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음과모음 2025.가을 - 66호
자음과모음 편집부 지음 / 자음과모음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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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모단

여러 생성형 AI 프로그램들의 급격한 발전으로 인해 문학계에 경고등이 켜졌다. 사람들은 생성형 AI를 통해 단순히 정보 검색만을 하는 것이 아니라 보고서, 논문 작성 등에 도움을 (아주 크게) 받고, 심지어는 상담 등의 영역에서 감정적인 위안을 얻기도 한다. 오로지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일이라 여겨졌던 것을 AI가 대신하기 시작하였다. 그렇다면 과연 문학계는 어떠할 것인가. 역시 문학 마저 AI가 대체해버릴 것인가.

이러한 우려가 쏟아지는 세태에서 『계간 자음과모음 2025 가을호』가 논의해야 할 점으로 주목한 부분은 바로 ‘작가’다. 『계간 자음과모음 2025 가을호』는 이 시대의 ‘작가성’이 현재 재구성되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작품 뒤에 숨어 보이지 않던 작가라는 존재가, 실체 없는 ‘가상적 작가’라는 존재로 인해 다시금 세상의 주목을 받고 있으며, 때문에 새로운 작가성의 논의가 필요한 것이다. 이 주제로 쓰인 다섯 편의 깊은 통찰이 담긴 글을 읽을 수 있었는데, 그중 노태훈 평론가의 글이 꽤 인상적이다.

노태훈 평론가는 이번 글에서 기존 한국문학 문단의 신격화가 무너졌다고 지적한다. 2015년 한국문학계를 뒤흔들었던 신경숙 작가의 표절 논란 사태를 들며, 그 당시의 작가상이 얼마나 신화적이었는지를 설파한다. 신경숙 작가는 『엄마를 부탁해』 등의 유수한 작품을 써낸 명실상부 한국문학의 대표 작가였는데, 그러한 작가가 표절 논란에 휩싸이니 여간 충격적이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문학의 작가마저도 마치 소속사에 속한 연예인처럼 그것을 방패 삼아 침묵하고 은폐할 수 있음’(241p)을 독자가 깨닫게 되었다는 사실이 있었다.

인터넷이 발전하고 독자들의 영향력이 세지면서, 그리고 여러 문학적 논란들이 공론화되면서 ‘작가’에 대한 기존의 신화적 시선은 다소 누그러졌다. 단순히 작가의 작품을 읽기만 하는 수동적 존재가 아니라, 적극적으로 자신의 독서 행위를 드러내고 이를 또 하나의 컨텐츠로 만들어내는 능동적 생산자가 된 것이다. 즉, 작가와 독자의 위치가 동일선 상에 놓이게 되었다. 그러나 노태훈 평론가는 아직도 한국문학의 비평적 담론이 ‘여전히 문학의 신화를 지키는 데 급급’하다고 지적한다(247p). 앞으로 AI가 더욱 더 발전하게 된다면 기존의 ‘작가’에 대한 개념을 완전히 틀어 다른 시선으로 바라보아야 할텐데, 지금의 모습은 전혀 시대상과 맞지 않은, 퇴보적인 것이다. AI가 쓴 작품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지, 그런 작품을 쓴 AI를 ‘작가’로 볼 수는 있는지, 독자들 뿐만 아니라 한국문학계에 종사하고 있는 전문가들 또한 이에 대해 깊이 논의해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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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운하우스
전지영 지음 / 창비 / 202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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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한국문학의 젊은 작가들이 유수한 작품들을 발표하고 있는 듯하여 독자로서 내심 흐뭇하고 뿌듯하다. 이번에 읽은 전지영 소설가의 『타운하우스』 또한 마찬가지다. 그 어려운 중앙지 신춘문예를 조선일보와 한국일보 두 곳에서 동시에 당선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나는 일말의 기대감을 품지 않을 수 없었다. 다만, 보통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법인지라 『타운하우스』 역시 그런 책이 될 것 같아 걱정어린 마음 또한 들었다. 다행히도 기우였다. 갖고 있던 기대를 훨씬 크게 뛰어넘는 훌륭한 작품들을 『타운하우스』에서 만날 수 있었다.

김애란 작가는 단편 소설을 쓸 때 주인공에게 약간의 ‘죄’를 짓게 한다고 했다. 그 지점에서 궁금해지는, 질문이 촉발되는 이야기가 시작된다는 말을 북토크에서 들은 기억이 있다. 이번에 읽은 『타운하우스』 역시 그 문법을 그대로 따라가는 듯했다. 소설 속 인물들이 마냥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은, 현실 속 우리들 마저 종종 저지르는 ‘실수’와도 같은 약간의 죄를 저지르는 입체적인 인물들. 그리고 그 죄를 마주하며 벌어지는 그 후의 이야기들. 그래서인지 『타운하우스』에 수록된 단편들의 서사는 장르소설 못지 않게 매우 흥미롭다.

이를 테면, 「소리 소문 없이」와 「뼈와 살」에서는 다른 사람에 대해 험담을 하는 주인공이 등장하고, 「남은 아이」는 교내 성추행을 저지른 학생의 엄마 시점으로 전개된다. 또한 「맹점」은 개업의, 제약회사 영업사원, 보험 설계사 셋이서 공모하고 환자의 수술비를 뒤로 넘기는 이야기이며, 「쥐」는 군인 남편의 의뭉스러움을 애써 묻어두고 모른 척 하려는 아내의 시점에서 전개되는 소설이다. 소설을 읽는 독자 또한 현실에서 으레 저지를 법한 실수들이거나, 혹 그렇지는 않더라도 우리가 사는 이 현실 어딘가에서 실제로 자행되고 있을 법한 이야기들인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전지영 작가는 이런 서사적 흥미를 구태여 자극적으로 강조하지 않는다. 오히려 무심하고 담담한 문체로 인물을 그려낼 뿐이다. 그러나 이러한 전지영의 문체가 그런 현실의 소슬함을 더더욱 짙게 하는 듯했다. 특히 「난간에 부딪힌 비가 집 안으로 들이쳤지만」에서 그런 점을 강하게 느꼈다. 이 소설은 12년 전 둘째 아들을 먼저 떠나보낸 중년의 부부가 등장한다. 이들은 소설 속에서 별다른 큰 사건을 맞닥뜨리지 않는다. 그저 서로를 꾸준히 증오하고 피하기만 할 뿐이다. 그런 점이 별다른 전환 없이 계속 이어지지만, 이상하게도 지루하지 않다. 두 사람 사이의 뒤틀린 관계가 뿜어내는 음산하고도 처연한 긴장감이 여간 흥미로운 게 아니었다.

아마도 나는 『타운하우스』를 시작으로 전지영이 쓰는 모든 작품을 따라 읽을 것 같다. 최근에 들어 전작을 찾아 읽는 작가들이 무척이나 많아져서 즐거운 부담을 행복하게 누리고 있는 요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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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수 - 장류진 소설집
장류진 지음 / 창비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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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류진의 소설을 읽을 때마다 나는 이런 기분에 휩싸인다. 소설 속의 사건들이 바로 내 옆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 같은 느낌, 혹은 소설 속 인물들과 아주 흡사한 성격의 사람들을 내 주변에서 본 것 같은 기분. 이는 곧 장류진 작가가 리얼리티, 즉 현실감을 작품 속에서 정말 잘 조성한다는 뜻일 것이다. 이번에 읽은 『연수』도 마찬가지였다. 일상의 한 장면을 이렇게나 예리하게 포착하여 현실감을 살려 하나의 이야기로 서사화할 수 있다니. 이는 분명 장류진 작가가 아니고서는 할 수 없는 능력일 테다.

표제작 「연수」는 20년도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에서 먼저 읽었던 작품이라 익숙한 내용이었지만, 그 외의 소설들을 읽으면서는 ‘이게 장류진이지!’를 속으로 연발했더랬다. 「펀펀 페스티벌」에서는 자기 잘생긴 줄 아는, 지 잘난 맛에 사는 꼴값(?) 인물 ‘이찬휘’가 꽤나 밉상이었고, 「공모」의 ‘김건일’은 어딘가 부족한 듯 무녀리 같아보여도 주인공을 팀장 자리에 앉히고 천사장을 끝까지 챙기려는 모습을 보여 마음이 많이 가는 인물이었다. 소설에서 인물 만큼 중요한 게 또 있을까 싶은데, 장류진은 현실적인 서사와 더불어 인물들을 아주 입체적으로 섬세하게 그려낸 것이다.

다만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첫 소설집 『일의 기쁨과 슬픔』에서 보여주었던 그 느낌에서 그리 큰 변화가 느껴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여전히 쉽고, 현실감 넘치고, 잘 읽혔지만, 그게 다였다. 조금 가볍다는 느낌을 『연수』에서 지우지 못한 것이다. 물론 이것이 장류진의 매력이라 한다면 딱히 할 말은 없지만… 사회적인 메세지를 담는다거나 마음 한 편이 묵직하게 울리는 찡한 감동이 느껴졌으면 하는 바람이 팬으로서 든다.

(덧 하나. 요즘 내가 김애란 전작을 읽는 중이어서 그런가, 모든 단편집을 김애란 작가와 비교하는 것 같기도 하다. 양해 바란다.)

(덧 둘. 이 책에 수록된 단편 중 「라이딩 크루」는 유일하게 ‘용두사미’였다. 나체 엔딩….이라니???? 이런 개연성 없는 결말은 현실감까지 놓쳐버린 것처럼 느껴져 퍽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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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의 엔딩 소설Q
김유나 지음 / 창비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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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 인스타그램에서 종종 댓글을 남기고 소통을 하는 분께서 선물로 주신 책이다. 취향이 완전히 똑같지는 않더라도 꽤 비슷한 부분이 많다고 생각했던 인친님의 선물이기에, 신인 작가의 작품임을 알고 있음에도 적지 않은 기대를 품고 책장을 펼쳤다. 분량이 짧은 게 흠이라면 흠이랄까, 내 예상보다도 훨씬 더 깊게 전해지는 울림에 꽤나 크게 놀랐더랬다.

『내일의 엔딩』은 뇌경색으로 쓰러진 아버지를 간병하게 된 딸 ‘자경’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소설이다. 물론 간병인의 처지만으로 나오는 건 아니다. 일적으로도 상당히 바쁜 하루를 보내던 자경은 결국 아버지를 떠나보내게 된다. 아마 작가가 전하고 싶은 주제의식이 바로 이 부분이지 않을까 싶다. 상실과 애도, 결국은 소중한 사람을 떠나보내야만 하는 우리내 삶, 이것을 ‘자경’이라는 인물을 통해 그려낸 것이 아니었을까.

개인적으로 나의 친할머니가 뇌경색으로 돌아가셨던 터라, 『내일의 엔딩』에서 그리고 있는 상황들이 조금은 남달리 무겁게 느껴졌다. 할머니의 장례식장에서 어른들이 하신 말씀을 나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할머니는 우리 가족을 배려하셔서 그렇게 빨리 가신 게다.”

고등학생이었던 당시의 나로서는 이 말이 그리 잘 이해되지 않았다. 애당초 ‘배려’라는 말과 ‘죽음’을 같은 문장에 놓을 수 있는 건지도 의문이었지만, 그래도 내 솔직한 마음으로는 조금이라도 더 오래 살아계시다가, 조금이라도 더 얼굴을 보게 할 수 있는 시간을 주시는 것이 가족을 배려하는 길 아니었던가, 하는 게 어리석은 그때의 내 생각이었다.

『내일의 엔딩』을 읽으며 그런 내 생각이 얼마나 가볍고 얄팍한 것이었는지를 몸서리치듯 깨달았다. 간병을 한다는 것이 얼마나 정신적, 신체적으로 힘든 일인지. 사랑하는 내 가족이 아파하는 모습을 낮이든 밤이든 언제나 지켜보는 것이 얼마나 지치는 일인지. 그런 와중에도 일상을 포기할 수는 없는 현대인의 삶이 얼마나 팍팍한 것인지. 그래서 왜 우리 할머니는 ‘가족들을 배려하셨다’는 말을 들으며 떠나셨는지…. 갑자기 할머니가 무척 보고 싶어진다.

우리는 결국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내야 할 것이다. 내가 떠나든 혹은 내가 떠나보내든, 결국 이별은 찾아오게 마련이다. 그렇다면 인생에서 결코 피할 수 없고 배제할 수 없는 죽음, 상실, 이별을 우리는 과연 어떻게 마주해야 할까. 『내일의 엔딩』은 이 질문을 던지는 소설이었다. 그리고 나는 아직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지 못했다. 아니, 애써 외면하고 있다. 상상하기 싫어서, 대면하고 싶지 않아서, 비겁하게 도망치고 있다. 다만, 얼마 전에 읽은 최진영 작가님의 산문집 『어떤 비밀』을 읽으며 조금은 용기가 생겼다. 그 문장을 인용하며 이 글을 마친다.

삶을 졸업할 때가 올 것이다. 정말 떠나야 할 때. 그 순간을 느닷없이 맞닥뜨리지만은 않기를. 잠시라도 준비할 수 있기를. 사랑을 전할 수 있는 시간이 주어지길 바란다. 그리고 돌아서서 인사해야지. 안녕, 너구나. 내 소설에는 네가 꽤 많이 등장해. 그만큼 너를 자주 상상했어. 그래서 네가 마냥 두렵지만은 않아. 너를 만나면 오랜 친구처럼 안아주고 싶다고도 생각했지. 이제 진짜 만났네. 내 손을 잡아줄 수 있어?

『어떤 비밀』, 367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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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뚝들 - 제30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
김홍 지음 / 한겨레출판 / 202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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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니포터11기

지금까지의 모든 한겨레문학상 수상작을 읽어본 것은 아니지만, 내가 읽어본 한겨레문학상 수상작은 언제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그리고 돌이켜 보면, 수상작들 간에 얼마간의 공통적인 특징이 있는 것 같다. 보통 ‘문학’에서 으레 느껴지곤 하는 감수성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다. 문장 하나 하나가 섬세하고도 예리한 감각으로 쓰여 읽는 이로 하여금 마음의 울림을 불러일으키는 것, 그리고 서사 자체가 가진 힘을 토대로 다음 내용을 궁금하게 만들어 책장을 넘기게 하는 것. 한겨레문학상 수상작은 대체로 후자, 즉 서사가 가진 매력이 압도적으로 강한 작품들이 많았다.

불행에 대해 겸손해야 한다고 장은 생각한 일이 있다. 누구나 조금씩은 불행하고, 가장 불행한 사람조차 끊임없이 불행하지만은 않으므로 호들갑 떨 필요가 없다고 말이다. 마침내 이루 말할 수 없는 불행이 찾아왔을 때 장은 불행이란 단어가 자신의 처지를 설명하는 데 한참이나 모자람을 깨달았다. (11p)

이번에 읽은 『말뚝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위의 첫문장으로 단숨에 나를 사로잡더니, 휘몰아치는 전개로 앉은 자리에서 다 읽게 만들었다. 총 3부로 구성된 이 작품은 1부에서 주인공 ‘장’에게 닥친 불행을 보여주고, 2부에서는 말뚝들이 들어닥친 대한민국에서 벌어지는 기상천외한 일들을 그려내며, 3부에서는 그 모든 일의 마무리를 짓는다. 서늘한 현실과 기발한 상상력을 적절히 조합하여 빠른 속도로 이야기를 전개시키는 작가의 필력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이 소설에서 작가는 무엇을 말하고 싶었는지, 이 작품이 ‘한겨레문학상’을 받을 정도로 문학적 가치가 대단한 것인지는 단 한 번의 독서로는 그리 잘 체감되지 않았다. 그러나 책의 말미에 수록된 서영인 평론가의 글을 읽으며, 나는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더랬다.

『말뚝들』이 전달하는 가장 핵심적인 메시지가 바로 이 ‘눈물’이라고 나는 읽었다. 제련소에서 유독 물질에 중독되어 죽은 외국인 노동자, 나흘째 잠을 못 잔 상태로 인도를 덮친 택배 노동자, 그 택배차에 받혀 숨진 아이, 그들이 모두 말뚝들이 되어 나타난 순간 이 죽음이 사회적 죽음이라는 사실은 명백해진다. 그리고 말뚝들 앞에서 자기도 모르게 우는 사람들의 눈물 역시 아마도 사회적 슬픔일 것이다. 『말뚝들』은 이 사회적 죽음과 사회적 슬픔을 추적하고 반추하며 기록한다.

나는 요즘 사회가 너무 팍팍해졌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 공감이 줄어들고 개인주의가 강화되고 있는 게 편하면서도 씁쓸하다. 왜일까, 곰곰이 생각해보면 너무 많은 정보들의 범람과 너무 빠른 세상의 변화가 적잖은 영향을 끼치는 것 같다. 특히 쇼츠나 릴스, 거기서 나오는 여러 사건들의 요약을 보며 슬픔을 느끼다가도, 우리의 손짓 한 번에 바로 다음 영상이 재생되며 그런 아픔이 곧바로 사라지지 않던가. 어쩌면 『말뚝들』은 이러한 현 세태에 맞설 수 있도록 공감과 연대를 주창하는 소설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어떤 ‘사회적 죽음’을 단순한 죽음으로 그치지 않고 더 나은 사회를 만들도록 나아가게 하는 것은 ‘사회적 슬픔’일테니 말이다.

이태원 참사 현장에 투입되었던 한 소방관님이 우울증을 앓다 결국 작고(作故)하셨다는 뉴스가 떠오른다. 부디, 그곳에서는 평안하시길, 정말 간곡히 바라며, 더이상 또다른 죽음이 나오지 않기를, 이 또한 너무도 간절히 바란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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