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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들의 집
래티샤 콜롱바니 지음, 임미경 옮김 / 밝은세상 / 2020년 10월
평점 :
" 사실 솔렌은 어떤 일이 자신을 기다리는지 전혀 몰랐다.(67) "
읽다가 문득, 이 책은 참 좋다고 생각했다. 어떤 내용이 나를 기다리고 있는지 전혀 몰랐다. 책을 읽기로 마음먹었을 때도, 처음 책을 읽기 시작했을때도, 삶에서 몇번 상처를 입은 잘나가는 여자 변호사가 남을 도우며 상실을 채워나간다는 그런 진부한 이야기겠거니 했다. 그런데 읽다가보니 이곳저곳에서 자꾸만 눈길이 멈췄다. 솔렌의 감정이 비로소 터지는 순간 나 역시 이 책에 마음을 열어 긍정했다. 이 책 괜찮네.
" 솔렌이 아는 가난이란 고작해야 동네 빵집 앞의 젊은 여자, 손을 내밀어 돈 몇 푼, 혹은 빵조각을 구걸하는 여자의 모습을 하고 있을 뿐이다. 중략 그의 가난은 그림으로 치면 그저 배경에 속한 것이기 때문이다. 가난은 이 도시의 풍경을 구성하는 한 불변 요소, 으레 있기 마련인 무엇이었다. 멈춰 서서 동전 한 닢을 줘 봤자 그 여자는 내일도 주거 부정 상태일 게 아닌가. 그러니 그런 행동이 무슨 소용인가? ...중략... 솔렌은 이기적인 사람은 아니지만, 자기 일에 붙잡힌 다른 수많은 사람들처럼 그 여자 앞을 그냥 스쳐 지나갔고 뒤돌아보는 일도 없었다. 각자 자신의 일을 챙기고 나머지 일은 신이 알아서 하게 맡기자는 주의였다. 물론 그러자면 신이 있어야겠지만. (56) "
솔직히 솔렌의 생각에 동의하는 편이고, 그랬기 때문에 이 문장을 처음 읽을 때부터 꼽아 두었다. 아마 공감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라 생각한다. 가끔은 지하철 입구 앞에 서있는 판매원에게서 '빅이슈'를 사곤 했다. 잡지를 읽는 취미는 없는데 재활과 자립의 의지가 보이는 사람들을 도울 수 있는 직접적인 방법이라고 생각해서였다. 그리고 아주 조금씩 네이버의 해피빈 모금을 해왔다. 가끔 받아볼 수 있는 기부 후기를 통해 내가 모금한 금액이 어떻게 사용되었는지 확인할 수 있다는 게 이유였다. 소액을 이곳저곳에 무엇보다도 쉽게 기부할수도 있고.
적고보니 냉담한가 싶은데, 사실 우리가 그 이상 무엇을 더 할 수 있단 말인가 속으로 의문을 가지고 있었다. 세상이 바뀌나? 지금 내가 가진 것을 나눈다고 해서 뭐가 더 달라질 수 있나? 근본적인 사회구조가 바뀌어야 할 문제고, 더 많이 가진 기업과 사람들이 나서야 할 문제가 아닌가 싶었다. 물론 더 나아가서 신이 있다면 신이 해결해야 할 문제고.
" 지하철에서 내려 어둠이 깔린 밤거리를 걸었다. 빵집 앞까지 오자 늘 있던 자리에 그 여자가 있었다. 처음으로 솔렌은 발걸음을 늦춰 그 앞에 섰다. 지갑에 든 현금을 전부 꺼내 깡통 안에 넣었다.(89) "
솔렌이 처음 변하게 된 순간에도 조금 뻔한 흐름인가 싶은 마음이었는데, 조금씩 궁전에서 머물고 있는 사람들의 단단한 보호막이 거둬지면서 시선도 달라졌다. 표지에 써있는 문구가 맞았다. 신이 아니라, '우리만이 우리를 구원할 수 있다.'
이리스와의 만남을 통해 솔렌이 또 하나의 벽을 허물고 달라지는 모습을 보이는 과정은 고무적이었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이들이 솔렌을 위해 하나의 기능을 하는 부수적인 인물들에 지나지 않는것은 아닌지 의문이 들었다. 여자들의 집에는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있었고, 솔렌이 그들을 만나게 되면서 내면을 치유하고 새로운 시선을 갖게 된다는 전형성이 마음에 걸렸다. 그리고 릴리, 그녀에게 보이는 솔렌의 태도가 정말 옳은 것일까? 아마 읽는 사람에 따라 다른 생각이 들 것 같다. 개인적으로는 조금 아쉬운 면이 있었다.
솔렌에 대해 더욱 공감하고, 여러모로 생각해보며 읽긴 했지만 계속해서 교차되는 블랑슈에 대해서도 매력적으로 느꼈다. 결국에는 어떤 접점이 더 있을까 궁금했는데 생각보다 간단하고 명료했다. 블랑슈의 삶은 격정적이고 정석적인 위인의 그것과 같아 매번 몰아치듯 읽게 되고, 그 에너지에 확 사로잡히는 기분이 든다. 솔렌은 계속해서 휩쓸리고 망설이고 그럼에도 나약해진 내면을 다시 쌓아올리기 위해 애쓰는 보통의 삶이라 읽으면서 더 신경쓰였던 것 같다. 여성의 삶, 여성 문제에 대해 관심있는 사람이라면 흥미롭게 읽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