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61
테네시 윌리암스 지음, 김소임 옮김 / 민음사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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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 - 테네시 윌리엄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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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작가 ‘테네시 윌리엄스’는 어린 시절을 불우한 가정 환경에서 보냈다. 아버지는 주색(酒色)을 즐기는 호탕한 성정이었던 데에 반해 어머니는 히스테리 일보 직전의 매우 예민한 기질을 가진 사람이었다. 특히 모계 쪽에서 정신 병력을 지닌 사람들이 많았는데, 그의 영향으로 작가의 누이는 정신 분열증으로 전두엽 절제 수술을 받고 평생을 금치산자(정신 상실자)로 살아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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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작가의 주변 인물들은 그의 작품 속 등장인물로 재창작된다.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는 평범한 삶을 꾸리던 ‘스탠리’와 ‘스텔라’ 부부에게 연락 한 통 없이 스텔라의 누이 ‘블랑시’가 찾아오며 벌어지는 이야기이다. 블랑시는 귀부인 행세를 해대거나 동생에게 제부의 뒷담을 일삼는 등 불청객 행세를 보이며 스탠리, 스텔라 부부에게 적지 않은 스트레스를 안긴다. 하지만 블랑시의 이러한 태도는 오래 가지 못한다. 극의 중반부에서 스탠리가 그녀의 과거를 알아버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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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일러 주의)

블랑시는 사실 동성애자 남편의 자살 이후 다른 남자들과의 잠자리를 전전해왔다. 그 정도는 영어 교사였던 그녀의 직장 학교의 한 학생을 범하는 것까지로 이어졌다. 이로 인해 그녀는 고향에서 추방되어 동생의 집을 찾은 것이다. 이 사실을 스탠리는 그녀의 동생 스텔라와 새 연인 ‘미치’에게 폭로하였고, 결국 블랑시는 극도의 정신 착란을 겪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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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블랑시가 좋은 행동을 한 것은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녀의 매력이 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연인 미치에게 과거 행적의 추궁을 받고 이별 통보를 당하는 와중에도 그녀는 항상 우아함을 유지하였고,

🗣 나는 사물들을 있는 그대로 전달하지 않아요. 나는 진실을 말하지 않고 진실이어야만 하는 것을 말해요. (144p)

그녀의 정신 분열을 견디지 못한 스텔라와 그 사실을 이용한 스탠리의 계략(?)으로 인해 블랑시는 정신병원으로 끌려가게 되었음에도 그 과정에서 그녀는 고상함을 절대 잃지 않으며 위엄을 드러낸다.

🗣 당신이 누구든, 난 언제나 낯선 사람의 친절에 의지해 왔어요. (180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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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듯 인물의 매력이 느껴지는 것은 비단 블랑시 뿐만이 아니었다. 남부의 사라진 영광에 연연해하며 현실과 환상을 혼동하는 당시 미국인을 대변하는 ‘블랑시’와 성(性)적 욕망을 상징하는 ‘스탠리’ 사이에서 극심한 내적 갈등을 겪는 모습을 보이는 ‘스텔라’가 그러했다. 과거의 자신을 놓지 못하는 블랑시와는 대조적으로 현실에 완전히 적응한 듯 살아가는 스텔라는, 언니를 너무도 사랑하기에 언니를 정신병원에 보낸 그 결정에 극심한 죄책감을 느끼면서도 스탠리가 주는 육체적 만족감을 버리지는 못하는 태도를 보인다. 이런 모습이 너무도 인간적이고 현실적으로 느껴져 왠지 모르게 정이 가는 인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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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는 당시 미국의 모습을 그려낸 작품이지만, 사랑과 꿈을 잃었음에도 새로운 사랑을 환상이나 거짓으로라도 만들어서 그를 놓지 않으려는 블랑시의 모습이, 모든 시대를 아우르는 공감대를 형성할 법한 인간 군상으로 느껴진다.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라는 제목 역시, 블랑시가 스텔라의 집으로 올 때 ‘욕망’ 열차를 타고 간 다음 ‘묘지’ 열차로 갈아타는 그 과정 중 블랑시가 추구했던 것은 ‘욕망’이었으나 결국엔 ‘묘지’를 향하게 되었다는 의미를 내포하는 것 같다. 이야기 자체도 흥미로웠고, 함의하는 바도 묵직해서 너무도 좋았던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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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양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59
다자이 오사무 지음, 유숙자 옮김 / 민음사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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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양> - 다자이 오사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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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자이 오사무의 <인간 실격>을 읽을 때는 끊임없이 침잠해가는 듯한 자기혐오적 감정의 묘사가 공감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섰기 때문인지 조금 읽기 힘들었다. 그 <인간 실격> 독후감을 피드에 올렸을 때 같은 학교 선배님께서 <사양>이라는 작품이 <인간 실격>보다 조금 순화된 느낌이라 말씀하시며 추천해주셨다. 선배님께서 말씀하신대로 확실히 우울의 무게가 <인간 실격>보다는 덜한 느낌이었고, 그래서 나와 더 잘 맞는 작품이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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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양>의 주인공은 어느 몰락한 귀족 집안의 장녀 ‘가즈코’로, 그녀의 다른 주변인물들(이를테면 어머니와 남동생 ‘나오지’, 그리고 남동생이 스승처럼 따르는 소설가 ‘우에하라’)을 ‘가즈코’의 시점으로 바라보듯 전개되는 작품이다. <인간 실격>이 자전적 소설이었던 것에 반해 <사양>은 주체적인 여성의 목소리로 전개된다는 점에서, <인간 실격>의 주인공 ‘요조’와 <사양>의 ‘가즈코’는 성격이 판이하게 다르기 때문에 두 작품이 주는 느낌은 천지차이인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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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우울하고 어두운 분위기의 소재 및 장면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작품 해설을 읽어보니 등장인물들 중 ‘나오지’에게는 다자이 오사무의 전기 모습이, 소설가 ‘우에하라’에게는 후기 모습이 투영되어 있다고 하는데, 해설을 읽기 전 작품을 읽으면서도 그런 점이 여실히 느껴졌다. 전쟁을 마치고 돌아온 ‘나오지’는 아편 중독에 빠져 막대한 빚을 불려가곤 하였고 결국엔 자살을 택하는 마지막 모습이, ‘우에하라’ 역시 현실을 너무도 비관적으로 바라보는 나머지 술과 여색에 허우적대며 살아가는 모습이 <인간 실격>의 요조와 비슷하게도 느껴지기 때문이다.

🗣 “죽을 작정으로 마시고 있어. 살아 있다는 게 슬퍼서 견딜 수 없어. 외롭다느니, 쓸쓸하다느니 그런 한가로운 게 아니고, 슬퍼. (후략)” (p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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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인간 실격>보다 <사양>이 더 좋았다고 생각한 이유는 아무래도 ‘가즈코’ 덕분인 것 같다. ‘가즈코’는 ‘우에하라’를 열렬히 사모하는 모습을 보이고, 또한 그녀는 앞으로 ‘사생아와 그의 어머니’라고 불리게 될 상황 즉, 결혼하지 않은 상태에서 임신을 하게 된 것으로 그려진다. 그러나 ‘가즈코’는 ‘우에하라’에게 남은 인생을 의존하려 하지않고 스스로 삶을 개척해 나가기로 마음을 굳게 먹는 모습을 보인다. 그런 주체성이, <인간 실격>의 어둡고 파멸적인 세계관과 달리 희망적인 여운을 선사하는 듯하다. 

🗣 전, 처음부터 당신의 인격이나 책임에 대한 기대는 없었습니다. 저의 한결같은 사랑의 모험을 성취하는 것만이 문제였습니다. 그리고 저의 그 바람이 완성된 지금, 이제 제 가슴은 숲속의 늪처럼 고요합니다. (p1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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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쪼가리 자작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41
이탈로 칼비노 지음, 이현경 옮김 / 민음사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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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쪼가리 자작> - 이탈로 칼비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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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음사TV 유튜브를 보다보면 ‘이탈로 칼비노’의 작품들이 은근히 많이 언급되는 걸 알 수 있다. 특히 정기현 편집자님께서 <나무 위의 남작>을 ‘인생책’으로 일컬으며 궁금증이 많이 생겼는데, 최근에 올라온 ‘민음사 직원들의 출근길 독서’ 영상에서 <반쪼가리 자작>이 언급된 것을 보고선 둘을 같이 구매했더랬다. <반쪼가리 자작>이 상대적으로 분량이 짧기도 하고, 이탈로 칼비노의 ‘우리의 선조들 3부작’ 중 첫 작품이기도 하여 <나무 위의 남작>보다 먼저 읽기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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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부터 말하자면, 최고였다. 세계문학전집 치고는 아주 쉬운 문체로 쓰여있어 가독성이 좋고 전개도 흥미진진하여 술술 읽혔으며, 마지막 결말에 다다르니 작품이 던지는 교훈과 여운에 흠뻑 빠져 오랫동안 생각에 잠기기도 하였다. 평소의 독후감에는 스포일러를 완전히 배제하는 것을 선호하지만, 이 작품만큼은 결말에 대한 언급이 불가피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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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무렵 외삼촌은 갓 청년기에 접어들었다. 선과 악이 뒤섞인 막연한 감정들이 혼란스럽게 터져나오는 시기였다. 그 나이에 우리는 새로운 모든 경험, 무시무시하거나 비인간적인 경험까지도 삶에 대한 불안하면서도 따뜻한 애정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다. (8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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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쪼가리 자작>은 인간의 본성 ‘선과 악’에 대한 이야기이다. 작품의 주인공 ‘메다르도 자작’은 전쟁에 참전하여 몸이 반으로 갈라지는 부상을 당한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몸의 한 반쪽만은 회복하여 고향으로 돌아오는데, 이 반쪽은 ‘악한’ 속성만을 가진 부분이었다. 때문에 그는 영주민들을 대상으로 가혹하고 혹독한 통치를 하게 되어 마을 사람들은 고통스러워 한다. 이때, 자작의 나머지 ‘선한’ 반쪽이 고향으로 돌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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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영주민들은 악한 메다르도의 폭정에 지쳐있던 와중에 선한 메다르도 자작이 돌아왔기 때문인지 그에게 열광하는 모습을 보인다. 실제로 선한 반쪽은 영주민들의 보다 나은 삶을 위해 물심양면 노력한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자 영주민들은 지나친 선행도 그들을 힘들게 한다는 걸 깨닫는다. 선한 반쪽의 자작은, 매일을 ‘순무’만을 먹을 정도로 가난한 ‘위그노교도’들이 조금 높은 가격으로 ‘호밀’을 유통하고 있는 것을 보고선 호밀의 가격을 낮추라는 잔소리를 일삼는다던지, 유흥과 쾌락에 기대어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문둥병’ 환자들에게 그들의 행동이 부도덕하다며 꾸짖는 등의 행동을 반복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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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한 반쪽과 선한 반쪽이 병존하고 있는 이 사회는 과연 어떤 결말을 맞이하게 될지는 이 글에 적지 않겠다. 다만, 다 읽고 나면 많은 것을 느끼게 될 것이라 생각한다. 비록 작품 자체는 환상적, 동화적인 가벼운 느낌이지만 작품이 주는 여운은 꽤 묵직했다. ’선’하기만 한 것도 타인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사실은, 평상시에 한번도 생각해보지 못했던 것 같다. 선과 악이 불분명하게 공존하여 ‘온전’하게 될때서야 비로소 융통성을 발휘할 수 있고 현명해질 수 있으리라는 걸 <반쪼가리 자작>을 읽으며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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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 해설에는 작가가 ‘반쪼가리가 된 메다르도를 통해 도덕적으로 분열되고 상처받고 소외된 현대인들을 표현’하려 했다고 한다. 완전히 다른 두 성질로 나뉜 반쪼가리 자작이 서로를, 즉 자기자신을 적으로 삼는 대립의 양상은 현대인의 모습이 투영된 것이었다. 신체는 완전할 지언정 내면은 불완전하여 선악의 구분이 모호해지고 자기자신을 적으로 삼는, 힘겨운 지금의 이 사회를 살아가는 인간들에게, 이 작품 <반쪼가리 자작>은 불완전한 모습이야말로 ‘인간적’인 모습이라며 위로를 건네는 듯하다. 지금으로부터 딱 70년 전인, 1952년에 출간된 아주 오래된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도 의미있는 교훈을 주는 것은 ‘세계문학전집’을 읽는 이유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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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한 열정 (무선) -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99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99
아니 에르노 지음, 최정수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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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한 열정> - 아니 에르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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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느 날 밤, 에이즈 검사를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사람이 내게 그거라도 남겨놓았는지 모르잖아.’ (46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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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록 외설스럽고 적나라하면서도, 이렇게나 깊이 있을 수 있나 싶어 놀라울 따름이다. <단순한 열정>은 한 여성의 사랑 이야기이다. ‘작년 9월 이후로 나는 한 남자를 기다리는 일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는 첫 문장으로 시작하는 만큼, 이 작품이 다루고 있는 사랑은 너무도 강렬하다. 그 강렬함을 독자들에게 그대로 전하기 위함인지 아니면 그 당시의 감정을 충실하기 담아내기 위함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이 작품은 직설적이고 수위 높은 표현들이 많이 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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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가끔 나와 정사를 나누며 보낸 오후가 그 사람에게 어떤 의미일지 자문해보았다. 정사를 나눈다는 것, 그 자체일 뿐이겠지. 어쨌든 또다른 이유를 찾는다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었다. 내가 확신할 수 있는 것은 단 하나뿐일 테니 말이다. 그 사람이 나를 욕망하느냐 욕망하지 않느냐 하는 것. 그것은 그 사람의 성기를 보면 당장에 알 수 있는, 유일하고도 명백한 진실이었다. (30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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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하게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들이 있다. 주인공 여성이 사랑한 남자는 바로 부인을 둔 유부남이라는 것, 그리고 이 이야기는 작가 자신의 경험을 담은 자전적 소설이라는 것. <단순한 열정>을 읽으면서 놀랐던 점은, 그들의 사랑이 사회적으로 용인되지 않는 부적절한 관계라는 것을 부정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본인의 사랑을 합리화하는 태도를 보이지도 않고, 잘못을 저지르고 있다는 죄책감을 내비치지도 않는다. 그저 자신의 육체와 영혼이 모두 그 사랑에 매몰될 만큼 그 사랑에 너무도 깊이 빠져버린 당시의 마음을 ‘평평한 문체’로 충실하게 적었을 뿐이었다. 그래서인지 주인공, 아니 작가의 감정과 심리를 읽는 독자로써 더욱 직관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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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RER이나 지하철, 혹은 대합실, 그리고 잠시 한눈을 팔 수 있는 장소라면 어디든, 나는 앉기만 하면 이내 A를 생각하며 몽상에 빠져들었다. 이런 상태에 들어서는 순간, 나는 온몸에 경련이 일어날 만큼 행복해졌다. 그리고 머릿속에 수많은 영상과 기억들이 넘쳐나서, 마치 머릿속으로도 몸의 다른 기관들처럼 육체적 쾌락을 느끼는 것 같았다. (35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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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이들의 결말은 어떻게 될까? 부인과의 이혼을 종용하고 사랑을 성취하게 될까? 아니면 애초에 올바르지 않은 관계였기에 이 관계의 끝도 좋지 못할까? 이 부분은 직접 이 책을 읽으면서 알게 되길 바라는 마음에 따로 피드에 적진 않겠다. 하지만 아무리 강렬하고 열정적인 사랑이더라도 세월의 무게, 즉 ‘시간’ 앞에서는 아무 소용 없다는 말은 꼭 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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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은 그 모든 일들이 다른 여자가 겪은 일인 것처럼 생소하게 느껴지기 시작한다. 그러나 그 사람 덕분에 나는 남들과 나를 구분시켜주는 어떤 한계 가까이에, 어쩌면 그 한계를 뛰어넘는 곳까지 접근할 수 있었다. (65-66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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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에게 ‘완전히’ 사랑에 빠지면 이런 마음가짐이 되고, 이런 심신 상태에 빠지게 된다는 것을 아주 ‘직관적’으로 느껴서 너무도 충격적이었던 독서였다. 누군가를 좋아해본 적은 있어도 이 소설 속에서 비칠 법한 ‘깊은 사랑’에 빠져본 적은 없었기에, 살면서 한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세계를 추체험하는 시간을 <단순한 열정>을 읽으며 즐길 수 있었다. 내가 소설을 좋아하고, 계속해서 읽는 이유가 이런거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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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렸을 때 내게 사치라는 것은 모피 코트나 긴 드레스, 혹은 바닷가에 있는 저택 따위를 의미했다. 조금 자라서는 지성적인 삶을 사는 게 사치라고 믿었다. 지금은 생각이 다르다. 한 남자, 혹은 한 여자에게 사랑의 열정을 느끼며 사는 것이 바로 사치가 아닐까. (66-67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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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풍의 언덕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18
에밀리 브론테 지음, 김종길 옮김 / 민음사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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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풍의 언덕> - 에밀리 브론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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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풍의 언덕>은 ‘캐서린’이라는 한 여자만을 사랑한 어떤 남자 ‘히스클리프’의 처절하고 지독한 복수극을 담고 있다. 이 작품이 쓰였던 당시의 시대적인 정서와 배경을 고려한다면, 드라마 <펜트하우스>는 명함도 못 내밀 정도로 그의 복수는 잔인하고 가혹하다. 작품에는 ‘워더링 하이츠’라는 야성의 세계와 ‘스러시크로스 저택’이라는 교양의 세계를 대조시키는 듯 두 공간적 배경이 주로 나오지만, ‘히스클리프’를 통해 두 공간이 결합되며 몰락하는 과정을 보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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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스클리프’는 ‘캐서린’을 잃은 후에는 완전히 눈이 뒤집혀 그곳에 있는 사람들을 모두 죽게 하거나(직접 죽이지는 않는다) 모질게 괴롭히면서 삶의 의미를 찾는 수준으로 그의 삶의 태도는 변모한다. 그렇기 때문에 복수를 완성했을 때의 ‘히스클리프’는 복수를 성공했다는 것에 대한 성취감 및 기쁨을 누리기는 커녕 허탈하고 공허하기만 하다. 일련의 과정을 바라본 독자들은 비단 이렇게까지 해야할 일인가하는 생각도 들 것이다. 그러나 목적을 위해 벌여야 하는 수단이 있을 때 그에 지나치게 몰입하다보면 수단이 목적을 앞서는 경험이 한번쯤은 다들 있을 것이라 생각하는데, 이를 고려한다면 복수에 눈이 돌아간 ‘히스클리프’를 비난만 할 수는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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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가지 더 말하고 싶은 부분은, <폭풍의 언덕>의 서술 구조가 상당히 독특하다는 점이다. 중고등학생 때 문학시간에 ‘소설의 시점’에 대해 배운 적이 있고, 그때는 아마 1인칭 시점과 3인칭 시점에 대해 배웠을 것 같다. 하지만 <폭풍의 언덕>은 2인칭 시점으로 전개된다고 말하고 싶다. 작품에서 중요하게 다뤄지는 인물은 ‘캐서린’과 ‘히스클리프’이지만, 그들이 직접 서술자로써 이야기를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저택에 세 들어와 살고 있는 ‘록우드’와 가정부 ‘넬리’의 대화에서, ‘넬리’가 가정부로서 그들을 회상하며 ‘록우드’에게 과거의 사건들을 알려주는 듯한 방식으로 전개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상당히 낯설기도 하고, 초반에 적응되지 않았을 때에는 지루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물론 그 지루함을 느끼게 된 것에는 어디까지나 나 자신의 부족함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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