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한다고 상처를 허락하지 마라 - 나를 아프게 하는 것들에 단호해지는 심리 수업
배르벨 바르데츠키 지음, 한윤진 옮김 / 다산초당(다산북스)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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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목에서 기대했던 것들은 좀 더 넓었다. 내가 사랑하고, 또 나를 상처주는 것들을 이성애적인-동성애를 포함하여- 의미의 것으로만 염두에 두고 책을 읽으려 했던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책을 읽기 전에 제목과 그 옆에 붙은 짧은 문구에 비추어 더 많은 것들을 떠올렸다. 진짜 내가 관심과 마음을 주는 것들 그리고 그 관계에서 반사되어 온 것들. 나뿐만 아니라 주변 사람들이 전해준, 혹은 그들을 통해 바라본 관계 안에서의 상처도 생각했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책 안의 내용은 오로지 나르시시즘에 빠진 남녀의 불행한 관계에 대한 것 뿐이었다. 소냐의 전 생애를 두고 정리되지 못한 과거의 상처가 어떤 식으로 관계맺기에서 그 그늘을 뻗어오는지 꽤 흥미롭게 읽을 수 있었지만 전체적으로 공감되는 내용은 아니었다.

 

 오직 단 한 번, 내가 실제적으로 아는 사람이 데이트폭력의 피해자가 된 적 있었다. 뉴스나 이래저래 건너오는 말들로는 더 많이 다양한 피해를 들은 적 있지만 내가 진짜 아는 사람은 한 명이었다. 그 사람이 결국 병원에 입원하고 가족들의 도움을 받아 관계에서 벗어나게 됐을 때는 이미 나와는 연락이 끊긴 뒤였기 때문에 공통의 지인에게서 그간의 일을 전해들었었다. 흔한 얘기였다. 과도한 흥분과 분노가 한번의 폭력으로 이어지고, 헤어질 결심을 하자 울며 반성하고 몇배는 더 잘해준다. 한번의 실수로 용서해주기로 하고 계속 만난다. 그 다음 다툼의 상황에서 또 폭력을 쓴다. 헤어지려하면 애원하고 반성하고 용서를 구하고, 마음이 약해진 틈을 타 관계를 이어간다. 그 다음, 다음 폭력은 더욱 커지고 책임을 전가하고 협박하고 지배하려 든다.

 

 이보다 더 간결하거나 길게 설명하려 해도 결국은 이런 구조였다. 책속의 소냐와 거의 비슷하다. 다만 그때 미숙했던 나를 놀래켰던 것은 피해자가 매우 똑똑하고 자기주장이 확고한 성향의 사람-으로 보였던-이었던 것이다. 발견되면 절대 상종하지 말아야 할 3가지 지뢰 중에 도박, 폭력, 바람이 있다. 특히 여성들에게 있어 이는 정언명령과 다름없다. 그런데 그 사람은 똑똑하고 강한 성격에도 불구하고 한번 자신을 때린 사람을 용서하고 다시 만났을까.는 의문이 머리속에 남았었다. 지금와서 생각해보면 연락이 끊어진 이유도 그 관계 탓이었을 것이다. 상대방에게 상처입으면서도 헤어지지 못하고 결국 큰 사건을 겪어야했던 과정이 책의 내용과 꽤 흡사했고, 그때의 그 사람을 이해해보는데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읽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책 속 인물의 생각과 행동을 이해하기 어려운 면이 많았다. 진심을 가진 순수한 사람들에게는 실례되는 말이지만, 인터넷 커플 매칭 사이트 같은데서 진실한 사랑을 할 상대를 구한다는 것부터 손절하게 된다. 잘못된 장소에서 심지어 기혼인 상태, 잘못된 상황의 사람이 어떤 정답-행복한 연애와 결혼이 반드시 정답일수는 없지만-을 낼 수 있을까. 그런데 분명한 것은 저런 곳에서 진실한 만남과 사랑을 찾으려 하는 사람들이 진짜로 있다는 것이다. 어디에서 누군가를 만나든 지뢰밟을 확률은 분명히 있지만, 번화가에서 밟을 확률보다 지뢰밭에서 지뢰밟을 확률이 더 높다는 것이 당연한데도. 애초에 사랑, 연애, 결혼에 의탁하거나 갈망하거나 자신에게서 비었다고 생각하는 무언가를 채우려고 하지 않는다면 더 좋겠지만.  

 

 이 책이 전세계 100만 부 베스트셀러 작가의 새로운 대표작이라는 사실이 암담했다. 관계에 실패하고 상처받은 사람들이 적어도 그만큼은 있다는 것이니. 인터넷 열심히 하는 어느 누군가의 현명한 말처럼 '안정이 필요하면 결혼말고 클래식을' 듣는 편이 차라리 나을 것이다. 과거의 치유되지 못한 상처가 있다면 심리/정신상담을 받고, 애정을 쏟고 받을 대상이 필요하면 덕질을 하거나 반려동물을 들이세요. 생각하기에 사랑은 너무나 불완전하다. 리스크도 크고, 무엇보다 나조차도 누군가의 제대로 된 상대가 되어주기 힘든데 똑같이 불안정한 타인에게 기대야 하는 부분도 있다. 실패 확률이 올라갈 수 밖에 없다. 거기다 누군가를 사랑해도, 결혼을 해서 가족이 된다해도 결국 인간은 외롭다.    

 

 관계 안에서 고통받고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스스로의 상황을 일깨울 수 있는 예를 보여주고 직접적인 도움을 제시하는 내용은 좋지만 끝은 어쩐지 아쉽다. 책이 모두를 구할 수는 없지만 지뢰에 발을 얹은 사람이 다치지않고 그 자리에서 벗어나는 방법을 알려줬다면 지뢰밭에 다시는 발을 들이지 않도록 경고와 교육을 해야했다. 어떤 부분이 아쉬운가 생각해봤는데, 그가 여전히 그 지뢰밭 안에서 길을 헤매게 둔 느낌이었다. 지뢰밭에서는 몇걸음 지나지 않아 또다른 지뢰를 밟을텐데. 연인과의 연애중 심각한 위기에 처해있다면 혹은 주변인이 자신도 모르게 그런 신호를 보내는 것 같다면 이 책이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이 책을 찾게 되는 일이 없어야 더 좋겠지만. 여러모로 마음이 무거운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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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가 있다 - 윤동주 산문의 숲에서
김응교 지음 / arte(아르테)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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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문의 맛이란 이런 것인가. 윤동주의 산문을 읽으며 의외의 세련됨에 몇번 놀라게 되었다. 어쩔 수 없이 고루한 부분이 있을것이란 예상을 깨고 한자표현이 어렵다는 점만 빼면 오히려 잘 읽히는 편이었다. 거기에 이어지는 김응교의 해설은 자칫 여백으로 남을 수 있는 시선의 배경을 채워준다. 생활과 시대가 녹아든 사진과 설명을 읽다보면 잘 만들어진 문학관의 시청각해설 코너에 들어가있는 느낌을 준다. 원문보다 몇배는 많은 해설이라니, 처음엔 부담스러웠는데, 읽다보면 확실히 도움이 되는 부분이 많다. 지나치고 넘어갈 문제를 확장시켜서 해석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때로 시각을 바꿔주기도 한다.

 

 왜 이제와서 윤동주인가. 거기에 잘 알려진 그의 시가 아니라 산문인 것일까? 사실 '나무가 있다'의 출간 소식을 듣고 떠올린 것은 언젠가 티비에서 본 적 있던 윤동주에 대한 다큐멘터리였다. 꽤 오래 전이라 잘 기억나지는 않지만 우리 못지 않게 일본에서도 그를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들이 굉장히 많다는 내용이 인상깊게 남았었다. 그의 생애에 대해 떠올린다면 일본인들이 그의 시비를 세우고 교과서에 시를 싣는 일을 어쩐지 건조하게 바라보게 되지만, 한편으로는 이 아름다운 문인에게 그만큼의 열정도 갖지 못한 자신이 작아보였다. 시를 몇 편 안다고는 생각했는데, 생각지 못했던 산문집이 출간된다는 소식에 반드시 읽어보자고 생각했다.

 

 " 이것은 과단성 있는 동무의 주장이지만 전차에서 만난 사람은 원수요, 기차에서 만난 사람은 지기라는 것이다.(p.18 종시) " 는 부분에서는 한참을 웃었다. 과단성 있는 동무라는 저분 채소 지하철 1호선 3개월 이상 출퇴근 유경험자 아니신지. 너무나 옳은 말이다. 지하철/전차가 지옥철이었던 것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는가보다. 거기에 시선이 자연스럽게 전차 안에 타고 있는 사람들에게로 옮아가는 것도 평범했다. '다만 방년 된 아가씨들'의 모습을 '판단을 기다'린다며 이리저리 평가하는 부분은 요즘의 감수성에는 맞지 않는다 생각했다. 이미 쓰여진 글을 어쩔 수 없는 일이고, 그들에 대한 언급이 여성노동자 문제를 염두에 둔 까닭이라는 해석(p.68~)이 있어 이를 감안하고 읽었다.

 

 처음의 '종시'를 통해 윤동주의 산문이 이런 것이다는 감각을 쟀다면, 뒤로 이어지는 '달을 쏘다'에서는 좀 더 깊은 심정적 공감을 이뤄낸다. 특히 늦도록 책장이나 뒤적이다 불을 끄고 간신히 자리에 눕는 일이 잦은 탓에 초반의 고요함이 익숙한 이미지로 다가왔다. 거기에 인간관계에 대한 고민이 이어진다면, '사람 사는 거 다 똑같구나' 하는 말이 저절로 나올 정도로 현생을 그대로 옮겨다 놓았다. 다만 이편의 고민이 좀 더 가볍고 상스럽게 표현될 뿐이지. 게다가 누가 수업 과제 글로 이런 작품을 쓰나요, 재능있는 사람들은 다 그런가요. 지나가는 문과는 이유없이 한 대 맞고 웁니다. 그런데 이 글을 써간 학생에게 70점을 준 교수는 또 뭔지. 친일을 해서 그런가, 점수가 짜다. 

 

 이어지는 '별똥 떨어진 데'를 읽으면 드디어 제목인 "나무가 있다"는 구절과 만나게 된다. 만나서 반갑기는 한데 생각보다 어렵다. 그냥 글도 쉽지 않을텐데 정지용의 동시 "별똥"에 대한 오마주가 담긴 내용이라 배경 설명이 없었다면 한동안 어리둥절 했을 것이다. 윤동주에 정지용이라니 너무나 그들만의 리그인 것. 그런데 나열된 두 이름만으로도 어쩐지 마음은 흐뭇하다. 마지막으로 '화원에 꽃이 핀다'까지 만나면 비로소 이 "산문의 숲"의 한 가운데에 들어서게 되는데, 이 둘은 특히나 해설의 도움이 반가웠다. 곳곳에서 만나는 아들러, 니체, 맹자 등은 전혀 반갑지 않았지만, 저자의 등장이 아니었다면 어떤 흐름으로 무엇을 말하고자 했는지 가늠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윤동주라는 이름이 가진 무게에 비해 즐겁게 읽었다. 그를 마주한 것이 온통 '공부해야 할' 책의 한 모퉁이였기 때문인가, 학업의 속박에서 벗어나 만난 윤동주는 재밌고, 세련되고, 매력적이었다. 무게니 속박이니 할 정도로 공부를 잘 하지도 열심히 하지도 못했으면서 부담만 느꼈다고 생색이었던 듯하다. 거기에 시가 아닌 산문과의 만남이 새로운만큼 윤동주에 대해 가진 인상도 좀 새롭게 바뀔 수 있는 경험이 될 것 같다. 무엇보다 안전한 가이드와 함께하니 믿고 읽어본다면 좋겠다. 기대 이상의 경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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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연결 - 구글, 아마존, 애플, 테슬라가 그리는 10년 후 미래
W. 데이비드 스티븐슨 지음, 김정아 옮김 / 다산북스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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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온통 '이 책을 지금 보다니 당신은 이미 늦었다, 지금이라도 봤으니 다행이다, 빨리 대비해라, 남들 다 하고? 난 뒤에는 늦는다'는 말들이 가득해서 나도 모르게 조급해졌다. 하도 몰아치는 바람에 내 생에 큰 변수가 없다면 남은 시간이 얼마나 될까 헤아려봤다. 의학기술이 발전하면서 IoT 덕분에 기대수명이 더 늘어난다면 50년은 족히 더 살리라. 남은 날이 이리 많은데 IoT 모르면 자연인이 돼야 하는가요, 두려웠다. 세상에 공인인증서 건너뛰는 삼성페이 쓰는 것도 신세계라 생각하고 있는 중인데, IoT가 뭔가요 진짜. 중년을 바라보는 청년의 삶 이대로 괜찮은 것일까 위기감이 느껴졌다. 닥치고 공부! 하는 마음으로 읽었다.

 

 처음 책 표지를 마주하고는 IoT가 무엇이었더라, 하고 생각했다. 분명 들어본 적 있는 말인데 확 떠오르질 않아서 불확실하게 사물인터넷?하고 짐작했다. 맞았다는 기쁨도 잠시 구체적인 설명이 되질 않는다. 확실히 나도 들어본 적 있는 말이라면 이쯤해서는 시대의 상식일텐데. 곰곰히 생각해보니, 설명하긴 어려워도 우리는 사물인터넷이 반영된 세계를 오래 전부터 상상해왔다. 팀 버튼의 '가위손(1990)'에 나온 장면이다. 에드워드가 만들어진 성에 발명가가 설치해놓은 쿠키기계가 있다. 이 기계의 모습은 마크 와이저가 91년에 쓴 논문에서 "컴퓨터가 우리 일상에 완벽히 스며들어 마침내 보이지 않게 될 어느 하루(p.70)" 를 그린 것과 같다. 좀 더 쉽게 다가가려나. 

 

 읽다보니 문득 걱정했던 것 과는 다르게, '그다음에 올 혁명(p.49)'을 일반 소비자/시민의 위치에 선 내가 선점해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일까 의문이 들었다. 이 선점은 주로 자신들의 사업 체계에 IoT 기술을 도입하여 발전해나가야 할 기업들의 과제인 것이다. 소시민 입장에서는 세상 돌아가는 흐름을 안다면 더 좋겠지만, 어찌보면 이 서비스를 이용해나갈 정도의 변화에 적응하면 되는 일 아닌가 하고 좀 안일해졌다. 책 안에서도 각 장의 중간에 있는 자가 진단 코너를 보면 '당신의 기업'으로 시작되는 질문들이 주를 이룬다. 당신의 기업이라니, 위기감은 줄어들고 대신 거리감이 느껴진다.

 

 대신 일반 노동자의 입장에서는 기계와 사물인터넷의 조합이 얼마만큼의 노동력을 대체할 것인가에 대한 걱정만 하면 된다. 이 기술의 발전이 직접적으로 노동시장에 영향을 줄 것이라 보여주는 예는 -팀 버튼이 여러번 나오는데- 영화 '배트맨'과 '아이언맨'이다. 배트맨과 아이언맨의 차이점이 무엇일까. 그들의 가장 직접적인 조력자가 알프레드와 자비스로 대비된다는 것이다. 인공지능, 기계, 사물인터넷 기술의 발전으로 우리의 알프레드는 일자리를 잃게 되고 그 빈 공간을 자비스가 채운다. 업계 최상의 능력치를 지닌 알프레드도 이러할진데 각 분야에서 얼마나 많은 인력이 떨어져나가게 될까. 사람들이 괜히 디스토피아적 미래를 그리는 것이 아니다.

 

 이것말고는 개인정보에 관한 우려가 있겠지만, 우리나라 개인정보는 이미 다 털릴만큼 털려 공공정보나 다름없으니 외려 덤덤하다. 처음에 발전하는 사회를 따라가지 못하는 노년을 맞이할까봐 걱정했던 일도 '스마트에이징(p.219)'같은 기술이 구원해줄 것이라 생각하니 잦아들었다. 이게 뭔지 모르겠어서 큰일이다,는 마음으로 책을 읽기 시작했던 것치고는 재밌고 가벼운 마음으로 끝맺었다. 무엇보다 좀 생소하고 어려울 수 있는 내용을 알기 쉽게 설명하고 있기 때문에 좋았다. 보기와 달리 생각보다 어렵지 않으니 우리 사회가 어떻게 변화해가고 있는지 궁금하다면 한번쯤 읽어본다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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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레오마가린 왕자 도난 사건
필립 스테드 지음, 에린 스테드 그림, 김경주 옮김, 마크 트웨인 원작 / arte(아르테)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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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지막으로 동화책을 읽은 게 언제였지. 나름 감을 잃지 않기 위해 청소년 도서는 가끔 챙겨보려고 하는 편인데, 동화책을 읽은 건 언제가 마지막이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요즘 아이들도 동화책을 읽을까. 너무 좁은 표본이지만, 주변에서 동화책 읽으며 재미있어 하는 아이를 본 적이 너무나 오래다. 한 십년 전 쯤 아이들을 가르칠 때 가끔 재밌어하는 부분이 나오기도 했지만, 요즘은 아이들이 핸드폰으로 게임을 하거나 유투브 영상을 보는 것을 더 많이 봤다. 나이든 사람들의 관념 속에 있는 어린이의 성숙함을 넘어선지 오래인 초등학생들 뿐 아니라, 유모차에 타고 있는 어린 아기들도 핸드폰에서 나오는 영상에 귀신같이 반응한다. 시대가 변했으니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아쉽다.

 

 그런데 새삼 '올레오마가린 왕자 도난 사건'이라는 파격적 제목을 단 동화의 출간 소식에 동화를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록 어른이지만 너무 오래 동화를 안 읽었다는 이유로 이 책을 꼭 읽고 싶었다. 섬세한 선과 바랜듯한 색감으로 표현된 삽화도 마음에 들고, 출간되기까지 과거에서 미래를 향해 쏘아진 신호를 잡아 천천히 풀어놓은듯한 시간차가 마음에 들었다. 지금 출간되지만, 요즘의 감성이 아닌 동화가 나오리라 기대되었기 때문이다. 이 독특한 제목의 동화는 그런 기대를 잘 충족시켜 주었다. 묘하게 시니컬한 부분들이 끼어들곤 하지만 그 뿌리에는 가장 기본적인 주제를 담고 있다. 잘 쓰여진 대부분의 동화가 그렇지만, '올레오마가린 왕자 도난 사건'도 어린아이 뿐 아니라 어른까지 전연령을 아우를 수 있는 매력을 가지고 있다.

 

 소년과 왕자, 그리고 그의 동물 친구들이 나오는 내용이라 가볍게 모험을 떠난 소년이 친구들의 도움을 받아 위기에서 왕자를 구하고 부귀를 얻어 행복하게 지내게 된다는 흐름을 떠올렸다. 그런데 소년의 유일한 친구인 닭의 이름이 '전염병과 기근'일 때부터 비버섬의 이름이 왜 비버섬인지에 대한 사소한 논쟁이 끼어들 때부터 이 알 수 없는 동화가 독자를 어디로 데려갈지 전혀 알 수 없을 것이란 예감이 들기 시작했다. 이런 요상한 내용을 베드타임 스토리로 딸에게 들려준다고?' 칼데곳 수상자인 필립과 에린의 손에서 재탄생한 이 동화는 확실히 만만치 않다. 이성의 끈을 놓지 않으며 웃음을 주다 어떤 부분에서는 동화적 허용을 가볍게 이용해버리곤 한다.

 

 조니가 주주꽃을 먹은 뒤로 겪는 일들은 환상적이라 기대했던 감성을 채우기에 충분했다. 속으로 잠시 씨앗이 큰 넝쿨이 되어 자라는 것은 아닐까, 꽃을 먹다니 조니는 채소도 잘 먹는 소년이네, 이런 생각을 해보긴 했다. 어린시절 책을 읽으며 이런저런 상상을 하길 좋아했는데, 아주 오랫만에 '올레오마가린 왕자 도난 사건'을 읽고 나서 주주꽃을 먹는 일을 상상해봤다. '클로디아의 비밀'을 읽은 뒤로 한참동안 어느 박물관의 어디에 숨어야 들키지 않을까 고심하거나, 사람들이 동전을 던진 분수대를 골똘히 바라보곤 했던 기억이 다시 떠올랐다. 내가 만약 주주꽃을 먹는다면, 어떨까. 다들 책을 읽고 나서 주주꽃을 먹고 나서 가장 먼저 하고 싶은 일이 뭘지 생각해보도록 하자.

 

 책에서 조니가 보여준 마음은 꽤 순수하고 따뜻한 것이어서 동화를 읽는다는 건 이런 것이구나 하고 잔잔한 감동을 받았다. 때로 사람을 만난다는 것에 지치고, 관계가 주는 무게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을 했는데 나도 누군가에게 '당신을 알게 돼서 정말 기쁘다'고 말해줄 수 있는 마음을 가져봐야 겠단 생각을 했다. 새삼 돌이켜보니 상대를 판단하고, 낙인찍고, 용서가 적었던 시간을 보냈다. 아마 왕과 올레오마가린 왕자와 비슷한 모습이지 않았을까. 가장 싫은 캐릭터의 모습이 가장 나와 닮아있다니. 금방 잊혀지는 부질없는 다짐이지만 남에게 더 유한 마음을 가질 수 있는 사람이 되자고 생각했다.

 

 이제 막 친구를 사귀어야 하는 아이들이 읽는다면 좋을 것 같다. 인간관계, 인연의 소중함과 무거움을 그 꼬맹이들이 다 이해할까 싶지만 만나서/놀아서/친해져서 좋았던 친구를 떠올릴 수 있는 계기가 된다면 그것도 의미있겠다. 주변의 꼬맹이들에게 소개해주고 싶지만 몇 번 책을 선물로 주었는데, 원치 않는 선물을 가져다 안긴 탓에 아이들이 감사하다는 인사조차 엄마의 눈치를 보며 고역으로 해내는 것을 보고는 이 눈치 없는 선물을 그만 하기로 했었다. 아이들은 왜 동화를, 책을 안 좋아하는 걸까. 아쉽다. 때로 동화의 가치를 아이보다 어른들이 더 크게 보는 것 같다. 아마 이미 뭔가를 잃고 난 뒤라 그렇겠지. 간만에 어린시절의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시간을 즐겼다. 모두 '올레오마가린 왕자 도난 사건'과 함께 환상적인 시간이 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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팀 쿡 - 애플의 새로운 미래를 설계하는 조용한 천재
린더 카니 지음, 안진환 옮김 / 다산북스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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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쿡은 잡스의 유산을 보전하며 '내 안의 모든 것, 내가 가진 모든 것을 회사에 쏟아붓고자' 노력하겠지만 결코 잡스와 같아지는 것을 목표로 삼지는 않겠다고 말했다. "내가 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은 바로 나 자신일 뿐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요. 그래서 내가 될 수 있는 최상의 팀 쿡이 되기 위해 노력해왔습니다." 실로 그는 지금도 그런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p.41) "

 

 상대적인 것일 수 있어 확언하기는 어렵지만 대체적으로 젊은 감성과는 동떨어진 편이다. 갤럭시말고는 핸드폰을 써본 적이 없고 주변의 대부분 사람들이 그렇다. 언젠가 지인이 자신의 주요 고객층은 아이폰 유저였으면 좋겠다는 내용의 한 경영인의 인터뷰를 본 내용을 얘기한 적 있었다. 아이폰 유저들이 흔히 말하는 '감성'을 이해할 줄 아는 사람이 고객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흐름이었다. 커피를 마시며 '어머 그럼 갤럭시 유저는 뭐 감성이 없나' 하고 한마디했지만, 확실히 아이폰을 고집하는 사람들이 주장하는 '감성'이란 것이 있긴 있나보다. 젊음, 유행, 인싸같은 수식어를 단. 쨌든, 잡스의 죽음 이후 여전히 잘 나가지만 - 아이폰의 전망에 대해 부정적으로 생각했던터라 '팀 쿡'에 대한 책이 궁금했다.

 

 다른 이의 죽음으로부터 시작되는 인물의 이야기는 새로웠다. 아무 접점이 없는 사람이지만 잘 알려진 유명인의 죽음에 대한 내용은 여전히 애석하게 다가왔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잡스가 애플에 미치는 영향, 그 자체로 애플과 동일시 될 수 있는 존재감이 그의 죽음과 함께 팀 쿡에게로 승계되는 계승적 구도를 보는 것 같은 느낌도 주었다. 잡스가 그 누구로도 대체될 수 없다고 생각해왔던 인물이 바로 그 사람의 빈자리를 대신하여 애플을 이끌어가게 되었을 때, 그가 느꼈을 부담이 과연 어땠을까. 전에는 쉽게 새로 나온 제품의 디자인이나 반응에 기대 '애플은 전보다 못해졌어'라고 가볍게 생각했지만, 빈자리를 채워 운영할 결단을 내리고 지금껏 보여준 행보만으로도 대단하다 생각하게 되었다.

 

 잡스의 죽음 이후에 몰아닥친 상황이 이어질거라 생각한 것과는 달리 팀 쿡의 어린시절부터 이어지는 내용들은 생각보다 평범했다. 그가 참가했던 몇몇 활동들은 비즈니스적 면모가 두각을 나타냈음을 보여주는 예시로 쓰였고, 앨라배마에서 겪었던 인종차별 사건들, 게이인 성 지향성 등은 그가 요즘 시대에 맞는 가치관을 가진 인물임을 보여주는 점으로 정리되었다. 누군가의 삶에 대해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이 초반 부분은 전형적인 전기물의 양식을 그대로 이용했기 때문에 심심하게 느껴졌다. 왜 우리가 자소서를 쓸 때 '엄한 아버지와 자애로운 어머니 밑에서 자라'같은 상투적 표현이 지양되지만 막상 쓰려면 그런 표현들이 절로 나오는 실수를 여기서도 범한 것이다. 좀 아쉬운 부분이었다.  

 

 우리가 알고 싶었던 팀 쿡에 대해서는 6장에 이르러서야 등장한다. 책에서는 잡스 이후 팀 쿡이 선보인 첫 프레젠테이션에서 느꼈을 대중의 실망감까지도 잡스가 보여줬던 흥미로운 애플 제품발표회의 전형을 깨버린 것으로 표현된다. 다만 읽다보면 애플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이 팀 쿡에 대해 말하는 것과 다름없음이 보인다. IBM과의 파트너쉽이 가져온 영향, 애플워치의 등장 같은 기업 연혁이 팀 쿡과 불가분의 것이지만 그를 말하는 게 될 수 있을까. 10장에서 나오는 커밍아웃 부분에서 이런 갈증이 조금 해소되는 듯 싶다가 그가 가진 소수와 다양성에 대한 열린 태도가 여성인력고용 같은 카테고리와 엮이면서 기승전애플로 돌아간다.

 

 다만 컴퓨터 산업의 줄기를 꿰고 있는 사람이라면 팀 쿡의 여정이 보여주는 이 산업 흐름이 꽤 흥미로울 것이다. 문과라서 어떤 부분들은 좀 전문적인 내용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그냥 이런 흐름이었구나 하고 읽어 지나간 부분도 있었다. 잘 모르더라도 IBM, 컴팩, IE, 애플, 마이크로 소프트, 델, 게이트웨이 같은 들어본 적 있는 이름들이 나와서 해당 분야에 관심있는 사람의 눈으로 보면 또 다르게 느껴지겠다 싶었다.

 

 팀 쿡에 대해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잡스의 이야기도 나올 수 밖에 없는 부분들이 있는데, 간혹 팀 쿡을 극대화하기 위해 잡스를 좀 쳐낸다는 느낌을 받을 때도 있었다.(p.146,171,182,187,244,391) 팀 쿡만의 장점을 드러내다보니 그런 것 같은데, 잡스를 다룬 책에서는 반대되는 방식을 썼겠지 비교해보고 싶어 스티브 잡스에 대한 책을 가진게 있었나 한시간을 찾아봤다. 결국 못 찾았다. 분명히 있었던 것 같은데 왜 안보이는지 아쉬웠다. 독서의 끝이 엉망이 된 책장 정리라는 과업을 남기고 말았다. 조잡함을 경멸했던 잡스와 과도한 재고를 증오했던 쿡의 체제를 따라 영원히 고통받는 갤럭시 유저는 책장 정리를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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