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의 요새 - 사유의 미로를 통과하는 읽기의 모험
고명섭 지음 / 교양인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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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응축 영역'이란 사랑의 감정이 응집되는 대상 곧 사랑의 파트너를 말한다. '정박 지점'이란 사랑이 닻을 내리는 지점 곧 사랑하는 이유다. 문제는 응축 영역과 정박 지점이 항상 일치하는 건 아니라는 데 있다. 슈미츠는 '먼저 죽은 파트너를 생각나게 한다'는 이유로 어떤 여자를 사랑하는 남자를 사례로 든다. 그 경우에 사랑의 대상은 현재의 여자이지만 그 사랑의 목표는 과거의 여자다. 응축 영역 곧 사랑의 대상과, 정박 지점 곧 사랑의 이유가 분리돼 있는 것이다. 이런 사랑은 파국으로 끝날 가능성이 크다. (84/사랑은 왜 깨지기 쉬운가) "


 [그앨 정말 좋아하나 / 너를 닮아서 사랑하나 / 흔들리는 마음은 점점 알 수가 없어]

오래 전 한 가수가 불렀던 노래의 가사가 떠오르는 순간이었다. '사랑의 딜레마'는 이리도 가까운 곳에서 '응축 영역'과 '정박 지점'의 어긋남을 노래하고 있었다. 읽으면서 쉽지 않다고 몇번을 되뇌이고 있다가 직관적으로 '이건 나도 예를 들어서 설명할 수 있겠는데?' 싶은 깨달음이 온 부분이다. 어렵지만 어렵지만은 않다. 


 '생각의 요새'는 약 500여쪽에 달하는 인문학 도서다. 책의 소개로는 '오컴의 면도날'같은 간결하고 선명한 언어로 사상가들의 생각과 개념을 소개하고 있다고 하지만 일단 어려워보인다. 하지만 어려운 말 쓰지 말라고 화내는 것보다 그런 뜻이었구나 하고 배워가는 사람이 되고 싶기 때문에 천천히 읽어보려 도전했다. 나와 같은 입장의 사람들에게 좀 더 유혹적인 리뷰가 되었으면 해서 다가가기 쉬울 감상을 소개글보다 먼저 넣어보았다. 면도날은 아니더라도 가위정도는 될만한 시선이었다면 좋겠다.


" 루만은 사회적 체계가 '소통'(커뮤니케이션)의 방식으로 작동한다고 말한다. 소통은 정보를 알려주고 그 정보를 이해하는 과정을 가리키는 말이다. 소통은 '정보-통보-이해'의 세 단계로 이루어진다. 누군가 생각 곧 정보를 다른 사람에게 통보하면, 그것을 받아들여 이해하는 순간에 소통이 성립한다. 생명체가 끊임없는 신진대사로 자기를 유지해 가듯이, 사회적 체계도 끊임없는 소통의 반복으로 자기를 유지해 간다. 만약 소통이 사라지면 사회적 체계는 소멸한다. (106/체계이론과 주체 없는 사회학) "


 요즘 SNS를 처음 이용해봤는데, 허공에 아무말을 말해보는 기분이 들어 사람들이 왜 이런 걸 하는걸까 생각이 들었다. 서로를 친구라 서슴없이 부르고 '소통'하자며 하트를 남기는 것을 부럽게 바라보며 SNS 초보는 혼자 궁금했던 것이다. 우리는 왜 가장 깊고 내밀한 공간에 들어앉아 그림자 같은 상대에게 계속해서 말을 건내고 소통을 이야기할까. 소멸되고 싶지 않은 사회적 체계가 우리 내면 무의식에 자리잡아 어디로든 무엇이라도 발신하여 수신을 얻어내라 시키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일부 흡충이나 촌충이 숙주를 조종하는 것처럼.


 또 하나 흥미로웠던 부분은 " 오늘날 민주주의는 유권자가 선거로 대표를 뽑는 '대표제 민주주의'(대의민주주의)를 뜻한다. 그러나 대표제 민주주의는 '인민의 직접 통치'라는 민주주의의 본질을 제대로 구현하지 못한 열등한 민주주의라는 평가를 받는다. 직접민주주의를 실행할 여건이 돼 있지 않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채택한 차선의 민주주의라는 것이다. (124/대표제의 길, 민주주의의 길) " 이라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내용이었다. 특히 홉스와 루소의 사상이 충돌하는 부분에 이르러(126) 요즘 시기에 이 부분의 내용을 읽는다면 공감도 되고 생각할 점도 많을 것이다. 


 " 대표제는 다수의 의지로부터 떨어져서 대표자가 독자적으로 행동할 가능성을 허용한다. 나아가 스스로 의지를 드러낼 수 없는 것을 대표해서 행동하는 것도 대표제에서는 가능하다. 그런 차원의 대표제가 적용될 수 있는 사례로 이 책은 환경. 생태 문제와 미래 세대 문제를 든다. 지구를 대표해 온난화 문제를 제기하고 싸우는 것, 멸종 위기에 처한 동식물을 대표해 보호를 요구하는 것이다. (127/대표제의 길, 민주주의의 길) "


 우리 사회의 뜨거운 감자가 되고 있는 현실적 문제를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않더라도 "태어나지 않은 미래 세대를 대표해 지금 세대에게 문제를 제기하는 것도 가능하다.(128)"로 이어지는 책의 내용은 꽤 강렬하게 다가왔다. 처음 책을 읽었을 때는 영화 '콘크리트 유토피아'를 떠올리며 대표제의 명암을 가늠해보았었는데, 지난 24일을 기점으로 연일 이어지는 뉴스를 보며 특히나 생각이 많아지는 부분이었다. 


 책의 몇몇 부분과 함께 나의 짧은 감상을 정리하며 리뷰를 남겼는데 어떤 부분은 좀 멀리 떨어져서 흐린눈을 하고 지나가기도 하고, 어떤 부분은 생각이 알 수 없는 곳으로 튀어 한동안 멀거니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몸 테크닉(142)'과 '헤게모니 투쟁과 대중문화(149)' 부분을 읽으며 언급되는 하비투스, 대중문화에 대해 생각하다 이런 속도로는 연말에나 완독하여 리뷰를 쓰겠구나 싶어 초반부 읽은 내용을 바탕으로 추천글을 남긴다. 생각보다 흥미로운 내용도 많고 생각이 튀어가는 지점이 재밌으면서, 빨리 다른 사람과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어지는 책이다. 처서가 지나고 날이 선선해지는 시기가 오고 있으니 당신에게 사유를 선물할 '생각의 요새'를 하나 지어보는 것도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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