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스토옙스키의 명장면 200
석영중 지음 / 열린책들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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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바렌카, 도대체 무엇이 날 파멸시키는 걸까요? 나를 파멸하게 하는 건 돈이 아니라 삶의 이 모든 불안, 이 모든 쑥덕거림, 냉소, 농지거리입니다.  ('가난한 사람들' 에서) 
 
 

도스토옙스키는 불안은 누구나 평생 동안 그림자처럼 데리고 다녀야 하는 삶의 일부임을 알았기에 불안에서 해방되려는 노력보다 오히려 불안을 더 깊이 탐구했다. 
 
우리를 불안하게 하는 것은 타인의 조롱과 비웃음, 그리고 인간을 생명체보다는 기능체로 취급하는 사회에서 따라오는 열등감이다. 불안이 커지면 세상에 대한 적의가 커지고, 당면한 문제에서 혹은 자기 자신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어진다. 그리고 이를 실천하는 순간, 불안은 혐오로 확장된다. 도스토옙스키는 이에 대해 <가난한 사람들>의 마카르, <분신>를 통해 말하고 있다. 
 
 


- 학창시절부터 따라다니던 별명 중 몇 개가 '투덜이'와 '걱정쟁이'였다. 우스갯말로 땅 꺼질까봐 길은 어떻게 다니냐는 사람이 바로 나다. 그런데 의외로 낙관적인 면이 많아 주변 사람들이나 나 스스로도 놀랄 때가 있다. 그럼에도 나는 내재되어 있는 불안감이 큰 사람임은 분명하다. [불안] 부분을 읽으면서, 불안이 삶의 일부분이라는 저자의 말씀이 심하게 와닿는구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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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레스타인 100년 전쟁 - 정착민 식민주의와 저항의 역사, 1917-2017
라시드 할리디 지음, 유강은 옮김 / 열린책들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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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7년, 트랜스 요르단의 압둘라 국왕은 팔레스타인인들의 보호(후견)을 해주겠다는 제안을 한다. 예루살렘 시장이었던 후세인 박사(저자의 첫째 큰아버지)는 아랍-미국 협회의 지시에 따라 트랜스요르단의 압둘라 국왕을 만나러 간다는 이스마일(저자의 아버지) 편에 그의 제안을 정중하게 거절한다는 답신을 보낸다. 이는 팔레스타인인들이 영국의 굴레에서 벗어나면 이어서 요르단의 굴레에 들어가기를 원하지 않는다는 의지의 표명이었다. 더구나 요르단에 미치는 영국의 영향력을 감안하면 결국 요르단이나 영국이나 별반 차이가 없음이었기에 그만큼 자주적 독립을 열망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서신이 요르단 국왕에게 전해진 그 순간 유엔 총회가 팔레스타인 분할에 찬성한다는 발표가 보도됐다. 1947년 11월 29일이었다. 이로써 새롭게 강대국으로 부상한 미국과 소련은 팔레스타인을 희생시켜 유대국가가 그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그 나라의 대부분을 장악하게 만드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또한 이 결의안은 또 다른 희생을 불러오게 만드는데, 아랍인이 다수인 땅에서 유대인이 다수를 차지하는 국가를 가능케하 하기 위해서 아랍인을 추방하는 조치가 이어진 것이다. 팔레스타인인들에게 닥친 재앙은 강력한 시온주의를 넘어서 미국, 소련, 미국과 손잡은 아랍 국가에 의한 결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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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년 여름에 이르면, 팔레스타인 국가는 황폐해지고, 사회는 대부분 파괴되었으며, 신생 이스라엘 국가가 된 지역에 사는 아랍 주민의 80퍼센트 정도가 자기 집에서 좇겨나고 토지와 재산을 잃었다. 팔레스타인인 가운데 최소한 72만 명이 난민 신세가 되었다. 이렇게 된 요인들에는 외국의 간섭, 아랍 내부의 의견 차이와 경쟁, 팔레스타인의 근대적 국가 기관의 부재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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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 벌어지고 있는 동안 시온주의 지도자들은 영국과 거리를 두고 새로운 후원자들에게 접근하는 외교적 조정을 기민하게 추진했다. 또한 군사 역량을 계속 증강하면서 1944년에 처칠의 지지 아래 영국군 내 유대인대대 그룹(시온주의 군대)을 구성해 상당한 수준의 훈련과 전투 경험을 함으로써 앞으로 팔레스타인에서 벌어질 충돌에 상당한 우의를 확보한다. 그와 반면, 위에서 언급했듯 팔레스타인은 여전히 정치적으로 사분오열된 상태였고, 많은 지도들이 망명 상태거나 영국에 구금되어 있었다. 안타까운 사실은 1만 2천명이 넘는 팔레스타인 아랍인이 제2차 세계대전 중에 영국군에 자원 입대했지만 유대인처럼 단일한 부대를 구성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들의 전쟁 경험을 활용할 수 없었다.  
  
 

- 유엔의 설립 목적은 전쟁 방지, 평화 유지,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모든 분야의 국제협력 증진이다. 도대체 누구를 대상으로 한 평화 유지이며, 누구와의 극제협력인가. 유엔 빌딩 소재지가 미국 뉴욕에 있다는 사실이 의미하는 바가 크다. 
 

- 아랍민족기금이 1944년에 창설됐는데, 유대민족기금은 이미 50년 전에 시작됐다고 한다. 1930년대 중반에 팔레스타인 식민화를 위해 이미 350만 달러를 모았다는 사실은, 시온주의가 팔레스타인 식민화를 얼마나 오래 전부터 구상해 왔는지 짐작할 수 있다. 팔레스티인의 정보 부재에 대한 안이함과 구성원들의 분열을 탓해야 할지, 순박함을 탓해야 할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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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색 여인 휴머니스트 세계문학 2
엘리자베스 개스켈 지음, 이리나 옮김 / 휴머니스트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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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여성의 입장에서 바라본 사회문제와 세태를 작가는 여타 작가와 어떻게 다르게 그려냈을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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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류의 씨 휴머니스트 세계문학 3
이디스 워튼 지음, 송은주 옮김 / 휴머니스트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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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린 작품 중 세 작품이 처음 번역되었다고 하니 작가의 새로운 작품을 만나볼 수 있는 기회가 되어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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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레스타인 100년 전쟁 - 정착민 식민주의와 저항의 역사, 1917-2017
라시드 할리디 지음, 유강은 옮김 / 열린책들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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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만은 제1차 세계대전을 기점으로 소멸되었다. 1917년 11월 2일 영국 외무 장관 아서 제임스 밸푸어가 이후 밸푸어 선언이라고 불리는 문서를 발표한다. 이 선언의 내용은 팔레스타인에 유대인의 민족적 본거지를 수립하는 것을 찬성하고, 이 목적을 실현하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하겠으며, 현재(당시) 팔레스타인에 사는 비유대인 공동체의 시민적.종교적 권리나 지위가 침해되는 일이 없을 것임을 밝힌다. 이는 제1차 세계대전 전에 유수프 디야의 선견지명이 눈앞에 도래한 것이었으며 동시에 팔레스타인 전체에 유대 국가를 세워 주권을 확보하고 이민을 통제한다는 헤르츨의 목표에 대한 지지 표명이었다. 당시 압도적 다수의 아랍 주민들을 '집단'으로 인정하지 않으며 마치 유령같은 존재로 치부한 것이다. 영국이 유대인에게 성서의 땅을 돌려줌과 동시에 영국으로 유입되는 유대인 이민을 줄이려는 반유대주의적 기대가 의도되었음은 명백하다. 더구나 애매모호한 문구 사용으로 시온주의자들과 영국 정치인들은 자기들끼리 확대 해석했다. 저자는 이 선언문이 팔레스타인 (아랍)원주민들에게 총구를 겨눈 선전포고였다고 말하는데, 이후 정치 상황을 보면 그야말로 총소리 없이 방아쇠가 당겨진 셈이다. 
 
 
문제는 전쟁 막바지였던 팔레스타인의 대응이 늦었다는 점이다. 거의 1년이 지난 1918년 12월이 되어서야 영국 외무부에 항의 편지를 보냈다는데, 사실 그 이면에는 유대인 인구수가 극소수에 불과했기에 밸푸어 선언의 실현 가능성이 희박하다고 보았을 것이라고 저자는 짐작한다. 
 
 
 

- 오스만 제국의 몰락으로 서구가 중동과 아랍 사회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쳤다고 봤을 때 오스만 제국은 '그들만의 전쟁'에 끼어들지 말았어야 했다. 불행의 문이 본격적으로 열린 사건은 1917년 11월 벨푸어 선언이다. 시온주의자들 입장에서 영국의 의도가 반유대적 사고에 기인했든 아니든 목표한 바를 이룰 수 있는 최대의 명분이 주어진 것이다. 물론 저희들끼리 만든, 납득도 안 되는 명분이지만. 오스만의 제국주의 식민 시대를 지지할 수는 없지만, 제국의 붕괴가 초래한 결과는 중동과 아랍의 끊임없는 전쟁으로 이어졌다는 아이러니는 역사의 양면성을 여지없이 보여준다. 6백여년을 제국 신민으로 살아왔던 그들에게 정치적으로 아무런 준비없이 던져진 민족 독립이 어떻게 다가왔을지, 그래서 늦어질 수 밖에 없었던 대처가 이해되는 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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