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짝반짝 추억 전당포
요시노 마리코 지음, 박귀영 옮김 / 포레스트북스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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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어른들은 일부러 바닷가 절벽에는 가까이 가지 않았다.(6) "


 처음부터 의심하면서 읽었다. 마법사에 대한 이야기라니, 사실 마법이 아니라 아이들의 상상과 관련된 이야기가 아닐까, 싶었다. 그래서 어른들이 일부러 전당포가 있는 절벽에 가지 않고 아이들의 상상을 지켜주는거라고 생각했다. '내가 벌써 간파해냈지' 하는 기분으로 저 문장을 가장 먼저 꼽아놓았다. 그런데 책을 다 읽고 나니 또 다른 감상이 마음 속에서 생겨났다. 그래서였구나. 모든 것에는 끝이 있어서.


 " "납득한 게 아니에요. 그 애의 사고방식은 지나치게 극단적인 면도 있어요. 단지 저나 모두가 알고 있던 정답을 말하지 않고 자기 생각을 탁 말해버리다니 멋지다고, 나중에 그렇게 생각했어요. 그다음부터는 점점. 감기가 아니라 주말만 돼도 만나지 못해서 보고 싶은 마음이 가득해져요."

 인터뷰가 계획과 전혀 다른 방향으로 폭주하고 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닫고, 리카는 어색하게 덧붙였다. 

 "그래서 저는 당신도 그런 상대가 있지 않을까 하고, 그걸 알려줬으면 한 거예요."

 마법사는 담담하게 대답했다.

 "우리에게 보고 싶은 마음 같은 건 없어. 인간이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하는 거잖아?"

 "어, 그런가요?"

 "그래. 왜냐하면 우리 마법사는 생명이 영원하거든. 그래서 지금 만나지 못하더라도 언젠가는 만날 수 있어. 너희 인간이 누군가를 정말정말 만나고 싶어 하는 까닭은 언젠가 영원히 만나지 못하는 날이 온다는 걸 알기 때문이야." (43) "


 사실 얼마 전 가만히 누워 한결 시원해진 바람을 맞다 문득 우리는 하루에도 수십 수백명의 사람들을 거리에서 지나쳐가며 살아가고 있는데 왜 과거에 알게 되었던 사람을 우연히 만나게 되는 일은 적을까 생각했다. 그러다 학교 다닐 때 같은 반이었던 친구들을 반이 달라지거나, 졸업을 하고 난 뒤로 이렇게 평생 두 번 다시 만나지 못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분명히 자각하고 이별한 적이 있었나 짚어봤다. 지금은 기억조차 희미한 수많은 친구들이 있었고 어딘가에서 열심히 살아가고 있을테지만 어쩌면 다시는 만나지 못하는 인연들이라 생각하니 모두에게 조금 더 잘할 걸 싶었다. 그때는 그런 걸 알수도 없고 또 알았다하더라도 이런 식의 후회를 할 거라고 생각치 않았을지도 모르지만.


 요시노 마리코의 '반짝반짝 추억 전당포'도 그런 만남과 헤어짐, 기억과 추억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깊이있게 누군가를 사귀고 이어지는 인연을 소중하게 간직하는 마음과 태도의 중요성을, 지우고 싶은 쓴 기억이나 즐거웠던 기억 또 아무리 사소하여 보잘 것 없어 보이는 일상의 한 부분이라도 자신을 이루는 소중한 조각임을 추억 전당포를 이용하는 아이들의 모습을 통해 조용히 비추어준다. 어쩌면 당연한 이야기라고 생각되겠지만 막상 천천히 책을 읽으며 리카와 하루토의 성장을 지켜보고 나면 마지막에는 감동하게 된다. 이렇게 순수한 감동을 준다는 점이 좋아서 청소년 도서를 읽는게 좋다.


 창을 닦는 달팽이와 차를 내어주는 다람쥐, 쓰다듬을 받는 갈매기 같은 동화적인 이야기를 좋아한다. '마법에 걸린 사랑'이란 디즈니 영화를 몇번이나 반복해서 볼 정도로. 표지에 있는 다람쥐를 보고 처음에는 인형이라고 생각했는데 매번 집안일을 돕는 야무진 모습으로 등장해 읽는 재미가 있었다. 어른이더라도 이런 취향을 가지고 있는 독자라면 충분히 즐겁게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초등학교 시절의 내가 '반짝반짝 추억 전당포'를 읽었다면 그 날 밤에 침대에 누워서 나라면 어떤 추억을 맡길까 고민하다 잠들었을테다. 물론 지금도 그러긴 한다. 독후활동으로도 아주 좋은 주제가 여럿 나올 책이라 읽어보기 참 좋을 것이다. 책을 읽고 생각해보자. 나라면 어떻게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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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의 요새 - 사유의 미로를 통과하는 읽기의 모험
고명섭 지음 / 교양인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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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응축 영역'이란 사랑의 감정이 응집되는 대상 곧 사랑의 파트너를 말한다. '정박 지점'이란 사랑이 닻을 내리는 지점 곧 사랑하는 이유다. 문제는 응축 영역과 정박 지점이 항상 일치하는 건 아니라는 데 있다. 슈미츠는 '먼저 죽은 파트너를 생각나게 한다'는 이유로 어떤 여자를 사랑하는 남자를 사례로 든다. 그 경우에 사랑의 대상은 현재의 여자이지만 그 사랑의 목표는 과거의 여자다. 응축 영역 곧 사랑의 대상과, 정박 지점 곧 사랑의 이유가 분리돼 있는 것이다. 이런 사랑은 파국으로 끝날 가능성이 크다. (84/사랑은 왜 깨지기 쉬운가) "


 [그앨 정말 좋아하나 / 너를 닮아서 사랑하나 / 흔들리는 마음은 점점 알 수가 없어]

오래 전 한 가수가 불렀던 노래의 가사가 떠오르는 순간이었다. '사랑의 딜레마'는 이리도 가까운 곳에서 '응축 영역'과 '정박 지점'의 어긋남을 노래하고 있었다. 읽으면서 쉽지 않다고 몇번을 되뇌이고 있다가 직관적으로 '이건 나도 예를 들어서 설명할 수 있겠는데?' 싶은 깨달음이 온 부분이다. 어렵지만 어렵지만은 않다. 


 '생각의 요새'는 약 500여쪽에 달하는 인문학 도서다. 책의 소개로는 '오컴의 면도날'같은 간결하고 선명한 언어로 사상가들의 생각과 개념을 소개하고 있다고 하지만 일단 어려워보인다. 하지만 어려운 말 쓰지 말라고 화내는 것보다 그런 뜻이었구나 하고 배워가는 사람이 되고 싶기 때문에 천천히 읽어보려 도전했다. 나와 같은 입장의 사람들에게 좀 더 유혹적인 리뷰가 되었으면 해서 다가가기 쉬울 감상을 소개글보다 먼저 넣어보았다. 면도날은 아니더라도 가위정도는 될만한 시선이었다면 좋겠다.


" 루만은 사회적 체계가 '소통'(커뮤니케이션)의 방식으로 작동한다고 말한다. 소통은 정보를 알려주고 그 정보를 이해하는 과정을 가리키는 말이다. 소통은 '정보-통보-이해'의 세 단계로 이루어진다. 누군가 생각 곧 정보를 다른 사람에게 통보하면, 그것을 받아들여 이해하는 순간에 소통이 성립한다. 생명체가 끊임없는 신진대사로 자기를 유지해 가듯이, 사회적 체계도 끊임없는 소통의 반복으로 자기를 유지해 간다. 만약 소통이 사라지면 사회적 체계는 소멸한다. (106/체계이론과 주체 없는 사회학) "


 요즘 SNS를 처음 이용해봤는데, 허공에 아무말을 말해보는 기분이 들어 사람들이 왜 이런 걸 하는걸까 생각이 들었다. 서로를 친구라 서슴없이 부르고 '소통'하자며 하트를 남기는 것을 부럽게 바라보며 SNS 초보는 혼자 궁금했던 것이다. 우리는 왜 가장 깊고 내밀한 공간에 들어앉아 그림자 같은 상대에게 계속해서 말을 건내고 소통을 이야기할까. 소멸되고 싶지 않은 사회적 체계가 우리 내면 무의식에 자리잡아 어디로든 무엇이라도 발신하여 수신을 얻어내라 시키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일부 흡충이나 촌충이 숙주를 조종하는 것처럼.


 또 하나 흥미로웠던 부분은 " 오늘날 민주주의는 유권자가 선거로 대표를 뽑는 '대표제 민주주의'(대의민주주의)를 뜻한다. 그러나 대표제 민주주의는 '인민의 직접 통치'라는 민주주의의 본질을 제대로 구현하지 못한 열등한 민주주의라는 평가를 받는다. 직접민주주의를 실행할 여건이 돼 있지 않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채택한 차선의 민주주의라는 것이다. (124/대표제의 길, 민주주의의 길) " 이라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내용이었다. 특히 홉스와 루소의 사상이 충돌하는 부분에 이르러(126) 요즘 시기에 이 부분의 내용을 읽는다면 공감도 되고 생각할 점도 많을 것이다. 


 " 대표제는 다수의 의지로부터 떨어져서 대표자가 독자적으로 행동할 가능성을 허용한다. 나아가 스스로 의지를 드러낼 수 없는 것을 대표해서 행동하는 것도 대표제에서는 가능하다. 그런 차원의 대표제가 적용될 수 있는 사례로 이 책은 환경. 생태 문제와 미래 세대 문제를 든다. 지구를 대표해 온난화 문제를 제기하고 싸우는 것, 멸종 위기에 처한 동식물을 대표해 보호를 요구하는 것이다. (127/대표제의 길, 민주주의의 길) "


 우리 사회의 뜨거운 감자가 되고 있는 현실적 문제를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않더라도 "태어나지 않은 미래 세대를 대표해 지금 세대에게 문제를 제기하는 것도 가능하다.(128)"로 이어지는 책의 내용은 꽤 강렬하게 다가왔다. 처음 책을 읽었을 때는 영화 '콘크리트 유토피아'를 떠올리며 대표제의 명암을 가늠해보았었는데, 지난 24일을 기점으로 연일 이어지는 뉴스를 보며 특히나 생각이 많아지는 부분이었다. 


 책의 몇몇 부분과 함께 나의 짧은 감상을 정리하며 리뷰를 남겼는데 어떤 부분은 좀 멀리 떨어져서 흐린눈을 하고 지나가기도 하고, 어떤 부분은 생각이 알 수 없는 곳으로 튀어 한동안 멀거니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몸 테크닉(142)'과 '헤게모니 투쟁과 대중문화(149)' 부분을 읽으며 언급되는 하비투스, 대중문화에 대해 생각하다 이런 속도로는 연말에나 완독하여 리뷰를 쓰겠구나 싶어 초반부 읽은 내용을 바탕으로 추천글을 남긴다. 생각보다 흥미로운 내용도 많고 생각이 튀어가는 지점이 재밌으면서, 빨리 다른 사람과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어지는 책이다. 처서가 지나고 날이 선선해지는 시기가 오고 있으니 당신에게 사유를 선물할 '생각의 요새'를 하나 지어보는 것도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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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름
델핀 페레 지음, 백수린 옮김 / 창비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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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입추가 지나고 처서가 왔어도 한낮을 지독하게 울리는 매미의 울음소리를 듣다보면 여름이 아직 다 끝난 것은 아니지만, 올 여름은 확실히 각별하다. 코로나와 이런저런 사정으로 잠시 멈췄던 발걸음을 떼어 여행을 다시 떠나게 되었다. 이제는 가족들도 각자의 생활이 있어 가족 여행을 가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닌데, 전부는 아니어도 거의 모두가 3일에 걸친 여행을 함께 떠나 힘들고도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시간이 지나고나면 오래도록 함께 이야기 할 추억이 되었다고 생각하니 흡족한 한편, 확실히 가족 여행은 힘들다.


 이렇게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난 뒤에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름'을 보니 마음에 더 와닿는 부분이 많고, 제목마저 더 내 이야기 같은 공감이 됐다. 수채로 연하게 그려진 그림이 보여주는 이야기가 한눈에 들어오고 글로 써진 이야기는 얼마 되지 않지만 하나하나 다정하고 애틋하다. 엄마와 할아버지 장의 여름에서, 엄마와 세티에게로 이어지는 추억들은 단단한 고리가 되어 가족을 하나도 강하게 묶어주는 듯 하다. 


 여행의 마지막에 그토록 꼼꼼히 챙기던 우산을 잃어버리고 돌아온 탓에 세티가 종종 모자를 찾는 부분에서 책장을 멈춰 분실물 센터를 한참동안 뒤적였다. 세상에 이렇게나 많은 우산이 분실물이 되어 주인을 기다리고 있다니. 우산을 키워드로 한 3일간의 습득물 신고 내역을 둘러보는데도 500개 이상의 목록을 훑어야 했다. 그 많은 우산들 중에 내 우산은 없었다. 나도 우산이 필요했던 다른 여행자에게 내 우산을 선물했다고 생각해야 할까. 무언가를 잃어버린 것이 오랜만이라 마음이 헛헛하다. 이 여름의 유일한 아쉬움이 될 듯 하다.


 책의 마지막은 아이가 엄마에게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름'이었다고 말하며 끝을 맺는다. 하지만 나의 여름은 이제 더이상 아이가 아닌 나의 감상보다도 함께한 짧은 시간이 올해 여름을 어떻게 기억하게 해주었고, 어떤 여행이었는지 부모님의 감상이 궁금한 시간이었다. 분명 모든 것이 다 좋지 않았겠지만 그래도 '함께해서 아름다운 여름'이었다고 여겨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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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가장 위험한 곳, 집 앤드 앤솔러지
전건우 외 지음 / &(앤드)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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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사를 하기 전에 살던 집에서 한동안 악몽에 시달렸다. 어느날 갑자기 시작된 악몽은 혼자 잠에서 깨어나는 때를 노리듯 반복됐다. 온몸에 돋아난 소름이 목덜미와 다리, 팔등을 타고 돌아다닐때 어두운 집에 혼자 있다는 사실이, 잠들면 또 악몽을 꿀지 모른다는 불안이, 악몽을 꾸는데는 뭔가 이유가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의식되어 견딜수가 없었다. 단순히 어느 날 어두운 집에 들어왔을때 반은 장난 삼아 반은 불안을 떨치려 큰소리로 '나와, 여기 있는거 다 안다'하고 말해보는 것과는 달랐다. 견디다 못해 엄마에게 불면을 토로했더니 절에서 부적을 몇 장 받아와 문에 몇 장 붙이고 불사른 연기를 집안 곳곳에 입혔다. 미신이라고 생각하겠지만, 그날 이후로 그런 악몽을 더는 꾸지 않았다. 진짜 효과가 있어서인지, 그저 심리적인 요인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마음과 생활에 안정이 찾아왔고 만족스러웠다. 


 집이 공포스러운 공간이 되었던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당신이 가장 위험한 곳, 집'이 궁금하기도 하고 읽기 무섭기도 했다. 이 책을 통해 그 때의 두려움이 다시 머리 속에 심어져서 또 악몽을 꾸게 되면 어떡하지 걱정이 들기도 했다. 어떤 부분들은 초자연적인 현상을 암시하는 묘사가 무섭게 느껴지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현실적인 공포에 바탕을 두고 있어 염려했던 것보다는 편안히 읽었다. 가장 첫번째 작품인 '누군가 살았던 집'이 책을 읽기 전 예상했던 공포와 가장 비슷한 결을 가지고 있었다. 심지어 요즘 묘하게 의식되었던 화장실 냄새라는 요인이 읽는 내내 신경쓰여서 결국은 책을 읽다 말고 화장실로 달려가 대청소를 하기도 했다. 알고보니 구석에 청소용으로 둔 목초액 병 때문에 나는 냄새였다. 두려움의 원인을 파악하고 나니 지극히 현실적인 이유였다는 걸 알면 허탈하면서도 과학과 문명이 승리한 기분이 들곤한다. 책에선 현실과 환상이 섞인 채 끝났지만.


 두번째 작품인 '죽은 집'은 한동안 생소하고 어렵게 느껴져 책도 찾아 읽어봤던 '특수청소업체'에 대한 내용과 지금도 많은 사람들을 괴롭게 하고 있는 '빌라왕 전세사기'에 대한 내용이 얽혀있었다. 책에 수록된 작품들 중 유일하게 희망적인 내용으로 끝이 난다는 점이 특별하고, 그래서 오히려 비현실적인 느낌을 받았다. '죽은 집'은 초자연적인 존재, 악몽 이런 것들을 말하지 않고 가장 현실적인 내용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그런데도 등장 인물들이 희망을 봤다는 이유로 비현실적이라 느껴진다니, 어떤 허구보다 현실이 더 잔인하고 무섭다는 말이 다시 한 번 떠올랐다. 전체적인 분위기와 안 어울리는 건 아닌가 싶지만, 가장 안전하고 아늑한 곳으로 여겨질 집이 가장 위험한 곳으로 표현되는 제목처럼 아이러니함을 짚은 작품이라고 생각하면 비슷한 결로 여길 수 있을 것 같다.


 '반송사유'는 약간 거칠게 느껴져서 섬세한 공포를 느끼지 못해 아쉬움이 남는 작품이었다. 메일을 주고 받는다는 재미있는 형식으로 되어 있는데 의도적으로 비어진 여백이 공포를 확장시키지 못하고 힘을 잃어서 아쉬웠다. 양현이 반복해서 말하던 '낚시바늘'이 가지는 의미가 무엇인지 늦은밤, 새벽시간의 메일에서 보이는 이상한 언동이 점차 낮에도 보이는 변화, 양현의 집에 대해 염려하던 김혜가 어느 시점부터 메일을 수신하지 않게 된 이유같은 것들이 무어라 주어지는 것 없이 보여지다 마무리되어 버린다. 좀 더 주의깊은 독자가 되어 숨겨진 공포를 찾아내 읽어야했던 걸까 아니면 좀 더 친절하게 두려움으로 독자를 이끄는 요소들이 필요했을까 여러번 읽어보았지만 아쉬움이 남았고, 다른 독자들의 생각이 궁금해진다. 


 '그렇게 살아간다'는 집보다는 집에 사는 사람들이 더 중점이 되는 작품이었다. 다른 작품들은 집이라는 공간을 어느 정도 활용했다면 '그렇게 살아간다'는 철저히 인물들의 내면이 공포가 된다. 죄책감, 괴로움, 상실감, 슬픔, 고통 같은 감정이 인물의 행동과 감정에서 비롯된다. 집은 그들이 한 공간에서 머무는 장소의 역할만 하기 때문에 '가족'이라는 주제에 더 맞는 작품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현실적인 무서움이 와닿았다. 어느정도 나이를 먹고 나니 가족이 아프거나 가족을 잃게 될지도 모를 상황을 몇번 생각해보게 되는데, 막연히 겪을지도 모르는 일이 아니라 예정된 미래이기 때문에 좀 더 숨이 막히는 답답함을 동반한 내용이었다. 진혜의 엄마가 헬스장에 다시 운동하러 가도 되는지 죄책감을 가지는 현실적인 내용들이 특히 인상적이었다. 


 시작부터 집이 무서웠던 경험담을 풀어놨지만 책의 위험한 경고에도 불구하고 집은 여전히 다른 어떤 곳과도 비할 수 없는 '홈 스위트 홈'이다. 우리는 집에 있어도 집에 가고픈 심정을 경험한 공부하는, 일하는, 지쳐본 현대인들이니까. 가장 익숙하고 편안하며, 나 자신 그대로의 모습으로 있을 수 있는 공간인 집을 비틀어 봤다는 것만으로도 흥미로운 시도였던 책이다. 집이라는 공간이 가진 이미지 때문에 비일상, 공포, 불안과 곁들였을때 더 자극이 크게 다가오는 효과도 있었다. 마침 주말에 본 영화에서 나왔던 노래를 떠올리며 '당신이 가장 위험한 곳, 집'의 서평을 썼다. '즐거운 곳에서는 날 오라하여도 내 쉴 곳은 작은 집 내 집 뿐이리' 집이 가장 무서운 책을 읽고, 멸망한 세상에서 집이 가장 중요한 영화를 본 주말이다. 모두 집에서 읽고 먹고 자고 생각하고 행복하며 생활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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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몽과 망상 - 어느 인턴의 정신병동 이야기
무거 지음, 박미진 옮김 / 호루스의눈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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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랫동안 어둠 속에서 헤맨 사람에게는 어둠이 바로 그 사람을 단련시키는 무공이다. 자신은 의식하지 못했겠지만 그에게는 어둠이 필요하다. 증상은 환자가 삶을 유지하도록 돕는다. '증상은 생존을 위함이다'라는 인식은 정신분석의 기초이다. 환자에게는 이 증상이 필요하기 대문에 있으며, 불필요해지면 증상은 자연스레 사라진다. 쓸모없는 기관이 스스로 퇴화하는 것처럼 말이다. p81 (망상 속의 괴물 중) "


 나는 무던한 사람이다. 강박적이거나 예민한 부분이 좀 있지만 대체로는 무심하고 게으르다. 절대적인 기준으로 어떻게 구분될지 모르겠지만 스스로 생각하기에 그렇고, 그런 이유로 주변과의 마찰이 있던 적도 있으니 열에 여덟 정도는 나를 그렇게 표현하지 않을까 싶다. '악몽과 망상'을 읽으면서 섬세함과 예민함에 대해 주로 떠올렸다. 인물에게는 '악몽과 망상'이었겠지만 읽으면서 '슬픔과 절망'을 가장 많이 느꼈다. 누군가의 내면에 고통스러운 사건이 새겨진 흉터를 바라보는 일이 그렇지 않은가. 


 처음에는 호기심으로 읽었다. 정신병동 이야기라니, 심리와 정신에 대한 다양한 케이스를 접해볼 수 있을테니 궁금하고 흥미로웠다. 이러한 호기심은 타인의 병증을 자극적인 소잿거리로 삼는 것 같지만 잘 모르는, 어려운 지식에 대해 좀 더 쉽게 알아보려는 욕구와 닿아있는 면이 크다. 무슨무슨 증후군이나 트라우마, 가스라이팅 같은 심리학 용어들이 한 번 알려지면 유행처럼 번져나가 사용되지 않는가. 읽어가면서 호기심이 이해와 공감으로 번져가는 경험을 하게 된다. 내용 자체가 단순 케이스의 소개에 그치지 않고 인물의 삶과 내면을 함께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읽는데 시간이 오래 걸리고, 또 그래서 이 책이 좋았다. 


 " 처음 팡위커를 만났을 때, 고양이에 관해 물었던 것이 무슨 뜻인지 이제야 알 것 같았다. 그 애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고양이가 아니라 바로 엄마였다.

 "다가가면 도망가버릴까요?"

 (.)

 "그럼 제가 저 멀리 가면 따라올까요?"

 (.)

 "글쎄, 너랑 아무 사이도 아니잖아."

 "무슨 사이라면요?"

 (.)

 더는 생각하기도 싫었다. 팡위커라고 두려움과 아쉬움이 없었을까. 다시는 수영할 기회가 없을 것 같았다고 했던 말은 그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 역시 자신의 모습 그대로 살고 싶은 게 당연하다. p139 (동생이 만들어낸 형 중 내용 일부 가림) "


 '동생이 만들어낸 형'은 가장 마음 아프게 읽은 내용 중 하나이다. 다중인격은 소설, 영화같은 창작물에서 많이 다뤄지는 소재라 여기서의 내용도 약간 클리셰처럼 느껴지긴 하지만. 책의 내용도 인상적이지만 나는 부모와 자식 사이의 관계를 개인적인 경험과 엮어 확장해나가는 시간을 가질 수 있어 좋았다. 가끔 형제자매를 둔 지인과 부모님은 자식들 중 누구를 가장 좋아할까,란 주제로 대화를 나눌 때가 있다. 물론 아이에게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 하듯 부모님에게 '우리 중 누가 제일 좋으세요' 물어볼 수는 없다. 하지만 의외로 이 주제로 대화를 나눈 지인들은 대체로 분명히 형제자매 들 중 누군가를 꼽아냈다. 그게 자신이든 아니든. 


 자식에게는 부모가 절대적인 존재이다. 하지만 부모에게 자식은 여럿 존재할 수 있다. 부모가 자식에게 베푸는 사랑과 헌신은 대체로 자식이 부모를 향하는 것보다 크다. 이런 일반적인 속설들만 나열해봐도 관계는 복잡하다. 자신의 필터로 걸러둔 그동안 겪어왔던 사건들을 모아서 속단해서는 안될 문제다. 하지만 우리는 철없이 우리의 경쟁자들 사이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애정의 크기를 가늠해보게 된다. 팡위커의 이야기를 읽으며 좋은 아이가 되기 위해 노력했던 것들, 사랑받기 위해 경쟁했던 것들, 여전히 가장 사랑받고 싶다고 갈구하는 마음을 은연 중에 드러냈던 '누구를 가장 좋아할까'란 질문의 본질을 하나하나 바라봤다.


 이 누군가에게 애정과 관심을 받고 싶다는 욕구가 얼마나 중요한지, 대부분의 환자들에게 타인과의 교류로 인한 병증이 있었고 그 상황에 대해 대부분 공감할 수 있었다. 그 중 하나인 추신의 이야기는 나말고도 많은 여성들이 공감할 것이다. 


 " 추신은 매일 음식을 극소량만 섭취하면서 깡마른 몸매를 유지하고 있었다. 신경성 식욕부진증 환자는 보통 신체 이상형태성 장애를 겪는다. 보통 사람들이 볼 때는 이미 너무 말라서 아름다움을 잃은 수준까지 갔는데도 정작 본인은 더 마를수록 보기 좋다고, 아직 더 살을 빼야한다고 여기는 것이다. 마른 몸에 비정상적으로 집착하며 자신의 몸에 대한 감각과 지각이 완전히 왜곡된 상태이다. p177 (침묵의 폭식증, 속죄의 거식증 중) "


 추신의 식이장애는 어릴 적 겪은 트라우마와 관련되어 있지만, 대부분 사람들이 식이장애를 가지게 되는 이유가 마른 몸에 대한 미적기준 때문이다. 나 역시 극단적이지는 않지만 절식과 폭식을 하는 식이장애를 가지고 있다. 요즘은 건강적인 문제 때문에 식사를 조절하고 있는 이유가 크지만 마른 몸을 가지고 싶다는 욕망도 여전히 섞여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타인의 시선에서 자유롭다면, 호감을 얻고싶다는 욕망이 외양이 아닌 내면으로 집중된다면, 이런 문제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까. 타인에게서 얼마나 더 초연해져야 이런 욕망이 다스려질까?


 " 그가 저지른 나쁜 짓에 대해 따질 수 없을 정도로 무식했지만. 천진난만함과 잔인함은 본래 유의어가 아니던가. p301 (내 바지 어딨어? 중) "


 다시 돌아가서 처음에 나는 내 무심함에서 비롯된 주변과의 마찰이 있었다고 밝혔다. 사실 좋게 포장하기 위해 무심함이라고 했을 뿐 무신경함, 이 책에서의 무식함과 다를 바 없는 언행으로 상대에게 상처를 주었을 것이다. 지금의 나는 주변인들의 범위를 많이 줄이고, 단정적인 어조로 공개적인 곳에서 말하기를 조심스러워 하는 편이다. 과거 가까운 상대에게서 '너의 이런 언동에 상처받았다'는 말을 들은 적 있기 때문이다. 책을 읽으며 곰곰히 생각해보니 나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상처를 주게 되었다는 말이 내심 충격으로 작용해 시간이 지날수록 내면으로 집중을 옮겨가고 있던 것은 아닐까 싶다. 

  

 그런데 타인과의 관계는 점점 더 좁고 내밀한 곳으로 집중되는데 타인의 관심과 호감을 얻고 싶다는 욕망은 여전히 지속되고 있었다. SNS의 좋아요를 확인하거나, 내 겉모습이 어떤지에 대해, 지금 어떤 냄새가 나고 있는지 확인하거나, 내가 무엇을 갖고 있는가 헤아려보게 되는 행동은 사회와 내가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당연하게 나타나는 것일까? 아니면 이런 행동들은 외적인 것에만 치중하는 부자연스러운 욕망일까? 책을 읽으며 상충되는 자신의 모습을 의식하고 궁금함을 느끼게 되었다. 처음은 단순한 호기심이 앞섰다면 읽으면서 점차 책에서 자신으로 생각을 확장하도록 만드는 꽤 괜찮은 책이었다. 


 책의 내용은 인물들의 관계가 얽히면서 조금 흐름이 달라지게 되는데 그 점이 조금 아쉬웠다. 자연스러운 흐름이 아닌 마무리를 위한 사건을 만들고 매듭 지은 수순처럼 느껴졌다. 개인적인 아쉬움과는 별개로 책은 재밌다. 거의 700쪽에 달하는 두꺼운 책이지만 잘 읽힌다. 날이 더우니 책과 함께 시원한 카페로 피서를 떠나 독서라는 행위를 보여주기 해도 좋을 것 같다. 내면을 가꾸는 행위를 보여주기로 이용한다면 플러스 마이너스 제로의 가책을 느껴도 될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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