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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움의 정원에서
크리스티앙 보뱅 지음, 김도연 옮김 / 1984Books / 2021년 12월
평점 :
이 책은 프랑스의 시인 크리스티앙 보뱅이 지극히 사랑했던 여인 마리옹 지슬렌을 잃고 그리움을 담아 쓴 에세이다.
서문에서부터 지슬렌을 향한 보뱅의 애틋함이 절절히 전해진다. 지슬렌과의 첫 만남에서부터 16년간 지속된 그들의 추억을 담담하게 풀어놓는다. 그녀와의 사랑이 이루어지지 않았더라도 그녀를 사랑했던 시간에, 그리고 죽음으로써 그녀를 잃고 찾아온 상실조차 감사하다는 그는, 지슬렌의 죽음 안에 감춰진 고귀하고 순수함을 찾아 그녀의 어린 시절부터 되짚는 글쓰기의 여정을 시작한다.
삶이 침묵 속으로 들어갈 때까지 계속 이어지는 것처럼 지슬렌의 죽음도 보뱅에게는 마찬가지가 아니었을까. 보뱅은 지슬렌의 삶의 방식을 하나하나 나열하며 그녀의 죽음을 애도한다.
사랑하는 이의 결혼을 지켜보는 보뱅의 마음은 어땠을까라는 생각을 채 하기도 전에 그가 대답한다. 한 가지를 잃었지만, 다른 하나를 얻었다는 그는 얻은 것에 무어라 이름을 붙여야 할지 모르겠다고, 단지 그것은 고갈되지 않는 것임을 알 수 있을 뿐이라고 썼다. 그가 얻은 무엇일까.
자유와 지혜와 사랑은 똑같은 말로서 각 단어가 다른 두 단어와 유리되면 알맹이도 의미도 없는 텅 빈 언어가 되어버린다고 얘기하며, 지슬렌이 남긴 가장 중요한 유산은 눈물과 웃음이라는 대목에서 그러한 유산을 남긴 지슬렌도, 떠난 자의 눈물과 웃음을 간직하는 시인도 아름답다.
사는 동안 '사랑이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의 답을 끊임없이 찾았다는 지슬렌. 한 개인을 대상으로 하는 사랑이 아니라면, 어쩌면 인간은 지슬렌이 찾았던 답을 찾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에 대한 답을 찾았다면 보뱅의 말처럼 다른 질문은 모두 부차적인 문제가 될 것이다. 그러나 이 질문에 대한 명쾌한 답을 내놓을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어쩌면 전혀 없을지도.
시인이 일컫는 젊음은 곧 삶이다. 완전무결한 삶, 절망과 사랑과 쾌활함이 뒤섞인 삶. 아이들이 자라고 독립해 나가면 혼자만의 고독을 누릴, 마음에 드는 집을 발견했으나 그 고독을 채 누려보지도 못한 채 마흔네 살에 그 삶을 놓쳐버린 지슬렌과 함께 하는, 희망할 수 없는 삶을 희망하며, 지슬렌을 향한 그리움으로 그녀를 생각하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말한 보뱅. 시시각각 다가오는 죽음을 인지하지 못한 채 죽음에 대해 얘기했던 그 순간들을 기억하는 그의 마음은 얼마나 아플까. 그럼에도 시인은 그 고통을 사랑과 애도로 승화했다. 읽는 내가 더 슬프다.
1951년에 세상에 나와 1979년 가을에 지슬렌을 만났고, 1995년 여름 그녀를 잃었다. 보뱅은 지슬렌을 만난 그때에 자신이 진정으로 깨어났다고 말한다. 16년 동안 지슬렌을 바라보는 일만으로도 세상에서 가장 바쁜 남자였다고 말하는 시인. 사람이 사람을 어떻게 이토록 무구하고 무한하하게 사랑할 수 있는지.
그녀는 세상에 없지만 모든 일상에서 그녀와 함께 하는 보뱅은 죽음의 시간이 올 때까지 자신의 일은 매 순간을 살아가는 것 뿐이며, 죽음에 이르러서야 우리가 비로소 쉴 수 있다고 얘기한다.
"만일 이 키스가 충만함과 끝없는 결핌에 입 맞춘 거라면, 결국은 모든 것에서 승리한 게 아닐까? (p51)" 지슬렌이 엽서에 남긴 이 글만으로도 보뱅이 왜 그토록 그녀를 사랑했는지 알 것 같다. 10년 후 지슬렌이 어디에 있을지 묻는 보뱅은 그녀에 대한 사랑을 여전히 현재 진행형으로 쓰고 있는데, 정작 책을 읽고 있는 내가 과거형으로 쓰고 있었다. 12월 한 해의 끝자락에 이 에세이를 읽을 수 있어서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