운 점이 있지만 또 다 좋아하고 만족할 수는 없다, 그럴 수도 있다는 것을 생각하게 만들어준 책이다. 


*예기는 29p
*살짝 섬_했다. 183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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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셋 (THE 3ET)
오준석 지음 / 황금가지 / 202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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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주여행 관리국에서는 행성들을 섹터로 묶어 분류했다. 하지만 우주는 무한하며, 끊임없이 확장되고 있었다. 이미 수백 개의 섹터와 수천 개의 행성이 존재했지만, 새로운 행성, 새로운 종족이 계속해서 나타났다. K 섹터는 우주 연방의 손길이 닿지 않는 미개척지로 연구를 목적으로 한 탐사선이나 연방 경찰에게 쫓기는 범죄자들이나 가는 곳이었다. 하푼이 가 본 곳은 J섹터까지였다. 그곳이 워프 스테이션이 존재하는 마지막 섹터였다. 사람들은 J섹터를 문명의 끝자락이라고 불렀다. 103" 

모든 일이 정신없이 몰아쳐댔다. 이 세계가 아닌 낯선 곳에 갑자기 내던져진 독자는 수배자와 현상금 사냥꾼들의 쫓고 쫓기는 추격전의 한 가운데로 워프하게 된다. 우주를 배경으로 종족이 다른 우주인들이 등장하고, 이를 관리하는 우주 연방도 있다. 우주선을 타고 날아다니면서 플라스마 엔진으로 공간을 워프하여 이동한다는 설정은 언뜻 마블 세계관 중에 가장 좋아하는 시리즈인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를 떠올리게 만들었다. 한국에서는 스페이스 오페라 장르가 그리 관심을 받지 못한다고들 하는데, 적어도 나에게 있어선 <가오갤>만은 예외였고 '더 셋'이 비슷한 느낌을 준다고 여겨지자 금새 흥미가 생겼다. 폭탄이 터지고 우주선이 날아다니는 '더 셋'의 세계관 앞에서 쏟아지는 정보를 주워삼키며, 나름의 우주를 그려가며 눈 앞의 인물들을 놓치지 않고 따라붙기 위해 다음 장으로 향하는 속도를 높여나갔다.

"다들 자신만의 재앙을 하나쯤은 가지고 있다. 마쉬에게는 파카두의 스퀴드가 폭발한 것이 재앙이었고 테이저맨에게는 하푼과 마쉬가 재앙처럼 다가왔을 것이다. 하푼의 경우에는 마쉬였다. 그의 존재 자체가 재앙이었다. 37" 

얼기설기 엮은 연결점들을 이용해 관계와 상황을 파악하고 나니 몰아치는 듯하던 전개의 속도감에 적응되어 재미가 모래폭풍처럼 몰려왔다. 현실에 구애받지 않는 공간과 시간으로 넘어가니 인물들의 개성이 더 뚜렷해지고 사건은 신선했다. 과거를 버리고 마쉬와 손잡고 현상금 사냥꾼이 된 하푼은 '제국 경찰을 죽이고 CRS-3 우주선을 탈취'해 수배자가 된 테이저맨을 잡기로 한다. 마쉬의 파괴적이고 즉흥적인 성향이 자신에게 자극과 보완이 될 거라 믿었지만, 바로 마쉬의 그 면모에 말 그대로 뒤통수를 맞고 낯선 행성에 버려지게 된다. 현상금을 얻기 위해 잡으려고 했던 테이저맨과 손을 잡게 된 하푼. 서로를 공격해 흘릴만한 피와 묻어둔 사정은 있는데 눈물과 인정은 메말라버린, 각박한 우주 세상에서 '살아남기'만이 목표였던 인물들이 억지로 엮어 함께 위기를 넘기며 조금씩 서로 스며드는 과정이 매력적이었다. 

"사막은 원하는 것을, 마음의 약한 지점을, 강한 욕구를 귀신같이 알아채서 인간의 감정을 건드리고 뒤흔들었다. 폭풍 속에서 눈이 뒤집어질 만큼 매력적인 상대가, 죽은 아버지가, 어린 여동생이 돌아왔다. 기억 속에 사랑스러운 모습으로 혹은 가장 끔찍한 모습으로. 그 남자에게 경고를 했지만 미리 안다고 해서 피할 수 있는 재앙이 아니었다. 꿈을 꾸고 있을 때는 꿈이 곧 현실이 되는 법이었다. 131" 

모래 폭풍 안에서 무엇을 만나게 될까 생각해보게 되었다. 아마 '더 셋'을 읽는 동안에 누구나 한 번 쯤은 코뮨의 지독한 모래 폭풍을 상상하며 만약 자신의 앞에 데사가 나타나게 된다면 어떤 모습일까, 데사의 꼬임에 말려들어가지는 않을까 생각해보게 될 것이다. 데사를 통해서 만나게 되는 죽은 자들의 모습은 자신 안에 있는 욕망, 죄책감, 미련 같은 감정들을 건드린다. 심지어 그 안에 그리워했던 이들의 영혼이 정말 존재하고 있다면 만들어진 가짜여도 데사와 함께 머무르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까. 하푼이 데사로 만나게 되는 미리엘과 토미를 보며 관계에 있어서 서로의 의도와 진심을 믿고 이해하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느꼈다. 하푼은 미리엘과 토미가 보이는 분노를 이해하면서 한편으로는 진짜 미리엘과 토미는 증오에 찬 언행을 하지 않을 것이란 믿음을 보인다. 이해와 믿음은 하푼을 위기의 순간에서 벗어나도록 해준다. 

처음엔 배신한 마쉬를 찾아내 코뮨 행성을 벗어날 수 있는 우주선만 탈 수 있으면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 생각했는데 우주의 일은 그렇게 쉽게 돌아가지 않았다. 하지만 이 어려움이 끝까지 긴장을 놓지 않고 하푼과 테이저맨을 응원하게 만들어준다. 이야기의 구조는 복잡하지 않지만 적절히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인물의 극복과 성장을 더해놓은 점이 좋았다. 더불어 이런 세계를 만들어낼 수 있구나, 그리고 이 세계가 더 이어질 수 있겠구나 앞으로의 이야기를 기다리게 된다. SF물을 영상으로 만들어냈을때 아쉬움을 남겼던 작품들이 여럿 떠오르긴 하지만 '더 셋'이 <가오갤>처럼 만들어진다면 얼마나 좋을까 기대도 했다. 처음 '더 셋'이 마음에 들 것이란 느낌은 확실히 옳았다. 장르가 낯설지라도 재미는 확실히 보장되어 있으니 당신의 우주에도 새로운 섹터를 하나 만들어보자. '더 셋' 섹터는 취향의 시작점이라고 이름 붙여질 것이다.
... 그리고 ...
" 테스는 하푼이 건네는 담배를 받아 단번에 들이마셨다가 기침을 쏟아 냈다. 
" ......끝내주는데? 묵직하네. 이름이?"
"말보로 레드. 지구 연방에 갔을 때 왕창 사 놨지. 좀처럼 구하기 힘든 물건이라서." 225"
우리들의 지구는 아직 무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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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근길의 주문 - 일하는 여자들을 지탱하는 언어와 관계, 그리고 마음, 개정증보판
이다혜 지음 / 한겨레출판 / 202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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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근길의 주문'은 일하는 여자들을 위한 교양서이다. 우리가 어떤 위치에 어떤 입장으로 서있는지 인지하도록 만든다.  또한 어떻게 생각하고, 판단하고, 말하고, 행동하고, 계획해야 하는지 조언한다. 생각이 굳어있다고 평가되어도 할 수 없지만 여성 대부분의 사회활동은 여전히 30대 초중반 이후로 변곡점을 맞는다고 생각된다. 그 이상의 나이로, 자연스러운 승진 기회를 얻어, 연차에 맞는 경쟁을 하며, 사회생활을 지속하고 있는 여성 리더들을 꼽아보자. 사원의 성비는 여성이 9가 넘는 회사에서 일할 때도 과장 이상 급의 직위로 가면 남성이 9에 가까워지는 성비 반전이 일어나는게 너무나 자연스러웠던 것이 기억난다. 공부를 하고, 취업 준비를 해서, 직장에 출근하던 여성들은 어디로 갔을까. 그 여성들이 계속 일하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할까.

 책을 읽으면서 어떤 부분은 공감되면서도 헛웃음이 나오기도 했다. 특히 우리가 사회 곳곳에서 만나게 되는 전형적인 유형의 군상들이 즉각적으로 떠오르는 사례들을 볼 때 그랬다. 저자 역시 글쓰기 강연을 진행하는 현장에서 직접 마주하게 된 상황을 예로 들어 보여주기도 했다. 검열 없이 입에서 나오는대로 질문하는 질문자들, 전문가의 강연을 듣고 배우러 온 자리에서 자신의 소견으로 가르치려 드는 공격자들, 상대의 말을 끊고 끼어들거나 매락 없는 무례한 말을 던지는 방해자들. 이들은 대부분 남성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재밌는 점은 남성들은 대부분의 자리에서 비슷한 태도를 보이는데 여성들은 남녀가 함께 있는 자리에서 의견을 표출하는 비율이 확연히 줄어든다는 것이다. 저자는 질의응답 시간에 가장 먼저 손을 들어 나서기보다 침묵을 선택하는 여성들에게도 나중에 이 말을 할 걸, 용기를 내볼 걸 후회하지 말고 나서기를 종용한다. 

 사회에서 여성들이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는 것은 의견 표출 뿐 아니라 관계맺기에서도 두드러진다. " 한국에서는 이상할 정도로 모르는 사이에 '욕'으로 하나되고 친해지는 경향이 심한데, 그런 대화는 몹시 재미있을 수 있으며 그래서 위험할 정도로 당신의 밑바닥을 드러내는 경향이 있다. 30" 며 건전하게 관계를 맺는 태도의 중요성을 말한다. 사회 생활을 하면서 만나는 사람들과의 관계는 대체로 표면적이다. 당신의 내면이 어떤지 시간을 들여 들여다보고 이해해주지 않는다. 드러나는 말과 태도가 당신이 된다. 공공의 소재를 두고 잠시 공감하고 연대를 쌓을 수 있지만 그 밑바탕이 당신 또한 공공의 소재가 될 수 있는 여지가 된다. "타인의 불행을 수집하지 말라(159)"고 조언하며 다른이의 허물을 험담하는 사람들과 멀어지고, 호재를 축하할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함을 강조한다. 

 "게다가 여성들은 사교 대상을 굉장히 폭 좁게 선택하는 경향이 있는 듯하다. '좋아하거나' 아니면 '필요가 있거나'인 사람만 만나려고 한다. 조금만 마음에 안 들어도 아예 어울리지 않으려는 경우도 많고, 자기가 겪은 일이 아니어도 누가 뭐라고 했던 기억이 있으면 '어떤지 쎄하다'며 거리를 두려 한다. 내 일과 직접 관련이 있으면 그나마 어울리지만 그것도 최소한으로 하려 든다. 93"는 내용을 읽으며 내심 찔렸다. 사회생활을 하며 인간관계에 질렸다는 이유로 '도망치고 싶(154)'어했다. 다른 사람과 거리를 두고 주변을 좁히려고 하는가 생각해보니 혹시 모를 피곤한 상황을 피하고 싶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또한 사람을 챙기고 관계를 유지하는 일 자체가 큰 심력과 체력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일하는 것 외에 더 힘을 쏟고 싶지 않아 관계에 제한을 두기도 했다. 저자는 잘라내기를 멈추고 좀 더 유연하게 거리를 두어 연결하고 유지하기를 조언한다. 이를 위해 일부러 '사교주간(128)'이라는 것을 두고 일부러라도 사람들을 만나려는 노력을 하고 있음을 보여주었는데 여러모로 생각을 달리하게 되는 부분이었다.

 여성 스스로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는 문제도 있지만 여성을 향한 평가절하의 차별적 시선도 문제임을 꼬집는다. 사회에서 여성의 문제제기는 예민함으로, 분노는 감정적인 태도로, 항의는 '여자의 징징거림(184)'으로 치부하려 든다. 개인적인 경험으로 일 처리가 느리고 분별 없던 직원때문에 거래처에서 느닷없는 항의를 받았다. 업무에 나와 관련된 부분이 없었지만 화가 난 거래처 입장에선 정확히 누구에게 항의해야 하는지는 상관없었을지 모른다. 어쩌면 자신의 업무와 직접적으로 얽힌 부분이 없는 여자 직원이 어쩌다 걸렸기 때문에 그의 분노가 더 쉽게 터져나왔는지도 모른다. 나중에 담당 직원에게 상황을 말하고 일처리에 대해 지적해주었더니, 건너건너 전해들리는 말이 '예민하다, 같이 일하기 무섭다'고 주변 사람들에게 불평했다는 것이었다.

 업무의 우선 순위도 챙기지 못한 자신에 대해선 반성이나 부채도 없이, 제대로 상황도 알아보지 않고 원색적인 비난을 퍼부은 거래처의 무례도 예사로 넘기고, 어쩌다 운 없이 자신의 부진을 대신 뒤집어 쓴 나를 예민하고 무서운 사람이라고 공격(205)하는 동료와 함께 일하는 것은 피곤한 일이다. 부서는 다르지만 몇 년이나 먼저 입사한 선임의 업무적 조언을 그저 선 넘은 오지랖으로 치부한 그 개인의 태도도 문제였지만, '보수적'이란 평가를 달고 있던 당시 근무했던 회사의 전체적인 기조 역시 차별적이었다. 남녀 신입 사원의 기본 급여 책정이 암묵적으로 달랐고, 직급 승진의 연차별 기회가 차별적으로 주어졌다. 대리 이하의 직급에서 여성이 9할 가까운 비율에서 과장 이상으로 넘어가면 남성의 비율이 9할로 반전되는 구조 앞에서도, 일하는 여성으로서의 자신의 미래가 이 회사에 없음을 인지하지 못했었다. 

 마침 선거일이었던 오늘 떠오르는 것은, 박근혜 탄핵 이후 이제 한동안은 여성이 대통령을 하게 되는 일은 없을 것이란 말을 종종 들었던 일이다. 직무를 잘 수행했는지 어땠는지를 떠나 그의 탄핵을 여성의 실패로 기록하고, 역시 여성이 그만한 직위를 수행하기는 무리라며 앞으로 다른 여성 대통령이 당선되는 일은 요원할 것이라는 말이다. 그간 무사한(?) 전임자가 거의 없는 수많은 남성 대통령들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남성은 뽑아놨더니 기회를 망쳤기때문에 다신 당선되기 힘들 것이란 평가를 왜 받지 않는 것일까. 남성의 무능과 실패는 개인의 과오로 평가의 양면이 있음을 헤아려줘야 하고, 여성의 것은 앞으로의 기회마저 몰수하게 될 치명적인 여성 모두의 실패가 된다. 그리고 그 기회의 박탈에 대해 공연하고 당당히 말한다. 이제 기회를 주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여성들도 그랬어야 했나? 줄줄이 감옥에 들어갔던 전대의 실패는 지나보냈더라도, 윤석열의 탄핵이 있었을 때 이제 남성에게 대통령 당선의 기회를 주는 일은 없을 것이라 말했어야 했을까. 

 '출근길의 주문'은 일하는 여성들이 계속해서 자신의 커리어를 지속하길 응원한다. 여성의 리더십(110)이 평가절하 되고 있음을 알리고, 남자들의 인맥 카르텔 모델을 훔치라고 조언한다. 여성에게 강요되는 돌려말하기(쿠션어 16), 침묵하거나 동조하여 모욕을 참기(51), 타인을 앞에 세우기(186), 여성성이나 외모 관리(205) 같은 일 외적인 분야에 대한 공격과 강요에서 벗어나야함을 알려준다. 그리고 우리 안의 죄책감과 패배주의와 싸워서 이겨야함을 말한다. 검열은 줄이고 좀 더 과감히 자신의 길을 가도 된다는 긍정을 전한다. 때로 다음날 출근이 지겹거나, 쌓여있는 업무를 다 때려치우고 싶거나, 무엇을 목표로 삼아야하는지 길을 찾기 어렵거나, 직장생활이 지긋지긋하게 느껴질 때 이 책은 주문(143)을 건넨다. 각자의 자리에서 일하는 우리가 서로의 길이 되고, 힘이 되고, 꿈이 되고, 답이 되어준다고. 이 응원에 힘입어 매일 아침 당신의 출근길을 향한 첫 발이 조금 더 수월히 나아간다면 좋겠다. 

 " 내가 다른 여자들의 자리를 빼앗고 있나? 그런 생각이 들면 다시 묻는다. 여자의 자리는 여자에게만 이어지나? 아니다. 결국 모두 다음 세대에 의해 대체될 테지만, 다음 세대의 여성들은 언젠가 지금 우리의 나이가 되어 일하면서도 "여자인데 내가 너무 나이 들어서까지 일하고 있나?"라는 질문을 하지 않아도 되기를 희망한다.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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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월한 피해자 - 스토킹과 사법 정의에 대한 어느 기자의 기록
곽아람 지음 / 생각의힘 / 202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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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에서 피해자로 산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알리기 위해서, 이 사회가 피해자를 어떻게 대하는지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범죄 피해가 남의 일이 아니라 자신의 일이 될 수도 있다는 걸 모든 사람들이 깨달았으면 해서, 궁극적으로는 사회 시스템을, 세상을 바꾸기 위해서. 27" 

저자를 어떻게 먼저 알리는 것이 더 좋을까 잠깐 머뭇거렸다. 기자이자 스토킹 범죄 피해자라고 하고 싶었다. 저자에 대해 소개할 때 피해자가 다른 무엇보다 앞선 수식이 되게 하고 싶지 않단 생각이 들었다. 이 책은 그가 피해자의 위치에 서 있어 보았기에 비롯된 것이었지만, 그 위치에 서게 된 사람들이 겪어야 하는 일들이 부당하고 편협한 시각에 갇혀 있음을 읽을수록 절감하게 되면서 '피해자 되기'에 질려있지 않을까 싶었다. 

그는 모든 방향으로부터 공격당하고 있었다. 가해자는 당연하고, 그가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 믿었던 회사, 경찰, 검사, 판사, 변호사 뿐 아니라 주변 사람들까지 피해자의 위치에 서서 만나게 되는 모든 사람들이 '범죄 피해자 곽아람'을 '피해자 위치에 있어야 하는 피해자'로 만들었다. 회사에서는 업무상 재해의 범위에 들지 않는다며 법적 지원을 거부하려 들고, 경찰은 피해의 경중을 재듯이 따지며 수사를 몰아갔다. 변호사는 피해자의 입장보다는 본인의 경력에 더 집중하기 위해 미온적인 태도를 보이고, 검사는 사건의 진행 상황조차 피해자와 공유하려 들지 않았다. 저자가 구형량을 알기 위해 검사실에 전화했던 일이 '사회적 예의'에 어긋나는 일(214)로 기자 갑질이라는 뒷말이 나올 정도다. 판사는 고압적이고 거만한 시선으로 법을 휘둘렀다. 주변인들조차 피해자의 대응을 두고 괜히 일을 더 키우는 것 아니냐는 시선을 보냈으니 암담하다. 판사 뒤에는 님, 가해자에게는 피고 인, 피해자는 존칭과 사람의 표현이 다 떨어지고 '놈 자' 만 남는다는 표현에 웃음이 쓰게 나왔다. 

" 충격이었다. 이 사람들은, 모른다. 갑자기 피해자가 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갑자기 범죄를 겪은 사람이 얼마나 경황이 없는지. 고소장 양식을 인터넷으로 찾아봐야겠다는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상황을 상상하지 못한다. 아니, 고소장이라는 게 있다는 사실 자체를 떠올릴 수 없는 사람이 세상에 있다는 것을 모른다. 자신들이 피해자가 될 일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세상에 판사를 상대로 범죄를 저지를 간 큰 인물은 없다고 여겨서, 생각이 아예 거기까지 미치지 못하는 것이다. 196" 

피해자는 사건의 당사자이면서도 소송에 있어서는 국가와 피고인에게 당사자의 자리를 빼앗긴다. 피해자는 사건에 있어서 어떠한 자료와 진행 상황에도 좀처럼 접근할 수 없이 배제되기 일쑤였다. 피해자를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진 구조가 피해자를 사건 밖으로 밀어냈다. 하지만 저자에게는 '기자'라는 수식이 있었고, 이는 한국사회에서 마법의 문구로 여겨지는 "취재가 시작되자(268)"와 결합되자마자 다른 세상으로의 급격한 전환을 불러 일으켰다. 모든 사람이 이처럼 '자원이 많은 피해자'일수는 없겠지만 책을 읽으며 느껴왔던 모든 답답함과 분노가 이 순간 함께 해결되는 느낌을 받았다.  
" 피해자로서의 볼일을 마친 후 기자로서의 업무를 시작했다. 홍보실은 바로 전화 연결이 되었다. 관등성명을 대는 경찰관에게 피해자 지위를 획득한 지난 5년간 검.경.법원에 전화를 걸어 갖은 박대를 당하면서도 단 한 번도 하지 않았던 말, 그러나 지난 20여 년간 일궈온 나의 정체성을 관통하는 단 한마디의 말을 내뱉었다. "조선일보 곽아람 기자인데요." 오후엔 전혀 다른 세상을 겪었다. 취재가 시작되자 모든 것이 달라졌다. 268" 

피해자는 수치심(84)을 느껴야하고, 우울하고 무섭고 불안해해야 한다. 법정에서는 불쌍함을 어필해 최대한 울고불고 '피해자다움'을 극대화하라(350)는 조언을 듣는다. 피해자답게 가해자보다 낮고 가엾고 약한 위치에 있어야 한다. 당신이 가해자보다 많이 배우고 많은 것을 가졌다는 이유로 제대로 된 죗값이 나오지 않을 수도 있다(416)는 말을 조언처럼 듣는 입장의 저자도 분노와 슬픔, 고통에 시달리다 '죽음을 전시(382)'하는 것으로 절망과 무력을 세상에 전달하고 싶다는 충동을 느낄 정도로 힘들다. 그러니 법에 대해 더 무지하고, 변호사를 선임하는 비용조차 부담이 되는, 어디에 대고 이런 부당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고 말할 곳이 없는 사람들이 갑자기 피해자가 되어버리면 어떻겠는가. 그동안 뉴스로 접하게 되는 흉흉한 사건들을 보면서 막연히 범죄의 피해자가 되는 것을 두려워했다면, 기자 곽아람이 내놓은 길고 답답한 싸움이 고통스럽게 이어지는 기록을 보면서 '사건' 이후에도 멈추지 않고 피해와 압박이 더해지는 현실적 공포를 깨닫게 되었다.   

여성을 대상으로 한 묻지마 범죄('부산 돌려차기 피해자' 김진주 씨(208)), 스토킹, 교제 살인, 일베 같은 사이트에 딥페이크 등 음란물을 올린 성범죄 등 각종 범죄 행위로 인해 고통받는 피해자들의 사건을 접하게 될 때마다 제대로 된 대처와 보호, 처분도 없이 개인이 감내해야 하는 불합리적인 조치들에 분노를 하곤 했다. 세상은 빠르게 변하는데 법이 너무나 느리고 보수적으로 변화를 받아들여 범죄자의 악의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있단 생각을 했다. 그리고 우리 사회는 여전히 과거에 만들어놓은 피해자성을 기준으로 함부로 말을 얹어 평가하고, 사건을 흥미거리로 소비하고 있지는 않았나 되짚어 보게 되었다. [탁월한 피해자]를 읽는 동안 우리 사회의 문제점에 대해 깨닫고 깊이 공감하며 같이 분노할 수 있었다. 처음엔 저자의 수식에서 뒤로 미뤄두고 싶었지만, 함께 응원할 수 있도록 버티고 싸워준 '피해자 곽아람'에게 고마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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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가능한 파랑의 궤도
네이선 밸링루드 지음, 심연희 옮김 / 문학수첩 / 202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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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아마, 언젠가 지구를 뒤로한 채 새로운 별로 떠나야만 하는 날이 올 것이라는 운명적인 예감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지구와 비슷한 조건을 가진, 지구와 비슷한 색을 가진 다른 별이 발견될 때마다 인류는 새로운 지구를 만들 수 있을지 가늠해보곤 한다. 마치 지구에선 자신과 닮은 또 다른 존재를 만나면 둘 중 하나는 사라져야 한다는 도플갱어 괴담을 지구 또한 피해갈 수 없다는 듯이, 너와 같은 별을 찾게 되면 낡은 지구는 버리고 새로운 지구로 떠나갈 것을 꿈꾼다. [불가능한 파랑의 궤도]는 바로 그 어둡고 위태로운 희망을 닮은 이야기다.

 [불가능한 파랑의 궤도]에서 새로운 지구로 선택된 무대는 화성이다. 애너벨의 가족은 애너벨이 다섯 살 때 화성으로 이주해왔다. 아직 화성과 지구간의 이동이 가능하던 때 엄마는 외할머니의 마지막을 지키기 위해 혼자 지구로 돌아간다. 엄마가 떠난 뒤 얼마 지나지않아 행성 간의 신호가 끊기고, 이 '침묵' 이 후 지구의 상황을 파악할 수 없는 상황에서 우주선의 왕복도 끊긴다. 화성에 이주해 온 사람들의 삶은 점점 황폐해지고, 아빠와 애너벨은 오래된 설거지 용 엔진 왓슨과 함께 '마더 어스 다이너'에서 엄마가 남겨둔 음성녹음에 의지하며 버텨낸다. 그러던 어느날, 예기치 않은 사건이 벌어지고 애너벨의 세계도 깨어진다. 

 사람들은 기적의 광물이라 여겨지는 스트레인지를 채굴해 지구로 보내기 위해 화성으로 이주해왔다. 스트레인지를 가공해 얻어지는 엔진 첨가물은 엔진에 인격/지능을 부여(50)한다. 스트레인지는 엔진 뿐 아니라 채굴을 하던 디그타운의 노동자들의 성향과 행동 마저 냉담하고 산만하며 거칠게 변화시켰는데, 스트레인지에 노출돼 오염된 사람들의 눈은 초록빛이 되었다. 화성 이주민들은 '침묵' 속에서 화성에서 벗어날 수 없는 상황과 고갈되는 자원, 스트레인지와 디그타운의 사람들, 사막의 광신도 집단인 나방족의 다름과 불가해함을 두려워한다.

" 우리 모두를 괴롭혔던 공포와 외로움을, 우리가 무서웠기에 저질렀던 부끄러운 일들을 말이다. 10"

 [불가능한 파랑의 궤도]를 읽으며 누군가를 미워하고 배척하는 일들이 결국 공포와 외로움에서 비롯되었구나 생각하게 되었다. 생존이 보장되지 않는 위기 상황에서 다른 사고와 입장을 가진 상대방을 이해하고 포용하지 못하기 때문에 생기는 단절은 공포와 외로움을 낳는다. 다름에 대한 구분과 배척은 결국 혐오와 폭력으로 번진다. 뉴 갤버스턴의 사람들이 초록빛 눈을 가진 디그타운 주민들과 나방족에게 품는 불안과 불편은 연령, 성별, 소득, 교육, 인종, 국적 등 우리 사회에서 타인과 자신을 구분지을 수 있는 모든 요소들이 경쟁과 갈등을 품고 있는 것과 닮아있다.

" 나는 조가 샐리와 맞서 싸워주기를 기다렸다. 제발 그렇게 해주기를 속으로 빌었다. 어른이 나를 구해주기를 바라며 다시금 소심해졌다. 204"

 깨어져 새롭게 깨어난 세계 속의 애너벨은 혼란과 두려움에 가득 차 있다. '마더 어스 다이너'는 침략됐고 아빠는 공격 당했으며 엄마의 음성 녹음이 담긴 소중한 실린더는 빼앗긴다. 하지만 그동안 애너벨을 둘러싸고 있던 세상은 애너벨에게 일어난 부조리하고 부당한 일들에 정당한 분노와 대응을 해주지 않는다. 어린 소녀에 불과한 애너벨에게 어른들은 이기심과 냉정함을 보여준다. 세상의 민낯을 보게 된 애너벨은 그에게 남은 친구 왓슨과 함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직접 그 안으로 뛰어든다. 

 우울 속에 침잠하는 아빠를 다시 깨우기 위해, 아빠마저 잃고 혼자가 되지 않기 위해 애너벨은 강도에게 빼앗긴 실린더를 되찾으려 사막으로 나선다. 세상으로 첫 발을 내딛은 애너벨은 자신의 두려움을 인정하고 굴복하는 대신 욕하고 저항한다. 때때로 애너벨이 모든 사람들에게 지나치게 공격적이고 예민하다고 보이는 부분도 있었지만, 그 과함조차 위악과 허세로 가시를 세워 자신의 미숙함과 나약함을 숨기려했음이 느껴지곤 했다.  

 " 내 발로 소외를 택했으면서도 비이성적으로 속이 상했다. 난 저들이 누구인지 알기에, 게다가 우리 아빠와 내게 저지른 일이 있기에 증오가 치밀었지만, 동시에 저들이 날 자기네 사이로 끌고 가서 저녁을 먹여주길 바랐다. 내가 바라보는 저 어둠 속에는 사실 아무런 공포도 없다고, 그 어떤 수수께끼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오로지 사랑과 온기와 단단하고 누구나 알만한 땅이 있을 뿐이라고 안심시켜 주기를 바랐다. 256"

 자신과 아빠를 구하기 위해 스스로 사막으로 뛰어든 애너벨은 냉정한 세상와 사람들의 날선 욕망과 마주하게 된다. 두렵고 버텨낼 수 없을 것 같은 현실 앞에서 애너벨은 세상에 나오기 전, 어린시절의 자신에게 주어졌던 어른의 보호가 이어지길 기대하곤 한다. 하지만 한 번 깨어진 알의 껍질 속으로는 다시 돌아갈 수 없는 것처럼, 세상 밖으로 나오길 선택한 애너벨은 오기와 저항으로 부딪혀 버텨 나간다.

 병아리가 알을 깨고 나오는 모습을 본 적이 있을까. 갓 부화한 작은 생명은 그동안 자신을 지켜주던 세상 안에서 벗어나 바깥으로 나오기 위해 제가 가진 모든 힘을 다해 껍질을 깨고 나오려 몸부림친다. 껍질 밖 세상에서 지켜보는 사람에겐 작은 균열일 뿐일 이 몸부림은 어린 생명에겐 더할 나위없이 최선을 다하는 저항이다. 애너벨 안의 약한 마음도 엇나가는 듯 보이는 거친 태도도 어느새 지켜보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여 응원하게 만든다. 

 '침묵' 속에 놓여져 갈수록 궁핍해지는 화성의 환경, 스트레인지의 영향 아래 공격적이고 섬뜩하게 변해가진 엔진과 사람들에게서 열네 살 소녀가 지키고 싶었던 것들은 단지 엄마의 목소리가 녹음된 실린더, 오래된 설거지용 주방 엔진 왓슨, 그리고 아빠였다. 단지 엄마를 그리워하는 상처받은 어린아이였던 애너벨은 지키고 싶은 것들을 위해 소녀시절과 이별한다. 그 과정에서 이기적이고 냉정한 어른들의 민낯과 마주하고 거칠고 혹독한 세상의 현실에 눈을 뜬다.

 이제 막 세상밖으로 나오게 된 애너벨은 과연 무엇을 발견하고 어떤 결과를 얻게 될까. [불가능한 파랑의 궤도]를 읽는 동안 화성이라는 미지의 공간 위에서 우리 삶과 닮은 공통점을 찾아 덧씌우기도 하고, 길을 떠나야만/떠남으로써 얻게 되는 성장을 응원하게 되기도 했다. 끝까지 긴장을 놓지 않고 애너벨과 함께 헤매고 싸우며 읽게 되는 치열하고 매력적인 이야기였다. 애너벨과 왓슨은 빼앗긴 실린더를 되찾아 아빠를 구해낼 수 있을까. 스트레인지의 영향은 어떤 변화를 가져올까. 우주의 '침묵'은 깨어질 수 있을까. 애너벨의 이야기속으로 들어가보자.

 " "야, 벨.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니까 기분 좋냐?" 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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