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파우더 미스터리 엘러리 퀸 컬렉션 Ellery Queen Collection
엘러리 퀸 지음, 이제중 옮김 / 검은숲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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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19XX년 5월 24일 화요일 낮 12시 15분.

프렌치백화점, 폴 라버리 디자이너의 프랑스 초현대적 침실 전시가 시작되면서 벽침대가 내려오고 그와 동시에 피투성이 시체 한 구가 굴러 떨어진다. 사망자는 프렌치백화점 대주주이자 대표이사 사이러스 프렌치의 아내 위니프레드 마치뱅크스 프렌치다. 

 

삽시간에 백화점은 혼란에 빠지고 마침 6층 아파트에서 회의 중이었던 사이러스 프렌치와 그의 비서 웨슬리 위버, 이사 네 사람이 내려오고 퀸 경감과 엘러리도 사건 현장에 도착해 수사를 시작한다. 

 

해자의 사망 추정 시간은 자정부터 새벽 2시 이전으로 범행 시간의 범위는 월요일 밤 11시 30분부터 화요일 오전 9시 30분으로 추정한다. 현장에 흘린 피의 양과 부검 결과 실질적인 범행 현장은 전시실이 아닌 다른 장소이며 사인은 총상이고 총알의 각도상 피해자는 앉아 있는 상태에서 살해당했다. 

 

경찰과 엘러리는 피해자 발견 장소가 사망 현장이 아니라는 점과 프렌치 집안의 사유 장소인 6층의 아파트는 가족과 비서만이 각자의 이니셜이 새겨진 열쇠를 가지고 있으며 그외의 사람은 출입이 제한된다는 점에 백화점을 모두 수색한다. 뿐만 아니라 프렌치 사장의 집을 찾아가 피해자와 실종자의 방을 살펴 본다.

 

장과 아파트에서 발견된 증거품은 M.F라는 약자가 새겨진 스카프, 피해자의 핸드백에서 나온 C가 새겨진 립스틱, 그리고 사라진 아파트 열쇠. 그리고 아파트 서재의 탁자에는 연관이 없는 다섯 권의 책과 담배 꽁초가 수북이 쌓인 재털이, 옷장에는 피해자 딸 버니스의 옷과 구두가 있다. 또한 색깔이 다른 북엔드의 펠트와 펠트에 흔적이 남아있는 지문 채취용 가루.  

 

러리는 백화점 마감 이후에 출입이 가능한 출입구와 사용 용도, 그리고 조명의 밝기를 확인한다. 피해자의 핸드백에서 나온 립스틱의 주인은 그녀의 딸 버니스이며 립스틱에는 마약 캡슐이 숨겨져 있었다. 현재 실종 상태인 버니스 카모디. 엘러리는 이 사건이 단순 살해 사건이 아닌 마약 범죄와 연관되어 있음을 유추하고 범위를 확대해 추리한다. 

 

 

붓 자매와 사이가 좋지 않았고 이기적이며 문란한 생활을 했던 의붓어머니를 지켜보았고 피해자에게서 나온 스카프의 주인 마리온 프렌치, 위니프레드와 불륜 관계인 소른, 이 사실을 알고 있었던 험악한 성정의 소른 부인, 딸에게는 관심도 없는 전처에 진저리를 치는 빈센트 카모디, 백화점 아파트에 북엔드를 기증했던 그레이, 위니프레드의 오빠 위니프레드의 마치뱅크스, 버니스의 돈을 노리는 그녀의 약혼자 트래스크, 아파트의 마스터 키를 가지고 있어 언제든 철통 보안의 백화점 내 어디든 갈 수 있는 보안반장 크라우더, 사건 다음날부터 출근을 하지 않고 있는 서적 판매부 책임자 스프링어.

이 사람들 중 한 사람을 제외한 모든 이들은 사건 범행 시간에 알리바이를 확인해 줄 이가 없다.

누가 범인일까? 

  

 

엘러리는 사건 발생 후 이틀이 지나 사건과 관계된 모든 사람들을 한 자리에 모은다. 아버지 퀸 경감의 건강 상태를 들어 자신이 대신 브리핑하는 것에 양해를 구하며 사건의 경위를 설명해 나간다. 

재에 펼쳐져 있었던 책이 던진 단서와 버니스의 립스틱, 스프링어의 행적을 통해 살해 살인 사건이 마약 범죄와 연관이 있으며 뿐만 아니라 실종된 버니스가 마약 밀매단 고객이자 유통에도 관계했음을 밝힌다.

황상 백화점 폐점 이후 입장은 용이하나 범죄를 저지르고 다시 나가기에는 시간이 부족하다. 예정에 없던 회의로 인해 일찍 출근한 웨슬리의 면도날이 아파트 욕실에서 사라졌다. 아파트 옷장 안 구두 가방에 놓여진 버니스의 구두 위치가 미심쩍다. 서재 재털이에 쌓인 담배 꽁초의 길이와 버니스의 방에 남겨진 담배 꽁초의 길이가 다르다. 버니스가 열쇠를 분실한 것도 모른 채 집으로 걸려온 미심쩍은 전화. 프렌치 부인이 앉아서 총상을 입은 것으로 보아 사전에 약속이 되어 있었을 것이라는 짐작과 살해 후 아파트를 원활하게 드나들 수 있었다는 점. 그리고 사라진 부인의 열쇠.

이를 통해 엘러리는 범인은 남자이며 단독범행임을 확실히 한다. 이 모든 정황이 가리키는 단 한 사람.

범인은 바로 그다!

■ ■ ■ ■

사건 발생 후 엘러리가 증거와 정황을 놓고 추리한 시간은 이틀, 그런데 책은 450여 쪽에 달한다. 개인적으로 스토리를 논리적이고 세밀하게 풀어놓는 방식을 좋아하는 나로서는 호흡이 긴 장편이 맞다. 그런 면에서 <프랑스 파우더 미스터리>는 읽는 내내 독자로서 무척 즐거운 시간이었다.

엘러리의 천재적 추리가 흥미진진한데, 읽다보면 그가 남다른 지능을 갖고 있음과 더불어 많은 독서량과 호기심이 지능을 앞선다는 생각이 든다. 아는 만큼 보이는 것이라면 그럴 것이고, 아는 만큼만 보는 것에 갇히지 않는다는 점이 엘러리의 가장 크고 탁월한 장점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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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가 없으면 내일도 없다 미야베 월드 (현대물)
미야베 미유키 지음, 김소연 옮김 / 북스피어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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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영도

'공주님'이라고 불릴만큼 마마걸인 딸 유비가 하루 아침에 연락이 닿지 않는다.  사위 사사 도모키는 아내가 장모와의 갈등으로 자살을 시도했으며, 현재는 치료와 안정을 위해 정신과 클리닉에 입원해 있다고 알려줄 뿐 일체의 면회를 사절할 뿐만 아니라 딸과의 전화 통화조차 막아놓은 상태. 이를 납득하지 못하는 하코자키 시즈코는 딸의 안전과 내막을 알아보기 위해 사립탐정사무실을 찾는다.  

 

화촉

한 예식장에 같은 날 시간차를 두고 예약된 두 예식이 모두 어그러지는 사태가 벌어진다. 한쪽은 신부가 도망가고, 한쪽은 신랑의 전 여자친구가 나타나 신랑 대기실에서 성관계 도중 발각된다. 이십대 초반인 신부는 집안의 사업을 유지하기 위해 예순 살이 넘은 남자와 마지못해 결혼을 결정하고, 다른 예식의 예비 신랑은 본인은 아니라고 하지만 결과적으로 (심리적으로) 양다리였으며 결혼식에서 도덕적으로 있을 수 없는 행동을 한다. 그런데 이 두 결혼식, 뭔가 수상하다. 같은 날, 같은 예식장에서 예정된 두 예식 모두 파혼이라니!

 

어제가 없으면 내일도 없다

동네에서 평판이 좋지 못한 모녀가 어린 아들의 목숨을 위협하는 자가 있다며 탐정사무실을 찾아온다. 아들의 목숨을 노리는 자는 바로 아들의 친할머니.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이혼한 전 남편의 어머니다. 등교길에 칠십대 노인의 운전 미숙으로 일어난 교통 사고. 모든 상황과 증언, 근거는 단순 사고임을 말하고 있는데, 오직 구치다 미키는 전 시어머니의 사주라고 억지를 부린다. 도대체 이 여자는 왜 이런 억지를 부리는 것일까? 

 

 

 

■ ■ ■ ■ 

 

동네의 골목 사립탐정 스기무라가 의뢰받은(정확히, 의뢰는 두 건, 한 사건은 어쩌다 보니 휩쓸리게 된) 세 사건을 중편소설로 엮은 옴니버스 소설집이다. 

위의 세 사건은 체육계 혹은 남성 집단의 서열화와 그에 대한 폐단,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에 의해 함몰되는 가족의 붕괴, 특히 여성을 향한 혐오와 인권유린을 다루고 있다. 

  

 

<절대영도>에서는 같은 대학 재학생, 졸업생으로 구성된 필드하키 동아리에서 선배(다카네자와 데루유키)의 말이라면 죽는 시늉은 말할 것도 없고, 개인의 사생활은 아예 인정되지 않는다. 양해 따위는 필요없다는 듯이 후배의 집으로 쳐들어가는 건 예사고, 회원들(특히 후배)의 연인이나 부인을 불러내 술시중 뿐만 아니라 저속한 농담과 음담패설, 외모 비하 등 여성 혐오를 드러내며 하대하고 희롱 및 성추행까지 한다. 이란 모임이 싫어서 탈퇴를 결심한 다마키 고지의 집으로 속임수까지 써가며 쳐들어가 결국에는 그의 아내를 집단 성폭행하고 자살로 몰고 간 '그' 집단을 다마키는 응징한다.  

 

소설에서 자신의 권력을 이용한 다카네자와가 가장 나쁜 사람일까(사실 그는 이 소설에서 거의 절대악이다)? 가족보다 선배의 말을 더 우선하며 자신의 아내를 희롱하는 것을 아무렇지 않게 여기고 선배의 명령이라는 이유로 아내가 지켜보는 곳에서 후배의 아내를 집단 강간하는 도모키는 정상인가? 남편을 사랑하기 때문에, 선배만 아니면 멋진 남편이기에, 남편이 시키는대로 변죽을 울리는 유비는 같은 여성으로서 갖는 수치심과 모멸감 따위는 길에 내다 버린 것인가!

 

사실 이렇게 위계질서를 강조하는 집단에서 학연 지연에 의한 따돌림과 여성의 성폭행 문제는 어제 오늘 일이 아니다. 우리나라의 가까운 사례로 학연으로 갈등을 겪어 러시아로 귀화한 A 선수, 얼마 전까지 코치의 성추행 사건으로 떠들썩 했던 S 선수 등 어렵지 않게 접하는 사회 문제다. 특히 여성의 성적 수치심을 이용해 상대로부터 원하는 것을 얻고자 하는 행위는 얼마나 비열하고 야비한가. 특히 최근에 n번방 사건처럼 큰 이슈는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 앞으로 학생을 가르칠 예비 선생인 교대 남학생들조차 카톡방에서 아무렇지 않게 외모 비하와 성희롱을 일삼았다. 이러한 행위들이 얼마나 일반화 되어 있는지 생각하면 우려되는 부분이 많다. 지금, 자신의 단톡방을 점검해 보는 건 어떨지...... . 

 

 

<화촉>에서는 개인의 행복과 선택보다 돈을 우선하는 부모로부터 결혼을 강요받는 스가노와 엄마를 오랜 죄책감과 피해의식에서 구원하고자 하는 시즈카, 두 여성이 등장한다. 16,7세기 이전에는 여성이 사람이기보다는 물건, 상품에 가까웠던 시절이었다. 세상에 이름을 내놓는 것은 있을 수도 없는 일이고, 가문의 명예나 권력에 의해서 결혼도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충효사상을 으뜸으로 치는 지역에서는 수절이 영광이고, 재혼이 가능하다 하더라도 허락이 필요했다. 지금이야 그렇지 않다고 말하겠지만 과연 그럴까? 

 

우리나라는 여전히 결혼을 결심한 많은 사람들이 부모에게 '허락'을 받는다. 부모는 자식의 배우자가 될 사람의 집안 내력, 학력, 심지어 연봉까지 물어본다고 들었다. 사실 가장 개인적인 부분을 부모라는 이유로 다 알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건 월권이다. 그리고 성인이 된 자식의 결혼을 허락하고 말고가 어디있나? 물론 마음에 차지 않는 부분도 있겠지만, 어쩌겠는가? 본인들의 선택인 것을. 부모로서 먼저 살아온 연륜으로 조언 정도는 할 수 있을테다.  그러나 결정은 본인들의 선택이고 부모의 몫은 축복으로 끝내야하지 않을까. 

 

사람은 누구나 어느정도 트라우마를 안고 산다. 트라우마를 안고 살든, 이겨내든 스스로 알아서 할 일이다. 엄마의 피해의식을 해결하기 위해 자신의 결혼식을 이용한다는 것은 상식에서 벗어난 일이다. 이는 엄마에게 또 다른 트라우마를 안겨주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 냉정하다고 여길 수 있겠지만 자신이 안고 가야 하는 삶의 무게는 각자 짊어져야 한다. 자식 혹은 부모의 짐을 대신 지는 것, 타인에게 짐을 지우는 것,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 짐으로 인해 사는 것이 너무 무겁지도, 너무 가볍지도 않는 것인지도 모른다. 

 

사람은 모두가 혼자서 배를 저어 시간을 강을 나아가도 있다. 따라서 미래는 항상 등 뒤에 있고 보이는 것은 과거뿐이다. 강가의 풍경은 멀어지면 자연히 시야에서 사라져 간다. 그래도 사라지지 않는 것은, 눈에 보이는 무언가가 아니라 마음에 새겨져 있는 무언가라고.  

p301

 

<어제가 없으면 내일도 없다>에서는 다 남 탓인 두 여인이 있다. 언니 미키는 어머니와의 관계가 좋지 않아 이른 나이부터 소위 '문제아'였다. 사고를 일으켜 관심을 끌고 동정을 얻어내며 외모를 이용해 남자를 유혹하기를 마다하지 않는다. 달면 삼키고 쓰면 뱉음에 있어 남편도 자식도 예외는 아니다. '이렇게까지 하는데 왜 나를 불쌍히 여기지 않아?'라는 듯 더 자극적이고 강하게 꾸미고 행동한다. 덕분에 십대에 아이를 낳고, 결혼 후에 다시 출산을 하지만 사실 두 아이 모두 아빠가 누구인지 불분명하다.

동생 미에는 학생 시절부터 언니의 추문과 나쁜 평판으로 인해 제대로 얼굴을 들고 다니지 못했다. 누구의 동생이라는 꼬리표가 늘 따라다녔고, 그 언니에 그 동생이라는 말이 뒤통수를 당겼다. 내가 원해서 그녀의 동생이 된 것도 아니고, 언니와 자신은 다른 사람인데, 아무도 두 사람을 별개로 보지 않았다. 순간의 감정을 억누르지 못하고 저지른 범죄. 하지만 미에의 내면에는 얼마나 많은 억울함과 분노가 차곡차곡 쌓여져 있었을까. 

 

461.

아무리 괴로운 과거라도 그건 당신의 역사에요. 어제의 당신이 없기 때문에 지금의 당신이 있고, 당신의 내일이 있는 거예요. 받아들이고 긍정적으로 나아가지 않으면 행복한 미래로 가는 길은 열리지 않아요. 

 

자신의 '어제'를 한번도 선택할 수 없었다는 미에의 비명. 미에의 말대로 '어제'는 선택할 수 없지만, '내일'은 선택할 수 있지 않나. '내일'은 곧 '모레'의 어제. 이 사실을 미에가 알았더라면 언니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었으려나...... .  

모쪼록 미키의 딸 사자나미만큼은 엄마의 전철을 밟지 않기를 바란다.

 

마음 좋은 넉넉한 이웃집 아저씨같은 스기무라 탐정.

필립 말로의 고독한 분위기도, 엘리리 퀸의 천재적 추리도, 셜록의 젠틀한 면도 전혀 느껴지지 않지만 따뜻한 인간미가 전해지는 새로운 캐릭터다. 소설에서 스기무라의 추리나 수사는 사건 해결에 결정적 역할을 한다거나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해주지는 않지만, 오히려 이러한 면이 좀더 현실적으로 와닿는다.  

 

스기무라 탐정의 건승을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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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입자들
정혁용 지음 / 다산책방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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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장을 넘길수록 점점 더 이 남자가 궁금해졌다. 

□ □ □ □

 

어느해 8월, 지갑에 9만8천원 뿐인 채로 강남고속버스터미널에 도착한 마흔다섯 살 남자. 구인란을 뒤지다가 컨테이너 숙소가 제공되는 영세 택배 업체에 취직한다. 목구멍은 포도청이고, 힘들어도 타인과 대면할 필요도 없는 일이라서. 

 

그 남자가 맡은 구역은 행운동. 그래서 동료 택배 기사들은 그를 '행운'이라 부르고, 누군가 그에게 이름을 물어오면 '행운'이라 부르라고 말한다. 타인과의 관계 맺기는 타고난 소질도 없고, 의지도 없는 남자. 남의 일상에 관심도 없을 뿐더라 상대의 관심도 불편하다. 그런데 어느날부터인가 그의 일상에 침입자들이 불쑥 나타난다.  

 

운동 1688번지대의 작은 벤치에 정오를 지나 비슷한 시간대에 같은 차림ㅡ청바지, 흰 티, 뉴욕 양키즈 야구 모자ㅡ으로 앉아 담배를 피우는 여성. 어느날 그녀는 차에 앉아 담배 한 대 피워 문 그의 차로 다가와 나중에 한꺼번에 갚겠다며 담배 한 개비를 꾸어간다. 그렇게 하루하루 담배 한 개비 씩 꾸어가던 얼마 후, '춘자'라고 이름을 밝히며 매주 일요일에 자신의 얘기를 들어주면 일당 백만 원을 주겠다는 제안을 한다. 이유는 죽은 남편이 '행운'과 너무 닮아서. 일언지하에 거절하지만 그녀의 지난 날 병력과 남편의 이야기를 듣고 마지못해 수락한다.

 

 

'행운'은 노상방뇨 중 우연히 마주친 적이 있는 마이클(행운이 즉석에서 붙여준 이름)을 100번지 비탈 동네의 인적 드문 곳에서 10대 무리에게 맞고 있을 때 구해준다. 이후 '행운'이 그 동네 택배를 돌 때마다 1시간여를 따라다니는 마이클이 왠지 싫지 않아 그와 함께 요깃거리를 나누곤 한다.  

 

 

요일 마지막 배송지 Bar '코카인'. 저녁 8시 이후에 배송해 달라는 부탁으로 일을 마치고 술도 가볍게 한 잔 하는 곳. '행운'은 그곳 종업원이 게이인 사실을 나중에야 알게 되지만 크게 개의치 않는다. 그저 술만 마시고 나오니까. 그리고 그들이 게이라는 것보다 숨겨진 더 큰 사실. 그것 때문에 나중에 '행운'은 폭력배와 형사에게 고역을 치르게 된다. 

 

 

역에서 폐지를 줍는 삼십 대 초반 여성 '마스크'(물론 이것도 '행운'이 붙인 이름이다). 우연찮게 아파트 경비원에게 봉변을 당하고 있는 그녀를 도와준 것이 계기가 되어 마주칠 때마다 잠시 양갱을 나누며 대화를 하는 사이가 된다. 대기업에 취업했지만  도박 중독자인 아버지로 인해 차츰 생활이 나락으로 떨어져 그저 하루하루 연명해 가는 그녀를 향해 '행운'은 말한다. 

 

살아요. 죽지 말고. 부탁이에요.

 

언제부터인가 폐지를  줍는 마스크를 볼 수 없다가 한참 후 우연히 달라진 모습의 그녀를 본다. 서로 눈이 마주쳤지만 고개를 돌리는 '마스크'. '행운'은 오히려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시 쉬는 시간. 휘청거리는 노인을 잡아주자 그 노인은 '행운'에게 말을 건넨다. 몇 마디 대화 후에 대뜸 금요일 저녁 8시까지 자신의 집으로 저녁 식사와 경제철학을 배우러 오라는 말을 남긴다. 아흔이 넘은 퇴직한 학자. 손녀를 통해 알게 된 그들의 가족사. 놀라는 것도 잠시 손녀는 예상치 못한 제안을 하고 '행운'은 정중히 거절한다. 

 

 

장 동료 '남현동(택배 구역이 남현동이라서 남현동이라고 불린다)'. 아버지의 장례로 결근해야 하는 그 대신 일을 맡은 '행운'에게 답례를 하겠다며 술자리를 청한다. 두 사람 모두 묵언수행하는 스님 못지 않게 말이 없다. 무거운 분위기를 이기지 못해 '행운'이 자리를 뜨려는 순간에 말을 시작하는 '남현동'. 돌아가신 아버지에 대한 원망, 유서를 통해 알게 된 오해. 아무에게도 풀어놓을 수 없었던 회한을 '행운'에게 풀어놓고 자유롭게 떠나는 '남현동'.

  

 

 외에도 살갑게 다가오는 청림과 주창, 그리고 다른 이들. 빚에 팔려간 연인의 어머니를 구할 돈을 벌기 위해 한국으로 오고, 가난한 살림에 여섯 식구의 생계를 택배만으로는 감당이 안되어 사채를 쓰고, 허리가 휘도록 일을 하면서 정작 병원에는 가지 못하며, 가장으로써 가족을 지키려고 안간힘을 다하는 그들. 직원들의 월급을 챙겨 작정하고 달아난 도박 중독자 사장때문에 모두 살 길을 찾아 제각각 흩어진다. 

 

다시 강남고속버스터미널에 선 남자. 

 

 

 

■ ■ ■ ■

 

 

 

생각해보면 사람들은 여러 이유로 오히려 깊은 관계에 있지 않은 사람들에게 속내를 꺼내놓는다.

가족이 힘이 아닌 짐이지만 섣불리 속내를 털어놓을 수 없다(특히 우리나라는 유교적 관습으로 그 성격이 강하다). 남편은 사랑해서 결혼했다고 철썩같이 믿었건만 한번도 사랑한 적이 없다며 배신감만 안긴다. 그저 자기 세계에 갇혀 자식에게는 관심이 없는 무정한 아버지라 여겼는데 격동의 시대를 온몸으로 겪으며 그의 방식으로 아들을 사랑했을 줄이야! '나'의 확신이 나'만'의 확신이라는 것, 그 확신이 상대 뿐만 아니라 주변인 모두를 불행하게 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간과한 안타까움. 자신의 삶의 방식을 강요해서 얻어진 불화. 사실 이 모든 일의 기저는 아이러니하게도 사랑이다. 

 

 

등장 인물들은 아무에게도 할 수 없었던 말들을 '행운'의 앞에서는 술술 뱉어낸다. 이유가 뭘까? 

간단하다. '행운'은 말이 없다. 조언이나 충고 따위는 물론이고, 위로도 하지 않는다. 그저 듣는다. 다만 사이사이 재미없고 건조한 농담을 던질 뿐.

 

친절하지 않은 무뚝뚝한 말투, 미운 말은 다하고 결국에는 지고마는 헛똑똑, 타인과의 관계 맺기에는 눈 씻고 찾아봐도 없는 소질. 거기에다 상대방을 당황스럽게 하는 재미없는 농담. 독자인 나조차도 이 남자에게 마음이 감기는 듯한 기분이었다. 

 

소설에서는 끝까지 '행운'의 미스터리한 정체가 밝혀지지 않는다. 단지 소설 사이사이마다 전해지는 하드보일드 풍의 분위기와 '행운'의 손놀림과 등장인물 들과의  대화, 그의 지성과 마지막 장면의 통화를 통해 독자가 짐작할 수 있는 지점이 있다.

 

<작가의 말>을 읽고서야 주인공 '행운(K)'에게서 필립 말로의 쓸쓸함과 고독이 왜 떠올려졌는지 알겠더라는. 한국의 새로운 하드보일드 작가의 출현이려나. 앞으로 '정혁용'이라는 사람이 계속 글을 쓰고 책을 낸다면 나는 앞으로 꾸준히 찾아 읽을 예감이 든다.  

 

 

 

[소설 속으로] 

 

 

60.

연민에는 책임이 따른다. 책임을 지지 못하면 동정으로 전락하고. 누구에게도 누군가를 동정할 권리가 없다. 

 

180.

밤길을 두려움 없이 걸어가고, 뒷사람의 발자국 소리를 무서워하지 않고, 택시를 타도 기사들을 신경 쓰지 않고, 헤어진 남자친구의 성난 전화도 무서워해본 적 없고, 직장 동료나 모르는 남자의 성희롱을 견딘 적도 없고, 남자들은 당연히 주어지는 기회를 힘들여 쟁취한 적도, 사소한 것 하나까지 관습과 싸워 얻어야 하는 그런 인생을 살지 않은 사람이니까. 그 인생을 살아보지 않은 사람이 살아온 이의 공포나 괴로움을 이해한다는 건 어불성설이죠. 전 누군가를 짐작으로 이해하거나 공감할 만큼 머리가 좋지 않아요.

 

205.

진리와 진실은 달라요. 진리는 사는 데 도움이 되죠. 하지만 진실은 꼭 그렇지 않아요. 모를 때 알고 싶지만 알고나면 차라리 몰랐으면 좋았을걸 하는 일이 대부분입니다. 상처만 배부르게 먹는 거죠. 일어난 일은 일어난 대로 흘려버리는 것도 괜찮은 방법입니다. 살면서 모든 일의 이유를 알아야 할 필요는 없지 않겠습니까?

 

 

 

나의 일상은 사막이다.

연민에는 책임이 따른다. 책임을 지지 못하면 동정으로 전락하고. 누구에게도 누군가를 동정할 권리가 없다. - P60

밤길을 두려움 없이 걸어가고, 뒷사람의 발자국 소리를 무서워하지 않고, 택시를 타도 기사들을 신경 쓰지 않고, 헤어진 남자친구의 성난 전화도 무서워해본 적 없고, 직장 동료나 모르는 남자의 성희롱을 견딘 적도 없고, 남자들은 당연히 주어지는 기회를 힘들여 쟁취한 적도, 사소한 것 하나까지 관습과 싸워 얻어야 하는 그런 인생을 살지 않은 사람이니까. 그 인생을 살아보지 않은 사람이 살아온 이의 공포나 괴로움을 이해한다는 건 어불성설이죠. 전 누군가를 짐작으로 이해하거나 공감할 만큼 머리가 좋지 않아요. - P180

진리와 진실은 달라요. 진리는 사는 데 도움이 되죠. 하지만 진실은 꼭 그렇지 않아요. 모를 때 알고 싶지만 알고나면 차라리 몰랐으면 좋았을걸 하는 일이 대부분입니다. 상처만 배부르게 먹는 거죠. 일어난 일은 일어난 대로 흘려버리는 것도 괜찮은 방법입니다. 살면서 모든 일의 이유를 알아야 할 필요는 없지 않겠습니까?
- P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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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80
하인리히 뵐 지음, 김연수 옮김 / 민음사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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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제 : 혹은 폭력은 어떻게 발생하고 어떤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가 

 

1974년 2월 20일 수요일 저녁, 여성 카니발 전날 밤, 어느 도시에서 스물일곱 살의 젊은 여성 카트리나 블룸은 엘제 볼터스하임이 주최하는 파티에 참석한다. 그 파티에서 자신을 탈영병이라고 고백한 루트비히 괴텐을 만나 첫눈에 사랑에 빠지고 그의 도주를 돕는다. 그러나 경찰은 그의 말과는 다르게 괴텐이 절도와 강도 용의자임을 카트리나에게 알리며 그녀를 참고인 자격으로 연행한다. 

 

하룻밤 사이에 카트리나는 경찰이 추적 중인 강도의 연인이며 그의 도주를 도왔을 뿐만 아니라 공범이 아니냐는 의혹까지 받는다. 괴텐의 사건을 쫓던  <차이퉁> 신문기자 베르너 퇴트게스는 사실과는 전혀 다른 자극적인 기사로 이슈몰이를 하고 그로인해 카트리나의 주변인물까지 고통당함은 물론 그녀의 어머니는 쇼크로 사망하기에 이른다. 더이상 견디기 힘든 카트리나는 결국 퇴트게스를 총으로 살해한다. 

 

 

■ ■ ■ ■

 

소설의 부제 <폭력은 어떻게 발생하고 어떤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가>를 보면 짐작할 수 있듯이 이 소설에서 의도하는 바가 무엇인지는 명백히 드러난다. 작가가 지적하고 싶었던 폭력은 어떤 폭력을 말하는 것일까? 

 

카트리나 블룸은 어떤 사람인가? 

어린시절과 결혼생활은 불운했지만, 친절하고 차분하며 계획성 있게 맡은 일을 처리하는 데에 책임감 있다. 필요 이상의 금전적 호의는 거절할 줄 알며 여건이 되는대로 일거리를 찾아서 자립하는 정직하고 성실한 사람이다. 또한 다정함과 치근덕거림을 구분할만큼 자신의 감정에 예민하고 상대를 선택하는데 있어 외적인 조건에 상관하지 않으며 주관이 뚜렷하다.

 

이토록 자신의 생활에 있어 반듯한 그녀를 언론은 어떻게 탈바꿈시켰을까? 

 

먼저 괴텐과 그녀가 2월20일 처음 만난 것이 아니라는 추측을 확신하듯 보도한다. 괴텐과 카트리나가 파티장에서 파트너를 바꾸지 않고 춤을 추었던 사실, 그들의 눈빛과 몸짓 등을 지켜본 이들을 인터뷰하면서 '~ 같았다' 혹은 '공산주의 냄새를 맡았다'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인터뷰이의 말을 사실처럼 기사화한다. 

 

카트리나가 가정부라는 신분으로 아파트를 소유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그녀의 노동의 과정과 전문성, 성실함은 삭제시킨 채 강도질에 동조하고 엄청난 부를 축적한 것인양, 그리고 과거에 그녀와 관계있는 사람들의 단편적인 정보를 전부인 듯 오도한다. 이제 진실 여부와는 상관없이 그녀는 오랜 친분이 있는 몇 사람을 제외하면 고립된 상태다.

 

또한 언론은 카트리나와 그녀의 가족, 주변인들까지 사찰에 가까운 신상털기에 나서 사건의 본질과는 아무 상관없는 마녀사냥으로 확대시켜 개인의 인생을 파멸로 몰아간다. 암수술 이후 안정을 취해아 하는 카트리나의 어머니를 찾아가 의사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인터뷰를 강행해 사망까지 이르게 하고(심지어 그 죽음도 딸의 행실에 대한 충격이 원인이라고 기사화한다), 그녀의 고용주였던 블로르나 부부를 좌익 공산주의 빨갱이로 몰아붙여 사회적 지위와 생계를 위협하고, 파티 호스트였던 엘제 볼터스하임의 부모까지 들춰낸다. 도대체 이들이 이 사건과 무슨 관계가 있다는 말인가! 

 

이 사건에서 악질적인 두 인물이 등장하는데, 카트리나를 희롱했던 슈트로입레더와 <차이퉁> 신문기자 퇴트게스이다.

슈트로입레더는 자신이 카트리나에게 억지로 떠안긴 반지와 열쇠로 그녀가 궁지에 몰렸음에도 불구하고 사회적 입지 때문에 진실을 밝히지 않는다. 퇴트게스는 허구와 사실을 교묘하게 섞어 기사를 이슈화 한다. 그가 그토록 쓰레기 기사를 쓰는 이유가 무엇인지는 소설에 언급되지는 않는다. 데스크의 지시였는지, 개인의 출세욕 때문이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저널리스트로서 가져야할 기본 소양이나 양심, 소명감 따위는 그야말로 쓰레기통에 처박아 놓은 사람이라고 밖에는 달리 할 말이 없다. 

 

그렇다면 카트리나는 왜 슈트로입레더에 대해서 사실대로 진술하지 않았을까?

 

그녀가 슈트로입레더 같은 사람을, 그러니까 부유할 뿐만 아니라 정계나 재계, 학계에서 거절할 수 없을 정도의 매력 때문에 영화배우만큼 유명한 사람을 거부한다고 하면, 누가 그녀의 말을 믿어 주겠는가? 그리고 그녀 같은 가정부가 영화배우 같은 사람을 거절한다고 하면, 그것도 윤리적인 이유에서가 아니라 취향을 이유로 거절한다면, 누가 그녀의 말을 믿겠는가?

p112

여론은 한낱 가정부에 불과한 자신보다 명망있는 유명인의 말을 더 신뢰할 게 뻔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대중의 머릿속에 '설마 신문이 거짓말을 하겠어?'라는 무의식의 지배를 무시할 수 없다. 지금이야 1인 미디어 시대가 도래했고, 국민의 의식도 높아져 예전보다는 여론몰이에 덜 휘둘리기는 하지만, 1970년대에 신문의 역할은 절대적이지 않았을까 싶다. 

 

무엇보다 <차이퉁>이 가장 대표하는 신문이라는 것이 카타리나를 더 두렵게 했을 것이다. 소설에서 언급된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모두 차이퉁을 통해서 듣게 된 것이네', '내가 아는 사람은 하나같이 차이퉁을 읽거든요'처럼 <차이퉁>에 실린 기사는 경찰이 수사한 내용보다 더 진실이라는, 보이지 않는 공식에 저항할 힘을 잃었을테다. 그리고 소설 초반에 살인 사건 이후 카니발 고위급 위원이 한 말과 다른 기자 쇤너의 죽음은 씁쓸함을 남긴다. 물론 카니발을 통해 지역 경제를 걱정하는 그의 입장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이후 언론 플레이로 결국 살인자가 되어버린 카트리나와 더불어 삶이 나락으로 떨어진 그의 지인들을 생각하면 '즐기고 노는 데' '신뢰'가 필요하다는 말은 신뢰의 무게가 어디에 있어야하는지, 경중이 바뀐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이제 작가가 지적하고자 하는 폭력이 무엇인지를 독자는 안다.

언어와 글의 폭력.

문명인이 기본적으로 갖춰야 할 교양이 폭력이 되는 순간 인생 전체가 어떻게 곤두박질 치게 되는지, 시대의 저널리즘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하면 어떠한 사태가 일어날지 여실히 보여준다. 요즘 시쳇말로 '기레기 기자'라는 말이 있는데, 이는 단순히 기자의 자질 문제일 뿐일까? 기자가 진실을 왜곡하지 않은 기사를 쓴다고 해도 데스크와 언론사를 스폰하는 기업 혹은 권력의 영향은 지대하다. 결국 한 사람의 기자가 양심을 지킨다고 해서 해결될 일이 아니다. 결국 저널리스트들이 본연의 태도를 잃지 않아야 함은 물론 상황을 객관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여론의 눈도 절실한 시대가 되었다. 작가가 희망하듯 모쪼록 신뢰가 살아 있는, 죽지 않은 저널리즘을 기대한다.

  

 

그 모든 것이 거짓말이라는 걸 사람들이 어떻게 알 수 있겠어요.

카트리나 블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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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웃는 숙녀 비웃는 숙녀
나카야마 시치리 지음, 문지원 옮김 / 블루홀식스(블루홀6)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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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이대로라면, 나는 분명 사람을 죽이고 말 거야...... .

첫문장

 

 

1992년.

따돌림과 학교 폭력에 시달리는 중학생 노노미야 쿄코 앞에 전학생으로 나타난 사촌 가모우 미치루. 쿄코는 아름다운 외모와 형용할 수 없는 분위기로 남들의 시선을 한몸에 받는 미치루의 도움으로 학교 폭력에서 벗어나고, 재생불량성 빈혈로 쓰러진 후 그녀의 골수 기증으로 이식 수술까지 성공해 건강한 삶을 얻게 된다. 미치루를 향한 동경을 넘어 이제는 그녀와 동일시 되고 싶은 쿄코. 그러던 어느날  미치루가 아버지로부터 가정폭력과 성적 학대를 받는 현장을 목격한 쿄코는 그녀를 구출하기 위해 미치루의 계획에 동참한다. 

 

 

2006년.

직장에서 받은 스트레스를 쇼핑으로 해소해 왔던 사기누마 사요는 쇼핑 중독에 걸리고 그에 따라 재정의 한계에 도달한다. 카드 돌려막기는 말할 것도 없고, 신용불량자가 되어 직장인 은행에서 사퇴를 강요받을 수 있는 처지까지 내몰렸다. 그러다가 우연히 동창회에서 만난 쿄코의 주선으로 만나게 된 생활 플래너 미치루. 문제점을 정확하게 짚어낼 뿐만 아니라 불법이 아닌 편법을 돌려 말하며 사요에게 공금횡령을 은근슬쩍 조언한다. 사면초가에 놓인 사요는 미치루의 컨설팅을 받아들이고 빚을 갚은 후 쇼핑 유혹에 다시 빠지고 만다. 어느새 횡령 금액은 2억 엔이 넘어갔고, 본사에서 감사가 나온다는 쿄코의 정보에 차명계좌를 확인하자 통장은 이미 비어 있었다. 그리고 사라진 미치루와 쿄코. 

  

 

2007년.

대학을 졸업하고 여든아홉 번 구직에 실패한 노노미야 히로키는 아버지 회사인 산업폐기물처리 업체에서 일한다. 어느날, 사정상 두 달 정도 집에 머물기로 한 미치루를 집에서 마주한 순간 그녀에게 이성으로서 매료된다. 스물아홉 살에 경영인이라는 타이틀을 단 미치루에게 자격지심을 느끼고, 그녀 앞에 남자로서 당당해지기 위해 자립하리라 결심한다. 며칠 후 누나인 쿄코와 미치루의 성애 장면을 목격하고, 다음날 미치루로부터 놀라운 고백을 듣는다. 또한 그녀는 히로키가 스스로 독립하기 위해서는 아버지를 넘어서야 한다는 조언을 덧붙인다. 히로키는 미치루를 위해, 그녀의 남자가 되기 위해 장도리를 손에 쥔다.  

 

 

2012년.

남편은 2년 전 정리해고를 당한 후 재취업은 고사하고 느닷없이 작가가 되겠다며 히키코모리 같은 생활을 하고 있어, 어쩔 수 없이 파트타임으로 생계를 이어가는 후루마키 요시에. 아무리 절약해도 점점 조여오는 생활고에 지쳐간다. 직장 동료에게 푸념 아닌 푸념을 털어 놓자 그녀로부터 생활 플래너 상담에 대해 듣게 된다. 소개받아 간 자리에는 미치루라는 삼십 대 중반의 아름다운 여성이 나와있다. 컨실팅을 떠나 자신의 괴로움을 알아주는 그녀의 위로에 감동한 요시에. 두번째 만남에서 미치루가 건넨 조언은 두 가지. 불필요한 지출을 줄일 것, 현재 모은 자산의 가치를 높일 것. 그런데 여기서 자산의 가치를 높인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요시에는 남편을 자산의 가치로써 활용할 수 있을까? 

 

 

경찰 다카도노, 아소의 집요한 추척으로 꼬리가 잡힌 미치루. 그들이 제시한 증거물을 확인 후 변호사 선임을 요구하고, 그녀가 지목한 변호사는 의외로 형사 재판의 이력이 전혀 없는 호라이 가네토다. 그녀는 왜 경찰.검찰이 꺼리는 베테랑 형사 재판 변호사가 아닌 민사 전문 변호사를 선임한 걸까? 

 

재판 현장에서 벌어지는 반전의 반전 쇼.

그녀는 희대의 악인인가? 치밀한 플래너인가? 아니면 천재인가? 

 

 

 

■ ■ ■ ■ 

 

 

소설은 가정 폭력, 아동 학대, 존속 살해, 쇼핑 중독, 금융 사기, 보험 살해 등 자극적인 소재와 극단적인 사건 진행을 보여 준다. 그러나 소설에서조차 잔인하고 끔찍한 사건들이 현실에서 드물지 않게 매체를 통해 보도 되고 있다.

 

돈을 주지 않는 노부모를 살해한 아들, 딸에게 성적 학대를 가하는 생부, 수입을 초과한 소비 생활 때문에 쏟아져 나오는 신용불량자, 보험금을 노리고 아내 혹은 남편을 살해하는 부부, 고객의 돈을 임의로 차용해 개인적으로 사용하다가 적발된 금융업 종사자. 

 

소설을 읽다보면 등장인물 들은 미치루에게 어이없을 정도로 쉽게 넘어간다. 아니 뻔히 보이는 이 수작에 넘어간다고? 하지만 정작 미치루의 무기는 아름다운 외모도, 1급 플래너라는 직함도, 뛰어난 지능도 아닌 피해자들의 약해진 마음을 읽어낼 줄 아는 능력이다. 

 

부모조차 못 알아본ㅡ따돌림과 학교 폭력으로ㅡ피폐해진 마음을, 전문대를 졸업한 후 쉴 틈 없이 동료보다 몇 배 더 고군분투하며 살아왔건만 돌아오는 건 승진 누락에 대한 허무함과 고단함을, 루저 취급을 하며 멸시하는 가족들로 인해 바닥으로 떨어져버린 자존감과 좌절을, 생계는 뒷전이고 이기적이고 권위적이며 자식 미래에는 관심도 없는 남편을 감수하면서 혼자 아둥바둥 하루하루를 버티는 고통과 괴로움을, 미치루는 알아준 것이다.

 

그러한 그들에게 미치루는 속삭인다.

네 잘못이 아니라고, 너는 죄가 없다고, 인정하고 기다려줬다면 너는 능력을 발휘했을 거라고, 너는 이렇게 살 사람이 아니라고, 너를 꺾어 벌레 취급하고 기회를 박탈한 건 그들이라고,  그러니 그 대가를 치르게 하라고. 

 

피해자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그들의 공통점은 주변인들과 소통의 부재다.

부모님에게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다는 이유로 학교 폭력을 혼자 감수하는 쿄코, 아무도 강요하지 않은 과한 노동량을 출세를 위해 마다하지 않으면서도 스트레스를 누구와도 공유하지 않는 사요, 누나인 쿄코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고민을 가족에 대한 선입견으로 인해 진정성을 담아 나누지 않는 히로키, 남편을 가족의 구성원이 아닌 그저 돈을 벌어오는 포지션으로 단정하고 딸들과 아버지와의 관계조차도 짐작만 할 뿐 대화하지 않으며 또한 남편이 가정에서 불필요한 존재라는 것까지 혼자 결정하는 요시에.

사치성 쇼핑은 열심히 일한 나에게 면죄부가 되고, 타인의 화려한 일상은 동경에 머무르지 않으며, 복수를 정의라는 이름으로 정당화시킨다. 

현대 사회에서 우리에게 절실히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사요는 돈이 곧 행복이라고 단정짓는다. 돈은 아무리 벌어도 만족할 수 없다. 분명한 사실은 '나'는 세상에서 돈이 제일 많은 사람이 될 수 없다. 그렇다면 누군가와 비교해봐야 무슨 소용이 있으랴.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지만, 간절히 바라는 것은, 너무나 식상하게도 공감과 이입이다. 피해자들이, 자신들이 미치루에게 이용당했다는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하는 것은 어쩌면 그녀가 그 순간만큼은 그들에게 진심으로 공감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20년 동안 수많은 범죄를 저질러 오면서도 다른 사람의 그림자에 숨어, 한 번도 사건 표면으로 존재를 드러내지 않았던 여자 

p379

 

이는  미치루에게만 해당할까?

우리는 살면서 보이지 않는 수많은 유혹을 받는다. 사소하게는 불필요한 쇼핑 목록, 마음이 맞지 않는 대상에 대한 불편한 심기부터 일확천금을 노리는 투기, 복권, 널 뛰듯 뛰는 주식 시장, 부동산 시장, SNS에서 보여지는 타인과의 괴리감 등 이루 헤아릴 수 없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사람이 공금 횡령을 하고, 가족을 죽이고, 친구를 이용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정도의 차이일 뿐, '남들도 다 그래'라는 명분 뒤에 숨어 있는 나의 또다른 이면은 없는지 돌이켜 볼 일이다.  

 

가모우 미치루는, 모든 이들의 내면 저 밑바닥에 웅크리고 있다가 언제든 튀어 올라올 기회를 보고 있다. 그러니 방심하지 마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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