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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레스타인 100년 전쟁 - 정착민 식민주의와 저항의 역사, 1917-2017
라시드 할리디 지음, 유강은 옮김 / 열린책들 / 2021년 11월
평점 :
1947년, 트랜스 요르단의 압둘라 국왕은 팔레스타인인들의 보호(후견)을 해주겠다는 제안을 한다. 예루살렘 시장이었던 후세인 박사(저자의 첫째 큰아버지)는 아랍-미국 협회의 지시에 따라 트랜스요르단의 압둘라 국왕을 만나러 간다는 이스마일(저자의 아버지) 편에 그의 제안을 정중하게 거절한다는 답신을 보낸다. 이는 팔레스타인인들이 영국의 굴레에서 벗어나면 이어서 요르단의 굴레에 들어가기를 원하지 않는다는 의지의 표명이었다. 더구나 요르단에 미치는 영국의 영향력을 감안하면 결국 요르단이나 영국이나 별반 차이가 없음이었기에 그만큼 자주적 독립을 열망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서신이 요르단 국왕에게 전해진 그 순간 유엔 총회가 팔레스타인 분할에 찬성한다는 발표가 보도됐다. 1947년 11월 29일이었다. 이로써 새롭게 강대국으로 부상한 미국과 소련은 팔레스타인을 희생시켜 유대국가가 그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그 나라의 대부분을 장악하게 만드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또한 이 결의안은 또 다른 희생을 불러오게 만드는데, 아랍인이 다수인 땅에서 유대인이 다수를 차지하는 국가를 가능케하 하기 위해서 아랍인을 추방하는 조치가 이어진 것이다. 팔레스타인인들에게 닥친 재앙은 강력한 시온주의를 넘어서 미국, 소련, 미국과 손잡은 아랍 국가에 의한 결과이다.
1949년 여름에 이르면, 팔레스타인 국가는 황폐해지고, 사회는 대부분 파괴되었으며, 신생 이스라엘 국가가 된 지역에 사는 아랍 주민의 80퍼센트 정도가 자기 집에서 좇겨나고 토지와 재산을 잃었다. 팔레스타인인 가운데 최소한 72만 명이 난민 신세가 되었다. 이렇게 된 요인들에는 외국의 간섭, 아랍 내부의 의견 차이와 경쟁, 팔레스타인의 근대적 국가 기관의 부재가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 벌어지고 있는 동안 시온주의 지도자들은 영국과 거리를 두고 새로운 후원자들에게 접근하는 외교적 조정을 기민하게 추진했다. 또한 군사 역량을 계속 증강하면서 1944년에 처칠의 지지 아래 영국군 내 유대인대대 그룹(시온주의 군대)을 구성해 상당한 수준의 훈련과 전투 경험을 함으로써 앞으로 팔레스타인에서 벌어질 충돌에 상당한 우의를 확보한다. 그와 반면, 위에서 언급했듯 팔레스타인은 여전히 정치적으로 사분오열된 상태였고, 많은 지도들이 망명 상태거나 영국에 구금되어 있었다. 안타까운 사실은 1만 2천명이 넘는 팔레스타인 아랍인이 제2차 세계대전 중에 영국군에 자원 입대했지만 유대인처럼 단일한 부대를 구성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들의 전쟁 경험을 활용할 수 없었다.
- 유엔의 설립 목적은 전쟁 방지, 평화 유지,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모든 분야의 국제협력 증진이다. 도대체 누구를 대상으로 한 평화 유지이며, 누구와의 극제협력인가. 유엔 빌딩 소재지가 미국 뉴욕에 있다는 사실이 의미하는 바가 크다.
- 아랍민족기금이 1944년에 창설됐는데, 유대민족기금은 이미 50년 전에 시작됐다고 한다. 1930년대 중반에 팔레스타인 식민화를 위해 이미 350만 달러를 모았다는 사실은, 시온주의가 팔레스타인 식민화를 얼마나 오래 전부터 구상해 왔는지 짐작할 수 있다. 팔레스티인의 정보 부재에 대한 안이함과 구성원들의 분열을 탓해야 할지, 순박함을 탓해야 할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