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들어진 유대인
슐로모 산드 지음, 김승완 옮김, 배철현 감수 / 사월의책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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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은 '카탈루냐'와 '아랍'을 민족으로 인정한 세계에서 얼마 안 되는 나라다. 한 마디로 유대 민족 외에는 민족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역설이다. 이스라엘 국가를 충족시킬 만큼 충분한 유대인 조건의 1순위는 무조건 어머니가 유대인이어야 한다. 종교적 믿음, 신앙, 언어는 부차적인 문제다. 그들의 정체성은 오로지 모계 혈족에 달려 있다. 이스라엘에서  카인의 표적을 달고 비유대인으로 살아야함에도 국방의 의무를 다해야하는, 그래서 같은 땅에 살고 있는 아랍인들을에게 총부리를 겨눠야하는 이들의 정체성. 
 


"홀로코스트에 비하면 '나크바'가 뭐 그리 나빴다는 건가? 짧은 기간 동안 제한적으로 벌어진 팔레스타인 난민 문제를 어떻게 이천 년 유배의 고통에 비길 수 있단 말인가?" 이 물음에 대한 사람들의 대답이 궁금하다.  
 



서문만으로도 이 책이 이스라엘 현지에서 어떤 반응을 보였을지, 그리고 청장년 세대는 어떻게 받아들여졌을지가 무척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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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스토옙스키의 명장면 200
석영중 지음 / 열린책들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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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9 장면.
자네에게 많은 행복을 기원하지는 않겠네. 지루할 테니, 불행을 바라지도 않네. 민중의 철학을 따라 그냥 다시 한번 말하지. <오래 살게나>, 그리고 어떻게든 너무 지루한 삶이 되지 않도록 노력하게나. 이 쓸데없는 소망은 내가 덧붙여 주는 것이네. 그럼, 잘 가게, 진심으로 잘 가게. 그리고 문 앞에 서 있지 말게. 문을 열지 않을테니. ('악령'에서) 
 
 


'무용하고 희망 없는 노동보다 더 끔찍한 형벌은 없다'라는 카뮈의 말, 이보다 더 나아가 '그런 형벌에 처해진 인간은 그 상태에서 벗어나기 위해 범죄를 저지를 수 있다'는 도스토옙스키의 경고. 그런데 나는 '무용하고 희망 없는 노동'의 기준이 무엇일지 고민하게 된다. 언급된 <죽음의 집의 기록>은 유형지에서의 노동이기에 이런 단정이 가능하지만, 현대인에게 이러한 고민이 갖는 무게가 얼마나 될지 의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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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스토옙스키의 명장면 200
석영중 지음 / 열린책들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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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9 장면.
세상은 날이 갈수록 하나로 합쳐지고, 이로써 거리를 줄여 나가고 허공을 통해 사상을 전달하는 형제적 관계를 형성해 나간다고 사람들은 믿고 있습니다. 아아, 인류의 그 같은 결합을 믿지 마십시오. 자유를 욕구의 즈대와 신속한 충족으로 이해함으로써 자신의 본성을 왜곡할 뿐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수많은 무의미하고 어리석은 욕망과 관습과 비합리적인 망상을 탄생시켰기 때문입니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의 한 장면을 통해 저자는 유대와 연결의 차이를 지적한다. 현재 SNS에서 이루어지는 소통이 과연 유대인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으며 타인과의 거리와 존중이야말로 진정한 연결이 될 수 있음이다. 도스토옙스키가 쓴 것처럼 자유를 욕구와 충족으로 왜곡시켜서는 안 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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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랑 위의 집
TJ 클룬 지음, 송섬별 옮김 / 든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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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2.
우리가 우리인 건, 어떻게 태어났느냐가 아니라 우리가 이 삶을 어떻게 살기로 결정하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이 소설에는 '보통 사람'이라고 지칭하는 다수의 사람들이 괴물이라고 핍박하는 인물들이 주요 등장인물이다.  
 


섬의 정령 채플화이트, 고아원 원장이자 출신을 알 수 없는 아서 파르나서스 , 악마의 자식으로서 적그리스도 종족인 여섯 살 루시, 어린 나이에도 얼굴에 수염이 나는 노움족 탈리아, 변신이 가능한 열여섯 살 샐, 형태가 불분명하고 촉수가 있는 메두소조아 천시, 희귀종 와이번 시어도어, 어린 숲 정령 피, 그리고 소심하기 짝이 없이 라이너스가 그들이다.  
 


그런데 책을 읽다보면 '괴물'은 과연 누구인지 독자는 알게 된다. 
인격을 존중하지 않고 오로지 일방적 명령에 복종하며 시키는대로 일만 하면 만사형통이고, 동료가 처한 곤란한 상황을 방관하고 나아가 한낱 조롱거리로 삼으며, 다수의 생김새와 다르다는 이유로 편견을 앞세워 학대하는 사람들. 그리고 다이어트 때문에 샐러드만 먹어야 한다는 라이너스의 말에 너도나도 몸을 동그랗게 부풀리고, 친구의 허물이나 행동이 의도된 것임이 아님을 적극적으로 변호하며, 서로의 다른점을 개성으로 인정하고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며 존중하는 아이들.   



 
이 소설은 곳곳에 천진한 아이들을 통해 어른들에게 근원적인 질문을 던진다. 아이들이 바다를 처음 본다는 라이너스에게 왜 바다를 처음 보냐고 묻자 해야 할 중요한 일들이 많아서 바다를 보러 갈 시간이 없었다고 대답한다. 원하지 않는데도 샐러드만 먹어야 하는 자신이 행복하다는 라이너스의 말에 의아해 하는 아이들. 열심이 살고 있는 우리, 삶이 즐거운가요? 
 


마을 사람들이 고아원을 향해 쓴 비방문이 뗏목을 타고 숲으로 흘러들어 온 것을 본 라이너스는 마법 능력을 가진 아이들을 향한 편견과 차별을 목격한다. 그들의 주장에 반대하는 문구를 써 넣은 깃발을 뗏목에 실어보내면서 처음으로 살아있는 기분을 느끼는 라이너스. 사람들은 자기가 선택한 삶을, 혹은 원하는 삶을 살고 있다고 여기지만 실상은 자신이 원하는 삶이 진정 무엇인지 충분히 고민의 시간을 갖는 이는 많지 않다. 상황에 떠밀려, 시간에 떠밀려 결정한  숱한 것들이 나 역시 얼마나 많았던가. 아서는 호기심이 결여된 삶은 사는 것이라고 할 수 없으며, 유머의 반대는 아무 감정도 못 느끼는 것이라고 말하는데, 많은 시간을 이렇게 살고 있지 않나 싶어서 조금 씁쓸하다.  
 


이 소설에서 짚고 넘어가는 또 한 가지는 집이라는 공간과 가족이다. 아서는 (소외 당한) 아이들에게 주어야 하는 것은 희망, 보살핌, 자기만의 장소, 어떤 두려움도 없이 자기 자신으로 존재할수 있는 집이라고 말한다. 소설의 후반에 라이너스가 최고위 경영진들 앞에서 여섯 명의 아이들에 대해 일일이 설명하는 장면에서야 독자들도 아이들의 사연을 구체적으로 알게 되면서, 서로의 내면을 들여다보고 공감하고 이해하며 보듬어 줄 수 있는 존재라면 가족이 될 수 있음을 새삼 각성한다.  
 


또한 작품에서 '괴물'로 취급되는 인물들의 면면을 보면 현재 우리 사회에서 소외되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과 겹쳐진다. 심지어 멀쩡히(?) 마법아동관리부에서 일하는 라이너스나 마르시아스섬의 시장인 헬렌조차 소설 밖 현실에 존재한다면 억압당하는 소외계층이었을 터다. 그러나 아무 잘못도 하지 않은 마법 아동을 꾀어내 퇴마술을 하고, 무턱대고 괴물로 몰아붙이며 어린아이에게 총구를 들이미는 마을 주민 역시 '괴물'이기는 마찬가지다. 
 


소설 초반, 마법적 존재들이 보통의 인간에게 동화되어야 한다는 라이너스의 주장에 아서는 왜 동화되어야 하며, 동화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누구이고, 동화를 강요당한 자들은 선택의 여지가 있는지에 대해 묻는다. 라이너스는 이에 대해 동화는 공공의 이익을 위한 조치라고 반박하는데, 과연 그 '공공의 이익'에 동화를 강요당하는 자들의 이익도 포함되어 있는지를, 독자는 되묻고 싶어진다.
 


사람들의 마음을 바꾸려면 먼저 소수의 마음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아서의 말이 와닿는다. 소설은 버티는 것 말고 살아가는 삶의 중요함을 얘기한다. 소설의 마지막, 돌아온 라이너스가 우는 탈리아를 번쩍 안아 올리는 장면에서 덩달아 눈물이 그렁그렁해진다.
 



한때 이영도 작가의 전작부터 나니아 연대기, 호빗, 레모니 스니켓, 해리포터 시리즈까지 일정 기간 동안 열혈 판타지 독자였던 시절이 있었다. 그 시기가 지나고 켄 리우, 신서로 등 사이사이 읽고 있으나 2,3년 전쯤부터는 의도치 않게 손절이라고 할 정도로 판타지와 거리가 먼 독서를 해왔다. 정말 오랜만에 읽은 판타지다.  
 


읽으면서 좋아하는 애니메이션 <업>이 생각났다. 물론 내용은 전혀 다르지만 그때 느꼈던 따뜻함과 뭉클함이 다시 느껴지는 소설이었다. 인생에서 때로는 판타지가 필요하다.  
 
 


420.
우린 모두 각자의 미눗방울 속에 안전하게 갇혀서, 이렇게 넓고 신기하기만 한 세상을 만나지 못하는 거야. 얼마나 손해인 줄도 모르고. 하지만 비눗방울 속에 갇혀 살기란 참 쉬워. 반복되는 일과는 평온을 주고든. 그러다가 비눗방울이 터지고 비로소 정신을 차리면 우리가 놓치고 살았던 게 이렇게 많다는 사실이 차마 믿어지지 않는 거야. 심지어 겁이 나기도 해.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다시 그 비눗방울 안에 들어가기도 하지.




♤ 출판사 지원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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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스토옙스키의 명장면 200
석영중 지음 / 열린책들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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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바렌카, 도대체 무엇이 날 파멸시키는 걸까요? 나를 파멸하게 하는 건 돈이 아니라 삶의 이 모든 불안, 이 모든 쑥덕거림, 냉소, 농지거리입니다.  ('가난한 사람들' 에서) 
 
 

도스토옙스키는 불안은 누구나 평생 동안 그림자처럼 데리고 다녀야 하는 삶의 일부임을 알았기에 불안에서 해방되려는 노력보다 오히려 불안을 더 깊이 탐구했다. 
 
우리를 불안하게 하는 것은 타인의 조롱과 비웃음, 그리고 인간을 생명체보다는 기능체로 취급하는 사회에서 따라오는 열등감이다. 불안이 커지면 세상에 대한 적의가 커지고, 당면한 문제에서 혹은 자기 자신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어진다. 그리고 이를 실천하는 순간, 불안은 혐오로 확장된다. 도스토옙스키는 이에 대해 <가난한 사람들>의 마카르, <분신>를 통해 말하고 있다. 
 
 


- 학창시절부터 따라다니던 별명 중 몇 개가 '투덜이'와 '걱정쟁이'였다. 우스갯말로 땅 꺼질까봐 길은 어떻게 다니냐는 사람이 바로 나다. 그런데 의외로 낙관적인 면이 많아 주변 사람들이나 나 스스로도 놀랄 때가 있다. 그럼에도 나는 내재되어 있는 불안감이 큰 사람임은 분명하다. [불안] 부분을 읽으면서, 불안이 삶의 일부분이라는 저자의 말씀이 심하게 와닿는구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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