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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미술사 - ‘정설’을 깨뜨리고 다시 읽는 그림 이야기
박재연 지음 / 한겨레출판 / 2025년 9월
평점 :
#하니포터11기
우리는 흔히 미술사를 위대한 천재들의 연대기쯤으로 생각한다. 고흐는 가난과 비극 속에서 미친 듯이 그림을 그렸고, 고갱은 타히티에서 원시적 영감을 받았으며, 루벤스는 거대한 캔버스를 홀로 완성한 천재였다는 식의 이야기 말이다. 그런데 이 책은 그런 익숙한 줄거리에 의문을 던진다. 정말 고흐는 그림을 한 점도 팔지 못했을까? 고갱이 본 타히티는 진짜 ‘원시적 낙원’이었을까? 루벤스는 혼자 붓을 잡았던 걸까?
이 책의 저자 박재연은 우리가 무심히 받아들이던 미술사의 신화를 다시 들여다본다. 흥미로웠던 건 단순히 “그건 틀렸다” 하고 부정하는 게 아니라, 그 이야기가 왜 그렇게 굳어졌는지를 보여준다는 점이었다. 예술가는 언제나 개인의 천재성으로만 설명되지 않는다. 시대의 제도, 권력, 시장, 심지어 관습 같은 것들이 작품 뒤에 겹겹이 쌓여 있었다. 이걸 읽으면서 “내가 미술관에서 작품 하나를 본다고 해서 그 모든 걸 알 수는 없겠구나” 하는 겸손함 같은 것도 생겼다.
무엇보다 이 책을 읽으면서 제일 재미있었던 순간은 각 예술가의 잘 알려지지 않은 면모를 엿볼 때였다. 루벤스가 사실 공방 시스템 속에서 조수들과 함께 작품을 제작했다는 사실은 “위대한 거장이 붓을 들면 곧바로 명작이 탄생한다”는 환상을 깨주었다. 베르트 모리조 같은 여성 화가가 오랫동안 ‘마네의 제수씨’라는 틀에 가려져 있었다는 이야기는, 우리가 미술사를 배울 때 얼마나 남성 중심의 프레임 속에 있었는지를 새삼 깨닫게 해줬다. 이런 부분을 읽을 때마다, 내가 아는 미술사가 단지 좁고 편향된 버전이었다는 걸 느꼈다.
또 하나 인상 깊었던 건 루브르 박물관의 이야기였다. 전쟁이나 혼란의 시기, 예술 작품들을 비밀리에 숨겨 지켜냈다는 사실이 무척 흥미로웠다. 미술관은 단순히 전시하는 공간이라고만 생각했는데, 때로는 작품의 생명을 이어가기 위해 은신처 같은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루브르의 웅장한 건물 안에 수많은 명작이 걸려 있는 풍경만 떠올렸던 나에게, 그 뒤편에서 그림들을 ‘숨겨 지킨’ 사람들의 노력이 있다는 사실은 어떤 드라마보다도 생생하게 다가왔다. 예술 작품은 단순한 그림이 아니라, 시대와 사람들의 손길이 이어져 지켜낸 결과물이라는 점을 새삼 느끼게 해주었다.
책장을 덮고 나니 ‘두 번째 미술사’라는 제목이 이해가 갔다. 우리가 학교나 미술관에서 배워온 ‘첫 번째 미술사’가 있었다면, 이 책은 그 그림자를 보여준다. 기존의 이야기를 지우려는 게 아니라, 그 옆에 또 하나의 길을 놓아주는 것이다. 덕분에 앞으로 미술을 볼 때도 조금 더 다층적으로 바라볼 수 있을 것 같다. 단순히 “이 그림은 누구의 명작이다”라는 이름표에 만족하지 않고, 그 배경과 맥락을 궁금해하게 될 것 같다.
읽는 내내 “아, 이런 이야기를 더 일찍 알았더라면 미술관에 가는 게 훨씬 재밌었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미술사를 잘 알지 못해도 부담 없이 읽을 수 있고, 동시에 통념을 흔들어주는 지점이 많아 머릿속이 환기되는 느낌이었다. 미술에 관심이 있든 없든 간에, 많은 사람들에게 이 책을 추천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