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식주의자 (리마스터판) -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창비 리마스터 소설선
한강 지음 / 창비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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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겨울부터 2005년 여름까지 이 세 편의 중편소설을 썼다. 따로 있을 때는 저마다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합해지면 그중 어느 것도 아닌 다른 이야기 - 정말 하고 싶었던 이야기 - 가 담기는 장편소설이다. 이제 제자리에 차례를 맞추어 놓을 수 있게 되었다. (245p)

초판본 작가의 말에 쓰인 이 문장 하나로 인해 나는 『채식주의자』를 다 읽고도 한동안 리뷰를 적지 못했다. 고등학생 때 처음 읽(다가 포기했)고, 군대에서 다시 한번 읽었어도 “정말 하고 싶었던 이야기”가 무엇이었는지, 도저히 감을 잡지 못 했었다. 물론 이 글을 쓰는 지금에 와서 ‘이제는 알겠다’고 하지도 못한다. 다만… 조금은, 아주 약간은 ‘아 이런 말을 하고 싶었던 걸까’하는 생각이 들어 그 느낌을 조심스럽게 이 글에 옮겨 보고자 한다.

일단 『채식주의자』가 어째서 이토록 어렵게 느껴지는 것인지를 먼저 해명하고 싶다. 『채식주의자』의 어려움은 ‘읽히지 않는’ 어려움이 아니라 ‘담고 있는 주제’의 난해함이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이런 내용, 이러한 이야기를 통해 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알기가 힘들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채식주의자』의 해석에 열쇠를 쥐고 있는 인물은 단연코 주인공인 ‘영혜’일텐데, 『채식주의자』에서 독자는 영혜의 목소리를 단 한 번도 직접적으로 들을 수 없기 때문이다. 총 세 부로 구성된 이 소설은 차례로 영혜의 남편, 형부, 언니의 시점으로 전개된다. 그리고 이는 필연적으로 왜곡을 발생시킨다. 독자들이 해석해야 할 영혜의 내면이 ‘서술자의 시선’을 한 차례 통과한 뒤 전해지기 때문이다.

위에 적은 작가의 말에서 ‘따로 있을 때는 저마다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고 한 이유도 아마 같은 맥락일 것이다. 세 이야기의 서술자가 다르고, 저마다의 입장과 관점이 제각각이기 때문에 각 중편의 주제도 저마다 다른 것처럼 보인다는 것. 그러나 세 이야기를 관통하고 있는 ‘영혜’라는 인물에 초점을 맞추어 소설을 읽으면, 정말로 하나의 메세지가 이야기되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흔하게 접할 수 있는 “기존의 남정 중심 가부장적 가족 제도 속의 내재된 폭력을 날카롭게 그려냈다”는 평가보다는, 조금 더 은유적이고 상징적인 해석을 해볼까 한다.

아마 『채식주의자』를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이 질문부터 시작해야 하는 것 같다.

“영혜는 ‘왜’ 채식을 선택했을까?”

읽어본 사람은 알겠지만, 그 이유는 바로 ‘꿈’이다. ‘수백개의, 커다랗고 시뻘건 고깃덩어리들이 기다란 대막대들에 매달려 있는’(18p) 모양의 꿈. 이 꿈은 육식에 내재되어 있는 폭력성을 상징한다. 이것이 영혜에게 일종의 두려움과 혐오감을 야기했을 것이고, 이를 거부하려는 방법의 일환으로 영혜는 채식을 선택한 것이다. 그리고, 그런 영혜의 마음을 그녀의 남편은 물론이고 부모, 형제 등 가족 모두 이해해주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단 한 사람, 「몽고반점」 속 영혜의 형부만은 다른 가족들과 달랐다. 물론 그가 영혜를 이해하고 공감해준 것은 아니다. 하지만 형부는 영혜의 그런 저항적 모습을 보며 자신의 예술가적 욕망을 불태우기 시작한다. 「몽고반점」이라는 작품만 따로 놓고 본다면 형부의 이야기가 주요하게 해석되어야 할테지만, 『채식주의자』 전체를 두고 이 작품을 보면 역시나 「몽고반점」 속 영혜의 모습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개인적으로 형부가 자신의 몸에 그린 꽃을 영혜가 ‘너무나도’ 좋아했던 장면이 무척 인상깊다. 이후 그 그림을 그린 후로 영혜가 악몽을 꾸지 않았다는 점을 보면, 그 그림이 영혜에게 아주 의미있던 것 같다. 이를 내 나름대로 해석해보자면, 아마도 ‘꽃(식물)이 되고 싶은 욕망’을 암시하는 게 아니었을까 싶다.

그리고 이런 점은 역시 「나무 불꽃」의 서사 바깥으로 드러난다. 영혜가 직접적으로 ‘나무가 되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개인적으로 가장 이해가 어려웠던 부분이 바로 이 장면이기도 하다. ‘채식’을 선언한 것으로 이미 한 차례 폭력을 거부하지 않았는가. 그렇다면 채식에서 더 나아가 나무가 되겠다고 선언하는 것은 대체 무얼 뜻하는 것인가.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채식’ 또한 폭력에서 온전히 벗어난 방법이라고는 할 수 없다. 분명히 채식 역시 다른 생명(식물)을 파괴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그렇기에 완전하게 폭력에서 벗어나기 위한 최후의 방법이자 수단으로 영혜는 식물이 되기를 선택했을 것이다. 「나무 불꽃」 속 영혜가 모든 음식을 거부하는 것도 아마 이런 함의를 지닌 것이 아니었을까.

영혜는 식물이 되기를 선언함으로써 인간의 본질을 포기한다. 적극적으로 폭력의 세계에 저항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삶을 살아가면서 당연하게 마주할 수밖에 없는 폭력의 세계(육식 등)를 우리는 어떻게 마주하고 살아가야 할까? 『채식주의자』가 던지는 질문이자 주제의식은 아마도 이것이 아니었을까, 조심스럽게 추측해본다. 한강 작가는 『채식주의자』를 두고 “‘우리가 이토록 폭력과 아름다움이 뒤섞인 세계를 견딜 수 있는가? 껴안을 수 있는가?’라는 질문으로 끝나는 소설”이라 말했다고 한다. 그리고 『채식주의자』에는 그러한 폭력을 대하는 태도가 상반된 두 인물이 등장한다. 적극적으로 거부하고 저항하는 영혜, 그저 인내하고 버티기만 하는 인혜(영혜의 언니). 우리는 이러한 두 갈래의 방법 중 어떤 태도를 취해야할지 혹은 또다른 폭력의 대처가 있는지, 이는 아마도 『채식주의자』를 읽은 뒤 우리가 생각해보아야 할 지점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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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적과 소음 날짜 없는 일기 2
이수명 지음 / 난다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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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없는 일기’ 시리즈는 이수명 시인의 1년 동안 쓴 일기를 한 권에 묶은 산문집이다. 다만 보통의 일기 에세이와는 다른 독특한 점이 하나 있는데, 바로 날짜를 쓰지 않고 월별로만 장을 나눈 것이다. 뭐랄까, 구체적인 날짜를 알지 못한 채 책을 읽다보니, 그 달에 할 법한 생각들과 느낌들이 어렴풋한 일관성 혹은 통일성 등을 가지고 모여있는 느낌이 들어 꽤나 새롭게 느껴졌다.

그리고 이 책은 ‘일기’라는 장르의 말마따나 가볍고 조용한 호흡으로 쓰인 글의 묶음이었지만, 그런 일상적인 순간조차 시인의 시선으로 포착되어 상당히 색다르고 신선한 내용을 품고 있었다. ‘와 이걸 이렇게 바라본다고?’ 혹은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하지?’ 등 시인만의 눈길과 사유가 무척이나 독특했고, 신기했고, 그래서 흥미로웠다.

감정은 들여다보거나 극복하는 것이 아니라 피하는 것인가보다. 비켜서는 것이다. 공간이 이것을 가능하게 해준다. 장소를 바꾸면 방금 전의 장소에서 가졌던 감정도 바뀐다. 감정은 내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머문 공간 안에 담겨 있는 것 같다. 그런데 왜 그동안 감정이 내면에 있다고 생각했을까. 내가 감정을 들고 다닌다고 생각했을까. (「1월」, 27p)

생활이 고요를 깨뜨리는 순간을 따르면서 한없는 침묵 속에 빠져들지 않고 지낸 것일 테다. 생활은 생활을 보게 한다. 생활로 향하며 우리가 바로 소음이라는 것을 보게 한다. 그러니 고요는 생활이 갑자기 멈추는 상황일 것이다. 비가 오려고 흐려서라기보다는 생활이 문득 멈춰서 고요가 고인다. 나는 일어서서 수돗물을 튼다. 물이 쏟아지는 소리를 듣는다. 생각난 듯이 세면대의 비누 얼룩을 지운다. 고요를 지운다. 생활이다. (「4월」, 72~73p)

작년에도 이렇게 더웠던가, 새삼스럽게 기억을 더듬는다. 해마다 더 더워지는 것 같다. 태양이 인간을 옭아맨다. 더이상 돌아갈 곳이 없는 사람들을 몰아붙인다. 오늘도 집안에서 숨어지낸다. 왜 태양이 단번에 뭉쳐졌을까 생각하면서. (「8월」, 145p)

물론 『정적과 소음』에는 단순히 일상에 대한 사유만 있는 것이 아니다. 시인으로서 ‘문학’을 대하는 마음과 태도, 이수명 시인만의 생각과 통찰 등이 담겨 있다. 내가 문인의 산문을 좋아하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이다. 문학을 좋아하는 나는, 그런 문학계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너무나도 진심으로 문학을 사랑하고 갈망하는 작가들의 태도를 감히 엿볼 수 있는 이런 책들이 있어 항상 감사함을 느낀다. 『고요한 읽기』(이승우), 『소설 만세』(정용준),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신형철)에 이어 이 책을 내 마음 속 목록 한 곳에 올리련다.

문학작품에서 아우라를 지니고 감동을 주는 인물은 싸우는 주체다. (…) 이 주체는 자신과 싸우고 운명과 싸우고 세계와 싸운다. (…) 싸움의 결과는 중요하지 않다. 패배도 귀하게 처리된다. 오히려 패했을 때 싸움이 빛난다. 패배하면 싸움이 끝나지 않기 때문이다. (「2월」, 39p)

고전이란 아마도 현대성을 선취한 작품을 일컬을 것이다. 현대가 들어 있지 않으면 고전이 될 수 없다. 작품이 낡으면 사라지는 까닭이다. 결국 낡지 않아야 고전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현대의 작품에는 그야말로 고전이 녹아 있다. 제대로 잘 녹아 있을수록 좋은 작품이다. 고전에서 더 나아가야 비로소 현대시가 되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으면 이것 역시 사라지게 마련이다. (「3월」, 51p)

이미지가 시의 시동이다. 한 줄, 늦어도 두어 줄을 쓰면 이미지가 나타난다. 이미지가 나타나야 진행이 되고 진전도 이루어진다. 그리고 문장들이 계속 이어지면서 가능성으로 남아 있는 이미지와 좀더 선명하게 드러나는 이미지로 나뉘어진다. 시는 이미지가 선명해지는 방향으로 움직인다. 선명해야 움직일 수 있다. (「9월」, 180p)

젊은 시는 대개 무엇인가 맞닥뜨린다. 그리고 그 맞닥뜨린 것을 크게 만드는 힘을 가지고 있다. 직면의 힘이다. 시 세계가 정면일 수밖에 없다. 만약 맞닥뜨리지 못했을 때는 눈앞에 무엇을 세우기도 한다. 잘 세워지지 않더라도 시도를 한다. 그러한 동력들이 흥미를 끈다. (「10월」, 192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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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랑한 이시봉의 짧고 투쟁 없는 삶
이기호 지음 / 문학동네 / 202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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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협찬 

500페이지가 넘는 소설이 이토록 부담스럽지 않았던 적이 있던가. 책에서 그리고 있는 이시봉의 모험 속으로 완전히 빨려들어가 순식간에 완독했던 소설이었다. 이기호 작가를 ‘타고난 이야기꾼’이라 부르고 싶게 만드는 이유는 이것 하나만이 아니다. 소설을 읽어가다보면 뭔가 결말을 암시하는 듯한 복선이 툭툭 등장하는데, 그 조각들이 후반부에 들어서 하나의 완전한 결말로 맞아떨어질 때 드는 쾌감이란… 여간 대단한 것이 아니었다!


소설의 주인공은 알코올 중독을 앓고 있는 만 스무 살 남성 ‘이시습’이다. 그에게는 키우고 있는 개 한 마리가 있다. 이름은 시습-시현 남매의 이름을 이은 ‘이시봉’. ‘시봉아’라 부르면 오지 않고 반드시 성을 붙여 ‘이시봉’이라 불러야하는 똑똑한 만 네 살 수컷 비숑이다. 평범한 일상을 지내던 어느 날, 이시봉은 ‘앙시앙 하우스’라는 곳에서 뜻하지 않은 연락을 받는다. 주인공이 데리고 있는 이시봉이 바로, 지금은 사라진 ‘후에스카르’ 계열의 비숑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소설은 두 갈래로 나뉜다. 하나는 이시습의 시점에서 전개되는, 이시봉을 원하는 앙시앙 하우스와의 서사. 그리고 또 하나는, 이시봉의 조상견 ‘베로’의 서사. 위의 이야기가 현재 대한민국을 배경으로 한다면, 베로의 서사는 1800년대 프랑스를 배경으로 전개된다. 소설은 전혀 다른 두 시공간이 독립적으로 펼쳐지고, 또 중간중간에 새로운 인물들과 그의 서사가 등장하여 이야기가 한없이 확장되는 듯한다. 그렇지만 우리의 이기호 작가는 이를 무책임하게 벌려놓기만 하지 않는다. 사실은 이게 이렇게 이어지고 또 저게 저렇게 이어지는…(스포일러를 막기 위해 내용은 여기까지만!)


이렇듯 나는 『명랑한 이시봉의 짧고 투쟁없는 삶』을 읽으면서 천명관 작가의 『고래』 생각이 많이 났다. 『고래』처럼 이 작품 또한 서사가 정말 촘촘하면서도 빠른 속도로 진행되어 엄청난 몰입감을 선사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나는 어쩐지 『고래』보다 『명랑한 이시봉의 짧고 투쟁없는 삶』이 더 좋았다. ‘훨씬’ 더 좋았다. 인물들이 너무 불행하거나 험하게만 다뤄지는 『고래』는 그 몰입감으로 인해 고통을 느끼기도 했기 때문인데, 이 작품은 전혀 그렇지 않다. 물론 소설 속 인물들은 저마다의 내면의 아픔과 불행을 분명 갖고 있기는 하지만, 이 소설에서 그리고 있는 서사의 방향은 상승 곡선, 즉 구원과 회복의 성질을 띠고 있기 때문에 얼마간의 뭉클한 여운까지도 느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좋았던 점 또 하나. 이 책은 어이가 없어서 피식 하고 웃게 되는 유머 코드가 있으면서도 반려인들의 가슴을 찡-하게 울리는 감동 코드까지 다 갖추고 있다는 점이었다. 물론 나는 애완동물을 키우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무해한 존재를 순수하게 사랑하는 마음이 어떤 건지를, 얼마나 소중하고 아름다운 것인지를 선연하게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 더더욱 반려동물을 키우는 사람들이라면 이 책이 얼마나 감동스럽게 느껴질지 궁금하기도 하고, 부럽기도 하다. 하… 이기호 작가, 다시 생각해도 글 정말 잘 쓴다. 두껍긴 하지만, 이번 휴가 기간에 시간을 내어 이 책 한번 정주행하는 것은 어떨지, 조심스럽고도 간곡하게 제안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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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깥은 여름
김애란 지음 / 문학동네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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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이라 그랬어』를 감명 깊게 읽은 뒤 김애란의 단편집을 다시 한번 펼쳐볼 용기가 났다. 아무래도 『달려라 아비』, 『비행운』을 읽었을 당시의 나는 너무나도 어렸기에 그 안에 담긴 정서의 무게를 감히 헤아리지 못한 것일 수도 있으리라 생각한 것이다. 때마침 부모님의 책장에 『바깥은 여름』이 있어서, 김애란의 단편집을 추천받을 때 항상 거론되었던 『바깥은 여름』을 이번 기회에 읽어보자고 마음을 먹었다.

『바깥은 여름』을 읽기 전에 후기들을 몇 찾아보았다. 반응은 극과 극이었다. 읽는 내내 눈물이 펑펑 났다는 감상도 있었고, 신파 마냥 억지스러운 울음 코드가 와닿지 않았다는 감상도 보았다. 그런 양극단의 후기들을 보고 나니, 이 작품의 무엇이 그토록 호불호를 나뉘게 한 건지 더더욱 궁금해졌다. 그리고 다 읽고 난 뒤의 내 감상은… 그저 ‘무난’했다는 거다.

총 일곱 편의 단편 소설이 수록된 이 소설집에는, 공통적으로 무언가를 상실하고서 그리워하는 마음을 그린 작품들이 많았다. 「입동」에는 다섯 살짜리 아이를 잃은 부모가, 「노찬성과 에반」은 늙은 개를 곧 잃게 생긴 초등학생, 「건너편」에는 남자친구에게 이별을 통보하고픈 여자친구, 「어디로 가고 싶으신가요」는 남편을 잃은 아내의 시선으로 전개되니… 『바깥은 여름』은 무언가를 ‘잃게 될’ 예정이거나 ‘잃고 난 뒤’의 착잡한 심정을 그리고 있는 소설이 많았고, 바로 이 지점이 사람들의 감상을 나뉘게 한 지점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나는 두 가지의 감상 모두 동의하지 못하겠다. ‘신파’라고 한다면, 정말 대놓고 “너 울어!!!”라고 하는 듯 억지스럽게 눈물샘을 자극하는 부분이 필히 느껴져야 할 텐데, 적어도 내게는 그렇게 읽히지 않았다. 지극히 자연스러운 흐름으로 전개되는 소설들이었다. 당연하다, 김애란인데. 초기작도 아니고 필력이 충분히 쌓일 만큼 쌓이지 않았겠는가.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과한 감정 이입으로 눈물이 폭포수처럼 터지지도 않았다. 결국 「입동」에서 보험금을 통해 빚을 갚게 될 때 탄식어린 한숨을 내뱉었을 뿐, 「풍경의 쓸모」에서 주인공이 교수에 임용되지 않았을 때 부조리한 현실감이 물씬 느껴져 납득하는 차원으로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을 뿐, 결코 감정의 동요가 격해져 눈물이 나는 일은 없었다. 하지만 이런 점이 오히려 『바깥은 여름』 만의 장점일 수 있겠다는 생각으로 이어진다. 감정선이 휘몰아치는 것보다 잔잔한 여운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오히려 더욱 강력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김애란의 문장은 그런 점을 특히 잘 살리는 것 같았다. 좋은 문장을 많이 만날 수 있어서 행복했던 독서 시간이었다.

어딘가 어렵게 도착한 기분. 중심은 아니나 그렇다고 원 바깥으로 밀려난 건 아니라는 안도가 한숨처럼 피로인 양 밀려왔다. 그 피로 속에는 앞으로 닥칠 피로를 예상하는 피로, 피곤이 뭔지 아닌 피곤도 겹쳐 있었다. (14p)

그렇게 사소하고 시시한 하루가 쌓여 계절이 되고, 계절이 쌓여 인생이 된다는 걸 배웠다. (20p)

이상하게 들릴지도 모르지만 재이야, 어른들은 잘 헤어지지 않아. 서로 포개질 수 없는 간극을 확인하는 게 반드시 이별을 의미하지도 않고, 그건 타협이기 전에 타인을 대하는 예의랄까, 겸손의 한 방식이니까. 그래도 어떤 인간들은 결국 헤어지지. 누가 꼭 잘못했기 때문이 아니라 각자 최선을 다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일이 일어나기도 해. 서로 고유한 존재 방식과 중력 때문에. 안 만나는 게 아니라 만날 수 없는 거야. (213p)

상대가 없어, 상대를 향해 뻗어나가지 못한 시시하고 일상적인 말들이 입가에 어색하게 맴돌았다. (…) 유리벽에 대가리를 박고 죽는 새처럼 번번이 당신의 부재에 부딪혀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때야 나는 바보같이 ‘아, 그 사람, 이제 여기 없지……’라는 사실을 처음 안 듯 깨달았다. (228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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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망한 사랑
김지연 지음 / 문학동네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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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에 없는 소리』를 쓴 작가가 맞나 싶을 정도로 『조금 망한 사랑』은 전작과 판이하게 다른 분위기를 보인다. 그리고, 이번에 읽은 『조금 망한 사랑』이 훨씬 더 좋았다. 두 작품 모두 청년들의 불행이랄지, 현실에서 맞닥뜨리는 고된 역경들을 그리고 있다는 점에서는 어느 정도 비슷한 부분이 있다고 할 수 있겠으나, 인물들이 그것을 받아들이는 혹은 바라보는 시선과 태도는 사뭇 다르다.

(몇 년 전에 읽어 나의 기억이 온전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내가 기억하는 『마음에 없는 소리』의 감상은 한 단어로 정리하자면 ‘불평불만’이었다. 소설 속 인물들이 세상의 부조리를 대할 때 거의 다 분노, 투쟁 및 불평불만 등의 태도로 일관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때문에 그걸 읽는 나까지도 매우 불편하고 답답했던 기분이었다. 개인적으로는 소설에서 불편함을 느끼는 것을 그리 선호하지는 않기에, 앞으로 김지연 작가의 소설을 읽을 일은 없겠구나… 싶었다.

그러나 『조금 망한 사랑』은 달랐다. 소설 속 인물들에게 일종의 고난이 닥쳐오는 것은 『마음에 없는 소리』와 비슷하지만, 『조금 망한 사랑』 속 인물들은 그것을 아주 chill하게, 다시 말해 쿨하고 시니컬하게 대처한다. 「포기」나 「반려빚」에서는 친구(지인)이 돈을 빌리고 나서 갚지 않은 채 튀고, 「좋아하는 마음 없이」에서는 남편이 바람나서 이혼을 해달라고 무릎꿇고 애원한다. 만약 내가 소설 속 상황을 마주한다면 이들을 죽을 때까지 쫓아서 머리끄댕이를 잡거나 하겠지만, 주인공들은 그러지 않았다. 아주 chill 하게 이런 상황에 대응해낸다.

이런 쿨하고 시니컬한 소설 속 인물들의 태도는, 어째서인지 현실에서 그러지 못하는 나에게 얼마간의 힐링과 위로를 주기도 했다. 왜일까, 내가 chill한 태도를 가진 사람들에게 동경을 품고 있어서일까? 분명 일상에서 맞닥뜨리는 크고 작은 사건들 하나하나에 내 감정을 일희일비 한다면, 이는 매우 큰 감정소모로 돌아와서 나 자신을 꽤나 힘들게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뭐가 되었든 좀 ‘쿨’해질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는 게 (거창하게 말하자면) 나의 신념인데, 그런 나와 아주 잘 맞았던 소설이 바로 이번에 읽은 『조금 망한 사랑』이었던 것 같다. 그래서 더더욱 나는 이 책이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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