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22092
˝나는 도대체 어쩔 셈으로 이런 정밀한 사진을 찍어 두었을까요? 이것이 언젠가는 슬픈 추억이 된다는 것을 예감이라도 하고 있었던 것일까요?˝
사람의 마음은 돈으로 살 수 있는게 아니다. 배푼만큼 고마움을 느낄거라는 것도 착각이다. 사람의 마음은 타인이 함부러 조정할 수 있는것도 아니다. 사랑은 절대로 계획한대로 되지 않는다. 마음은 그런거다.
다니자키 준이치로의 <미친 사랑>을 읽고나서 예전에 유행했던 ‘다마고치‘가 떠올랐다. 내가 해보지는 않았지만 가상의 애완동물을 키우는 그런 게임이었던거 같은데 이 책의 내용도 그것과 비슷한 느낌이었다.
[이 ‘나오미‘라는 이름이 무척이나 내 호기심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참 예쁜 이름이구나, ‘NAOMI‘라고 쓰면 서양 사람 같다고 생각한 것이 시작이었고, 그때부터 차츰‘그녀에게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상하게도 이름이 하이칼라면 얼굴 모습도 어딘가 서양 사람 냄새를 풍기고 아주 영리해 보여서, ‘이런 곳의 여급으로 놔두기에는 아깝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P.5
20대 후반의 주인공 ‘조지‘는 어느 술집에서 일하는 15세에 이국적으로 생긴 여급 ‘나오미‘를 알게 되고, 그녀를 멋지게 키워서 자신의 부인으로 만들겠다는 계획을 세운다. 소위 미천한 ‘나오미‘의 집안은 ‘조지‘의 제안을 별다른 반응 없이 받아들이고 딸을 그에게 내준다.
[나오미 같은 소녀를 집에 데려와 그 성장하는 모습을 천천히 지켜본 뒤, 마음에 들면 아내로 맞아들이는 방법이 가장 좋다. 어쨌든 나는 부잣집 딸이나 교육을 받은 훌륭한 여자를 원하는 건 아니니까 그걸로 충분했습니다. ] P.15
그리고 ‘조지‘는 ‘나오미‘를 하이칼라 여성으로 만들기 위해 피아노도 가르치고 영어도 가르친다. 처음에는 그의 의도대로 ‘나오미‘가 순진하게 따른다. 하지만 사람이 어떻게 다마고치랑 같을 수 있겠는가. 사람은 기계와는 다르다. 절대로 의도대로 될 수가 없다. 마음이란게 있으니까. 그녀가 성장할수록, 그녀가 아름다워질수록 그와는 점점 멀어질 수 밖에 없다.
[나오미를 ‘훌륭하게 만드는 것‘과 ‘인형처럼 소중하게 여기는 것‘, 이 두 가지가 과연 양립할 수 있는 것일까?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바보 같은 이야기지만, 그녀의 사랑에 현혹되어 눈이 어두워져 있던 나는 그렇게 뻔한 이치조차 전혀 분별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P.60
그러나 아무것도 몰랐던 ‘나오미‘는 사회생활을 할 수록, 많은 사람을 만날 수록 점점 변해가게 된다. 특히 성에 관해 눈을 뜨게 되면서 ‘조지‘에게만 보이던 관심을 다른 남자들에게 돌리게 된다, 그것도 아주 많이. 그녀의 거짓말과 속임수는 점점 커진다. 주변 모든 사람들을 빨아들인다. 이제야 세상에 눈을 떴다고나 할까?
[흔히 세상에서는 ˝여자가 남자를 속인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내 경험에 따르면 이것은 결코 처음부터 ‘속이는 게 아닙니다. 처음에는 남자가 자진해서 ‘속는 것‘을 기뻐합니다. 어떤 여자에게 반해버리면 그 여자가 하는 말이 거짓이든 진실이든 남자 귀에는 모두 귀엽고 사랑스럽게 들립니다. ] P.75
‘조지‘는 ‘나오미‘의 이러한 변화를 눈치챈다. 그리고 의심에 의심을 한다. 하지만 달콤한 ‘나오미‘의 육체에 빠져서 벗어날 수 없었다. 혹시라도 그녀가 자기를 버릴까봐 전전긍긍하게 된다. 그럴수록 집착은 점점 심해져만 가고, 더욱 매달리게 되며, 점점 ‘나오미‘에게 끌려가게 된다. 결국 그녀의 못된 행실을 직접 알게 되고, 이번 기회에 담판을 지으려고 한다. 과연 ‘조지‘의 미친 사랑의 끝은 어떻게 될까?
[그녀가 나를 속이고 있었다는 게 분명해지면, 나는 그녀를 용서할 수 있을까? 솔직히 말해서 나는 이제 그녀 없이는 하루도 살아갈 수 없습니다. 그녀가 타락한 죄의 절반은 물론 나한테도 있으니까, 나오미가 순순히 잘못을뉘우치고 사과만 해준다면, 나는 더 이상 그녀를 나무라고 싶지도 않고, 또 나무랄 자격도 없습니다. 하지만 내가 걱정하는 것은, 그렇게 고집이 세고 특히 나에 대해서는 한층 더 강경해지고 싶어 하는 그녀가 설령 증거를 들이댄다 해도 그렇게 호락호락 나에게 고개를 숙일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P.171
이 책을 읽으면서 작가인 ‘다니자키 준이치로‘의 필력이 정말 대단하다는 걸 느꼈다. 정말 이야기를 맛깔스럽게 잘 이끌어가고, 몰입도는 높으며, 이야기는 무척 재미있다. 게다가 시점도 1인칭이다보니 주인공인 ‘조지‘가 느끼는 감정이 날것으로 날카롭게 전달된다. ‘나오미‘와의 설레이는 첫 만남의 시작과, 동거를 시작하면서 꿈꿨던 행복이 어떻게 처참하게 무너지게 되는지, 그리고 어떻게 체념하게 되는지, 감정의 롤러코스터를 그대로 느낄 수 있다.
이 책의 원제는 <치인의 사랑> 인데, 처음에는 왜 좋은 제목을 놔두고 <미친 사랑> 이라는 제목으로 바꿨지? 의아해 했는데 책을 다 읽고나서 <미친 사랑>이라는 제목이 적당하다는 생각을 했다. 사랑이(사랑에) 미친거지 사람이 미친거는아니지 않은가?
Ps. 지금까지 다니자키 준이치로의 책은 딱 다섯권 읽었지만, 전작을 할꺼니까 중간정리를 해보자면,
1. 초강추 : 슌킨 이야기
이야기가 아름다우면서도 문학적으로도 뛰어난 느낌이 든다.(왜 뛰어나냐고 물으면 답은 못하겠지만...)
2. 읽는 재미(추천) : 미친 사랑(치인의 사랑)
읽다보면 시간가는 줄 모르고, 나오미의 아름다움과 조지의 빡침을 머릿속에 그리게 된다. 그런데 문학적으로 높게 평가받을만 한가? 라고 물어본다면 약간 물음표가 붙는다. 당시 시대상황을 고려하면 대단히 파격적이고 세련됐다는 느낌이 들긴 하지만.
3. 충격적 재미(추천) : 소년
다니자키 준이치로의 데뷔작인 <문신>도 좋았고, 끔찍하지만 선명한 작품인 <소년>도 좋았다. 다만 <작은 왕국>은 그렇게 좋지 않았다. 단편이란 이렇게 써야 독자에게 깊은 인상을 줄 수 있구나 라는 생각을 하게 하는 단편집이었다.
4. 이게 뭐야(약간 추천) : 열쇠
엄청 특이한 설정, 엄청 막장인 이야기. 또한번 이책이 쓰여진 시기를 생각하면 놀랍기만 하다. 이 책도 읽는 재미가 있지만, <미친 사랑>과 <소년>에는 못미친다. 하지만 설정 자체는 더 파격적이다.
5. 비추 : 요시노 구즈
일본사에 대한 이해가 없어서 그런지 일단 읽기가 대단히 어렵다. 읽다가 중간에 포기했다. 누가 대신 읽고 리뷰를 남겨주면 좋겠다.
다음번에는 다니자키 준이치로의 <만, 시게모토 소장>을 읽어야 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