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제4장 본문입니다. 

 

子曰  道之不行也 我知之矣. 知者過之 愚者不及也.

道之不明也 我知之矣. 賢者過之 不肖者 不及也.

人莫不飮食也 鮮能知味也.

공자는 말씀하셨다. "도가 행해지지 않음을 나는 알겠다. 지혜로운 사람은 지나치고 어리석은 사람은 모자란다. 도가 밝아지지 않음을 나는 알겠다. 어진 사람은 지나치고 못난 사람은 모자란다. 사람이 마시고 먹지 않음이 없으나 그 맛을 아는 경우가 드물다."   
 

2. 중용의 도가 실행되기 어려운 이유는 이미 앞 장에서 암시한 바 있습니다. 최고의 경지이니 그것을 인정한다고 해서 대뜸 실천에 옮길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하지만 이 어려움을 신비적, 탈속적 차원에서 논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가령 불가나 선가의 공부 식이라면 처음부터 중용을 말할 까닭이 없어지고 말 것입니다. 아무리 어려워도 그것은 인간의 사회적,  문화적 삶 속에서 행해질 수밖에 없는, 또 그래야 하는 수준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므로 그 어려움은 중용 자체의 경지 문제라기보다는 우리가 형성하는 사회, 문화 관계의 문제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 근가가 제시됩니다.  

 

지혜로운, 또는 아는 사람은 지나치고 어리석은, 또는 모르는 사람은 모자란다고 공자께서 진단하셨습니다. 여기서 知者와 愚者가 대비된 것은 문자 그대로 보면 이상합니다. 우자가 모자란 것은 당연한데 어찌하여 지자는 지나친 것일까요? 참으로 아는 사람이라면 그럴 리 없지 않겠습니까?  

 

결국 여기 知者는 "이른바" 아는 사람이란 뜻이지요. 스스로 그리 여기는 사람이라고 보아도 별 무리는 없겠지만, 제 생각에는 사회적인 의미에서 知者로 여겨지는 집단으로 보는 게 더 나은 이해인 듯합니다. 요즘 잘 쓰는 말로 "사회 지도층"인 셈이지요. 권력, 돈, 지식을 통해 사회를 쥐락펴락하는 지배층이 바로 그들입니다.   

 

그런데 이들의 앎은 어리석은 자들과 선을 그은 상태에서 규정된 정치적 차원을 획득하게 됩니다. 당연히 어리석은 사람들, 즉 일반 백성은 "아랫것"이 되는 것이지요. 하여 그들은 입만 열면 백성을 훈계하려 듭니다. 우리사회에서 그 표본을 너무나 여실히 목격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런 앎은 소인의 앎입니다. 그와 선명한 대비를 이루는 군자의 앎, 곧 大知가 제6장에 나옵니다. 大知는 자신과 어리석은 사람을 구별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여기 知者는 사회를 분열시킴으로써 자신의 권위를 세우고 기득권을 유지하는 천박한 지배층, 즉 약육강식과 승자독식의 정글 법칙을 구가하는 집단인 것입니다.  

 

어리석은 사람 또한 이런 맥락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스스로 패배주의에 빠진 개인들을 의미할 수도 있겠지만 지배집단에서 배제된/분리된 사회정치적 존재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3. 중용의 도가 밝게 펼쳐지지 않는 까닭 또한 이치적으로 동일합니다. 이른바 어질다고 하는 사람은 지나치고 이른바 못났다고 하는 사람은 모자라기 때문입니다.  지자와 현자를 구태여 구분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知와 行을 연결하고 賢과 明을 연결한 것은 어찌 보면 엇갈린듯하지만 오히려 이론과 실천을 통일적으로 이해하는 실사구시적 관점이라고 이해하면 훨씬 선 굵은 읽기가 가능하겠지요.   

 

4. 그러면 지나치다는 것은 어떤 상태를 말하는 것일까요? 앞에서 본 바와 같이 "특별하다"는 뜻입니다. 특별하려면 극단적 프로세스를 써야 하고 극단적 프로세스를 쓰려면 소통을 거절해야 하므로 중용을 어긴 것입니다. 물론 그들은 소통을 거절하면서 "아랫것들"의 무지를 탓하겠지요.  

 

모자란다는 것은 어떤 상태를 말하는 것일까요? "특별한" 자들에게 소외, 억압당하는, 그래서 소통에서 제외된 상태를 뜻합니다. 또한 그것을 문제로 인식하지 못하는 상태를 말합니다.  결국 그 상태는 이른바 어리석고 못난 사람들로 하여금 자기 존재에 반하는 선택을 하도록 몰아갑니다. 지난 세월 동안 우리사회에서 수도 없이 목도한 바 있으니 더 이상 군더더기를 붙일 까닭이 없겠군요.  

 

5. 우리는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마시고 먹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단순히 생명 유지라는 목적을 위해  음식을 수단으로만 여긴다면 구태여 맛을 거론할 이유는 없습니다. 하지만 여기 분위기대로라면 맛과 그것을 아는 것은 중용의 도를 설명하는 데 중요한 구실을 한다고 봐야 합니다.    

 

마시고 먹을 때 그 음식의 맛을 알고, 모르는 것은 어떤 맥락에서 중용의 도를 설명하는 핵심 사례가 되는 것일까요? 아마도 맛에 탐닉하는 자들과 맛조차 모른 채 허겁지겁, 또는 딴 생각에 사로잡혀 마시고 먹는 자들의 극단을 염두에 두면서 한 말이었을 것입니다.  

 

"특별한" 자들은 자체생명인 음식의  고유한  향미를 넘어선 즐거움을 탐하므로 중용을 어겼습니다. "아랫것"들은 맛은커녕  자기 연명에 급급하여 생명인 음식의 가치로움에 미치지 못했습니다.  둘 다 음식의 형태로 마주선 생명과 소통하지 못했습니다.    

 

수운 선생의 가르침 식으로 말한다면 음식은 하늘입니다. 하늘이 하늘을 기르는 거룩한 사건이 마시고 먹는 것입니다. 이런 어법대로라면 음식의 맛을 아는 것은 바로 그 거룩함을 알아차리는 일입니다. 마시고 먹는 사건의 거룩함은 유미주의와 실용주의를 가로지르는 경계에서 피는 꽃입니다. 

 

6. 마시고 먹는 일상의 사소한(!) 일을 예시하신 공자의 의중은 무엇일까요? 길고 깊게 수런거릴 일 없겠지요. 중용 자체가 평범함에서 벗어나지 않는 것이니 그렇고, 그 평범함이 극명하게 드러나는 시공간이 바로 사소한 일상이니까 그렇습니다. 사소함은 과소평가된 위대함이란 사실을 간파한 통찰이 숨 쉬고 있습니다.  

 

마시고 먹는 일은 관통과 흡수로 요약되는 중용의 본령이 가장 구체적 현실로 드러나는 장(場)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일(놀이)과 잠, 대화, 性, 호흡 등도 동일한 중용 도량(道場)임에 틀림없습니다. 사실 눈에 보이는 이런 일상의 거룩함에 터 잡지 않은 가치, 즉 눈에 보이지 않는 이념, 사상, 종교 따위의 이른바 거룩함은 죄다 뜬 구름일 뿐입니다. 그야말로 사소한 예 하나로 大小, 聖俗 이분법이 최종 부도 처리됩니다. 知愚, 賢不肖 이분법은 더 이상 숨 쉴 수 없습니다.     

 

7. 그러나 세상은 이분법 세상입니다. 공자의 절망, 중용의 좌절은 바로 세상을 둘로 갈라야 이익을 극대화할 수 있는 "특별한" 소수 집단이 권력, 돈, 지식을 독식한 데서 연유합니다. 그들의 지나친 독단은 바야흐로 도를 넘어섰습니다. 공자의 시대는 물론이거니와 오늘 우리 앞에서도 그러합니다.  

 

백성은 죽어나가는데 연일 웃는 얼굴 아니면 짐짓 엄숙한 얼굴로 대문짝만 하게  신문, TV에 나는 사람들이  나라를 '말아먹고' 있는 장본인인데 아랑곳하지 않고 그들은 도리어 백성에게 끊임없이 뭔가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복종이든, 희생이든, 표든.......닥치는 대로 취하려 합니다. 음식 맛 아닌 제 입맛에 맞추어 거리낌 없이 욕설을 퍼부으면서 독식사회를 구축해 갑니다. 걸핏하면 편향, 변덕, 무지를 들먹이며 백성을 꾸짖습니다. 자신들만이 중용의 도를 실천한다고 스스로 속이면서 이 순간도 세상을 갈라놓는 일에 몰두하고 있습니다. 지금 여기서 무엇을 해야 참된 중용의 실천일까요? 어찌 살아야 군자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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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제3장 본문입니다. 

子曰 中庸 其至矣乎 民鮮能久矣.

공자는 말씀하셨다. "중용은 최고의 도리이다. 백성들은 오래 지속하기 어렵다."
 

2. 평범함에서 늘 벗어나지 않는 일이야말로 가장 어려운 실천의 덕목입니다. 자신의 기득권에 대한 애착과 집중을 버려야 하기 때문입니다. 자신과 같은 정도로 대우해야 하는 상대방과 소통하려면 필승의 전략이 아닌 공감의 진정성을 지녀야 하기 때문입니다. 진정성으로 세상을 살기 얼마나 어려운가, 그런 자세로 살면 백전백패할 것인데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영혼 깊숙히 동의하기가 여간 힘들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제2장에서 보았듯이 "특별한" 존재로 인정 받고, 거리낌 없이 사는 사람들이  세상의 권력, 돈, 지식을 거머쥐고 있는데 그들 밑에서 힘 없이, 궁핍하게, 더듬거리며 한 평생을 살고싶은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아무리 애쓰며 살아도 고작 백년 안쪽인데  도덕이며, 가치며, 아름다움이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이런 생각에 누군들 빠져들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소인에 맞서 상생의 세상, 대동세상을 만들고자 하는 군자의 길에 선뜻 나서 내내 갈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아마도 여기 백성(民)이라 함은 소인적 삶의 자연(Sein)적 매력과 군자적 삶의 당위(Sollen)적 기품 사이에서 흔들리는 다수 시민을 가리킬 것입니다. 이들은 한편으로는 "특별한" 자들에게 일방적으로 당하는 존재이므로 참 소통의 길, 즉 군자의 길에 목말라 있으나, 다른 한편으로는 소인의 저 "특별한" 소유도  가없는 열망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는 사람들입니다. 


어느 순간 분연히 떨쳐 일어나 군자의 결기를 세워 보지만 이내 주저앉게 됩니다. 자긍심에 상처 입은 처자식의 슬픈 눈망울을 뿌리치는 일이 권력, 돈, 지식을 뿌리치는 일보다 쉽다고 주장할 수 있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자신의 남편이, 자신의 아버지가 중용의 삶을 살아갈 때 흔쾌히 동의하고 동참할 아내와 자식이 있다손 치더라도 그 길을 모델로 제시하며 따르도록 강요할  권리를 가진 사람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일반 백성들은 오래 지속하기 힘듭니다. 그들은 하루하루를 눈물겹게 살아가기에도 버거운 몫을 지니고 있습니다.  중용의 도를 지속시키는 것은 군자의 몫입니다.  군자는 그 길을 자발적으로 선택한 사람입니다. 누구든 그가 선택한 만큼이 그의 삶이니 그로써 군자 되는 것이 군자의 숙명입니다.
 

3. 비록 오래 지속할 수는 없으나 백성은 때때로 화산이 됩니다. 짧은 순간 집중된 결기로 중용이 탄젠트적 성취를 이룰 수 있게 하는 거대한 힘이 된다는 말입니다. 사실 이것만으로도 백성의 존재는 숭고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중용의 도를 오래 지속하지 못하는 백성을 두고 한탄하는 것은 도리가  아닙니다. 참으로 군자라면 늘 그 백성 속에서 그들과 소통하여 변혁의 여울목으로 함께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백성과 군자는 결코 분리된 존재가 아닙니다. 크게 하나(大同)입니다. 백성을 자신과 구별하는 자들은 소인입니다. 여기 백성에 대한 공자의 시각은 어떤 것일까요? 곰곰히 생각해 볼 필요가 있겠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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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값 창비시선 322
정호승 지음 / 창비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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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miscellany

이 시집을 읽으면서 몇 가지 전에 없던 일을 겪었습니다. 무엇보다, 놀랍게도, 정말 처음 있는 일인데, 첫 시에 바로 가슴이 쩡! 하고 소릴 내더라는 것입니다. 사실, 그 동안, 어떤 시집과 마주하더라도 처음엔 낯가림 하면서 읽는 게 습관이었습니다. 한참 지나가야 마음이 슬슬 뜨거워지고, 몸도 풀리지요. 한데 이번엔 첫 시 앞에서 오래 머물러 있었습니다. 급기야 시 전문을 손전화 문자에 실어 누구에겐가 보내기까지....... 

그리고, 시집 끄트머리에 붙은 시인의 말을 시보다 더 주의깊게 읽은 것도 처음입니다. 그 글을 읽는 제 호흡은 이렇게 마디지어집니다. 

 (1) .......꼭 가야하는 길이 있다. 나는 이제야 그 길이 시와 시인의 길임을 확신한다. 

 (2) 시인이 한 편의 시를 남기기 위해서는 한 평생이라는 시간이 필요하다. 

 (3) 이번 시집에 수록된 시들은 대부분 짧다.......시는 묵언의 상태에서 이루어지는 그 무엇임을 새삼 깨닫는다. 

 (4) .......앞으로 쓸 시에 대한 기대감으로 눈부신 오늘 아침을 맞이한다.    

흠, 60년을 꼬박 살고서야 확신이 서는 운명의 길이라.......그 운명의 길 종착역에서 비로소 시 한 편이 나온다.......그 시는 침묵과 버금한다.......이렇게 사무치는 깨달음 뒤에 쓸 내일의 시란 과연 무엇일까.......  

끝으로, 이건 별로 중요한 이야기는 아닙니다. 시를 다 읽은 후 느긋한 마음으로 해설을 읽으면서 시 읽는 마음의 studium과  punctum을 살피는 버릇까지는 이전과 다르지 않았지요. 그런데 이번에는 해설을 통해 뭔가 살펴지지 않았다는 게 달랐습니다. 해설하신 분이 독자들의 수준을 배려해서(!) 그리 쓰셨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려 해도 시인의 그 짧은 시들에 비해 해설이 너무나 '길다'는 느낌을 지우기 어려웠습니다.  

2. studium  

정호승을 생각하면 그 맞은 편에 떠오르는 시인이 한 사람 있습니다. 마종기. 

정호승의 시는 수직적이고 마종기의 시는 수평적입니다. 정호승의 시는 운문성이 너무나 또렷하고 마종기의 시는 산문성이 지배적입니다. 삶의 차이일 수도 있을 테고 사람의 차이도 있을 테고....... 물론 내밀한 것까지야 알 수 없지만요.  

마종기는 시국사건에 연루돼 추방 당한 상태로 오랫동안 이국 땅에 살면서 끊임없이 겪는 회한과 그리움을 바탕으로 시를 쓰기에 아무래도 경쾌하게 수직적 상상력으로 나아가기 어려웠을 것이다, 이정도. 그냥 그의 시는  산문 같고, 한 걸음 더 나아간 것이라면 산문적 삶에서 어떻게 운문적 정서가 나오는가를 대놓고 알려주는 시가 있어, 어쩌다 운문(!)인 시 사이를 이어준다는 느낌입니다. 어쩌면 시종일관 배회, 방황 같기도 하고....... 

 정호승은 탄젠트적 상상력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고 느낍니다. 그가 넘나들고 구사하는 은유, 그 절정으로서 역설이 너무 날렵해서 저는 'S라인 선문답'이라고 누구에겐가 말했답니다. 그것이, 때로는 통쾌함으로 다가오다가, 때로는 얄미움으로 다가옵니다. 통쾌함은 저의 아둔함에 금을 냅니다. 군더더기 설명이 필요 없지요. 얄미움은 의심을 품게 만듭니다. 의심은, 가령, 마종기의 삶에서 이런 뒤집음이 나올 수 있을까, 또는, 그의 영성은 너무나 투명한 순물질이 아닐까.......실로, 물색없는 발상인데, 하여, 용서를 양쪽에 다 구해야겠지만, 어째, 가끔, 스님의 주례사가, 문득, 떠오릅니다.^^  

좌든 우든 그럼에도 몸 느낌으로는 분명하게 정호승에 기울어집니다. 제가 생각하는 한, 그가 시인이거든요. 물론, 이런 제 생각이 결국 흔하디흔한 통속 감각이어서 도리어 안심입니다. 

3. punctum 

이 시집 전체를, 제 삶의 감각에서, 다음 세 편으로 관통해 봅니다. 

 (1) 어제 <뒷모습>을 돌아보며  

그동안 나는  

내 뒷모습이 아름다워지기를 바라는 사치를 부려왔다 

내 뒷모습에 가끔 함박눈이 내리고 

세한도의 소나무가 서 있고  

그 소나무에 흰 눈꽃이 피기를 기다려왔으나 

내 뒷모습에도 그믐달 같은 슬픈 얼굴이 있었다 

오늘은 내 뒷모습에 달린 얼굴을 향해 개가 짖는다 

아이들이 달려와 돌을 던진다 

뒷모습의 그림자끼리 비틀비틀 걸어가는 어두운 골목 

보행등의 흐린 불빛조차 꺼져버린다 

내일은 내 남루한 뒷모습에 강물이 흘러라 

내 뒷모습의 얼굴은 둥둥 강물에 떠내려가 

배고픈 백로한테 쪼아먹혀라 

 (2) 오늘 <충분한 불행> 앞에 서성대다 

나는 이미 충분히 불행하다 

불행이라도 충분하므로 

혹한의 겨울이 찾아오는 동안 

많은 것을 잃었지만 모든 것을 잃지는 않았다 

죽음이란 보고 싶을 때 보지 못하는 것 

보지 못하지만 살아갈수록 함께 살아가는 것 

더러운 물에 깨끗한 물을 붓지 못하고 

깨끗한 물에 더러운 물을 부으며 살아왔지만  

나의 눈물은 뜨거운 바퀴가 되어  

차가운 겨울 거리를 굴러다닌다 

남의 불행에서 위로를 받았던 나의 불행이 

이제 남의 불행에게 위로가 되는 시간 

밤늦게 시간이 가득 든 검은 가방을 들고 

종착역에 내려도 

아무데도 전화할 데가 없다 

 (3) 내일 <봄비>에 깃든다 

어느날 

썩은 내 가슴을 

조금 파 보았다 

흙이 조금 남아 있었다 

그 흙에 

꽃씨를 심었다 


어느날 

꽃씨를 심은 내 가슴이 

너무 궁금해서 

조금 파보려고 하다가 

봄비가 와서 

그만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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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제1장은 어기(語氣)나 내용의 기획성으로 보아 후대의 것으로 보입니다. 고증 여부와 상관없이 그런 판단에 의거, 맨 뒤로 돌렸습니다. 

2. 제2장의 본문입니다. 

仲尼曰 君子 中庸 小人 反中庸. 君子之中庸也 君子而時中,  小人之中庸也 小人而無忌憚也.

중니는 말씀하셨다. "군자는 중용을 하고 소인은 중용을 거꾸로 한다. 군자가 중용을 하는 것은 군자다우면서 때에 알맞게 하고, 소인이 중용을 거꾸로 하는 것은 소인스러우면서 꺼리는 것이 없다." (이하 이기동 역을 따름) 

3. 군자라는 용어는 익숙한 만큼 어려운 말입니다. 다 안다고 생각하는 게 함정이지요. 그래서 추상적이고 모호한 개념으로 둥둥 떠다니는 겁니다. 무엇보다 미리 전제된 개념이라는 인식이 일을 더욱 어렵게 만듭니다. 구체적 문맥에서 군자의 내포를 찾지 않고 막연한 카리스마를 부여함으로써 은연 중에 통치자나 지배집단과 등치시키는 상징조작에 넘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구체적 문맥에서 보면 중용을 하는 자가 군자입니다. 구체적 문맥을 보편적 지평으로 재빨리 전환하는 전술이 바로 주어와 술어의 위치를 바꾸는 것이지요. 중국인들이 전가의 보도로 쓰는 어법입니다. 검증 과정 없이 역명제를 연역법의 선두에 세우는 일 말입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보면 중용의 도를 실천하고서야 비로소 군자가 될 수 있기에 중니는 뒤에 "도가 아마 행해지지 않을 것이다."(제5장)라고 하여 군자가 '형성'될 수 없는 세상을 한탄하셨습니다. 바로 다음, 순 임금의 실천을 근거로 들며 "이로써 순이 되었다."(제6장) 즉 "중용을 실천함으로써 군자가 되었다."라고 갈파하셨습니다. 

이런 정황으로 미루어 보건대 군자는 순 임금의 실천을 따르는 공자 자신을 가리킵니다. 이는 마치 신약성서에서 예수께서 자신을 "인자"라고 하신 것과 같습니다. 제자들이 하느님을 보여달라고 하자 "나를 본 것이 곧 하느님을 본 것이다."라고 일갈하신 것과도 같습니다. 결국 이를 신성모독으로 간주한 모세종교 집단의 손에 예수가 죽었듯이 군자-자의식을 가진 공자는 끝내 제후들에게 버림을 받았습니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공자가 군자면 저들은 필연적으로 소인일 테니 말입니다.  

이런 맥락의 연장선에서 보면 군자란 공자를 대표단수로 하는 당시 사대부 계층 혁신 세력, 그 사상, 그 실천의 지향점을 가리키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오늘날 표현으로 바꾸면 "깨어 있는 지식 민중" 정도라고 할까요...지나친 비약이 아닌 까닭은 다시 제6장에 나옵니다. 순 임금이 "묻기를 좋아하고 평범한 말을 살피기를 좋아했다."는 사실 말입니다. 평범한 말이 무엇인 줄 안다면 군자를 이렇게 아래로부터, 그리고 집단적으로 자리매기는 데 이의를 달기 어려울 것입니다.  

4. 이렇듯 주희의 뜻과는 상관 없이 군자는 약육강식, 승자독식을 추구하는 기득권 특수층 세력에 맞서 새로운 사회를 만들어 가려는 혁신적, 저항적 주체를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군자의 사회적 행동의 강령인 중용은 약육강식, 승자독식에 맞서는 의미를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중용은 거의 모든 해석들이 답습하는 것처럼 명사적 어법으로 읽으면 안 됩니다. 명사적 이해에서는 中이  핵심 가치이고  그 中이 불변하는 법칙임을 천명하는 게 庸이라는 식으로 규정됩니다. 명사로서 中이 무엇이냐에 대해 많은 논의가 있지만 사실은 그럴수록 관념성만 깊어질 뿐입니다. 명사라는 게 그 본령상 추상적일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저는 중용 자체를 동사 구문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이 동사구문 전체가 군자의 사회행위를 드러내는 술어가 됩니다. 中은 "벗어나지 않는다"는 뜻을 지닌 동사입니다. 庸은 말 그대로 "평범하다"는 뜻입니다. 결국 중용은 "평범함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는 간결한 뜻을 가지게 되는 것이지요. 

약육강식, 승자독식 사회에서 강자, 승자가 되려면 극단적 프로세스를 선택하는 "특별함/특수함"을 무기로 지녀야 합니다. 뭇 제후가 공자에게 바란 것이 바로 이런 "특별한/특수한" 프로세스였고 그들이 그것을 통해 휘몰아가는 세상이 바로 춘추전국의 피바람이었지요.   

권력, 돈, 그리고 지식의 삼각동맹으로 사회이익을 독점하려고 준동하는 제후의 탐욕에 맞서 평범한 다수의 삶의 가치에 굳건히 닻을 내리려 했던 공자의 몸부림이 다름아닌 중용입니다. 그러면 평범한 다수의 가치인 그 "평범함"은 무엇일까요? 

평범하다는 것은 그저 그렇다는 뜻이 아니라 현실을 있는 그대로 산다는 뜻입니다.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산다는 것은 모순적 대칭구조로 이루어진 세계를 받아들인다는 것입니다.  그 대칭의 경계에서 부단히 모순의 "공존통합"을 위해 "거래"하는 삶이 바로 평범함입니다. 

거래는 상호 "관통과 흡수"를 전제합니다. 쌍무적 관계 형성입니다. 소통입니다. 제후적 일방통행은 설 자리가 없습니다. 쌍방향 소통을 하려면 자아의 中(가운데)을 버리고 "경계"로 나아가야 합니다. 기득권으로서 中을 버려야 비로소 중용을 이룬다는 역설이 여기에서 성립하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동사로서 中의 실질적 내용은 "끊임없이 경계로 나아간다"는 역동적 경향성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경계를 향해 나아가는 주체적 결단에서 늘 벗어나지 않는 다는 뜻입니다. 그 경계에는 자신과 동등한 주체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와 만나 일구어내는 "서로 주체성"(철학자 김상봉의 용어)의 세상이 바로 군자의 세상입니다. 군자의 세상은 거창하지도 특별하지도 않습니다. 상호 소통, 거래, 관통과 흡수가 일어나는 일상적 사건 그 자체입니다. 그것이 庸입니다. 그 庸을 바르고 아름다운 흐름으로 만드는 것이 中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종래 중용이해는 거꾸로 된 것이라 아니 할 수 없습니다. 주희와는 맞는지 모르나 공자와는 맞지 않는, 아니 우리와는 맞지 않는 식민주의적  해석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庸도 실천이요 中도 실천이니 둘 다 동사입니다. 그리고 그 핵심은 도리어 庸에 있습니다. 

5. 대칭구조로 된 현실세계에서 모순을 "공존통합"시키는 건강한 거래, 공정한 소통은 시의성(時中)이 생명입니다. 찰나 찰나 서로 주체의 상황은 변하므로 그에 알맞게 소통해야 합니다. 영원 불변하는 규범이란 논리적인 차원에서라면 모르되 현실적으로는 무의미한 것이지요. 죽어도 해야 한다, 죽어도 해서는 안 된다, 이런 강박적 기준은 제후의 가치입니다. 군자는 때에 맞추어 그저 올바르게 할 따름입니다. 

6. 중용의 공간적/공시적 지평은 서로주체성의 평등, 평화 사회이념으로 나타나고 시간적/통시적 매락은 투명한 혁신, 저항의 역사의식으로 나타납니다. 이런 이해야말로 평범한 사람, 즉 중용의 사람이 읽는 중용 사상이라고 생각합니다. 주희와 그 아류를 따르지 않는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7. 군자가 위와 같이 자리매겨진다면 소인은 당연히 "홀로주체성"에 입각해 분열적, 강박적으로 강자의 길, 승자의 길을 추구하는 저 춘추전국 시대의 제후 무리가 될 것입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주희류의 사람 또한 거기에 소속되겠지요. 더 나아가 오늘 우리를 살펴 본다면 천민자본주의, 신자유주의로 무장한 지배집단이 바로 소인입니다.  

우리나라로 범위를 좁혀 보겠습니다. 입만 열면 "국민을 위한다"면서 말끝마다 국민을 향한 훈계를 달고 사는, 아마도 속으로 자신들을 군자라고  생각할, 이른바 사회지도층이 바로 소인 집단임에 틀림없습니다. 저들은 스스로 중용한다고 함으로써 오히려 소인임을 만천하에 드러내고 있으니 소인답습니다. 저들은 부동산 투기, 주가조작, 이중국적 취득, 탈세, 병역 기피, 뇌물 수수, 위장 전입 등을 거리낌없이(無忌憚) 행하고도 부끄러움을 느끼지 못하니 가히 소인의 중용답습니다. 

되는 대로 지껄이고 닥치는 대로 말을 바꿉니다. 개인적 소신과 국가 경영을 혼동합니다. 사적 처지와 공적 지위를 구분하지 않습니다. 민주주의  한다면서 지역감정에 편승합니다. 양극화는 가속도가 붙고 서민경제는 파탄의 나락으로 떨어졌는데 거시 경제 지표 호전만 말합니다. 과연 기탄 없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우리사회를 이끌어가는 "특별한" 사람들입니다. 권력, 돈, 지식을 원없이 향유하는 이른바 셀러브리티(celebrity)입니다. 이들 눈에는 "평범한" 국민들이 한심하고 만만하게 보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허나 그들의 그 "특별함"이야말로 "無忌憚"과 동의어임을 어느 누가 부인할 것입니까? 

8. 군자는 늘 때에 알맞게 평범함에서 벗어나지 않음으로써 세상을 바로잡는 사람입니다. 그는 자신의 기득권적 중심을 버리고 스스로 경계로 나아가 타인과 소통함으로써 대동(大同) 세상을 만들어 갑니다. 그러므로 그의 영혼은 약육강식, 승자독식의 시대정신에 맞서는 투명한 날카로움으로 빛납니다. 군자의 영혼이야말로 원철학적 혁명이요, 기품있는  좌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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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isy 2011-02-16 13: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자 하나하나 몸에 부딪쳐오네요..눈물 글썽이며 읽고있습니다
-대구에서

bari_che 2011-02-20 10: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리 쉽지 않은 글인데 눈물을 글썽이며 읽으신다니 대단한 감수성을 지니신 분이군요. 더 세심하게 감각을 다듬어 써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우리가 고전을 읽는 까닭은
삶에서 어떻게 시공의 질서와 변화가  이루어지는가,
어찌하면 그 삶의 참된 주체로 설 수 있는가를 탐색하기 위함입니다.  

어떤 고전이든 숱한 눈길을 거치며 
세월보다 더 많은 의미군을  끌어안고 있겠지만
오늘 나의 눈으로 새롭게 읽지 않는 한 화석에 지나지 않습니다. 

따라서 무엇을 읽느냐 하는 문제보다는
어떻게 읽느냐 하는 문제가 더 중요하겠지요.
하여 무엇부터 읽을까 그리 오래 망설일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와 매우 익숙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멀리 있는
유가의 사서삼경 중 <중용>을 한 번 읽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저는 유가와 그 경전에 대해 전문적으로 공부한 바 없습니다.
홀로 사서를 서너 번 읽고, 한의대 예과 시간에 맹자를 부분적으로 공부한 게 전부입니다.
그러나 귀밑머리에 서리 내리도록  산 인생의 날들을 믿고 
무모하나마 고전 여행을 떠나보려 합니다.  

*             *             * 

<중용>이란 텍스트는 본디 <예기>에 속해 있었는데 남송의 주희가 독립시켰다고 합니다. 주희는 <중용> 뿐만 아니라 <대학>도 그리 했고, 나아가 유가 경전 전체를 재구성하여 이른바 사서삼경이란 개념 자체를 만들었습니다. 결국 오늘날 우리가 접하는 최종 텍스트로서 유가 경전 체계는 주희 한 사람의 편집작품입니다.  

물론 내용은 저자로 가탁된 사람의 직접 언술도 포함하겠지만  후대의 가필과 수정도 있습니다. 고대의 책 쓰기는 지금과 전혀 달라 단독 저자가 완작을 하는 경우는 없습니다. 이를테면 사회역사적 집단 창작이지요.  그러므로 깊이 있는 본문 비평이 필요한 것입니다. 일점일획이 다 성현 말씀이다, 이래버리면 안된다는 것이지요. 

이런 차원에서 본다면 오늘 우리의 안목으로 사서삼경을 재구성할 수도 있습니다. 주희에게 있던 권한(?)이 우리에게는 없다면 사서삼경은 종교적 권위를 획득하게 되는데 이보다 더 불행한 일은 없겠지요. 체계 전체를 문제삼지 않더라도 부분적인 구성이나 의미 해석에서는 이미 수도 없이 재구성이 이루어져 왔습니다.  

내용이든 형식이든 끊임없이 흔들리며 시대마다 새롭게 태어나야 오히려 참된 권위를 지닌 고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실 주희는 그 본보기에 지나지 않는 것이지요. 주희만큼의 치열성이 있다면  누구라도 사서삼경을 우리의 문제의식에 맞게 재구성, 편집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주희가 활동했던 남송 시대의 사대부에게는 크게 두 가지 화두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통치 이념으로서 정통유가의 헤게모니를 확립하는 것입니다. 특히 불교 사상의 도전에 직면한 유가의 위기의식은 주희에게서 아주 노골적으로 드러난 바 있습니다. 

다른 하나는 이른바 오랑캐에게 수모를 당하고 남으로 밀려난 한(漢)족의 자존심을 회복하는 것이었습니다. 중화 이념의  확립을 통해 중원 패권의 옛 영광을 대체 복원하는 것입니다. 이 두 흐름을 한 데로 묶는 정치경제학적 연결고리가 바로 중산층 사대부의 존재였습니다. 

그래서 주희는 한족 주체의 중국 전통 질서와 체계를 중심으로 모든 가치를 통합, 안정화하는 명사적 어법으로 텍스트를 재구성하고 읽어냈습니다. 이런 접근법으로 그가 처한 시대의  난관을 돌파했다는 점에서 주희는 참으로 탁월한 존재인 것입니다.  

그러나 주희는 주희의 탁월함으로 빛납니다. 우리는 우리의 탁월함을 향해 나아가야 합니다. 오늘날 한국사회에서 과연 주희의 어떤 관점이 유효할 수 있을까요? 제 소견에는 우리 사회가 주희와 너무나도 판이한 과제를 안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따라서 그만큼 다른 각도에서 읽어야 합니다. 이제 그 읽기를 시작해 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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