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이책 정말 좋네 ㅋ 요건 명작이다.
















나르치스 군, 고백하건대 나는 자네를 두고 한 가지 가혹한 판단을 해왔다네. 나는 곧잘 자네가 오만하다고 생각했었지. 그래서 어쩌면 자네한테 잘못한 게 있을지도 몰라. 여보게, 자네는 너무나 고립되어 있고 외로운 존재야. 자네한테는 숭배자는 있을지언정 친구는 없거든. 제발이지 자네를 꾸짖을 기회라도 왔으면 하고 바랐다네. 하지만 그럴 계기가 있어야 말이지. 자네 또래의 젊은이들이 곧잘 그러듯이 때로는 자네도 철없이 굴기라도 했으면 좋겠어. 그런데 자네는 절대로 그러지 않거든. 그래서 이따금 자네 때문에 마음을 졸이곤 한다네, 나르치스. - P15

우리 수도원에서 질서와 순종의 미덕이 흐트러진다면 아무리 교육 제도를 개선해도 소용이 없단 말일세. 자기 뜻을 굽힐 줄 모른다면 그것은 나르치스의 잘못이야. 그리고 자네들 젊은 학자들한테 바라고 싶은게 있다면 자네들보다 우둔한 상급자들이 앞으로도 결코 없어지지 말았으면 하는 것일세. 오만함을 다스리려면 그보다 좋은 약은 없는 법이지. - P21

아름답게 빛나는 이 소년이‘그런 각오를 다지고 있으리라고는 아무도 눈치 채지 못했지만, 그에겐 이미 태어날 적부터 그 어떤 운명의 짐이 지워져 있었다. 그는 속죄와 희생의 길을 가야만 하는 남모를 운명을 타고났던 것이다. - P30

군계일학처럼 외로운 존재였던 나르치스는 골드문트가 모든 면에서 자기와 상반된 존재인 듯하면서도 닮은 데가 있다는 것을 직감으로 알았다. 나르치스가 어두운 성격에 깡마른 체격이었다면 골드문트는 눈부시게 화사한 존재였다. 또 나르치스가 사변가요 분석가였다면 골드문트는 몽상가로서 어린아이처럼 순진한 영혼의 소유자로 보였다. 그렇지만 두 사람 사이의 그러한 대립적 측면보다는 공통점이 더 컸다. 둘은 훌륭한 인격자였고 두 사람이 보여주는 재능과 개성은 다른 생도들에 비해 두드러졌으며, 또 둘은 숙명적으로 그 어떤 특별한 경고를 받으며 태어난 존재였던 것이다. - P31

골드문트는 작은 정원을 가로질러 재빨리 친구들을 뒤따라갔다. 비틀거리며 화단에 넘어진 골드문트는 촉촉한 내음과 두엄 냄새를 맡았으며, 또 장미 덩굴에 찔려 손에 생채기가 나기도 했다. 그는 울타리를 타고 넘어 잰걸음으로 다른 친구들을 뒤쫓아 마을을 벗어나서 숲을 향해 걸어갔다. 두번 다시 오지 않을 거야!」하고 그는 의지를 굳게 다짐했다. 하지만 그의 가슴은 탄식하며 「내일다시올거야!」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 P42

「그래, 사랑하는 친구, 마음껏 울면 금방 나아질 거야. 자, 자리에 앉아. 얘기하지 않아도 좋아. 내가 보기엔 그만하면 충분해. 너는 오전 내내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내색을 하지 않으려고 애를 썼던 것 같아. 매우 씩씩하게 해냈어. 지금은 우는 것만이 네가 할 수 있는 최선이야. 아니라구? 벌써 다 울었어? 그새 괜찮아졌단 말이지? 자 그럼 이제 양호실로 가자꾸나. 거기서 좀 누워 있어, 저녁때쯤이면 훨씬 나아질 거야. 가자구 !」 - P43

그는 이제 서로 마음의 장벽이 허물어졌으며 둘이 서로 친구가 되리라는 것을 알았다. 오늘은 골드문트가 자기를 필요로 했고 그에게 도움을 줄 수 있었다. 언젠가는 그 자신이 나약해져서 골드문트의 도움과 사랑이 필요해질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 그런 상황이 닥친다면 자신도 이 소년의 도움과 사랑을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았다. - P46

그는 골드문트의 본성을 환히 꿰뚫고 있었으며, 서로 대립되는 기질에도 불구하고 그 본성을 아주 내밀하게 이해하였다. 그도 그럴 것이 골드문트의 본성은 바로 그 자신이 잃어버린 또 다른 반쪽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골드문트의 본성이 온갖 공상이나 잘못된 교육 그리고 아버지의 말씀과 같이 철판처럼 단단한 껍질에 에워싸여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이미 오래전부터 이 어린 생명의 비밀을 모두 예감하고 있었다. 그 비밀은 복잡한 것이 아니었다. 나르치스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도 분명히 자각하고 있었다. 그 비밀을 짊어지고 있는 당사자에게서 비밀의 베일을 벗겨내고 껍질을 벗게 해주는 것, 친구에게 본연의 천성을 되돌려주는 것이 그가 할 일이었다. 그것은 물론 어려울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견디기 힘든 것은 어쩌면 이 일로 인해 친구를 잃게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이었다. - P51

친구를 생각하는 마음이 아무리 간절해도 둘 사이는 그렇게 멀기만 했고, 둘을 이어주는 마음의 끈은 너무나 팽팽하게 긴장해 있었다. 마치 눈먼 사람과 멀쩡한 사람이 함께 걸어가듯 둘의 우정은 평행선을 유지하고 있었다. 눈먼쪽이 자기가 장님이라는 사실을 의식하지 못할수록 멀쩡한 쪽은 오히려 마음이 놓이는 식이었다. - P51

그래,골드문트. 난 너와 같은 부류가 아냐. 네가 생각하는 그런 부류가 아냐. 물론 나도 말로는 하지 않은 서약을 간직하고 있지. 그건 맞아. 그렇지만 단연코 너와 같은 부류는 아냐. 오늘 너한테 해줄 말이 있는데, 언젠가는 이 말이 생각날 거야. 모름지기 우리의 우정에는 네가 얼마나 완벽하게 나와는 다른 존재인가를 너한테 보여주는 것 말고는 다른 어떤 목표도 의미도 없어. 너한테 해주고 싶은 말은 바로 이거야. - P56

그는 사랑을 위해 태어난 존재인 것이다. 섬세하고 풍부한 감성을 타고난 그는 꽃 향기라든가 떠오르는 태양, 말이나 새의 비상, 음악 같은 것을 너무나 깊이 체험하고 사랑할 줄 알았다. 그런 존재인 골드문트가 어째서 정신의 세계를 추구하고 금욕의 길을 가야 하는 수도사가 되겠다는 집념에 사로잡혀 있는 것일까? - P61

나르치스가 말했다. 「바로 그거야. 핵심을 찌르는 말이야. 사실 너한테는 차이라는 것이 그다지 중요하지 않지만, 나에게는 오직 차이만이 중요한 것 같아. 나는 본성상 학자이고 내 소명은 학문이야. 그런데 학문이라는 것은 네 말을 빌리자면 <차이를 찾아내겠다는 집념>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지. 학문의 본질을 이보다 더 훌륭하게 정의하기도 힘들 거야. 나처럼 학문을 하는 사람한테는 다양성을 확인하는 것만큼 중요한 일은 없어. 학문이란 분류술이라고도할 수 있지. 이를테면 어떤 사람이 여타의 사람들과 구별되는 특징이 무엇인가를 찾아내면 곧 그 사람을 안다고 말하거든. - P68

나르치스가 다시 말을 이었다. 「진심으로 하는 말이야. 우리는 가까워질 수 없어. 마치 해와 달, 바다와 육지가 가까워질 수 없듯이 말이야. 이봐, 우리 두 사람은 해와 달, 바다와 육지처럼 떨어져 있는 거야. 우리의 목표는 상대방의 세계로 넘어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인식하는 거야. 상대방을 있는 그대로 지켜보고 존중해야 한단 말이야. 그렇게 해서 서로가 대립하면서도 보완하는 관계가 성립되는 것이지」 - P70

「물론이지」나르치스가 말을 이었다. 「너 같은 기질의 사람들, 그러니까 강렬하고도 섬세한 감성을 지녀서 영혼으로 느낄 줄 아는 몽상가나 시인들, 혹은 사랑에 빠진 사람들은 우리 같은 정신적 인간보다는 거의 예외없이 더 우월한 존재라고 할 수 있지. 그런 사람들은 말하자면 모성(母性)의 풍요로움을 타고난 존재들이야. 그들의 삶은 충만해 있고, 사랑의 힘과 체의 능력을 부여받은 존재들이지. 그 반면 우리 같은 정신적 인간들은 너 같은 사람들을 곧잘 이끌어가고 다스리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충만된삶을 전혀 모르고 메마른 삶을 살게 마련이야. 과일의 단물처럼 넘쳐흐르는 삶의 풍요로움, 사랑의 정원과 예술의 땅은 바로 너희들의 것이지. 너희들의 고향이 대지라면 우리네의 고향은 이념이야. 너희들이 감각의 세계에 익사할 위험이 있다면 우리는 진공 상태의 대기에서 질식할 위험에 처해 있지. 너는 예술가고 나는 사상가야. 네가 어머니의 품에 잠들어 있다면 나는 황야에서 깨어 있는 셈이지. 나에겐 태양이 비치지만 너에겐 달과 별이 비치고, 네가 소녀를 그리워한다면 나는 소년을 그리워해. - P74

이제 생각이 났다. 또렷이 알 수 있었다. 아, 어머니, 어머니였다! 산더미처럼 쌓였던 망각의 더께가 걷혔다. 망망대해 같은 망각의 바다가 갈라졌다. 잃어버렸던 어머니가 파랗게 빛나는 위엄어린 시선으로 다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말할 수 없이 사랑했던 그 어머니가. - P87

나르치스는 얼마 전에 수련 과정을 마치고 정식으로 사제복을 입게 되었다. 그러면서 골드문트를 대하는 태도가 눈에 띄게 변하기 시작했다. 이전까지는 나르치스의 신호나 경고를 시건방지게 잘난 척하는 성가신 행동이라고 곧잘 거부감을 느껴오던 골드문트도 지난번의 커다란 체험 이후로는 이 친구의 지혜로움에 경탄해 마지않는 존경의 태도를 보이기 시작했다. 그 친구의 말 가운데 얼마나 많은 부분이 마치 예언처럼 들어맞았던가! 또 자기 인생의 비밀을, 숨겨져 있던 상처를 얼마나 정확하게 알아맞혔던가! 그리고 얼마나 지혜롭게 자신의 마음을 치유해 주었던가! - P93

네 마음을 잘 알겠어, 이젠 더 이상 언쟁을 벌일 필요는 없어. 말하자면 너는 이제 깨어난 거야. 이제는 너와 나 사이의 차이가 무엇인지도 깨닫게 된 것이지. 모성의 피를 타고난 사람과 부성의 피를 타고난 사람의 차이, 영혼과 정신의 차이말이야. 넌 아마 수도원에서 생활하고 수도사의 일생을 추구하려는 네 노력이 잘못이었다는 것도 곧 깨닫게 될 거야. 그건 네 아버지가 꾸며낸 믿음일 뿐이야. 그런 믿음을 불어넣어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마음을 속죄하듯이 씻어내려고 하셨던 거야. - P103

그리고 분명히 말하고 싶은 것은, 너나 내가 어떤 직책을 맡게 되든 간에, 또 우리의 형편이 어떻게 되든 간에, 네가 나를 진지하게 불러주고 필요로 하는 그런 순간에 내가 너에게 침묵하지는 않을 거야. 결단코 그런 일은 없을 거야. - P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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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ni74 2022-11-29 22:4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ㅎㅎ 북플에도 골드문트님 계시지요 ~

새파랑 2022-11-29 23:14   좋아요 1 | URL
골드문트님이 괜히 골드문트 하신게 아니더라구요. 책 읽으면서 페이지 줄어드는게 아까운 중입니다 ㅋ

scott 2022-12-02 00:22   좋아요 1 | URL
만화에서도 (일본)
골드문트가 쫌 멋진 외모 였습니다 ㅎㅎㅎ

새파랑 2022-12-03 14:35   좋아요 0 | URL
전 마음은 골드문트지만 외모는...
😅 중요한건 마음 아니겠습니까 ㅋ

꼬마요정 2022-11-30 01:0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아아 저 이 책 고등학생 때 읽고 인생책이었어요. 지금 다시 읽고 싶은데 그 느낌이 안 날까봐 못 읽고 있어요ㅜㅜ

새파랑 2022-11-30 08:08   좋아요 2 | URL
아 제가 고등학생때 이 책 읽었으면 인생이 바꼈을까요? ㅋ

물감 2022-11-30 11:1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아 안그래도 이책 눈독들이고 있었는데 새파랑님 글보니 이거 읽어야 겠습니다.
그러나 늘 그렇듯이 과연 언제............ㅋㅋㅋㅋㅋㅋ

새파랑 2022-11-30 12:41   좋아요 2 | URL
아직 3분의 1밖에 못읽긴 했는데 초반은 완전 좋습니다. 이렇게 이야기가 있는게 좋더라구요 ^^

레삭매냐 2022-11-30 13:2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읽은 것 같기도 하고
읽지 않은 것 같기도
하고...

헷갈리네요.

약간 신화적 느낌이
랄까요.

새파랑 2022-11-30 17:40   좋아요 1 | URL
아마 레삭매냐님은 오래전에 읽으셨을겁니다 ㅋ 어제 이후로 아직 진도를 못빼서 잘 모르겠네요 ㅋ

프레이야 2022-11-30 13:43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알라딘의 골드문트 님 소환 ㅎㅎ
중2때 읽고 뭘 제대로 알았을까요. 다시 읽어야… 고전은 생에 주기적으로 읽어야할 것 같아요.

새파랑 2022-11-30 19:56   좋아요 2 | URL
전 중2때 뭘하고 있었던걸까요 😅 그래서 고전은 고전인가 봅니다 ㅋ

서니데이 2022-11-30 19:3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지금은 이 제목을 많이 들어서 익숙하지만, 처음 들었을 때는 아마 ˝지와 사랑˝이라고 들어서, 가끔 생각나는 것 같아요. 책의 내용보다도요.
새파랑님, 오늘 날씨가 많이 춥네요. 감기 조심하시고, 따뜻하고 좋은 하루 보내세요.^^

새파랑 2022-11-30 20:52   좋아요 2 | URL
전 <지와 사랑> 이 더 어울리는거 같아요. 나르치스라고 하니 나치 생각도 나고 😅 오늘 정말 춥네요 ㅜㅜ

scott 2022-12-01 11:49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새파랑님 이 작품 읽고
아뒤
골드문트로 바꾸실 것 같습니다!^^

새파랑 2022-12-01 12:08   좋아요 3 | URL
중복아이디 가능 할까요? ㅋ 감기 걸려서 어제 빨리자서 못읽었네요 ㅜㅜ

물감 2022-12-01 13:24   좋아요 3 | URL
골드문트는 뺏겼으니까 아쉬운대로 나르치스 가시죠ㅋ

새파랑 2022-12-01 14:00   좋아요 3 | URL
그런데 제가 나르치스 보다는 골드문트에 더 가까운 성향인거 같아요 ㅋ 그래서 나르치스는 좀 힘들거 같다는 😅

페크pek0501 2022-12-02 11:0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26 - 사랑하지 않았다면 상대편에게 불만스럽거나 애석함을 느끼지 않겠죠. 이 문장을 뒤집은 것 같이 느껴졌어요.
젊은 시절의 짐~노년에는~이 문장이 참 좋네요.

새파랑 2022-12-02 16:31   좋아요 0 | URL
다시 보니까 제가 쓴 글이 너무 개판이네요 ㅋ 아 글씨쓰는 연습좀 해야할거 같습니다 ㅜㅜ

Jeremy 2022-12-03 06: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새파랑님 덕분에 제 Kindle 과 대조해가며
한국어로 이 책의 1/3 이상을 오늘 아침 다시 따라 읽은 느낌이에요.
저도 꽤 많은 문장 발췌해 놓았는데 새파랑님께 영감 받아서
겹치는 문장 몇 개만 따로 제 페이퍼로 적고 있는 중입니다.

책 후반부의 더 좋은 문장들도 밑줄긋기 기대해 봅니다.
특히 예술과 죽음에 대한 심오한 철학적 고찰이 드러나는.

새파랑 2022-12-03 08:53   좋아요 1 | URL
이거 읽다가 갑자기 급한 일ㅇㄱ 생기고 축구본다고 책을 거의 못읽었어요 ㅜㅜ 이번 주말에는 꼭 읽어야 겠습니다~!! 이 책의 후반부도 기대가 되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