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와 헤어지고 - 고흥준

 


어느 골목이었는지 기억이 나질 않네. 은새잎 냄새가 코를 찔렀는데 그때가 유월이었는지, 칠월이었는지, 하루종일 비가 왔는지, 비가 오다 잠시 그쳤던 저녁이었는지, 도무지 기억이 나질 않네. 내가 기억하는 건, 당신의 창가에서 흘러나오던 작은 라디오 소리. 초승달이 낡은 지붕 위로 살금살금 걷던 소리.





때로는 어느 골목이었는지 모두 기억할 수 있네. 당신이 잠시 걸음을 멈춰 처음으로 나를 돌아본 길이었는데 그날은 고양이들이 낮은 담장에 나란히 앉아 낯선 이를 구경하던 밤, 아직 밤이기엔 너무 일러 낮잠을 실컷 잔 늙은 호박잎들이 옹종옹종 수군거리던 저녁이었네. 그때 사랑은 참 다정도 하여 반짝거리는 심장을 내게 주었지.



그 밤을 지나는 동안 젊었던 몸뚱이는 참으로 쉬이 늙어 흐느끼던 울음으로도 추억은 남질 않았네. 고양이들의 밤도, 호박잎들의 밤도, 은새잎 가벼이 지던 밤도, 당신이 안녕하며 뛰어갔던 골목에는 무엇 하나 남질 않았네. 그 길에 이리 늙은 몸만 홀로 남아 옛 소리를 듣던 귀는 자꾸 닫혀가고, 당신의 이름 석 자를 담벼락에 쓰다가 주저앉았던 그 골목에, 스물 몇이었던 세월만 고스란히 남았네.

 

 

* 체셔님이 올려놓은 시인데 너무 좋아서 여기다 베껴놨다.


댓글(3)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비로그인 2007-08-22 11: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하셨어요. :)
저도 너무너무너무 좋아하는 시랍니다.
시인이 시작활동을 계속 하심 좋으련만....

책향기 2007-08-22 22: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저 베껴왔을 뿐인데 뭐 그런 칭찬까지...^^; 근데 이 시 옮겨오고 나니 서재가 이상해졌어요. <시 읊조리기> 클릭하면 왜 "그녀와 헤어지고"만 뜨는걸까요? 저번에 올린 "주저흔"은 안 보여요. 근데 체셔님 댓글 클릭하면 "주저흔"이 뜨거든요?!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요??@.@

비로그인 2007-08-23 12: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거 말고 좋은게 또 있었단 말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