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고전을 읽는 까닭은
삶에서 어떻게 시공의 질서와 변화가 이루어지는가,
어찌하면 그 삶의 참된 주체로 설 수 있는가를 탐색하기 위함입니다.
어떤 고전이든 숱한 눈길을 거치며
세월보다 더 많은 의미군을 끌어안고 있겠지만
오늘 나의 눈으로 새롭게 읽지 않는 한 화석에 지나지 않습니다.
따라서 무엇을 읽느냐 하는 문제보다는
어떻게 읽느냐 하는 문제가 더 중요하겠지요.
하여 무엇부터 읽을까 그리 오래 망설일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와 매우 익숙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멀리 있는
유가의 사서삼경 중 <중용>을 한 번 읽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저는 유가와 그 경전에 대해 전문적으로 공부한 바 없습니다.
홀로 사서를 서너 번 읽고, 한의대 예과 시간에 맹자를 부분적으로 공부한 게 전부입니다.
그러나 귀밑머리에 서리 내리도록 산 인생의 날들을 믿고
무모하나마 고전 여행을 떠나보려 합니다.
* * *
<중용>이란 텍스트는 본디 <예기>에 속해 있었는데 남송의 주희가 독립시켰다고 합니다. 주희는 <중용> 뿐만 아니라 <대학>도 그리 했고, 나아가 유가 경전 전체를 재구성하여 이른바 사서삼경이란 개념 자체를 만들었습니다. 결국 오늘날 우리가 접하는 최종 텍스트로서 유가 경전 체계는 주희 한 사람의 편집작품입니다.
물론 내용은 저자로 가탁된 사람의 직접 언술도 포함하겠지만 후대의 가필과 수정도 있습니다. 고대의 책 쓰기는 지금과 전혀 달라 단독 저자가 완작을 하는 경우는 없습니다. 이를테면 사회역사적 집단 창작이지요. 그러므로 깊이 있는 본문 비평이 필요한 것입니다. 일점일획이 다 성현 말씀이다, 이래버리면 안된다는 것이지요.
이런 차원에서 본다면 오늘 우리의 안목으로 사서삼경을 재구성할 수도 있습니다. 주희에게 있던 권한(?)이 우리에게는 없다면 사서삼경은 종교적 권위를 획득하게 되는데 이보다 더 불행한 일은 없겠지요. 체계 전체를 문제삼지 않더라도 부분적인 구성이나 의미 해석에서는 이미 수도 없이 재구성이 이루어져 왔습니다.
내용이든 형식이든 끊임없이 흔들리며 시대마다 새롭게 태어나야 오히려 참된 권위를 지닌 고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실 주희는 그 본보기에 지나지 않는 것이지요. 주희만큼의 치열성이 있다면 누구라도 사서삼경을 우리의 문제의식에 맞게 재구성, 편집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주희가 활동했던 남송 시대의 사대부에게는 크게 두 가지 화두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통치 이념으로서 정통유가의 헤게모니를 확립하는 것입니다. 특히 불교 사상의 도전에 직면한 유가의 위기의식은 주희에게서 아주 노골적으로 드러난 바 있습니다.
다른 하나는 이른바 오랑캐에게 수모를 당하고 남으로 밀려난 한(漢)족의 자존심을 회복하는 것이었습니다. 중화 이념의 확립을 통해 중원 패권의 옛 영광을 대체 복원하는 것입니다. 이 두 흐름을 한 데로 묶는 정치경제학적 연결고리가 바로 중산층 사대부의 존재였습니다.
그래서 주희는 한족 주체의 중국 전통 질서와 체계를 중심으로 모든 가치를 통합, 안정화하는 명사적 어법으로 텍스트를 재구성하고 읽어냈습니다. 이런 접근법으로 그가 처한 시대의 난관을 돌파했다는 점에서 주희는 참으로 탁월한 존재인 것입니다.
그러나 주희는 주희의 탁월함으로 빛납니다. 우리는 우리의 탁월함을 향해 나아가야 합니다. 오늘날 한국사회에서 과연 주희의 어떤 관점이 유효할 수 있을까요? 제 소견에는 우리 사회가 주희와 너무나도 판이한 과제를 안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따라서 그만큼 다른 각도에서 읽어야 합니다. 이제 그 읽기를 시작해 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