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순한 열정 (무선) -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99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99
아니 에르노 지음, 최정수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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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한 열정> - 아니 에르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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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느 날 밤, 에이즈 검사를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사람이 내게 그거라도 남겨놓았는지 모르잖아.’ (46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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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록 외설스럽고 적나라하면서도, 이렇게나 깊이 있을 수 있나 싶어 놀라울 따름이다. <단순한 열정>은 한 여성의 사랑 이야기이다. ‘작년 9월 이후로 나는 한 남자를 기다리는 일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는 첫 문장으로 시작하는 만큼, 이 작품이 다루고 있는 사랑은 너무도 강렬하다. 그 강렬함을 독자들에게 그대로 전하기 위함인지 아니면 그 당시의 감정을 충실하기 담아내기 위함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이 작품은 직설적이고 수위 높은 표현들이 많이 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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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가끔 나와 정사를 나누며 보낸 오후가 그 사람에게 어떤 의미일지 자문해보았다. 정사를 나눈다는 것, 그 자체일 뿐이겠지. 어쨌든 또다른 이유를 찾는다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었다. 내가 확신할 수 있는 것은 단 하나뿐일 테니 말이다. 그 사람이 나를 욕망하느냐 욕망하지 않느냐 하는 것. 그것은 그 사람의 성기를 보면 당장에 알 수 있는, 유일하고도 명백한 진실이었다. (30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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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하게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들이 있다. 주인공 여성이 사랑한 남자는 바로 부인을 둔 유부남이라는 것, 그리고 이 이야기는 작가 자신의 경험을 담은 자전적 소설이라는 것. <단순한 열정>을 읽으면서 놀랐던 점은, 그들의 사랑이 사회적으로 용인되지 않는 부적절한 관계라는 것을 부정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본인의 사랑을 합리화하는 태도를 보이지도 않고, 잘못을 저지르고 있다는 죄책감을 내비치지도 않는다. 그저 자신의 육체와 영혼이 모두 그 사랑에 매몰될 만큼 그 사랑에 너무도 깊이 빠져버린 당시의 마음을 ‘평평한 문체’로 충실하게 적었을 뿐이었다. 그래서인지 주인공, 아니 작가의 감정과 심리를 읽는 독자로써 더욱 직관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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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RER이나 지하철, 혹은 대합실, 그리고 잠시 한눈을 팔 수 있는 장소라면 어디든, 나는 앉기만 하면 이내 A를 생각하며 몽상에 빠져들었다. 이런 상태에 들어서는 순간, 나는 온몸에 경련이 일어날 만큼 행복해졌다. 그리고 머릿속에 수많은 영상과 기억들이 넘쳐나서, 마치 머릿속으로도 몸의 다른 기관들처럼 육체적 쾌락을 느끼는 것 같았다. (35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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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이들의 결말은 어떻게 될까? 부인과의 이혼을 종용하고 사랑을 성취하게 될까? 아니면 애초에 올바르지 않은 관계였기에 이 관계의 끝도 좋지 못할까? 이 부분은 직접 이 책을 읽으면서 알게 되길 바라는 마음에 따로 피드에 적진 않겠다. 하지만 아무리 강렬하고 열정적인 사랑이더라도 세월의 무게, 즉 ‘시간’ 앞에서는 아무 소용 없다는 말은 꼭 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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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은 그 모든 일들이 다른 여자가 겪은 일인 것처럼 생소하게 느껴지기 시작한다. 그러나 그 사람 덕분에 나는 남들과 나를 구분시켜주는 어떤 한계 가까이에, 어쩌면 그 한계를 뛰어넘는 곳까지 접근할 수 있었다. (65-66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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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에게 ‘완전히’ 사랑에 빠지면 이런 마음가짐이 되고, 이런 심신 상태에 빠지게 된다는 것을 아주 ‘직관적’으로 느껴서 너무도 충격적이었던 독서였다. 누군가를 좋아해본 적은 있어도 이 소설 속에서 비칠 법한 ‘깊은 사랑’에 빠져본 적은 없었기에, 살면서 한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세계를 추체험하는 시간을 <단순한 열정>을 읽으며 즐길 수 있었다. 내가 소설을 좋아하고, 계속해서 읽는 이유가 이런거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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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렸을 때 내게 사치라는 것은 모피 코트나 긴 드레스, 혹은 바닷가에 있는 저택 따위를 의미했다. 조금 자라서는 지성적인 삶을 사는 게 사치라고 믿었다. 지금은 생각이 다르다. 한 남자, 혹은 한 여자에게 사랑의 열정을 느끼며 사는 것이 바로 사치가 아닐까. (66-67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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