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움은 언제나 광속 - 시 한 수, 그림 한 장
김주대 지음 / 현암사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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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단언하기는 어렵지만, 최근들어 가장 오랜 기간동안 가방안에서 출퇴근을 함께 한 책이었다. 책이 상하는 걸 참 안좋아하는데 책 끄트머리가 날긋날긋하게 상했다. 상한 귀퉁이를 보고 있자니 왜 이렇게 오랜 시간을 두고 읽었을까 자책까지 하게 된다. 제목에 써져있는 광속이란 단어완 정 반대의 과정으로 읽게 되는 책. 오가는 길의 절반 정도는 서평을 쓰기 위한 과정이었지만 '시 한 수, 그림 한 장'으로 되어있는 짤막한 글들을 읽어내는 시간도 녹록치 않았다. 긴 문장은 덜어내며 읽고 간결하게 만들지만 짧은 문장은 파헤치며 읽어 풍부하게 만들기 때문일까 생각했다. 그런 말은 그저 핑계고 읽는다는 것에 게을렀던 건지도 모르겠다.

 

 SNS 시인으로 잘 알려져 있다는 시인의 소개를 읽으면서 sns를 하지 않는다는 것이 그저 인생의 낭비를 줄이는 것만이 아니라- 혹은 아날로그적인 부분을 남겨두는 보루가 되는 것 또한 아니라- 알게 될 수도 있었던 새로움을 모르고 살아가고 있는 것이 되는구나 느꼈다. 그렇다고 sns를 하게 될 것 같진 않지만, 그래도 많은 사람들이 sns를 통해 새로운 시도를 하며 이 전에 없었던 양식의 표현법을 만들어 내고 있는 것을 의식하게 되는 계기 중 하나였다. 게다가 문인화라는 것도 교과서에 쓰여 있던 단어로 본 것 외에 실제적으로 체감하게 된 것은 처음인데- 문인화라는 단어의 뜻을 다시 찾아보고 그 이상의 감명을 받았던 장들을 떠올렸다. 문인화라는 단어의 뜻을 넘어선 작품들을 문인화를 지칭해야 하는 한계라니.

 

 어떤 작품이 어떤 식으로 기억에 남아있다고 소개하면 좋을까 한참을 생각해보는데, 어렵다. 왜 이 작품의 이 구절이 마음에 들었는지 설명하기 어려운 느낌이 있다. '집'이라는 작품이 그러한데, 글쎄- 시 구절 안의 표현도 그렇고 집이라는 단어를 집의 형상으로 그려넣은 점도 그렇고 다 좋지만. 읽으면서 개인적 체험을 떠올리게 만드는 감상의 바탕이 있기 때문에 더 의미있게 기억에 남는다. 돌아갈 집이 없는 것도 아닌데 '차곡차곡 쌓여있는 집'에 돌아가 어둑하면 불을 켜고 밥을 먹을 사람들을 생각하면 '부러웠다.'는 시인의 덧말이 언젠가 늦은 밤의 차창에서 봤던 사람사는 곳의 노랗고 하얀 불빛을 떠올리게 하는 면이 있었다.

 

 언급한 작품 외에도 '고뇌'라는 작품에서 글씨로 사람의 형상을 만들어낸 그림을 보고 몇번이나 손가락으로 선을 따라 그어보며 인상적이면서도 간결한 표현법이 좋다고 생각했었고 '확장되다'라는 작품의 선명한 색감이 주는 화려함에 시선이 머물기도 했었다. 화질이 좋지 않아, 색감을 더 표현하기 힘들었지만 아래에 '집'이라는 작품을 같이 올린다. 책을 읽어본 사람이라면 많은 작품 중에 왜 이것을 골랐을까 싶어할지도 모르지만- 누군가는 이 글귀를 통해 비슷하거나 혹은 다른 감상을 느끼게 된다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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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영화를 보겠다고 회사에 다니나 - 영화로 읽는 직장생활 바이블
오시이 마모루 지음, 박상곤 옮김 / 현암사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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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목이 참 기발했다. 센스가 있었다. 그런데 문득 이거 직상생활 '바이블'이 될 재목인가 싶어진다. 아니 대체, 한 달 기를 쓰고 회사 다녀서 월급 받고 나면 카드값이며 핸드폰 요금이며 빠져나가기 바쁜 텅 빈 통장을 안고 그래도 또 밥 벌이는 해야지 싶어 아등바등 출퇴근하는 소시민들이- 회사 다니는 것을 무슨 영화를 보겠다고 다니게 될 수 조차 있냐는 말이다. 말 그대로 주말에 영화나 한 편 보러 나가는 일도 때로는 사치인 마당에. 회사는 그냥 다니는 거고, 영화(映畫)나 영화(榮華)나 뭐가 되었든 보는 일은 회사와는 하등 상관이 없는 일로 알고 시작해야 하는 것이 요즘의 기본 상식인 것을.

 

 글을 읽겠다고 모셔운 분을 앞두고 면구하지만 좋아하는 일본 애니메이션 감독은 미야자키 하야오였다. 얼마 전에 스튜디오 지브리의 마지막 작품이 될지도 모른다고 예견되며 개봉한 '추억의 마니'도 스크린에서 내리기 전에 보고 오려고 서둘러 다녀왔는데, 어쩌다보니 느낌이 상당히 다른 오시이 마모루 감독의 책을 일게 되었다. 감독의 작품은 '공각기동대' 외에는 모르는데 책 속에 '천사의 알'이란 작품에 대한 언급이 있어 수년전에 동명의 영화를 봤던 기억이 나서 찾아봤더니 토가시 신 감독의 다른 작품이었다. 생각을 공유할 수 있는 접점이 없어 아쉬웠다. 다만 어찌되었던 책 속에서 꼽아놓은 영화들이 상당히 많고 또 좋은 작품들이어서 그 리스트만은 믿으면서 읽을 수 있었다.

 

 최근에 일본인 저자가 쓴 영업에 관련된 책을 읽었는데, 그 책도 저자가 어떻게 골드만삭스의 사장 자리에 오르게 되었는지 자신의 성공 비결을 밝히는 내용이었다. 이 책과 마찬가지로 어딘가 상대방을 몰아붙이는 자신자만에 찬 강력한 어조로 되어 있어 읽는 동안 약간 불편한 반발심이 계속 이어졌다. 물론 이쪽은 영화의 내용을 함께 소개하면서 그것을 실제 사회 생활에 녹여내려는 노력이 더 기울어져 있어 내용이나 의미가 더 풍부했지만 특유의 강압적인 분위기가 비슷하게 느껴져서 개인적으로는 아쉬웠다. 그만큼의 자신이 있었기 때문에 자신이 가고자 한 분야에서 성공할 수 있었겠지만, 말이다.

 

 책에 대해 다소 호의적이지 않은 시선으로 있었다. 하지만 일요일 정오마다 해주는 '출발 비디오 여행' 프로그램을 즐겨보는 사람으로, 이 책에서 소개하는 영화들에 대해 읽을 때마다. 또 그 영화가 생소한 작품일수록 직접 찾아서 볼까 말까 기대하는 마음으로 즐겁게 읽었던 부분도 분명히 있었다. 다만 대부분의 영화가 지극히 남성적인 취향에 맞춰져 있다는 점은 조금 아쉬웠지만, 저자의 목록이니까 어쩔 수 없지!

 

 다만 우리가 즐겁게 읽고 끝장을 덮고 난 뒤에 상기해야 할 것은, 이것은 이미 자신을 성공의 길에 올려놓은 다른 사람이 걸어온 길이고 세상은 한 번 뚫린 위로 향하는 길에 뒤따르는 사람을 위한 성공의 자리는 마련해두지 않는다는 것이다. 따지고 보면 자신만의 길을 걸어 위로 올라간 사람에게만 그 사람이 걸어온 길에 맞는 자리를 내어놓는다. 이미 누가 지나온 길은, 지금 시대나 당신의 상황에 맞지도 않을 뿐더러 다른 사람의 것이다. 애초에 남을 따르는 사람을 두고 당신조차 매력을 느끼지 못할 것이다. 자신을 그런 위치에 두지 말자. 그저 그의 삶이 이러했다면 난 다르게 살아보자, 나만의 자리를 찾아보자고 여기자. 그것이 훨씬 더 경제적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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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나를 묻는다 문학과지성 시인선 330
이영유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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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애석하게도 큰 감흥이 없었다. 시보다는 책 날개에서 먼저 보았던 그의 부음이 더 오래도록 남는 시집이었다. 이상도하지. 이영유 시인은 이제서야 시집 '나는 나를 묻는다'를 찾아읽게 되면서 알게 된 이름 석자인데, 존재를 깨닫는 동시에 시인의 부재에 대한 확인을 하고 또 그것이 꽤 오랜 시간을 지나 내게 전해졌다는 것을 느낀다. 어디선가 본듯하다. 까만 활자의 구절로 오래 전 부음이 지금에서야 내게 닿았다는 것을. 언제고 전해지기 위해 하염없이 시간과 공간 속에서 메아리치며 떠들던 부음에 조의를 표한다. 아주 늦었지만 그래도 서둘러.

 

 다만 생각이 닿은 부분은 아래의 시이다.

 

[ 品格에 대하여 - 품격, 그리고 한문을 쓴다

 

나, 스스로가 품격의 기준이므로

품격은 나이다

혀에 모터를 달고 끝없이 굴려보라

무슨 소리가 나는지,

 

하여간 품격은

나로부터 벗어나지도 못하고

내 안으로 들어오지도 못한다

漢文이 또 하나, 나의 국어임을 알게 된다

 

격이 없으므로 격이 있고

격이 있으므로 격이 없다

아직도 혀에 모터가 붙어 있는지?

그렇다면, 모터를 떼든가

혀를 뗄 일이다 ]

 

때때로 나 자신은 무엇으로 보여지는가, 나타내는가, 증명하는가, 구성되어 있는가에 대해 두루뭉술하게 생각하곤 한다. 사실 몇 해 전까지만 해도 그런 생각은 잘 안했는데 어느 순간부터 자존감이나 자존심의 차이를 구분하려 하고 나를 나에게 어떻게 보여야 하는가 생각하게 되면서 나에 대해 정의하고픈 마음이 들기 시작했다. 잘 지켜지진 않지만 내가 받고 싶지 않은 대접을 남에게 하지 않으려 노력하는 일들도 그 일환이다. 그러다보니 좀 더 관계에 있어서 냉담해지는 부분도 있지만 말이다. 쨌든 이 '품격에 대하여'란 시를 읽다보니 그 모든 시도가 결국은 나라는 사람의 품격을 높이고 싶다는 열망에서 비롯된 것과 비슷하단 생각이 들었다.

 물론 말은 적을 수록 좋다는 부분에 있어선 정말 가슴깊이 동감하지만, - 지금 이렇게 쉼없이 타자를 쳐내는 일을 멈추지 못하는 것처럼 속에 든 것을 쏟아내지 못해 안달인 성미에 실행에 옮기지 못하는 것이다. - 한문을 쓰는 일이 곧 품격이 될 수 있고 그것이 나의 국어임을 인지한다는 부분은 그다지 동의하지 않는 부분이다. 시간이 지나면 혹은, 한문을 더 배우고 익힌다면 생각이 달라질 수 있으나 - 사실대로 말하자면 한문이 섞인 부분을 읽기 어려워서 그렇다는 것도 있고, 우리말로 표현할 수 있는 것들은 가급적 우리말을 쓰는 것이 좋다는 생각을 은연중에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쓰면서도 한 문장에 얼마나 많은 한문이 들어있는지. 비록 나는 달리 쓸 길을 찾지 못해서 이렇게 한자표현을 잔뜩 끌어다 쓰지만 할 수 있다면 쉽고 정확한 우리말로 글을 쓰고 싶다는 바람이 있다.

 

 연작들인 '나는 암이다' 는 제목 만으로도 정신을 산란하게 만드는 강렬함이 있었다. '지병의 악화로 영면하였다'는 시인의 지병이 무엇이었는지- 이름 만으로도 끔찍한 병명을 곳곳에서 발견하면서 몸서리쳤다. 마치 일상인양 시집 안에 툭툭 끼워져있는 병의 그림자가 기울 때마다 피해가며 읽었다. 이상하게도 질긴 암세포가 그 안에 엉겨있는 양 제목만 봐도 지긋한 느낌이었다. 대신 눈에 들어온 다른 시 한편은,

 

 [ 光化門에서

 

 모처럼 광화문 네거리를 다녀왔다

참, 오랜만이다

이제는 아무렇지도 않은 철 지난 과거,

거기 광화문이 있다

이제는 누구도 보살피지 않는 오래된 상처,

열을 맞춰 달리는 차들의 행렬,

순간 모든 게 정지되고,

피 흘리던 역사의 흔적들은

아우성으로만 멀리서 달려온다

갑자기 파란 불이 켜지고,

그만!

 

뒤를 돌아보니 모르는 것들 투성이다

그랬다, 예전부터 내가 알고 있던 것들은

없었다

그냥, 나는 그 모든 것들을 다 알고 있다고

스스로 믿고 있었던 것뿐이다

아득한 곳에서 달려오고,

또 아득하게 사라지는 것들,

한 세기의 흔적이,

한 인생의 아우성이,

흩뿌리는 눈 속으로 사라진다

사라지고, 사라지는 눈 먼 사이사이로

신기루처럼 광화문이 다가선다

 

누구에게나 상처는 ...... ]

 

 시의 전문이다. 나와 세계가 정말 긴밀하게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며 믿고 살아가는데 - 사실 내 세계야 어떻든 세상은 태평하리만큼 틀을 잃지 않고 계속된다. 금방 내 세계가 끝난대도 어떤 영향도 받지 않은 채 무심하게 모든 것들이 그대로일 것이라 생각하면 그 자체로도 어떠한 절망이 엄습한다. 존재의 무상함을 느끼는 가장 일반적인 때가 아닐까 싶다. 이 '광화문에서'가 그런 순간 또한 포함하고 있다고 여겨졌다. 내가 그 곳에 존재하거나 혹은 그렇지 않았던 순간에도 계속되고 있는 공간과 시간. 사실 내가 없이는 그 공간과 시간의 존재조차 인지되지 않는 것이지만, 그 '있게 함'을 만드는 인지의 주체조차 사실은 공간과 시간에 의해 인지되지 않으면 무상하기만 한 것이라는 틈새가 현실감있게 다가왔다. 얼마 전에 볼일이 있어 그 앞을 다녀와서 더 그럴지도.

 

 감흥이 없었다고 하면서도 할 말은 조금 있었던 것 같다. 확 들어와 꽂히진 않았어도 이래저래 되새겨 떠올릴 시들이 있었던 시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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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단
제바스티안 피체크.미하엘 초코스 지음, 한효정 옮김 / 단숨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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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린 구면이네요.

 작가 제바스티안 피체크의 이름은 길고 복잡하지만 또 그렇기 때문에 인상이 강렬하게 남는다. 기억하기 어려울 것 같은데도 기억에 남는다. 사람에게 지문이 있는 것처럼, 목소리가 다르고, 체향이나, 분위기같은 것이 다 다르게 느껴져서 그 사람을 만드는 것처럼- 작가에게도 문체가 다 다르게 존재하는 것일까. 라는 생각을 떠올린다.

 

 솔직히 말하자면 차단이라는 제목과 색다를 것 없어 보이는 표지를 보면서 작가 이름을 살필 생각도 안하고 무심히 책을 읽기 시작했다. 그저 나오는 내용으로 조금 스릴러 장르이거나 추리 장르이겠거니 생각하고 읽다가 어느 순간에 이르러 전에 읽었던 책과 좀 비슷한데 하는 생각이 심히 들어왔다. 무슨 책이었더라, 이렇게 문득 일상에 끼어들어온 잔인하고 무자비한 살인마로 인해 긴장과 초조 속에서 인물이 극한까지 몰려가며 끝으로 끝으로 결말을 향해 독자와 함께 달려가도록 만드는 이 몰입감을 느꼈던 것은 - 요 네스뵈의 "스노우맨" 도 이와 비슷하지만 아니었다.

 

 그러다 작가 이름을 다시 보고 난 뒤에 생각나는 제목들이 있었다. "눈알사냥꾼" 과 "눈알수집가". 그랬다, 제바스티안 피체크의 전작들을 차례로 읽어왔던 것이다. 그리고 그때 느꼈던 특유의 분위기를 마치 전에 만났던 사람 특유의 냄새나 분위기 같은 것을 더듬어 재인식하듯이 '알아보게' 되었다. 신기한 점은 작가 본인이 같다는 것도 특유의 분위기가 날 수 밖에 없는 일이긴 하나 한 번 번역이 되어 완성된 책에서도 이 분위기가 똑같이 느껴진다는 거다. 심지어 번역을 한 사람도 다른데. 어떻게 서로 다른 사람을 거쳐서 만들어진 다른 책들이 결국은 같은 뿌리를 가지고 나온 것이라고 이리도 분명하게 알아볼 수 있을까. 그만큼 제바스티안 피체크가 자신만의 색을 강렬하게 가지고 있는, 혹은 확립한 작가라는 것을 뜻하기도 하고, 지난 두 권과 이번 새 책을 통해 독자 -나- 로 하여금 자신이 어떤 글을 쓰는 사람이라는 것을 확실히 인식 시켰다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작가가 독자의 기대를 충족시키는 새 작품을 가지고 돌아오기란 참 부담스럽고 어려운 일 일테지만 제바스티안 피체크는 그 이상을 이번 "차단"을 통해 증명해 낸 것 같다. 법의학자인 미하엘 초코스와 함께 사실적이고 실감나는 부검 과정과 사후 반응 검사들을 설명해내면서 다소 강렬함이 지나쳐서 위화감이 들 수도 있는 부분들 마저도 제대로 보여주었다. 어떤 의의나 흠집의 여지도 남겨두지 않겠다는 듯이. 하지만 숨가쁘게 몰아쳤던 것에 비하면 헤르츠펠트의 딸인 한나의 완고한 모습은 좀 애매했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바는 아니었고, 여러차례 지나치게 과한 과정이 댓가로 주어졌다고 생각하도록 상황이 전개되었으나 글쎄, 한나의 심리가 제대로 반영이 된 것일까 십대라는 불안점함이 그 바탕에 깔려있다는 것을 고려하여도 말이다.

 

 이처럼 작가에게 있어서 가장 약점이 될 수 있는 부분은 인물들의 심리와 행동 근간에 대한 당위성이 아닐까. 고립된 장소 안에서 자신의 안위조차 감당할 수 없는 린다가 모든 두려움에서 매번 눈을 돌리지 않고 점점 더 깊은 사건의 중심으로 제발을 옮기는 일이 왜, 단지 한 생명에 대한 인류적 책임에서만 비롯되는지 그 끈도 약하게 느껴졌고 왜, 본보기 혹은 원망의 대상이 헤르츠펠트에게로 이렇게나 가혹하게 집중되어야 했는지, 잉골프는 제대로 된 설명도 해주지 않고 자신을 받아들일 생각이 없던 상대의 개인적이면서도 위험한 일에 기꺼이 동행하기로 마음을 먹는지 설명해야 한다면 지금같은 전개나 결말로는 안될 것이다. 물론 그런 것과는 상관없이 독자를 몰고가는 몰입도와 긴장감은 상당한 수준으로 이어지면서, 기꺼이 펼친 첫 장을 쉼없이 넘겨 끝내 앉은 자리에서 마지막 한 장마저 덮어내도록 만드는 재미는 보장되어 있지만 말이다.

 

 이 내용 이상으로 작성했던 리뷰를 임시로 저장했었는데 잠시 다른 일을 마치고 불러오니 한문단만 남은 채로 사라져버렸었다. 전에 썼던 내용이 생생한 감상을 그대로 옮겨놓은 것이라 마음에 들었었는데 지금은, 지나간 글을 되살려 엉성하게 연결해놓은 느낌이다. 분명 버튼을 눌렀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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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생의 중력 문학과지성 시인선 400
홍정선.강계숙 엮음 / 문학과지성사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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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럴 줄 알았으면 읽지 않는 것인데.

 

 표지의 '엮음'이란 말의 뜻을 깨닫고는 먼저 든 생각이다. 30여년간 매해 10여권의 시집을 내온 '문학과 지성사'의 400호 기념 시집이었다는 것을 몰랐다. 이 400호 시집은 301호부터 399호의 시집 들 중 시인 83명의 시를 골라 수록하였다. 사실 100호, 200호, 300호 때도 이랬었다고 하나 - 시집 읽는 일이 영 둔하디 둔한 내가 어찌 알아, 그걸. 때문에 교과서 한번 처음부터 제대로 읽어본 준비없이 요약본을 먼저 본 것 같아 영 찝찝했다. 공부 못하는 애들이 이런저런 핑계를 대는 것처럼 시 못 읽어 본 나도 핑계를 댄다. 내가 아직 시선집 모아읽을 레벨이 안되는데 벌써부터 읽어서 아쉽다고. 감상만 잘한다면야 이리 읽든 저리 읽든 뭐 어쩌겠냐만, 개인적으로는 아쉬웠다. 아는 만큼 보이는 법이고, 모르면 이렇게 손해다.

 

 그래도 몇 몇 시인들 이름이 눈에 들어와서 그래도 한달에 한 권 정도는 시집'도' 읽자고 생각했던 지난날의 나에게 고마움을 느꼈다. 덕분에 내가, 그래도 이 정도까지는 낯설지 않게. 다만 시인들의 시집에서 꼽힌 시들이 영 생소했다는 것은 아쉬웠다. 내게 무언가를 남긴 시가 꼭 다른 사람에게 무언가를 남길 수 있다곤 생각하지 않지만, 그래도 그 중 하나로 여기에 꼽혀 올라올 정도면 나도 좀 주의깊게 읽었어야 했는데 대부분 무심결에 지나쳐버린 시들이었던 것 같다. 그래서 새삼 눈에 들어오는 시들도 있었고 또 아직 읽어보지 않는 시집에 들어 있는 시들 중 마음에 드는 것들을 꼽아볼 수도 있었다.

 

 [ 타마리스크 나무 아래  - 신대철 "바이칼 키스"

 

모래폭풍이 땅을 뒤집는 순간 황야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어두운 몸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푸른 하늘, 붉은 흙먼지, 야생의 숨결을 받은 것들을 숨 돌릴 새 없이 몸부림쳤다. 무엇에 쫓겨 가는지 짐승들이 미친듯이 달렸다. 밤새 살아남은 발자국들은 거대한 먼지 굴 속에서 굴러 나와 먼지를 끌고 달렸다. 황야에 들어갈수록 긴 꼬리가 생기고 몸이 팽창했다. 달궈진 시간만 소멸하면서 생성되었다. 나는 내가 인간도 짐승도 아니라는 것 말고는, 내가 없는 곳에서 내가 무수히 태어난다는 것 말고는, 무엇이 소멸 속에서 생성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지평선은 둥글고 향긋해도

 그 중심은 깊고 황막한 곳

 

다시 황야로 들어간다면 모래폭풍 넘어 타마리스크 나무 아래 서 있고 싶다. ]

 

 신대철 시인의 "바이칼 키스"라는 시집은 제목이 워낙 강렬해서인지 읽었는가 헷갈릴 정도로 또렷하게 제목이 기억난다. 언젠가 읽어야지 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미리 만나게 되었다. 그리고 많은 시 중에서 가장 마음에 들어서 본문을 사진으로 찍어두기까지 했다.  '달궈진 시간만 소멸하면서 생성되었다. 나는 내가 인간도 짐승도 아니라는 것 말고는, 내가 없는 곳에서 내가 무수히 태어난다는 것 말고는, 무엇이 소멸 속에서 생성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는 부분이 굉장히 인상적이었다. 이를테면 영화 "인터스텔라"가 떠오르도록. 같은 시공간 안에 무수한 내가 존재할 수 있는, 그 의식은 끊임없는 신호로 보내질 수도, 존재가 무엇으로도 규정될 수 없을 수도, 어느 지점에서 존재하고 부재하는지도 모를 그런 모든 차원을 포함하고 또 넘어선 면을 그려낸 듯 했다. 황야와 사막을 말하는데도 우주를 떠올리게 만드는 점도 좋았다. 꼭 읽어야지.

 

 이 시와 같이 [ 보이저 1호가 우주에서 돌아오길 기다리며 - 함성호 "키르티무카" ] 시도 같이 적어뒀다. 내 느낌 상으로는 마치 연작처럼 보이기도 하고 신대철 시인이 만들어 놓은 세계에서 함성호 시인이 신호를 보내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내용 중에 [ 어머니 전 혼자에요 / 오늘도 혼자이고 어제도 혼자였어요 / 공중을 혼자 떠도는 비눗방울처럼 / 무섭고 고독해요 / 나는 곧 터져버려 우주 곳곳에 흩어지겠지요 / 아무도 제 소멸을 슬퍼하지 않아요 ... 후략... ] 하는 부분이 있는데 왜 내가 존재하면서도 존재하지 않는지 소멸되면서도 영원히 사라지지는 않는 존재로 남을 수 있는지 설명하긴 어렵지만 더불어서 느껴지는 무엇인가가 있다.

 

 그런데 이번에 내가 꼽은 시들은 공통점이 있는데 다음으로 적어둔 [ 책상 - 박형준 "생각날 때마다 울었다" ] 에서도 비슷한 감각이 나온다. [ 책에는 두 번 다시 발을 담글 수 없어요 / 나는 책상에 강물을 올려놓고 그저 펼쳐 볼 뿐이에요 / 내 거처는 공간이 아니라 시간일 뿐 ... 후략... ] 여기서도 내가 존재하는 것이 어떤 확고한 지점에 확실한 존재로서 있는 것이 아니라 그저 '시간' 어쩌면 순간 혹은 중복되어 산재할 수 있는 것으로 표현되는데 그 모호함과 불확실함이 다른 두 편의 시와 비슷한 감상을 불러일으킨다. 물론 '책상'이란 시가 좋았던 점은 그 외에도 [ 나는 어스름한 빛에 얼룩진 짧은 저녁을 좋아하고 / 책 모서리에 닿는 작은 바스락거림을 사랑하지요 ] 하는 부분의 정경이 애틋함을 불러일으키기도 해서지만.

 

 읽지 않는 것인데 하고 생각한 것치곤 꽤 흥미롭게 읽었다. 문지의 시집을 고집스럽게 읽고 있는데, 고집스러운 것 치곤 더디게 읽지만. 시집 중에서 뭔가 기본을 제시하는 것 같단 느낌이 들어서 그렇다. 수학의 정석이나 성문기초영어 같기도 하고. 아직 안 읽은 100호, 200호, 300호도 곧 읽게 되기를. 이런 준비되지 않은 자세가 아니라 준비된 배경을 가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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