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제1장은 어기(語氣)나 내용의 기획성으로 보아 후대의 것으로 보입니다. 고증 여부와 상관없이 그런 판단에 의거, 맨 뒤로 돌렸습니다. 

2. 제2장의 본문입니다. 

仲尼曰 君子 中庸 小人 反中庸. 君子之中庸也 君子而時中,  小人之中庸也 小人而無忌憚也.

중니는 말씀하셨다. "군자는 중용을 하고 소인은 중용을 거꾸로 한다. 군자가 중용을 하는 것은 군자다우면서 때에 알맞게 하고, 소인이 중용을 거꾸로 하는 것은 소인스러우면서 꺼리는 것이 없다." (이하 이기동 역을 따름) 

3. 군자라는 용어는 익숙한 만큼 어려운 말입니다. 다 안다고 생각하는 게 함정이지요. 그래서 추상적이고 모호한 개념으로 둥둥 떠다니는 겁니다. 무엇보다 미리 전제된 개념이라는 인식이 일을 더욱 어렵게 만듭니다. 구체적 문맥에서 군자의 내포를 찾지 않고 막연한 카리스마를 부여함으로써 은연 중에 통치자나 지배집단과 등치시키는 상징조작에 넘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구체적 문맥에서 보면 중용을 하는 자가 군자입니다. 구체적 문맥을 보편적 지평으로 재빨리 전환하는 전술이 바로 주어와 술어의 위치를 바꾸는 것이지요. 중국인들이 전가의 보도로 쓰는 어법입니다. 검증 과정 없이 역명제를 연역법의 선두에 세우는 일 말입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보면 중용의 도를 실천하고서야 비로소 군자가 될 수 있기에 중니는 뒤에 "도가 아마 행해지지 않을 것이다."(제5장)라고 하여 군자가 '형성'될 수 없는 세상을 한탄하셨습니다. 바로 다음, 순 임금의 실천을 근거로 들며 "이로써 순이 되었다."(제6장) 즉 "중용을 실천함으로써 군자가 되었다."라고 갈파하셨습니다. 

이런 정황으로 미루어 보건대 군자는 순 임금의 실천을 따르는 공자 자신을 가리킵니다. 이는 마치 신약성서에서 예수께서 자신을 "인자"라고 하신 것과 같습니다. 제자들이 하느님을 보여달라고 하자 "나를 본 것이 곧 하느님을 본 것이다."라고 일갈하신 것과도 같습니다. 결국 이를 신성모독으로 간주한 모세종교 집단의 손에 예수가 죽었듯이 군자-자의식을 가진 공자는 끝내 제후들에게 버림을 받았습니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공자가 군자면 저들은 필연적으로 소인일 테니 말입니다.  

이런 맥락의 연장선에서 보면 군자란 공자를 대표단수로 하는 당시 사대부 계층 혁신 세력, 그 사상, 그 실천의 지향점을 가리키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오늘날 표현으로 바꾸면 "깨어 있는 지식 민중" 정도라고 할까요...지나친 비약이 아닌 까닭은 다시 제6장에 나옵니다. 순 임금이 "묻기를 좋아하고 평범한 말을 살피기를 좋아했다."는 사실 말입니다. 평범한 말이 무엇인 줄 안다면 군자를 이렇게 아래로부터, 그리고 집단적으로 자리매기는 데 이의를 달기 어려울 것입니다.  

4. 이렇듯 주희의 뜻과는 상관 없이 군자는 약육강식, 승자독식을 추구하는 기득권 특수층 세력에 맞서 새로운 사회를 만들어 가려는 혁신적, 저항적 주체를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군자의 사회적 행동의 강령인 중용은 약육강식, 승자독식에 맞서는 의미를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중용은 거의 모든 해석들이 답습하는 것처럼 명사적 어법으로 읽으면 안 됩니다. 명사적 이해에서는 中이  핵심 가치이고  그 中이 불변하는 법칙임을 천명하는 게 庸이라는 식으로 규정됩니다. 명사로서 中이 무엇이냐에 대해 많은 논의가 있지만 사실은 그럴수록 관념성만 깊어질 뿐입니다. 명사라는 게 그 본령상 추상적일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저는 중용 자체를 동사 구문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이 동사구문 전체가 군자의 사회행위를 드러내는 술어가 됩니다. 中은 "벗어나지 않는다"는 뜻을 지닌 동사입니다. 庸은 말 그대로 "평범하다"는 뜻입니다. 결국 중용은 "평범함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는 간결한 뜻을 가지게 되는 것이지요. 

약육강식, 승자독식 사회에서 강자, 승자가 되려면 극단적 프로세스를 선택하는 "특별함/특수함"을 무기로 지녀야 합니다. 뭇 제후가 공자에게 바란 것이 바로 이런 "특별한/특수한" 프로세스였고 그들이 그것을 통해 휘몰아가는 세상이 바로 춘추전국의 피바람이었지요.   

권력, 돈, 그리고 지식의 삼각동맹으로 사회이익을 독점하려고 준동하는 제후의 탐욕에 맞서 평범한 다수의 삶의 가치에 굳건히 닻을 내리려 했던 공자의 몸부림이 다름아닌 중용입니다. 그러면 평범한 다수의 가치인 그 "평범함"은 무엇일까요? 

평범하다는 것은 그저 그렇다는 뜻이 아니라 현실을 있는 그대로 산다는 뜻입니다.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산다는 것은 모순적 대칭구조로 이루어진 세계를 받아들인다는 것입니다.  그 대칭의 경계에서 부단히 모순의 "공존통합"을 위해 "거래"하는 삶이 바로 평범함입니다. 

거래는 상호 "관통과 흡수"를 전제합니다. 쌍무적 관계 형성입니다. 소통입니다. 제후적 일방통행은 설 자리가 없습니다. 쌍방향 소통을 하려면 자아의 中(가운데)을 버리고 "경계"로 나아가야 합니다. 기득권으로서 中을 버려야 비로소 중용을 이룬다는 역설이 여기에서 성립하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동사로서 中의 실질적 내용은 "끊임없이 경계로 나아간다"는 역동적 경향성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경계를 향해 나아가는 주체적 결단에서 늘 벗어나지 않는 다는 뜻입니다. 그 경계에는 자신과 동등한 주체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와 만나 일구어내는 "서로 주체성"(철학자 김상봉의 용어)의 세상이 바로 군자의 세상입니다. 군자의 세상은 거창하지도 특별하지도 않습니다. 상호 소통, 거래, 관통과 흡수가 일어나는 일상적 사건 그 자체입니다. 그것이 庸입니다. 그 庸을 바르고 아름다운 흐름으로 만드는 것이 中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종래 중용이해는 거꾸로 된 것이라 아니 할 수 없습니다. 주희와는 맞는지 모르나 공자와는 맞지 않는, 아니 우리와는 맞지 않는 식민주의적  해석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庸도 실천이요 中도 실천이니 둘 다 동사입니다. 그리고 그 핵심은 도리어 庸에 있습니다. 

5. 대칭구조로 된 현실세계에서 모순을 "공존통합"시키는 건강한 거래, 공정한 소통은 시의성(時中)이 생명입니다. 찰나 찰나 서로 주체의 상황은 변하므로 그에 알맞게 소통해야 합니다. 영원 불변하는 규범이란 논리적인 차원에서라면 모르되 현실적으로는 무의미한 것이지요. 죽어도 해야 한다, 죽어도 해서는 안 된다, 이런 강박적 기준은 제후의 가치입니다. 군자는 때에 맞추어 그저 올바르게 할 따름입니다. 

6. 중용의 공간적/공시적 지평은 서로주체성의 평등, 평화 사회이념으로 나타나고 시간적/통시적 매락은 투명한 혁신, 저항의 역사의식으로 나타납니다. 이런 이해야말로 평범한 사람, 즉 중용의 사람이 읽는 중용 사상이라고 생각합니다. 주희와 그 아류를 따르지 않는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7. 군자가 위와 같이 자리매겨진다면 소인은 당연히 "홀로주체성"에 입각해 분열적, 강박적으로 강자의 길, 승자의 길을 추구하는 저 춘추전국 시대의 제후 무리가 될 것입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주희류의 사람 또한 거기에 소속되겠지요. 더 나아가 오늘 우리를 살펴 본다면 천민자본주의, 신자유주의로 무장한 지배집단이 바로 소인입니다.  

우리나라로 범위를 좁혀 보겠습니다. 입만 열면 "국민을 위한다"면서 말끝마다 국민을 향한 훈계를 달고 사는, 아마도 속으로 자신들을 군자라고  생각할, 이른바 사회지도층이 바로 소인 집단임에 틀림없습니다. 저들은 스스로 중용한다고 함으로써 오히려 소인임을 만천하에 드러내고 있으니 소인답습니다. 저들은 부동산 투기, 주가조작, 이중국적 취득, 탈세, 병역 기피, 뇌물 수수, 위장 전입 등을 거리낌없이(無忌憚) 행하고도 부끄러움을 느끼지 못하니 가히 소인의 중용답습니다. 

되는 대로 지껄이고 닥치는 대로 말을 바꿉니다. 개인적 소신과 국가 경영을 혼동합니다. 사적 처지와 공적 지위를 구분하지 않습니다. 민주주의  한다면서 지역감정에 편승합니다. 양극화는 가속도가 붙고 서민경제는 파탄의 나락으로 떨어졌는데 거시 경제 지표 호전만 말합니다. 과연 기탄 없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우리사회를 이끌어가는 "특별한" 사람들입니다. 권력, 돈, 지식을 원없이 향유하는 이른바 셀러브리티(celebrity)입니다. 이들 눈에는 "평범한" 국민들이 한심하고 만만하게 보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허나 그들의 그 "특별함"이야말로 "無忌憚"과 동의어임을 어느 누가 부인할 것입니까? 

8. 군자는 늘 때에 알맞게 평범함에서 벗어나지 않음으로써 세상을 바로잡는 사람입니다. 그는 자신의 기득권적 중심을 버리고 스스로 경계로 나아가 타인과 소통함으로써 대동(大同) 세상을 만들어 갑니다. 그러므로 그의 영혼은 약육강식, 승자독식의 시대정신에 맞서는 투명한 날카로움으로 빛납니다. 군자의 영혼이야말로 원철학적 혁명이요, 기품있는  좌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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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isy 2011-02-16 13: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자 하나하나 몸에 부딪쳐오네요..눈물 글썽이며 읽고있습니다
-대구에서

bari_che 2011-02-20 10: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리 쉽지 않은 글인데 눈물을 글썽이며 읽으신다니 대단한 감수성을 지니신 분이군요. 더 세심하게 감각을 다듬어 써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