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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의 끝
윌리엄 트레버 지음, 민은영 옮김 / 한겨레출판 / 2016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N22005
˝그는 떠날 것이고, 매일 아침 가장 먼저 드는 생각은 그가 떠났다는 사실이 될 것이다. 지금 아짐에 가장 먼저 드는 생각이 그가 있다는 사실인 것처럼.˝
이루어지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어쩔 수 없이 끌리면서 시작하는게 바로 사람이고, 사랑이다. 결과를 걱정해서 시작도 하지 않는다면 그건 사랑이 아니다.
아무도 모르게 다가온 사랑, 아무도 모르게 시작한 사랑, 아무도 모르게 끝난 사랑, 하지만 평생 기억에 남을 사랑. ˝월리엄 트레버˝가 <여름의 끝>에서 써내려 간 사랑은 이런 사랑이었다.
1. ˝엘리˝
부모가 누구지도 모른 채 수도원에 버려져서 자란 ˝엘리˝는 성인이 된 후 농부 ˝딜러헨˝의 집의 가정부로 들어가게 된다. ˝딜러핸˝은 자신이 일으킨 사고로 첫번째 아내와 아이를 잃은 사람으로, 마음속에 큰 슬픔을 간직한 채 사람들과의 교류를 피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집에 들어온 ˝엘리˝에게 애정을 느낀 그는 그녀에게 청혼을 하고,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엘리˝는 이를 받아들인다. 사랑에 의한 결혼이 아닌, 상황에 의한 결혼을 한 그녀.
˝딜러헨˝은 그녀에게 잘 해 주었고 그녀가 어디 불편한게 있는지, 생활이 무료하지는 않는지 항상 배려를 해준다. 하지만 ˝엘리˝는 이런것에 고마움을 느끼면서도 무엇인지 모를 공허함을 느낀다. 그러던 어느날 그녀는 마을에서 자전거를 타고 사진을 찍고 다니는 ˝플로리언˝이라는 남자를 보게 되고, 비슷한 또래의 그에게 왠지모를 호감을 느끼며 그에 대한 궁금증을 가진다. 그는 어디서 온 걸까? 그는 누구일까?
[그가 궁금했고, 궁금해하지 않으려고 노력했고, 궁금해하면 안 된다는 것을 알았다고 말하고 싶었다. 그가 안녕하세요, 하고 말했을 때 누구인지 바로 알았다고 말하고 싶었다.] P.111
우연한 기회에 둘은 대화를 나누게 되고 서로가 서로에게 호감이 있음을 알게되며, 다른 사람의 눈에 뛰지 않는 장소에서 둘만의 만남을 갖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관계는 친구에서 연인으로 발전하게 되고, 매일 ˝플로리언˝에 대한 생각만을 하던 그녀는 이제 더이상 남편의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그녀의 머릿속은 온통 ˝플로리언˝으로 가득차 있었다.
[두 사람이 친구가 되었을 때 그녀의 외로움은 그의 외로움이 되었다. 그러다 그는 지나친 욕심을 부려 우정에서 너무 많은 무엇을 바람으로써 위태로운 사랑이 피어나는 것을 무심히 내버려두었다. 그녀는 그에게 왔고, 이제 더 커진 죄책감은 연민을 더욱 키웠으며, 죄책감에는 연민이 가진 어떤 위엄까지 드리워졌다. 무모한 착각은 오늘 일어난 일로 인해 조금 덜 무모해 보였고, 가망없는 갈망은 조금 더 설득력을 지니는 것 같았다. 두 사람은아무 말도 없이 앉아 있었고 시간은 멈춘 듯했다.] P.254
하지만 ˝플로리언˝이 떠나야 한다는 사실을 알게되고, 그가 미리 말해주지 않은것에 대해 아쉬워하지만, 그동안 너무 순진하게 살아왔던 그녀는 지금 누리고 있는 안락한 삶을 포기하고 그와 함께 떠날 결심을 한다. 뒤늦게 찾아온 사랑의 강렬함을 쉽게 포기할 수 없었던 ˝엘리˝는 과연 현재를 포기할 수 있을까?
[그날 밤 엘리는 잠결에 울었다. 흐느끼는 소리가 들릴까봐 애써 잠에서 깨어났다. 베개가 젖어 있어 뒤집었는데, 아침이 되어 보니 눈물은 마치 꿈속에서 흘렸던 것처럼 사라지고 없었다. 하지만 꿈이 아니었음을 그녀는 알았다.] P.190
그녀는 상점에서 녹색 여행가방을 사고 이를 헛간 볒집 속에 숨긴다.
2. ˝플로리언˝
이탈리아인 어머니와 아일랜드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 외동아들 ˝플로리언˝, 부모님이 모두 돌아가신 지금 그에게 남아있는건 부모님이 물려주신 집 한 채 ‘셜해나‘ 뿐이었고, 이마져도 부모님이 함께 물려주신 빚 때문에 처분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만약 그가 살림을 잘 했더라면 그런 상황까지 안갔을 수도 있지만, 그는 생활력이 높지 않않았다. 그동안 너무 방만하게 살아왔던 삶.
모두 미술가였던 부모님은 아들인 ˝플로리언˝ 역시 미술적 재능이 있을 것으로 기대하였고, 미술가가 되기를 꿈꾸었으나 그가 물려받은 재능은 없었다. 부모님의 기대를 맞출 수 없었고, 수줍음이 많고 사람과의 관계를 좋아하지 않았던 ˝플로리언˝은 외로울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가 어린시절 부터 좋아하던 ˝이사벨라˝로부터는 더이상 편지가 오질 않았다. 이제 그와 관계 있는 사람은 없었다.
[그들은 부모라서 어쩔 수 없이 아들을 너무나 대단하게 보았다. 플로리언은 그 사실을 알았다. 하지만 이제 그의 기억 속에는 실패만 남아있었다. 처음에는 속상했지만 나중에는 신경을 덜 쓰게 되었다. 집에는 책이 가득했고 그는 책을 많이 읽었다.] P.46
이렇게 외롭고 무료한 날들 속에서 그는 ˝엘리˝와 길에서 무언가를 물어보기 위해 우연히 대화를 한 이 후 거리에서 그녀를 보게 되고 그때마다 큰 호기심을 갖는다. 그리고 어느 상점 앞에서 두번째 대화를 하게된다. 그리고 서로가 서로에게 끌리고 있음을 알게 된다.
그런데 ˝플로리언˝은 그녀가 결혼한 사람임을 늦게 알게 된다. 그녀의 손에 결혼반지가 있었다는 사실은 좀 더 친해진 후에 알게 된다. 그가 알아채지 못했던 걸까? 아니면 그녀가 초반의 만남에서는 반지를 숨겼던 걸까? 하지만 그런건 문제가 되지 않았다. 약간의 죄책감이 있었지만, 그는 그녀에 대한 마음이 점점 커져감을 알 수 있었다.
[플로리언은 거짓을 물리치며 부드럽게, 가능한 한 다정하게 그렇게 말했다. 거짓은 시간이 지나 진실이 드러나며 상처에 상처를, 고통에 고통을, 수치심에 수치심을 더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시간의 엄중한 지혜가 두 사람 모두를 벌할 터였다 무자비하게.] P.234
하지만 ˝플로리언˝ 역시 그녀에게 숨겼던, 아니 말하지 않았던 사실이 하나 있었다. 그가 곧 마을을 떠나야 한다는 사실. 무슨 의도가 있어서 그런 건 아니었지만 그는 초반에 그 사실을 말 할 수 없었다. 그는 둘의 관계는 결국 끝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호기심을 주체하지 못하고 시작했다. 그리고 너무 깊어져 버린 감정 때문에 그는 갈등한다. ˝플로리언˝은 그녀가 자신과 함께 떠나기를 바라기도 하지만 차마 말하지는 못한다.
[침묵하는 이유는 엘리에게 고통을 주고 싶지 않아서일까? 혹은 시작은 그렇지 않았으나 이제는 기쁨이 된 관계를 갑작스럽게 끝내고 싶지 않아서일까? 아니면 과거에도 자주 그랬듯이 뭐든 숨기고 싶어 하는 성향이 우세했던 것일까? 알 수 없었다. 미루고 있을 때는 그게 옳다고 느꼈지만 숨긴다고 해서 어떻게 해볼 수 일이 아니며, 자신의 행동과는 상관없이 어쨌든 일어날 일임을 그는 알고 있었다.] P.183
하지만 그녀 역시 자신과 함께 떠나고 싶다는 걸 알게 된 그는 ˝셜헤나˝의 지붕 위에서 그녀가 오기를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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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트레버˝가 <여름의 끝>을 81살에 썼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 다소 놀랐다. 노년에도 이러한 감성으로 글을 쓸 수 있다니. 어쩌면 나이가 드는 건 육체일 뿐 감성은 결코 사라지는게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다만 표현을 안해서 무뎌진 것일 뿐이지.
˝월리엄 트레버˝는 이 책에서 등장인물의 감정을 자세히 묘사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너무 담담하게 그린다. 다만 독자에게 상황과 대화를 통해 등장인물의 감정을 직접 상상하고 느끼게 한다. 그래서 책을 다 읽고 나면 여운이 강하게 남는다. 초반부의 다양한 인물들만 잘 이해하고 넘긴다면 ˝윌리엄 트레버˝가 선사하는 따뜻한 문장이 주는 울림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사랑이 처음이었던 ˝엘리˝의 어쩔 수 없는 선택도 이해가 되고, 떠날 수 밖에 없었던 ˝플로리언˝의 돌아서는 모습도 이해가 되었다. 하지만 서로가 서로에게서 결핍을 채울 수 있었기에 잠시나마 행복했었고, 설레였었고, 간절했었기에, 어쩌면 그것 만으로도 충분한건 아닐까?
뜨거운 그들의 여름은 그렇게 끝났고, 모든 것은 제자리를 찾아가겠지만 두 사람이 간직한 여름날의 추억은 아마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다.
Ps 1. 주인공 두 사람만을 구분하여 그들이 느꼈을 감정의 흐름으로 리뷰를 써봤는데 줄거리 요약보다 어려웠다. 이게 다 ˝윌리엄 포크너˝의 <내가 죽어 누워 있을 때>를 읽은 탓이다. 개인적으로는 <펠리시아의 여정> 보다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