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 수업 - 불교철학자가 들려주는 인도 20년 내면 여행
신상환 지음 / 휴(休)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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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이나 답사를 다닐 때 근처에 성당이나 사찰이 있으면 가능한 들러보려고 한다(물론 답사 일정에 성당이나 사찰이 있는 경우도 많다). 불교는 나에게 익숙한 종교가 아니다. 등산과 답사가 계기가 된 사찰 방문은 종교와 무관한 안온함을 주기는 하지만 불교에 대해서 아는 바는 상식 수준을 넘지 못한다.   


제목이 <인도 수업> 이지만, 절반 정도의 분량이 티벳과 불교 이야기다. '불교 수업'에 더 가까운 책이 아닐까 싶은데, 그럼에도 제목이 <인도 수업>인 까닭은 인도에서 이야기가 시작되고, 저자가 어디에서 무슨 얘기를 해도 결론은 인도에 대한 이야기로 마무리를 짓기 때문인 듯하다. 인도에서 20년 수학한 저자가 인도, 티벳, 투르크 여행기를 불교와 접목시켜 서술한다.  








 
인더스강은 기원전 3세기 인도 정복 전쟁을 펼쳤던 알렉산더 대왕이 그리스어로 '인도스'라고 불렀고, 페르시아인들은 '힌두스'라고 불렀다. 이러한 과정을 겪으며 오늘날 인더스강과 그곳에 사는 사람들이라는 뜻으로 인도인들을 부르는 '힌두'가 생겨났다고 하네. 인도에는 국어 즉 national language가 없다. 이는 인도의 역사.인종.지형 등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다. 애초부터 '나라말'을 생각하기에는 그 규모가 컸고 그곳에 사는 사람들이 너무 다양했던 것. 이처럼 인도의 언어와 어원, 역사, 문화의 유래와 현재 인도인들의 삶 등을 여행자가 아닌 현지인의 입장에서 이야기한다. 




티벳은 궁금하지만 검색으로 아는 게 전부인 곳이다. 먼저 새롭게 안 사실, 티벳학이라고 하는 것은 티벳의 문화.역사 등을 공부하는 것이고, 티벳 불교는 이 기운데 불교를 전문으로 다루는 것이고, 티벳 밀교는 티벳의 현밀쌍수의 전통 가운데 밀교를 강조하며 수행하는 것 등을 가리킨다(티벳 불교와 밀교는 다르다). 그럼 여기서 현밀쌍수는 무엇인가? 이런 식으로 아는 건 없고 궁금증은 못 참아 꼬리에 꼬리를 물고 자료를 찾느라 읽는 시간만큼이나 검색하고 다른 책을 들추는 데 시간이 들었지만, 그 과정도 꽤 재미있었다. 


대승 불교가 대중들에게 널리 퍼지게 된 배경이 '시장의 요구' 때문이었다고. 티벳의 불교 전래는 불교적 세계관을 그 문화적 원형으로 삼고 출발했다. 당시 주나라에서는 사후 문제를 언급하면 은나라의 귀신 숭배 사상과 겹쳐 소위 이단으로 낙인이 찍히게 되었는데, 중국에 전래한 불교가 커다란 마찰 없이 도교의 개념을 빌어 중국 문화와 융합될 수 있었던 것은 '사후 문제의 결여'라는 빈자리를 채워줄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세상이 돌아가는 이치에는 그만한 이유가 다 있다더니!) 


인도-티벳 불교의 전통을 이해하는 핵심은 '세간의 진리'와 '수승한 의미의 진리' 이다. 일체 부자성에 근거를 둔 언설로 표현 불가능한 연기 실상의 세계와 언설로 된 희론의 세계에 그 근거를 두고 있다. '일체 부자성=연기=공성' 이라는 항상 움직이는 세계를 언어.개념.정의 등으로 고정하는 언설의 세계로 전환하는 순간, 오류가 발생할 수밖에 없다는 점을 강조한다. (이거 이해하는 데 시간 좀 걸렸다) 


중국 불교가 소의경전(Root text Buddhism)이라면, 티벳 불교는 주석불교(Foot note  Buddhism)이다. 그러나 기도와 신행, 대승의 근간인 자비심과 공성을 강조하는 것은 공통분모다.  


티벳 불교에서의 밀교는 생활 그 자체를 뜻한다. 신행의 근간이 되는 진언과 염송은 밀교의 전통인데 대승 불교에서 빼놓을 수 없는 요소이니 티벳 불교=밀교로 취급할 필요는 없다. 밀교는 스승과 제자 간의 법의 전승을 매우 중요하게 여긴다. 제례 의식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중국이나 티벳의 밀교는 공통점을 지녔으나 티벳 불교는 '티벳 불교'의 특징을 지닌다. 이외에도 티벳 불교와 비티벳 불교의 차이, 티벳 불교가 세계로 퍼져나갈 수 있었던 이유, 그리고 티벳의 간략한 역사 등 티벳(불교)에 대한 궁금증을 어느 정도 해소할 수 있었다 


'자유 티벳'을 향한 불교의 불살생 언칙에 따른 비폭력 투쟁을 계속하는 티벳 불교와 만가지 단점에도 불구하고 유일무이에 가까운 한국의 호국 불교의 위대함은, 방식은 다르지만 맥락은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2장 티벳 이야기]를 읽고는 나름 진심 뿌듯했다는.  



[4부 투르크 이야기]는 그야말로 여행 에세이 느낌이 물씬 나는 부분인데, 읽다보니 몇 년 전에 읽은 유홍준 교수님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중국편 중 '실크로드의 오아시스 도시' 가 생각났다. 중복되는 내용이 많지는 않지만 그때 기억을 되짚어 가며 읽는 것도 꽤 괜찮은 읽기였다. 파미르 고원 , 톈산 산맥, 키르기스스탄의 오시, 카자흐스탄의 북아랄해, 투르케스탄의 아흐멧 야사위의 대영묘, 사마르칸트 등 두 달에 걸친 중앙아시아 여행기. 이렇게 긴 여행 일정이 가능하다니 그저 부러울 따름이다.  


비록 일부나마 내가 이 책이 아니면 어디서 불교 경전을 쉽게 만날 수 있을까 싶다. 나에게는 불법을 따라가는 생소한 여행기였지만, 내 나름의 의미가 있었다. 불교를 철학적으로 접근해 보고 싶다는 생각도 든다(종교학으로는 엄두가 안나고). 




​♤ 출판사 지원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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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스토옙스키의 명장면 200
석영중 지음 / 열린책들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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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도스토옙스키에 관해 예리한 글, 심오한 글, 웃기는 글, 무서운 글은 쓸 수 있지만 따뜻한 글을 절대 못쓴다고 얘기한다. 그 치열함에서 따뜻함보다는 위로를 받았다는 저자가 고른 2백 개의 구절 혹은 장면이 실려있다. 불안, 고립, 권태, 권력, 고통, 모순, 읽고 쓰기, 아름다움, 삶, 사랑, 용서, 기쁨 등 열두 개의 주제별로 나누어진 도스토옙스키를 단편적으로나마 만나본다.


책을 본격적으로 읽기 전에 일단 가볍게 훑어보니 다행(?)스럽게도 대부분 읽은 작품이라 더 반가웠다. 서문에서 도스토옙스키의 족적을 찾아 러시아, 카자흐스탄, 독일,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체코, 오스트리아, 스위스를 둘려본 저자의 순례가 간단한 에피소드처럼 쓰여 있는데, 로마사를 따라 답사 순례를 하고 싶은 나로서는 무척 부러운 부분이었다. 그리고 도스토옙스키를 읽고 나면 다른 작가는 조금 심심하게 느껴진다는 저자의 말에 충분히 공감하는 바다.   
 



'고통'이 도스토옙스키 문학 전체를 아우르는 핵심 화두라는 첫문장에서 그동안 읽은 그의 작품들을 되짚어보니 납득이 된다. 저자는, 인간은 타인의 고통과 자신의 고통이 스쳐 지나가듯 만나는 지점에서 성장한다고 썼는데, 이에 촛점을 맞춰 인용된 글들을 읽어갔다. 자신의 가난보다 더 극한의 가난에 시달리는 이웃의 고통을 목격하는 마카르, 족쇄에서 두 발이 그냥 빠질 정도로 앙상한 죄수의 고통, 벼랑 끝에 내몰렸으나 돌아갈 곳을 상실한 자의 고통, 어린 자식을 잃은 부모의 슬픔과 고통, 굶주림의 고통 등. 이러한 고통들을 의식하려고 하지 않는 순간, 우리는 공감력을 잃어버린 소시오패스가 되고 만다. 무엇보다 악으로 변질되는 슬픔이야말로 가장 고통스러운 부분이라는 마지막 문장에서 우리가 놓아서는 안 되는 것이 무엇인지를 다시금 깨닫는다.  


'고통은 조건과 상관없이 우리가 수용하는 방식에 따라 우리의 격을 달라지게 한다'는 저자의 글에서 '일단 멈춤' 모드가 된다.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다. 여기에 인용된 글은 <지하로부터의 수기>인데, 아마 '고상한 고통'을 염두에 두고 쓴 문장인 것 같다. 이론적인 것이 아닌 실제적인 면에서 저자가 말한 고통의 수용 방식과 내가 수용하는 고통의 방식의 차이에 대한 생각들이 길어진다.  


<악령>을 통해 고통의 종착역인 죽음을 극복할 때 인간은 신의 경지에 이를 것이며 그 세상이 얼마나 끔찍할지를 얘기하는 대목에서 일련의 미래 소설들에서 영생이 또 다른 고통의 시작임을 일관되게 주장하는 바와 상통한다. 위로받을 수 없다는 사실만이 위로가 되는 그런 고통이 인생에는 있다는 저자의 글이 무슨 말인지 알 것 같아 깊게 와닿는다.




마음에 드는 책을 발견하여 완전히 몰입해서 읽는 것과 누군가와 사랑에 빠지는 것은 것의 같은 것이 아닐까라고 짐작하는 저자. 그런가...? 책은 읽는 대상일 뿐만 아니라 경우에 따라 여러 매개체로 전환된다. 때로는 사랑으로, 때로는 추억으로, 때로는 아픔으로, 떄로는 위로로 다가온다. 책 자체보다 책을 소유했던 사람 혹은 그와의 관계 맺음에서 오는 여러 감정들에 따라 달라진다. 독서라는 행위 역시 모든 이에게 긍정적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하물며 글쓰기야 말해 무엇하랴. 저자는 <가난한 사람들>의 마카르가 존재하기 위해 썼고, 씀으로써 존재했다고 얘기하는데, 도스토옙스키야말로 그러하지 않았을까.  


격하게 와 닿은 문장, "독서는 삶의 균형을 잡아 주는 경험이지 삶을 대신하는 경험은 아니다.(p182)"



​도스토옙스키에게 있어서 아름다움이란 영혼이 아름다운, 영원을 향한 깊은 응시다. 이는 그의 몇 작품만 읽어도 아주 잘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미시킨이 말한 "아름다움이 세상을 구원하리라"는 나스타시야의 외모적 아름다움이 아닌 것처럼, 특히 <백치>의 미시킨과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의 알로샤로 대변하는 궁극의 아름다움이 무엇인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성찰이 없는 내면의 인간은 결코 아름다울 수 없다. 이러한 아름다움에 무감각한 사람, 해학이 없는 사람을, 저자는 위험한 사람이라고 말한다.  



저자의 말에 따르면 사랑은 도스토옙스키가 가장 많이, 가장 집요하게 파고들었던 개념이다. 정말 그의 소설에서는 어떤 형태든 '사랑'이 절대적 위치에 있다. 사랑이야말로 얼마나 섬세한 감정인지. 사랑할수록 우리는 타인을 인정하고, 더 잘 이해하게 된다. 그리고 사랑은 누군가를 변화시키는 가장 큰 원인이 되기도 한다. 그게 부정적이든 긍정적이든.


보상에 대한 생각이 아주 미미하게 개재해도 그 사랑은 의미를 상실한다는데, 현실에서 그러한 사랑이 가능할까? 저자의 말대로 소설 속에서나 가능한 사랑이다. 사랑에 대한 평가는 사랑이 깨어졌을 때만 가능하다는 저자의 말에 슬그머니 웃음이 난다. 사랑을 평가하겠가고 그 사랑을 일부러 깰 수 없는 노릇이니까. 집착은 사랑이 아니다. 사랑에 목숨 걸지 마시길. 로고진(아니면 드미트리)처럼 된다. 더하여 로고진의 사랑을 사랑이라 할 수 있겠나. 그리고 그런 무서운 사랑, 반길 사람 아무도 없을 것이다.


도스토옙스키가 지향하는 사랑은 '실천적 사랑'이다. 주변의 소외자, 약한 자들에 대한, 완벽한 자기희생을 통한 사랑의 완수. 그러나 도스토옙스키도 이러한 변함없는 사랑은 불가능하다고 수차례 강조했다고 한다. 그래서 저자는 우리가 짚어할 부분은 실천적 사랑의 성공이 아니라 그 가능성에 대한 믿음이라고.  




우리는 타인을 어디까지 용서할 수 있는가. 도스토옙스키는 작품을 통해 우리에게 묻는다. 그는 종교적인 차원에서의 용서, 그리고 법과 원칙적인 차원에서의 용서를 명백히 구분했다. 눈에 들어오는 용서에 대한 해석은, 연민과 동정심을 구분해야 하는 것과 범죄자를 구제하는 것은 동정심이 아니라 그로 하여금 스스로를 인간으로 깨닫게 해주는, 동료 인간의 인간적인 대접이라는 것이다. 범죄자가 스스로 죄를 뉘우칠 때에 용서와 갱생의 선순환이 시작될 수 있다는 말씀이다. 저자가 인간과 세상을 바라보는 보편적인 시선에 대해 얘기하면서 인간의 도리를 지키는 일이 가장 어려운 일인 것 같다는 글에서 같은 생각을 하게 된다.  




전체적으로 봤을 때 가장 많이 인용된 작품은 <죄와 벌> <악령>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지하로부터의 수기> <죽음의 집의 기록>이다. 발췌한 문장들을 읽자니 새록새록 기억이 나면서, 저자의 첨언을 읽는 즐거움까지 보태졌다.  


책을 다 읽고나니 정말 200개의 장면을 뽑아내는데 엄청 고생하셨겠다는 생각이 든다. 뽑아놓은 글을 읽어도 기억이 가물가물한데, 그 많은 작품들 중에서 테마에 맞춰 일일이 찾아냈을 수고와 도스토옙스키에 대한 애정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중간 중간에 저자가 가장 좋아하는 구절이나 깊게 각인되어 있는 장면, 혹은 대목들이 있는데, 앞으로 좋아하는 작가들의 작품들을 읽으면서 구절 혹은 장면들을 수집해 놓는 것도 의미있는 작업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도스토옙스키의 작품을 읽지 않은 독자들이 선뜻 손을 내밀기에는 거리감이 있을 수 있으나 기승전결이 있는 책이 아니라서 읽는 데에 무리가 없다. 가볍게 도스토옙스키를 만날 수 있다는 장점이 있고, 무엇보다 저자의 글이 참 좋아서 그것만으로도 읽어보라고 권해주고 싶은 책이다. 개인적으로 사이사이 읽게 될 책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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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들어진 유대인
슐로모 산드 지음, 김승완 옮김, 배철현 감수 / 사월의책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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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은 '카탈루냐'와 '아랍'을 민족으로 인정한 세계에서 얼마 안 되는 나라다. 한 마디로 유대 민족 외에는 민족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역설이다. 이스라엘 국가를 충족시킬 만큼 충분한 유대인 조건의 1순위는 무조건 어머니가 유대인이어야 한다. 종교적 믿음, 신앙, 언어는 부차적인 문제다. 그들의 정체성은 오로지 모계 혈족에 달려 있다. 이스라엘에서  카인의 표적을 달고 비유대인으로 살아야함에도 국방의 의무를 다해야하는, 그래서 같은 땅에 살고 있는 아랍인들을에게 총부리를 겨눠야하는 이들의 정체성. 
 


"홀로코스트에 비하면 '나크바'가 뭐 그리 나빴다는 건가? 짧은 기간 동안 제한적으로 벌어진 팔레스타인 난민 문제를 어떻게 이천 년 유배의 고통에 비길 수 있단 말인가?" 이 물음에 대한 사람들의 대답이 궁금하다.  
 



서문만으로도 이 책이 이스라엘 현지에서 어떤 반응을 보였을지, 그리고 청장년 세대는 어떻게 받아들여졌을지가 무척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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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스토옙스키의 명장면 200
석영중 지음 / 열린책들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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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9 장면.
자네에게 많은 행복을 기원하지는 않겠네. 지루할 테니, 불행을 바라지도 않네. 민중의 철학을 따라 그냥 다시 한번 말하지. <오래 살게나>, 그리고 어떻게든 너무 지루한 삶이 되지 않도록 노력하게나. 이 쓸데없는 소망은 내가 덧붙여 주는 것이네. 그럼, 잘 가게, 진심으로 잘 가게. 그리고 문 앞에 서 있지 말게. 문을 열지 않을테니. ('악령'에서) 
 
 


'무용하고 희망 없는 노동보다 더 끔찍한 형벌은 없다'라는 카뮈의 말, 이보다 더 나아가 '그런 형벌에 처해진 인간은 그 상태에서 벗어나기 위해 범죄를 저지를 수 있다'는 도스토옙스키의 경고. 그런데 나는 '무용하고 희망 없는 노동'의 기준이 무엇일지 고민하게 된다. 언급된 <죽음의 집의 기록>은 유형지에서의 노동이기에 이런 단정이 가능하지만, 현대인에게 이러한 고민이 갖는 무게가 얼마나 될지 의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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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스토옙스키의 명장면 200
석영중 지음 / 열린책들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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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9 장면.
세상은 날이 갈수록 하나로 합쳐지고, 이로써 거리를 줄여 나가고 허공을 통해 사상을 전달하는 형제적 관계를 형성해 나간다고 사람들은 믿고 있습니다. 아아, 인류의 그 같은 결합을 믿지 마십시오. 자유를 욕구의 즈대와 신속한 충족으로 이해함으로써 자신의 본성을 왜곡할 뿐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수많은 무의미하고 어리석은 욕망과 관습과 비합리적인 망상을 탄생시켰기 때문입니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의 한 장면을 통해 저자는 유대와 연결의 차이를 지적한다. 현재 SNS에서 이루어지는 소통이 과연 유대인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으며 타인과의 거리와 존중이야말로 진정한 연결이 될 수 있음이다. 도스토옙스키가 쓴 것처럼 자유를 욕구와 충족으로 왜곡시켜서는 안 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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