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제4장 본문입니다. 

 

子曰  道之不行也 我知之矣. 知者過之 愚者不及也.

道之不明也 我知之矣. 賢者過之 不肖者 不及也.

人莫不飮食也 鮮能知味也.

공자는 말씀하셨다. "도가 행해지지 않음을 나는 알겠다. 지혜로운 사람은 지나치고 어리석은 사람은 모자란다. 도가 밝아지지 않음을 나는 알겠다. 어진 사람은 지나치고 못난 사람은 모자란다. 사람이 마시고 먹지 않음이 없으나 그 맛을 아는 경우가 드물다."   
 

2. 중용의 도가 실행되기 어려운 이유는 이미 앞 장에서 암시한 바 있습니다. 최고의 경지이니 그것을 인정한다고 해서 대뜸 실천에 옮길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하지만 이 어려움을 신비적, 탈속적 차원에서 논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가령 불가나 선가의 공부 식이라면 처음부터 중용을 말할 까닭이 없어지고 말 것입니다. 아무리 어려워도 그것은 인간의 사회적,  문화적 삶 속에서 행해질 수밖에 없는, 또 그래야 하는 수준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므로 그 어려움은 중용 자체의 경지 문제라기보다는 우리가 형성하는 사회, 문화 관계의 문제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 근가가 제시됩니다.  

 

지혜로운, 또는 아는 사람은 지나치고 어리석은, 또는 모르는 사람은 모자란다고 공자께서 진단하셨습니다. 여기서 知者와 愚者가 대비된 것은 문자 그대로 보면 이상합니다. 우자가 모자란 것은 당연한데 어찌하여 지자는 지나친 것일까요? 참으로 아는 사람이라면 그럴 리 없지 않겠습니까?  

 

결국 여기 知者는 "이른바" 아는 사람이란 뜻이지요. 스스로 그리 여기는 사람이라고 보아도 별 무리는 없겠지만, 제 생각에는 사회적인 의미에서 知者로 여겨지는 집단으로 보는 게 더 나은 이해인 듯합니다. 요즘 잘 쓰는 말로 "사회 지도층"인 셈이지요. 권력, 돈, 지식을 통해 사회를 쥐락펴락하는 지배층이 바로 그들입니다.   

 

그런데 이들의 앎은 어리석은 자들과 선을 그은 상태에서 규정된 정치적 차원을 획득하게 됩니다. 당연히 어리석은 사람들, 즉 일반 백성은 "아랫것"이 되는 것이지요. 하여 그들은 입만 열면 백성을 훈계하려 듭니다. 우리사회에서 그 표본을 너무나 여실히 목격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런 앎은 소인의 앎입니다. 그와 선명한 대비를 이루는 군자의 앎, 곧 大知가 제6장에 나옵니다. 大知는 자신과 어리석은 사람을 구별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여기 知者는 사회를 분열시킴으로써 자신의 권위를 세우고 기득권을 유지하는 천박한 지배층, 즉 약육강식과 승자독식의 정글 법칙을 구가하는 집단인 것입니다.  

 

어리석은 사람 또한 이런 맥락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스스로 패배주의에 빠진 개인들을 의미할 수도 있겠지만 지배집단에서 배제된/분리된 사회정치적 존재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3. 중용의 도가 밝게 펼쳐지지 않는 까닭 또한 이치적으로 동일합니다. 이른바 어질다고 하는 사람은 지나치고 이른바 못났다고 하는 사람은 모자라기 때문입니다.  지자와 현자를 구태여 구분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知와 行을 연결하고 賢과 明을 연결한 것은 어찌 보면 엇갈린듯하지만 오히려 이론과 실천을 통일적으로 이해하는 실사구시적 관점이라고 이해하면 훨씬 선 굵은 읽기가 가능하겠지요.   

 

4. 그러면 지나치다는 것은 어떤 상태를 말하는 것일까요? 앞에서 본 바와 같이 "특별하다"는 뜻입니다. 특별하려면 극단적 프로세스를 써야 하고 극단적 프로세스를 쓰려면 소통을 거절해야 하므로 중용을 어긴 것입니다. 물론 그들은 소통을 거절하면서 "아랫것들"의 무지를 탓하겠지요.  

 

모자란다는 것은 어떤 상태를 말하는 것일까요? "특별한" 자들에게 소외, 억압당하는, 그래서 소통에서 제외된 상태를 뜻합니다. 또한 그것을 문제로 인식하지 못하는 상태를 말합니다.  결국 그 상태는 이른바 어리석고 못난 사람들로 하여금 자기 존재에 반하는 선택을 하도록 몰아갑니다. 지난 세월 동안 우리사회에서 수도 없이 목도한 바 있으니 더 이상 군더더기를 붙일 까닭이 없겠군요.  

 

5. 우리는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마시고 먹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단순히 생명 유지라는 목적을 위해  음식을 수단으로만 여긴다면 구태여 맛을 거론할 이유는 없습니다. 하지만 여기 분위기대로라면 맛과 그것을 아는 것은 중용의 도를 설명하는 데 중요한 구실을 한다고 봐야 합니다.    

 

마시고 먹을 때 그 음식의 맛을 알고, 모르는 것은 어떤 맥락에서 중용의 도를 설명하는 핵심 사례가 되는 것일까요? 아마도 맛에 탐닉하는 자들과 맛조차 모른 채 허겁지겁, 또는 딴 생각에 사로잡혀 마시고 먹는 자들의 극단을 염두에 두면서 한 말이었을 것입니다.  

 

"특별한" 자들은 자체생명인 음식의  고유한  향미를 넘어선 즐거움을 탐하므로 중용을 어겼습니다. "아랫것"들은 맛은커녕  자기 연명에 급급하여 생명인 음식의 가치로움에 미치지 못했습니다.  둘 다 음식의 형태로 마주선 생명과 소통하지 못했습니다.    

 

수운 선생의 가르침 식으로 말한다면 음식은 하늘입니다. 하늘이 하늘을 기르는 거룩한 사건이 마시고 먹는 것입니다. 이런 어법대로라면 음식의 맛을 아는 것은 바로 그 거룩함을 알아차리는 일입니다. 마시고 먹는 사건의 거룩함은 유미주의와 실용주의를 가로지르는 경계에서 피는 꽃입니다. 

 

6. 마시고 먹는 일상의 사소한(!) 일을 예시하신 공자의 의중은 무엇일까요? 길고 깊게 수런거릴 일 없겠지요. 중용 자체가 평범함에서 벗어나지 않는 것이니 그렇고, 그 평범함이 극명하게 드러나는 시공간이 바로 사소한 일상이니까 그렇습니다. 사소함은 과소평가된 위대함이란 사실을 간파한 통찰이 숨 쉬고 있습니다.  

 

마시고 먹는 일은 관통과 흡수로 요약되는 중용의 본령이 가장 구체적 현실로 드러나는 장(場)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일(놀이)과 잠, 대화, 性, 호흡 등도 동일한 중용 도량(道場)임에 틀림없습니다. 사실 눈에 보이는 이런 일상의 거룩함에 터 잡지 않은 가치, 즉 눈에 보이지 않는 이념, 사상, 종교 따위의 이른바 거룩함은 죄다 뜬 구름일 뿐입니다. 그야말로 사소한 예 하나로 大小, 聖俗 이분법이 최종 부도 처리됩니다. 知愚, 賢不肖 이분법은 더 이상 숨 쉴 수 없습니다.     

 

7. 그러나 세상은 이분법 세상입니다. 공자의 절망, 중용의 좌절은 바로 세상을 둘로 갈라야 이익을 극대화할 수 있는 "특별한" 소수 집단이 권력, 돈, 지식을 독식한 데서 연유합니다. 그들의 지나친 독단은 바야흐로 도를 넘어섰습니다. 공자의 시대는 물론이거니와 오늘 우리 앞에서도 그러합니다.  

 

백성은 죽어나가는데 연일 웃는 얼굴 아니면 짐짓 엄숙한 얼굴로 대문짝만 하게  신문, TV에 나는 사람들이  나라를 '말아먹고' 있는 장본인인데 아랑곳하지 않고 그들은 도리어 백성에게 끊임없이 뭔가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복종이든, 희생이든, 표든.......닥치는 대로 취하려 합니다. 음식 맛 아닌 제 입맛에 맞추어 거리낌 없이 욕설을 퍼부으면서 독식사회를 구축해 갑니다. 걸핏하면 편향, 변덕, 무지를 들먹이며 백성을 꾸짖습니다. 자신들만이 중용의 도를 실천한다고 스스로 속이면서 이 순간도 세상을 갈라놓는 일에 몰두하고 있습니다. 지금 여기서 무엇을 해야 참된 중용의 실천일까요? 어찌 살아야 군자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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