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직 워드
조나 버거 지음, 구계원 옮김 / 문학동네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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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을 쓸 때 피하려고 하는 표현들이 있다. 피하려고 노력하고 있는만큼 습관이 되어 잘 고쳐지지 않는 부분이긴 한데, 하나는 '~하는 것 같다' 이고, 다른 하나는 외래어 표현이다. 물론 이 밖에도 더 많은 문제점이 있지만 모든 것을 고려하면서 글을 쓰려고 하기엔 의지도 능력도 약하다. 책을 읽고 나면 가급적 서평을 써서 기록을 남겨두려고 하는데 어떤 책에 대한 감상을 글로 남기면서 확고한 끝맺음을 하기는 쉽지 않다. '매직 워드'를 읽으며 기대한 것은 나의 감상을 좀 더 공감을 얻을 수 있는 방식으로 표현할 수 있는 도움을 얻을 수 있을까 였다. 특히 책의 띠지에 '어떻게 하면 더 나은 설득자가 될 수 있을지 알려주는 놀라운 책-다니엘 핑크' 란 문구가 있었기 때문에 더욱 기대가 되었다.


 책에서 다루는 여섯 가지 유형의 매직 워드는 1 정체성과 능동성을 북돋우는 단어, 2 자신감을 전달하는 단어, 3 올바른 질문을 던지는 데 효과적인 단어, 4 구체적인 내용을 나타내는 단어, 5 감정을 자극하는 단어, 6 유사성(과 차별성)을 활용하는 단어를 말한다. 이 여섯 유형의 매직 워드에 대해 살피면서 가장 먼저 반가웠던 것이 '2장 자신감을 전달하라' 부분이었다. 처음 글을 쓸 때 신경쓰고 있다고 꼽은 습관 중 하나인 '~하는 것 같다'는 표현은 보통 내 생각이 강하게 드러나지 않게 하기 위해서 써왔다. 이는 2장의 내용과 겹쳐 있어서 특히나 유심히 읽었고, 가끔은 번거롭게 생각되는 이 작은 차이를 왜 신경써야 하는지 한꺼풀 더 의지를 다지게 되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4번째 유형의 매직 워드도 인상적이었다. 전에 다른 책의 서평을 쓰면서도 적었지만 글을 쓸 때 대상을 정확하지 않은 표현으로 넘기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조언을 듣고 나무의 이름, 식물의 이름을 찾아보게 되었다. 그저 숲에 나무가 있었다, 좋은향기가 났다는 식의 모호한 표현을 사용하기 보다 나무와 꽃의 이름을 알고, 향기도 어떤 향기인지 알고 구체적으로 쓰는 연습이 필요하다는 생각과 '구체적인 언어를 활용하라'는 4장의 내용은 같은 지점을 짚어내고 있어 신기했다. 어떤 상황에서 효과적인 작용을 하는지, 어떤 표현이 덜 구체적이고 더 구체적인지 직접적으로 표를 제시한 점, 반대로 추상적으로 표현하면 더 좋은 상황에 대한 예시 등이 함께 있어 읽는 재미가 있었다.


 말과 글에 대한 생각을 해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흥미롭게 읽게 될 만한 면이 있는 책이다. 솔직한 생각으로는 제목이나 표지에서 느껴지는 계발서의 전형적인 틀에서 벗어난 개성이 입혀졌다면 더 많은 관심을 받을만한 책일 것이다. 표지로 책을 판단하지는 않아야 하지만, 독자들에게 매력적으로 다가서는 디자인이 갖춰진다면 겉도 내용도 더욱 설득력이 생기지 않았을까. 흥미롭게 읽은만큼 약간의 아쉬움도 남았다. 하지만 내용은 아쉽지 않으니 읽어봐도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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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 소녀를 만나다
이영환 지음 / 문학동네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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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멍청이는 나다. (152) "


 단 한 줄로 한 쪽을 전부 채워낸 문장이 가장 인상깊었다. 사랑에 빠진 사람들에게 던지고 싶었던 말이 아닐까. 멍청이가 된 줄도 모르는 혹은 알고도 어쩔 수 없이 멍청이가 되어버리는, 사랑에 빠진 사람들. 아쉬운 순간이 하나도 없이 완벽한 연애를 하는 사람이 있을까? 내가 서투르고 혹은 세련되지 못해서일지 모르지만 진심이었던 순간들에는 언제나 멍청했던 내 모습이 있었다. '소년, 소녀를 만나다'는 그런 멍청했던 날들에 대한 이야기다. 굉장히 개인적인 이야기를 풀어내는데 읽다보면 이상하게 공감된다.


 앞에 써둔 짧은 문구는 #17 멍청이 내용에 나온다. 거기엔 " 그 남자애가 그애를 향한 마음을 학원 남자애들 앞에서 드러냈을 때, 그는 그애에게 접근할 수 있는 독점적 자격을 학원 남자들로부터 얻은 셈이었다. 그건 우리의 암묵적인 룰이었고, 누구나 아는 그 룰을 어기는 것을 무리는 좋아하지 않았다. '나도 그애가 좋다'라는 단순 명쾌한 명분을 나는 그 완고한 룰 앞에서 내세우지 못했다.(156) "는 내용이 나오는데, 다른 친구가 먼저 누군가를 좋아한다고 공표하고 나면 어쩐지 자신의 마음을 드러내기 어려워지는 미묘한 마음과 분위기를 잘 드러내 그게 어떤 상황인지 알 것 같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게 뭐라고, 싶은 작은 행동들이 좀처럼 앞으로 나가지 못하던 때를 하나씩 솔직하게 보여준다. 보고도 알은 체 인사를 건네지 못했던 날, 어떤 말로 고백해야 할지 실없는 고민을 나누던 날, 속마음과는 다른 모난 말만 하던 날, 작은 친절에 큰 의미를 부여하던 날, 모른 척 속마음을 떠보고 싶던 날들이 그림과 글로 펼쳐진다. 조금 간지럽고, 손과 발도 한번씩 접었다 펴주고, 잊어버린 척 살았던 누군가의 얼굴과 목소리를 떠올리다 보면 순식간에 마지막 책장에 다다른다. 어쩌면 책을 읽는 시간보다 혼자서 속으로 되뇌이는 추억들이 더 오래도록 이어졌는지 모른다.


 이 책의 가장 재밌는 부분은 맨 마지막에 등장하는데 작가의 말에 있다. " 좋아했던 소녀를 그리는 내게 "걔의 어떤 부분이 좋았어?"를 묻지 않은 아내에게 감사합니다. (189) "라고 적혀있는 부분이었다. 이 도발적인 문제작을 그리는 동안 장난으로라도 저 질문을 하지 않은 데에 감탄과 웃음을, 또 기어코 소녀들을 그려낸 의지와 용기에 웃음을 보내며 책장을 덮었다. 그리고 머리속에 떠오르는 과거들도 함께 다시 저편 어딘가로 덮어두기로 한다. 내일은 좋아하는 사람에게 떡볶이를 먹으러 가자고 청해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우리 모두 소년/소녀의 마음으로 내일은 떡볶이를 먹으러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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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만의 리듬으로 삽니다 - 80대 엄마와 50대 딸의 한 지붕 남남생활
신연재 지음 / 자음과모음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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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불완전한 존재여서 어떤 선택이 가장 완벽한지 알 수 없다. 그래서 모든 선택은 불완전하다. 그 사실을 인정하고, 선택 뒤에 따라오는 결과에 대해 최선을 다해 감당하고 책임지는 것에서부터 진짜 삶이 시작되는 것 아닐까. (30)"


 목소리는 생각보다 단단했다. 80대 어머니와 함께하는 일상의 소소한 이야기가 담긴 에세이가 아닐까 생각했는데, 비혼인에 대한 그릇된 발언을 꼬집어내는 비판부터 시작되었다. 처음엔 좀 당황했는데 잠시 생각해보고 이내 수긍했다. 적령기라 생각되는 시기부터 저자의 지금에 이르기까지 얼마나 많은 말들이 자주, 또 반복적으로 전해져왔겠는가. 그나마 비혼과 1인 가구가 이정도의 사회현상으로 나타나게 된 요즘에나 실례와 이해를 의식이나마 한다. 그러니 비혼인의 삶에 대해 이야기를 시작할 때 하하호호 말랑한 일화가 놓여져있을거란 예상이 엇나가도 어쩔 수 없다.


 " 지난번 강원도의 한 리조트에 갔을 때, 엄마와 산책을 나갔다가 어떤 할아버지가 혼자 벤치에 앉아 있는 모습을 봤다. 특별히 즐길 거리는 없어도, 가족과 함께 여행을 와 있다는 것 자체가 집에 혼자 우두커니 있는 것보다 저분에게 더 나은 일일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를 엄마와 나누었던 기억이 난다. (125)"


 나이를 점점 먹어가면서 나이 먹는 일이 가장 무서울 때가 새롭고 멋진 경험이 생기면 그게 젊은 사람들에게 어울려보인다는 생각이 들 때다. 나 자신에게 제약을 두고, 다른 사람에게도 편견 어린 시선을 보내는 것이다. 요즘 나잇값이라는 것에 고민할 때가 있는데 나이 먹은 만큼의 어른스러움과 걸맞음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과 나이에 구애받지 않고 하고싶은 것을 하면서 살아야 한다는 생각이 부딪히곤 한다. 저자가 탱고를 배우려고 했을때 나이제한이 있는 것을 보고 '물 흐리는 나이'가 되었다(124)고 했는데 차갑고 뾰족하게 찔러오는 표현이었다. 어떤 어른이 되어야 하고 어떻게 나이를 먹어야 하는 것일까 한참동안 생각해보게 되었다. 나중에 주변인들을 만나 한번씩 물어봐야지 마음 먹었다.


 저자가 여든이 넘은 어머니와 함께 살기 때문에 병간호라던지, 노후 돌봄의 주제가 나오는데 요즘 주변인들과 만나서도 적지 않게 나오는 얘기라 마음이 저절로 무거워지기도 했다. 전보다 병원에 방문할 일이 잦아지는 부모님을 모시고 병원순례를 떠나는 것이 혹은 가끔 입원이라도 하는 일이 생기시면 병실을 찾아가며 챙기는 것이 그동안 좀처럼 무관심해지기 어려운 나의 일이었기 때문이다. 누구는 당연히 자신이 챙길 몫이라고 받아들이기도 하지만 내 앞에 부모님의 노후가 놓여진다고 생각하면 어쩐지 나는 버거워져서, 문득 (늙은 나를 돌보아 줄 나와 같은)내가 없는 내 노후는 어떨까 염려도 해보곤한다.


 한 네번째 장에 들어서야 처음 기대했던 '엄마와 함께 사는' 일상적인 내용이 풀려나온다. 어떤 부분은 너무 똑같아서 웃고, 또 너무 똑같아서 피곤했다. 서로를 가장 아끼고 사랑하는 사이의 이야기니 당연히 소소하게 감동적이기도 하다. 어머니가 부추전을 해놓고 기다렸는데 저녁밥을 먹고 왔다고 하자 '미리 말을 해주지'(145)하셨다는 날의 이야기는 괜히 더 마음이 쓰였다. 언젠가부터 우리 엄마도 내가 먹을 음식을 잔뜩 해두고는 마음대로 골라가며 담아가는 나에게 선택받지 못한 음식들이 얼마나 맛있고 좋은지 홍보하신다. 선심쓰듯 그럼 조금 더 가져간다고 하면 신나서 가방에 담아주시니, 부추전을/반찬을 해놓고 기다리는 엄마의 마음이 생각나는 이야기였다. 


 공감도 하고 감동도 하고 대체로 웃으면서 때로는 심각한 고민에 빠져들며 그러나 즐겁게 읽었다. 에세이를 자주 읽지는 않는데 이렇게 가끔씩 마음에 드는 에세이를 만날 때면 더욱 반갑고 즐겁다. 비혼을 결심하는 젊은 세대가 많다고 하던데 조금 멀지만 가까운 미래의 혼자사는 삶이 어떨지 궁금하다면 '우리만의 리듬으로' 산다는 것이 어떤지 엿봐도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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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다정한 그림들 - 보통의 일상을 예술로 만드는 방법
조안나 지음 / 마로니에북스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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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언제나 맛없는 비스킷을 먼저 먹고 가장 맛있는 건 나중에 먹는 나는, 힘든 일을 한번 겪고 나면 나머지는 웬만하면 다 웃어넘길 수 있다. 그러니까, 햇살 가득한 스타벅스에서 이 글을 쓰는 수요일은 행복 그 자체이다. (41) "  


 어떤 분야이든 전문적인 지식과 안목을 가진 사람들을 보면 괜히 거리감이 들었다. 굉장히 평범한 사람인 나는 언제든 어느 누구와든 대체될 수 있는 흔한 사람인데, 그들은 뭔가 특별한 능력이나 세상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특히나 예술을 감상하고 그걸 풀어낼 힘을 가진 사람들은 더욱 멀었다. 분야마저 어렵게 느껴지곤 했다. 요즘은 생각을 바꿔 나도 뭔가 생각하고 받아들이는 만큼 즐거웠다면 됐다고 생각하지만 모든 마음을 내려놓기는 쉽지 않다. '나의 다정한 그림들'을 읽고 싶었던 이유는 조금이라도 더 보고 배우고 싶어서였다. 그런데 저 문장을 읽는 순간 순식간에 거리가 좁혀졌다. 책의 리뷰도 수요일에 써서 남겨야지, 마음먹었다. 


 책을 읽고 감상을 쓰는 시간동안 항상 내려져있던 거실창의 블라인드를 일부러 올려두었다. 어떨 때는 별안간 책을 읽다말고 블라인드를 올리러 달려가곤 했다. 늘 모니터와, 화면과, 활자를 보던 눈이 어느 한 순간이라도 푸르고 일상적인 풍경을 바라봤으면 좋겠다 마음먹게 되는 책이었다. 하루종일 외부와 단절시켜놓고도 답답한 줄 몰랐던 공간에 개방감이 더해지는 변화를 덕분에 꽤 즐기게 되었다. 아파트 단지 안에 마련해둔 화단의 나무들이 조금씩 물드는 사소한 풍경이라도 시선 안에 들어오면 특별해지는데, 화가들에게 더 넓고 푸르른 자연이 주어진다면 그리지 않을 수 없었겠구나 싶었다. 그래서 자연과 정물을 그린 작품들이 많은 것일까. 모델료가 필요하지 않다는 장점도 있겠지만. 


 읽으면서 공감도 많이 하고 닮은점을 찾아내기도 하느라 오래 걸렸다. 일상이 수시로 끼어드는 상황에서 할 일을 하는 고군분투인지라 책 안에는 코로나로 격리를 하던 시간, 반찬 해먹는 일, 잠들기 전 인터넷 쇼핑 같은 주제가 등장한다. 나 역시 책을 읽으면서 세탁소도 다녀오고, 분리수거도 하고, 택배를 받기 위해 몇 번이고 자리를 털고 일어나야 하면서 '느낌 있게 사는(183)'건 일상 안에서는 좀처럼 쉽지 않구나 했다. 어느 날 지인이 어떤 가수의 얘기를 하면서 결혼을 하면 예술성이 죽는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 명곡의 탄생은 짝사랑과 실연 기간에 집중된다는 우스갯소리와 곁들인 말이지만 순간 당황스러움이 느껴지는 말이었다. 책을 읽으며 떠오른 그 말을 다시 생각해보니 책 한 권 읽는데도 생활이 끼어드는 순간이 있는데, 예술을 하며 느낌을 유지하기란 얼마나 더 어렵겠냐는 뜻으로 느껴져 속으로 그랬구나 했다. 


 이 책에서 발견한 가장 세속적인 지점은 미술 에세이를 쓸 때 저자가 거치는 4단계(129)를 설명한 부분이다. 어떤 분야에 대해 에세이를 쓰고 싶은 사람이 참고해도 좋겠지만 미술 작품을 감상하는 방법으로 써도 좋겠다. 전에는 전시를 가기 전에 미리 공부를 안해가면 이해도 못하고 어떻게 감상해야 되는지 모를 것 같아 걱정했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따라다니는 도슨트 안내 시간에 그림도 제대로 감상하지 못하면서 설명만 들으며 힘들게 쫓아다닌 적도 있다. 그런 감상법이 나에게 더 잘 맞아서가 아니라 잘 모르면서 보는 걸 부끄럽게 또는 의미없게 여긴 탓이다. 하지만 모르고 보는 시간도 필요하다. '좋다'고 느꼈다면 "내 삶에 필요한 이유"까지는 아니더라도, 왜인지 이유를 생각해보자. 같은 감상법들은 나에게 더 잘 맞는 방법이라 도움이 되었다. 


 많은 그림들이 소개되는데, 샐리 스토치의 그림(25)을 안내 받으며 기쁨을 느꼈다. 처음에는 자연스럽게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인가 했는데, 책에서도 스토치의 그림을 소개하며 호퍼를 말한다. 물론 나중에 호퍼의 그림도 등장한다.(143) 하지만 둘 사이의 분위기가 다르고 굳이 누구의 그림이 더 좋다고 평하지 않아도 될 만큼 시선을 끄는 각자의 매력이 존재한다. 카페라는 익숙한 공간이 화폭으로 옮겨져서일까. 잘 모르는 예술의 세계를 쉽게 설명해주고, 유명한 작가와 그림들을 배우는 내용도 좋지만, 이런 어렵지 않은 접근이 마음에 들었다. 내가 커피를 한 잔 내려 책을 읽는 시간처럼 그래서 어떤 '작품 속 의미'들보다 내 마음을 사로잡는 '분위기'를 예술에서 음미하는 순간을 선사한다. 새삼 '다정한'의 의미를 깨달았다.


 책을 읽고 독후감을 정리하는 동안 잠시 여행을 다녀왔다. 책이 인상깊었던 탓일까, 흐리던 날이 개어 어느 날의 한라산을 바라보고는 책에서 본 오키프의 그림같다고 떠올렸다. 작가는 제주도 여행을 다녀오면서 아그네스 마틴의 <행복한 휴가>(225)를 이야기 했지만, 단순한 선이 칠해진 <행복한 휴가>보다는 캔버스에 유채로 그린 <페데르날>(91)이라는 그림이 한라산과 닮아 자연스럽게 연상되었다. 한라산이 이렇게 생겼었나 새삼스럽기도 했는데, 아마 이런 감상은 이전에 가지지 못했을 것이고, 앞으로는 혼자 한라산을 보며 이 그림을 떠올릴 것을 짐작하니 천천히 느리게 나를 변화시키는 힘이 독서에 남아있음을 발견한다. 책과 그림과 저자와 일상과 가까워지는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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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 맛집 산책 - 식민지 시대 소설로 만나는 경성의 줄 서는 식당들
박현수 지음 / 한겨레출판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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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성 맛집 산책은 그리움을 먼저 전해주었다. 경성이라 불리던 시대에 대한 그리움이 아니라, 책에 소개된 지금까지 이어져 내려온 식당 중 한 곳에 대한 추억 때문이다. 언젠가 엄마와 함께 종로와 인사동엘 다녀올 일이 있었는데 그때만해도 종로에 자주 가질 않아 목적한 곳 외에 어디서 식사를 하고 차를 마실지 몰랐다. 일을 마치고 괜찮아보이는 곳에 들어가 기분좋게 먹고 마신 우리의 외출은 썩 만족스러웠다. 그런데 그날 밤 우리의 자랑을 들은 아버지가 놀라움과 안타까움 게다가 약간의 기막힘을 담은 기색으로 거기까지 갔으면 이문설렁탕을 먹으러 갔어야지! 하시는게 아닌가. 대체 그 설렁탕이 무엇이길래! 눈앞에 놓인 설렁탕을 두고 '왜 먹질 못하니' 탄식하는 김 첨지를 떠오르게 만들었던 것일까. '경성 맛집 산책'에 바로 그 이문설렁탕 집도 소개되었다는 것을 알고 그때의 추억이 떠오르며 궁금했다. 


 책이 제법 귀엽다. 음식점에 대한 소개와 함께 메뉴판이 제공된다. 비싸보았자 50전 내외의 가격을 보며 부자가 된 기분도 느낀다. 만원만 가져가도 갑부가 되겠구나. 설렁탕이 15전 냉면이 20전이니, 뒤에 전 대신 천원을 붙이면 요즘 물가인 셈일까? 책에서는 1원에 5만원 정도로 소개했는데 1원에 10만원으로 봐도 무방할만큼 식대는 갈수록 오른다. 요즘 물가를 비교해 생각해봐도 일반적인 식사 한끼 가격보다는 좀 더 비싼가 싶은데, 책 속에 나오는 음식점들이 대부분 고급스러운 곳이라 호텔 식사값이나 커피값으로 생각해보면 비슷하다. 그러니 1원도 안되는 가격들에 살짝 넉넉한 기분을 내봤지만, 그때도 갑부는 커녕 설렁탕과 냉면 값 살벌하게 오른 물가에 허리띠를 졸라 매는 지금과 다를 바 없는 서민의 삶일 것이다. 시대가 시대니만큼 더 힘들었으면 모를까. 


 다시보니 가격면에서는 영 귀엽지만은 않은 경성의 맛집 면면을 살펴보니, 고급스러운 호화로움이 느껴진다. 그때 당시를 보여주는 신문, 사진 그리고 문학작품 안에서 등장하는 묘사를 살펴보면 꽤 재미있다. 얼마 전 유행했던 개화기 스타일의 의상을 그대로 입은 듯한 사람들과 한복을 입은 사람들이 섞여 광화문이나 인천, 전주, 군산 같은 관광지에서 요즘도 볼 수 있는 모습같기도 하다. 그 시절 사람들의 옷차림이 내노라하는 식당들의 호화스러움 못지 않게 멋을 낸 점이 인상적이다. 이 고급 음식점들이 소설 등에 자주 등장하는 것을 보면 요즘 위스키를 마시고 오마카세나 호텔 식사를 예약해서 향유하는 문화가 새삼스러운 과소비 풍조라기엔 오래된 것이 아닌가 싶다. 


 책이 상당히 두툼한데 읽는 데에는 오래 걸리지 않는다. 책을 읽고 나니 어떤 장소들은 눈 앞에 풍경이 펼쳐질 것도 같다. 이제는 흔해진 음식들이지만, 여전히 사랑받고 있는 식문화로 자리잡은 메뉴들을 컨셉에 맞춘 차림을 하고 즐기러 다녀와도 재밌겠다. 시간을 뛰어넘어 혹은 옮겨와 오래된 가을 길을 걷는 특별한 산책을 다녀와도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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