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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없는 것도 부른다면 - 박보나 미술 에세이
박보나 지음 / 한겨레출판 / 2021년 12월
평점 :
이 세상에 남아돌거나 소외되어도 괜찮은 존재는 하나도 없다. (레오나르도 보프 신부)
이 시대를 관통하고 있는 사회 문제들이 현대 미술과 만나 세상에 전달하고자 하는 메세지들을 담았다. 현대 미술가인 저자 본인을 포함, 이 책에 등장하는 예술가들이 사운드, 그림, 노래, 텍스트 등을 결합해 포퍼먼스 예술을 선보이는 과정과 결과물들에 대한 사유를 담은 에세이다.
이 책에서 주목할만한 점은 '옆으로 나누는 대화'다. 브라질의 개혁 신학자 레오나르도 보프 신부의 생각에서 영감을 받아, 저자는 나무로 시작해서 14가지의 소재를 마치 손을 잡고 원을 그리듯 옆으로 옮겨가다가 열네 번째에 다시 나무로 돌아오는 방식으로 서술한다.
저자는 인간은 비인간 존재들을 제 입맛에 맞춰 재창조하고, 생태계 질서를 재구성하려 든다고 지적하면서 사람과 사람 뿐만 아니라 이 지구를 구성하는 존재들이 유기적으로 엮일 수 있는 데에 예술이 도움을 줄 수 있다고 얘기한다.
예술은 사람 안에서, 사랑이 있는 공간 안에서 완성되며, 우리와 시간과 공간을 공유하는 수많은 사물들은 인간과 상호 작용을 일으키며 같은 세계를 구성하고 있음을 강조한다. 생각해 보니 비생명체인 사물도 개인의 역사 안에서 사연을 담고 있다면 단순 사물의 위치를 넘어선 것임을, 사실은 우리도 알고 있지 않은가.
기억에 남는 부분을 꼽자면 먼저, 미국 매사추세츠주에 위치한 마서즈비니어드 섬의 사례인데, 1960년대 청각 장애 이주민들이 정착한 이후, 듣지 못하는 사람들의 비율이 네 명 중 한 명에 이르자 청인 주민들까지 모두 수화를 배우기 시작하면서 주민 모두가 수화로 충분히 대화를 할 수 있게 되어 아무도 자신의 의견과 감정을 전달하는 데 불편함을 느끼지 못했다고 한다. 그들에게 들을 수 없다는 것은 장애가 아닌 그냥 특정한 신체적 상태로 인식한다고. 그런데 미국 원주민의 역사가 그러했듯 이 섬 또한 참혹한 과거를 안고 있다. 청각 장애인에게 이상적인 장소라는, 유명한 휴양지라는 명성이 섬의 전부는 아니다. 저자는 모든 공간은 삶의 흔적을 담고 있기 때문에 그곳을 담은 예술품이 박제 된 그림일 수 없다고 말하는데, 이 대목에서 앞서 읽었던 민정기 작가의 작품도 이와 같은 맥락이겠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두번째는 케이티 패터슨의 <미래 도서관>. <미래 도서관>은 노르웨이 숲에 천 그루의 묘목을 심고, 그 나무가 다 자라면 그것으로 책을 인쇄하여 출판하는 프로젝트다. 패터슨은 해마다 한 명의 작가를 초청해 원고를 청탁해 받는데, 그렇게 모은 원고는 나무가 다 자랄 때까지 공개하지 않고 봉인해서 오슬로의 공공 도서관에 보관한다. 글을 제공한 작가에게도 참 의미 있는 작업이겠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2019년에는 한국의 한강 작가가 다섯 번째 작가로 초대되어 원고를 전달하는 의식을 가졌다고 한다. 패터슨은 이 작업의 완성을 100년 뒤인 2114년으로 잡았다. 생각해 보라. 한 세기 동안 천 그루의 나무를 심어 숲을 키우고, 백 명의 문필가들은 글을 쓴다. 현재 이 프로젝트에 참여한 작가들은 자신의 완성된 결과물을 볼 수 없다. 패터슨은 이 작업을 지속시키기 위해 식수와 원고 모집을 계속 해나갈 후원자들을 모집했다고 한다. 100년 뒤의 인류가 살아갈 세상은 아무도 모른다. 그래서 저자의 말처럼 패터슨의 이 프로젝트는 단순히 의미 있는 책을 만들어 서고에 보관하는 데에 있다고 생각되지 않는다. 그야말로 나무의 성장을 지켜보며 그저 앞만 보고 빠르게 달려나가는 인류에게 숨 고르기를 하라는 의미일 것이다.
뽑혀나가는 나무, 잃어버린 새소리, 폭력과 혐오, 순혈주의, 동물권, 종차별, 진실과 거짓, 착취 된 자연, 소통, 정상과 비정상, 정체성과 개별성, 도시 난개발, 차별과 소외, 공간이 갖는 의미, 폭력적인 속도 등 생물과 비생물의 경계 없이 조화를 이루어 이 땅 위에 존재하는 삶을 수직적 발달이 아닌 물방울이 떨어져 그 울림이 멀리 퍼져나가 듯 사방으로 뻗어나갈 수 있기를 바람한다.
♤ 하니포터 1기로서 쓴 리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