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값 창비시선 322
정호승 지음 / 창비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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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miscellany

이 시집을 읽으면서 몇 가지 전에 없던 일을 겪었습니다. 무엇보다, 놀랍게도, 정말 처음 있는 일인데, 첫 시에 바로 가슴이 쩡! 하고 소릴 내더라는 것입니다. 사실, 그 동안, 어떤 시집과 마주하더라도 처음엔 낯가림 하면서 읽는 게 습관이었습니다. 한참 지나가야 마음이 슬슬 뜨거워지고, 몸도 풀리지요. 한데 이번엔 첫 시 앞에서 오래 머물러 있었습니다. 급기야 시 전문을 손전화 문자에 실어 누구에겐가 보내기까지....... 

그리고, 시집 끄트머리에 붙은 시인의 말을 시보다 더 주의깊게 읽은 것도 처음입니다. 그 글을 읽는 제 호흡은 이렇게 마디지어집니다. 

 (1) .......꼭 가야하는 길이 있다. 나는 이제야 그 길이 시와 시인의 길임을 확신한다. 

 (2) 시인이 한 편의 시를 남기기 위해서는 한 평생이라는 시간이 필요하다. 

 (3) 이번 시집에 수록된 시들은 대부분 짧다.......시는 묵언의 상태에서 이루어지는 그 무엇임을 새삼 깨닫는다. 

 (4) .......앞으로 쓸 시에 대한 기대감으로 눈부신 오늘 아침을 맞이한다.    

흠, 60년을 꼬박 살고서야 확신이 서는 운명의 길이라.......그 운명의 길 종착역에서 비로소 시 한 편이 나온다.......그 시는 침묵과 버금한다.......이렇게 사무치는 깨달음 뒤에 쓸 내일의 시란 과연 무엇일까.......  

끝으로, 이건 별로 중요한 이야기는 아닙니다. 시를 다 읽은 후 느긋한 마음으로 해설을 읽으면서 시 읽는 마음의 studium과  punctum을 살피는 버릇까지는 이전과 다르지 않았지요. 그런데 이번에는 해설을 통해 뭔가 살펴지지 않았다는 게 달랐습니다. 해설하신 분이 독자들의 수준을 배려해서(!) 그리 쓰셨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려 해도 시인의 그 짧은 시들에 비해 해설이 너무나 '길다'는 느낌을 지우기 어려웠습니다.  

2. studium  

정호승을 생각하면 그 맞은 편에 떠오르는 시인이 한 사람 있습니다. 마종기. 

정호승의 시는 수직적이고 마종기의 시는 수평적입니다. 정호승의 시는 운문성이 너무나 또렷하고 마종기의 시는 산문성이 지배적입니다. 삶의 차이일 수도 있을 테고 사람의 차이도 있을 테고....... 물론 내밀한 것까지야 알 수 없지만요.  

마종기는 시국사건에 연루돼 추방 당한 상태로 오랫동안 이국 땅에 살면서 끊임없이 겪는 회한과 그리움을 바탕으로 시를 쓰기에 아무래도 경쾌하게 수직적 상상력으로 나아가기 어려웠을 것이다, 이정도. 그냥 그의 시는  산문 같고, 한 걸음 더 나아간 것이라면 산문적 삶에서 어떻게 운문적 정서가 나오는가를 대놓고 알려주는 시가 있어, 어쩌다 운문(!)인 시 사이를 이어준다는 느낌입니다. 어쩌면 시종일관 배회, 방황 같기도 하고....... 

 정호승은 탄젠트적 상상력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고 느낍니다. 그가 넘나들고 구사하는 은유, 그 절정으로서 역설이 너무 날렵해서 저는 'S라인 선문답'이라고 누구에겐가 말했답니다. 그것이, 때로는 통쾌함으로 다가오다가, 때로는 얄미움으로 다가옵니다. 통쾌함은 저의 아둔함에 금을 냅니다. 군더더기 설명이 필요 없지요. 얄미움은 의심을 품게 만듭니다. 의심은, 가령, 마종기의 삶에서 이런 뒤집음이 나올 수 있을까, 또는, 그의 영성은 너무나 투명한 순물질이 아닐까.......실로, 물색없는 발상인데, 하여, 용서를 양쪽에 다 구해야겠지만, 어째, 가끔, 스님의 주례사가, 문득, 떠오릅니다.^^  

좌든 우든 그럼에도 몸 느낌으로는 분명하게 정호승에 기울어집니다. 제가 생각하는 한, 그가 시인이거든요. 물론, 이런 제 생각이 결국 흔하디흔한 통속 감각이어서 도리어 안심입니다. 

3. punctum 

이 시집 전체를, 제 삶의 감각에서, 다음 세 편으로 관통해 봅니다. 

 (1) 어제 <뒷모습>을 돌아보며  

그동안 나는  

내 뒷모습이 아름다워지기를 바라는 사치를 부려왔다 

내 뒷모습에 가끔 함박눈이 내리고 

세한도의 소나무가 서 있고  

그 소나무에 흰 눈꽃이 피기를 기다려왔으나 

내 뒷모습에도 그믐달 같은 슬픈 얼굴이 있었다 

오늘은 내 뒷모습에 달린 얼굴을 향해 개가 짖는다 

아이들이 달려와 돌을 던진다 

뒷모습의 그림자끼리 비틀비틀 걸어가는 어두운 골목 

보행등의 흐린 불빛조차 꺼져버린다 

내일은 내 남루한 뒷모습에 강물이 흘러라 

내 뒷모습의 얼굴은 둥둥 강물에 떠내려가 

배고픈 백로한테 쪼아먹혀라 

 (2) 오늘 <충분한 불행> 앞에 서성대다 

나는 이미 충분히 불행하다 

불행이라도 충분하므로 

혹한의 겨울이 찾아오는 동안 

많은 것을 잃었지만 모든 것을 잃지는 않았다 

죽음이란 보고 싶을 때 보지 못하는 것 

보지 못하지만 살아갈수록 함께 살아가는 것 

더러운 물에 깨끗한 물을 붓지 못하고 

깨끗한 물에 더러운 물을 부으며 살아왔지만  

나의 눈물은 뜨거운 바퀴가 되어  

차가운 겨울 거리를 굴러다닌다 

남의 불행에서 위로를 받았던 나의 불행이 

이제 남의 불행에게 위로가 되는 시간 

밤늦게 시간이 가득 든 검은 가방을 들고 

종착역에 내려도 

아무데도 전화할 데가 없다 

 (3) 내일 <봄비>에 깃든다 

어느날 

썩은 내 가슴을 

조금 파 보았다 

흙이 조금 남아 있었다 

그 흙에 

꽃씨를 심었다 


어느날 

꽃씨를 심은 내 가슴이 

너무 궁금해서 

조금 파보려고 하다가 

봄비가 와서 

그만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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