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제15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김멜라 외 지음 / 문학동네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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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캐니 밸리] - 전지영

수록된 순서대로 읽느라 가장 마지막에 읽은 작품이지만, 글을 쓰려고 보니 왜인지 제목만 보고선 내용이 기억나지 않았다. 아마 앞에 있는 작품들이 워낙 인상적이어서 그런 탓일 것이다. 아무튼 내용을 간략히 소개하자면, 왜소증을 앓는 택시 기사인 주인공이 어떤 젊은 여자를 부자 동네의 한 저택에 데려다주는데, 그 여자가 얼굴에 염산 테러를 당했다는 소식을 경찰에게서 듣는다. 음… 미스터리 장르인가, 싶지만서도 마냥 그렇지만은 않아서 머릿속에 물음표가 남은 채로 이야기가 끝난 소설이었다.

[혼모노] - 성해나 ⭐️

신력이 다한 무당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작품이다. 소재부터 참신하고 좋다. 게다가 플롯 또한 (좋은 의미로) 가관이었다. 주인공이 모시던 할머니 신이 옆집의 무당에게로 옮겨 간 것이었다. 주인공은 오십대 중년 남성, 옆집 무당은 십대 여성. 극명하게 대비되는 두 인물의 나이와 성별의 설정이 더더욱 주인공의 노욕(老慾)을 돋보이게 하는 듯했다. 안타깝다는 마음보다는 웃기다는 생각이 더 강하게 들었다.

[반려빚] - 김지연

제목을 스쳐보기만 했을 땐 [반려’빛’]인 줄 알았는데 막상 내용을 살펴보니 [반려’빚’]이었다. 주인공을 배신하고 떠난 연인에게서 남은 것은 오로지 ‘빚’ 뿐이었고, 아직도 그녀를 잊지 못한 주인공은 그저 ‘빚’을 반려자처럼 생각하며 조금씩 야금야금 갚아나가는 플롯을 담은 작품이다. 물론 중간에 잠수탄 연인이 다시 돌아오며 이야기는 극적으로 치닫긴 하지만, 아무튼 암울한 현실을 한없이 어둡게만 그려내지 않고 나름 시니컬하게? 약간의 조소를 머금은 듯한 냉소적인 문체로 전개되어 좋았다. 다만, 주인공을 굳이 ‘레즈비언’으로 설정할 필요가 있었을까 싶다. 이 작품의 중심 주제가 ‘퀴어’는 아니므로 평범한 남성 주인공에 여성 연인으로 읽어도 충분히 잘 읽힐 것이다. (실제로 나는 평범한 남녀 커플로 읽다가 중간부터 이들이 동성 연인임을 뒤늦게 깨달았다.) 그래서 이런 설정이 억지스럽게 느껴져서 조금 아쉬웠다.

[파주] - 김남숙 ⭐️

군대에서 당한 폭력의 복수극을 다루고 있는 작품, 읽다 보면 넷플릭스 드라마 <더 글로리>가 필연적으로 떠오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다만 <더 글로리>가 비현실적으로 완벽하게 설계된 스케일 큰 복수를 다루고 있다면, <파주>는 보다 더 현실적인 복수가 등장한다. 이는 독자들의 마음을 더욱 안타깝게 만든다. 더불어 군대 내에서 피해 인물이 당한 폭력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소설에서는 끝까지 등장하지 않는데, 이 부분은 속시원하지 않다는 느낌보다는 더욱 처절한 감정이 들었다. 처음 접하는 작가였고, 앞으로 이 작가의 작품을 찾아 읽을 것 같다.

[보편 교양] - 김기태 ⭐️

이 작품은 개인적으로 이번 젊작상 수상작품들 중 가장 좋았던 소설이었다. 교사인 주인공이 ‘고전 문학’ 과목을 담당하게 되며 벌어지는 이야기를 담은 작품, 혹시 내가 교육학과 학생이어서 더 몰입해서 읽은 것이었을까. 부정은 못하겠다만, 어쨌든 아주 현실적인 씁쓸함과 내가 바라는 결말의 달콤함을 동시에 맛볼 수 있는 작품이었던 것은 분명하다.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수업에서 다루자 이에 대한 학부모의 민원이 들어오고, 교장은 주인공에게 ‘당신이 전교조였으면 문제가 커졌을 것’이라며 안도하는 모습이… 여간 씁쓸한 것이 아니다. 아, 더 내용을 설명하다간 스포일러를 할 것만 같아 말을 줄이겠다. 아무튼 나는 이 소설만큼은 두고두고 여러번 읽고 싶다.

[어차피 세상은 멸망할 텐데] - 공현진

두 명의 수영 센터 강습생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소설, 이들은 동시간대 강습생들 중 가장 낮은 실력을 갖고 있다. 그래서 강습 외에 따로 시간을 내어 죽어라 연습을 하지만, 그럼에도 이들의 실력은 전혀 늘지 않는다. 이 소재만 읽더라도 아주 참신하고 재밌지 않은가. 다만 이 두 명의 주인공들 각각의 사연들 또한 이 소설에 등장하는데, 이 서사가 조금 겉돈다는 느낌이 들어 조금 아쉬웠다. 그래도 수영 센터를 중심으로 전개되는 서사는 흥미로웠다. 유머러스한 문체가 잘 어울리는 작품이었다.

[이응 이응] - 김멜라 ❌

네 차례나 젊작상을 수상하였고 심지어 올해는 대상까지 탔지만, 나는 도저히 김멜라의 글을 읽지 못하겠다.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다. 일단 먼저, 유달리 문장들이 안 읽힌다. 현학적인 건가 하면 그것도 아니고, 철학적인 깊이가 담긴 건가 하면 그것도 아니다. 그러면 만연체인가? 모르겠다. 확실한 건, 가독성이 매우 낮다는 것이다. 그리고 두 번째, 소재가 너무 역겹다. 22년도 젊작상에 수록된 작품은 ‘딜도’의 시점으로 바라보는 레즈비언 커플 이야기… 아직도 잊지 못한다. 더군다나 올해 작품의 소재도 ‘성욕을 해소하는 기계’… 왜 자꾸 ‘젠더’를 소설에 집어넣지 못해 안달인 것인가 싶을 정도로 너무 싫다. 이제 그녀의 이름을 젊작상 목록에서 보지 않을 수 있어 행복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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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거운 유월의 바다와 중독자들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 50
이장욱 지음 / 현대문학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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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핀서포터즈

이장욱 작가는 소설가인 동시에 시인이다. 시도 쓰고 소설도 쓰시는 분이라는 말이다. 그래서일까? 이 작품은 어쩐지 소설 보다는 산문시를 읽는 듯한 기분을 들게 했다. 이 책의 줄거리를 요약하기란 힘들다. 명확한 사건 내지는 갈등이 없기 때문이다. 그저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 보낸 인물들이 그 떠난 사람을 추억하는 내용으로 가득 차있다. 그러므로 이 작품에는 회상과 묘사가 전부이다. 이러한 내용에 ‘시인’으로서의 시적 표현들이 들어있으니, 더더욱 소설이 아닌 산문시로 읽히는 까닭인 듯하다.

모수의 유품은 많지 않았다. 뭐든 간소한 사람이었다. 인생에 많은 물품이 필요하지 않은 사람이었다. 많은 감정도 필요하지 않은 사람이었다. 몸이 큰 편이어서 에너지가 많이 필요할 텐데도 어쩐지 삶 자체가 소규모였다.

80p

소설 속 주인공 ‘연’은 남편 ‘모수’를 잃은 뒤 그를 추모하고 회상한다. 그리워하긴 하는 걸까? 슬프기는 한걸까? 모수를 떠올리는 연의 태도는 시종일관 담담하기 때문에 애절하다거나 처연하다는 감정과는 거리가 상당히 멀다. 그저 모수를 생각할 뿐이다. 아니, 중얼거릴 뿐이다. 어쩌면 무채색 같은 연의 담담한 태도가 모수를 추모하는 그녀만의 방식일지도 모른다.

예상하던 일이 일어나면 사람은 예상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충격을 덜 받는다. 예상을 성실하게 하면 어떤 일이든 생각보다 담담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데 이런 건 모수가 생전에 했던 말이었다. 죽음은 그렇지 않을 텐데. 예상을 아무리 해도 죽음은 그렇지 않을 텐데.

81p

그리고 또다른 인물 ‘천’이 있다. 이 인물은 연극 배우로 얼마 전 연인이었던 아나운서 ‘한나’와 이별을 겪었다. 한나는 천에게 ‘혼자 있을 시간이 필요하다’는 말을 전하며 그를 떠나버렸고, 천은 그 말을 계속해서 곱씹으며 생각에 잠긴다. 독자들은 천이 사유하는 흐름을 따라가며 그의 내면으로 유유히 가라앉는 기분이 들 것이다. 이 또한 보통의 소설에서는 찾기 힘든 감각이다.

천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나는 이미 혼자 있는 시간이 충분한데, 한나 역시 그건 마찬가지일 텐데, 인간에게는 혼자 있는 시간이 얼마나 필요한가. 천은 침울한 생각에 잠겼다.

98p

서사성과는 거리가 있는 이 소설이 누군가에게는 지루하게 느껴질 수도 있겠다. 그러나 문장 하나하나를 음미하며 읽다 보면, 그 담담한 문체로부터 비롯되는 여운과 감동에 잠길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소설보다는 시를 읽을 때 느끼곤 하는 감각인데, 이 작품에서 그러한 감상을 느끼니 색다르고 신선한 재미를 받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시중에 널리고 널린 가볍고 자극적인 이야기에서 벗어나 가끔은 담담하고 깊이 있는 여운에 빠져드는 것도 좋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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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빛 창창
설재인 지음 / 밝은세상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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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협찬

소설의 주인공 ‘곽용호’는 잘나가는 스타 드라마 작가인 엄마 ‘곽문영’ 밑에서 자라 제대로 되는 것 하나 없는 삶을 의미없이 하루하루 살아가는 흔한 이십대 여성이다. 용호는 그런 엄마에게서 제대로 된 사랑 하나 받지 못했다 생각하며 ‘혐오’하는 수준으로 자신의 엄마를 싫어하는데, 어느날 갑자기 그 엄마가 집필한 드라마를 계약해놓은 채 홀연히 실종된다.

용호는 이 소식을 드라마 제작사 직원에게서 듣게 되는데, 용호는 별 대수롭지 않은 일로 생각하지만 그 직원은 이 드라마가 파기되면 수많은 사람들이 직장을 잃게 된다며 아주 큰일이라고 경고한다. 그런데 소설은 예상과는 조금 다르게 전개된다.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게 된 용호는 이 문제를 ‘엄마를 찾는 방식’으로 해결하는 것이 아닌, ‘드라마 대본을 본인이 쓰는 방식’으로 해결하려 하는 것이다. 물론 이는 제작사 직원의 제안도 있었고 주인공을 도울 문창과 대학원생 ‘장현’도 있었기 때문에 이를 용호가 수락하며 둘은 대본을 써내려간다.

문제는 대본 제작 과정이 용호가 알던 방식과는 조금 달랐다는 점에서 심화된다. 처음에는 둘이 열심히 대본을 쓰는대로 제작사 측에서 통과되며 승승장구하는 줄로만 알았으나, 원래 용호가 알던 작가와 제작사의 갈등이 이들의 대본 집필 과정에서는 전혀 없다는 것을 도중에 깨달은 것이다. 장현 또한 이를 눈치채고 대본에 의도적으로 논리가 결여된 장면을 집어넣어 제작사에 보냈으나, 이 역시 별다른 피드백 없이 곧바로 통과되어 이들의 의심은 확신으로 굳어진다. 결국 무언가 꿍꿍이를 느낀 이들은 용호의 엄마 ‘곽문영’을 찾아야겠다고 다짐하며 이야기는 본격적으로 깊어진다.

이후의 이야기는 스포일러가 될 수 있어 설명을 생략하는 바이다. 이 다음에는 페미니즘적인 요소도 들어가있고, 이십대의 취업난 등 팍팍한 현실 사회상을 반영한 부분도 있으나, 이런 부분들은 차치하고 일단 이 소설은 ‘재미’가 있다. 가독성이 워낙 좋아 술술 읽히고 중간 중간에 드러나는 반전들도 예상치 못하게 하여 독자들의 흥미를 끌어올리니 더더욱 빠른 속도로 책장을 넘길 수밖에 없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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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을 깨는 아이들
범유진 외 지음 / &(앤드)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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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앤드러블 #앤드러블4기

최근 나는 공무원 시험 준비를 그만둔다는 (나름) 큰 결심을 하였다. 공무원 시험 공부를 계속하는 게 단지 힘들어서 포기하는 건 아니었다. (물론 매우 힘들긴 했다.) 공부를 그만두는 이유는 공무원이 아닌, 하고 싶은 다른 일이 아주 크고 선명하게 내 마음속에 자리잡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정말 무수히 많고 깊은 고민의 과정을 겪어야만 했다. 지금까지 준비하고 공부했던 걸 뒤로하고 새롭게 도전을 하려는 데에는 분명 엄청난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으니 말이다.

이 마음을 가장 잘 알아줄 사람은 아무래도 부모님이지 않을까 싶어 부모님께 이 고민을 토로했다. (나는 부모님과 꽤 친하게 지내는 편이다. 특히 엄마랑은 거의 베스트프렌드 수준이다…) 그렇지만 엄마와 아빠는 서로 상반된 의견을 내셨다. 엄마는 하고 싶은 걸 해라, 아빠는 공무원 시험 준비를 마저 해라. 아빠의 생각은 노후까지 보장된 공무원을 마다할 이유가 없고, 지금까지 공부한 거에서 조금만 더하면 분명히 합격할텐데 이를 포기하는 건 너무 아깝지 않느냐는 것이었다. 원체 내가 공무원 준비하는 것을 좋아라 하셨던 아빠였기에, 아빠의 그런 생각이 이해되지 않는 건 아니었다.

그때, 엄마의 말 한마디가 그 대화의 판도를 완전히 뒤집었다. 엄마는 평생을 하고 싶은 게 없었다고, 그저 흘러가는 대로 이끌리며 살아온 터라 그게 몹시도 후회된다고, 그래서 아들이 하고 싶은 게 있다는 게 엄마는 너무 부럽고 자랑스럽다고, 아직 이십대 중반인데 하고 싶은 걸 도전하는 게 얼마나 가치 있는 거냐며, 약간 울먹이면서까지 이렇게 나의 생각을 지지해주셨던 것이다… (지금 생각해보니 다시금 코 끝이 찡…😢) 아빠 또한 엄마의 그 말이 맞는 말이라고 생각하셨던지 아무 말도 못하셨다. (물론 나중에 둘이서 밥먹을 때 공무원을 한번 더 해보라는 권유를 하긴 하셨지만… 이미 복학 신청을 해놓은 후라서 그 말을 들을 순 없었다☺️)

이런 나의 내밀한 사정을 이 글에 적은 이유는, 이 소설집에 수록된 소설들이 이런 고민을 하고 있는 지금의 나에게 너무도 필요한 위로와 조언을 건네주었기 때문이다. 범유진 작가님의 작품 [런웨이, RUN, WAY]에는 주변의 단짝 친구들과는 달리 하고 싶은 게 뭔지를 모르는 주인공 ‘유하’가 등장하고, 이와 달리 이선주 작가님의 작품 [실패하겠다는 말]에는 하고 싶은 게 너무도 뚜렷하여 부모님의 반대와 부딪히는 주인공 ‘아름’이 등장한다. [런웨이, RUN, WAY]를 보면서는 유하가 결국 자신의 장래 희망을 멋지게 찾아내서 꿈을 이룩하길 바라는 마음이 드는데 그게 어쩐지 내가 나 자신을 응원하는 것 같아 조금 쑥스러운 마음이 들기도 하였다. 반면 [실패하겠다는 말]을 읽으면서는 가장 현실적이면서도 따뜻한 조언을 얻었는데, 그게 무엇인지는 문장 자체를 옮겨 적으며 이 글을 마치도록 하겠다. 혹시 나같은 고민을 품은 사람들, 특히 나의 동년배들에게 이 책을 권하고 싶다.


“하면 된다,는 자신감도 필요하잖아. 근데 그보다 더 필요한 게 뭔지 알아?”

엄마와 꿈에 관해 이렇게 진지하게 대화해 본 적은 처음이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실패를 받아들일 용기.”

76~77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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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나긴 하루
박완서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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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 기대 없이 펼친 첫번째 수록작 ‘석양을 등에 지고 그림자를 밟다’는 내게 황홀경을 선사했다. 사실 요즘들어 젊은 소설가들의 글을 읽는 데에 조금 싫증이 나던 참이었다. 퀴어 내지는 페미니즘을 주제로 담고 있는 작품들이 많아서 그런 것인지 대다수의 소설 속 여성 주인공들은 하나같이 기구한 사건(성희롱, 성차별, 가정폭력 등등)에 휘말리고 남성 인물들은 악하게 비춰진다고 느껴졌는데, 처음에는 물론 그런 시선에 공감도 하고 우리 사회의 부정적인 일면을 과감히 표현했다는 생각에 씁쓸하기도 했으나 그런 소설들이 계속 반복되니 그들이 담고 있는 우울 내지는 분노의 톤이 이제는 작위적이고 지겹게 읽혔다.

그러던 중에 만난 이 단편 ‘석양을 등에 지고 그림자를 밟다’는 내게 가뭄의 단비 같은 소설이었다. 박완서 작가님의 인생을 이 단편 하나로 요약한 듯한 자전적인 이야기였는데, 그래서일까 훨씬 진솔하고 내밀한 이야기로써 모든 서사가 자연스럽게 읽혔다. 이를테면 ‘할아버지’가 그러하다. 유년기 시절의 일화 속 할아버지는 뼛속 깊은 유교 전통 아래 남녀차별을 일삼는 인물이 아닌, 그저 손녀를 몹시 이뻐하고 부인(할머니)에게 종종 혼나기도 하는 귀엽고 사랑스러운 인물이다. 작가님이 할아버지를 회상하며 글을 쓰던 중에 추억에 잠겨 행복한 기분이 듦으로 인해 글까지 그 기분이 전염된 것일까, 그 글을 읽는 동안에는 독자인 나 또한 같이 행복해진 듯했다.

그렇다고 해서 소설이 내내 행복하기만 한 것인가 물으면, 그렇지 않다. 보통의 소설이 그러하듯 이 작품에서도 주인공의 고난 내지는 주인공을 괴롭히는 악(惡)이 등장한다. 국어 과목과 별도로 ‘조선어’가 존재하던 당시 사회가 그러했고, 삼촌을 돌아가시게 만든 ‘전쟁’이 그러했으며 남편과 아들의 ‘죽음’이 그러했다. 그러므로 이 작품은 내게 ‘희노애락’ 중 어느 하나만이 아닌 모두가 담겨있는 입체적인 소설이었고, 그런 점이 내게 꽤나 큰 충격을 주었다. ‘단편’의 분량에서는 보통 사건 하나의 분량만을 다루는 것이 일반적인데, 짧은 분량 속에서도 인생의 여러 복합적인 면모를 담아냈다는 것이 지금껏 젊은 작가들의 소설을 주로 읽어 온 내게 아주 긍정적인 충격을 준 것이다. 이래서 박완서 박완서 하는구나 싶다. 앞으로 읽을 수 있는 박완서 작가님의 작품이 많다는 사실에 너무도 행복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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