山是山 水是水

山不是山 水不是水

山是水 水是山

山是山 水是水

 

청원 유신 선사 선화다. 첫 문장과 마지막 문장이 같다. 겉보기만이 아니다. 익숙한 통속 논리에서 볼 때 부정을 부정하면 긍정이 되므로 함의 또한 같다고 할 법하다. 청원 유신이 어찌 통속 논리 따위를 구사했겠나. 부정을 부정하면 긍정이 되지 않는다. 부정(否定)을 부정(否定)하면 부정(不定:uncertainty)이 된다. 부정(不定)은 모순 너머 역설 품은 불확정·불확실 창발 네트워킹이다. 신성하고 신비한 실재다.

 

고대 인류 삶은 녹색이었다(山是山 水是水). 타락(스티브 테일러) 또는 분리(찰스 아이젠스타인) 이후 인류 삶은 백색이다(山不是山 水不是水 山是水 水是山). 제국 백색문명 폐해를 극복하는 일은 그 모두를 폐기하는 일이 아니다. 제국 백색문명이 저지른 실패는 세계 진실 극히 일부, 이를테면 1/5 이하에 전부를 환원한 짓이므로 애써 밝혀낸 지식과 지혜를 없애고 고대 녹색을 복원하는 일로 솔루션을 삼아서는 안 된다. 그럴 수도, 그럴 필요도 없다. 백색 지혜를 거룩하게 쓰는 녹색 삶을 살아야 한다. 백색 품은 녹색, 이 거룩한 삶은 연두색이다. 연두는 영롱한 장엄 녹색이다(山是山 水是水).

 

연두 의학을 상상한다. 제국 백색문명을 극복하는 과업 본성은 치유다. 기왕 펼쳐진 의료독재 사회에서 문어발을 거둬들이는 일보다 더 근원적인 일은 치유 개념, 주체, 대상을 바로잡는 일이다. 제국 백색문명 탓에 병든 존재는 백색 인간에 국한하지 않는다. 수많은 비인간 생명, 비생명이 왜곡되고 변형되었다. 인간 치료 너머 치유로 번져가지 않으면 안 된다. 물론 인간이 결국은 치유자라는 우월의식에서가 아니라 결자해지 이치를 따라서다. 그러므로 무엇보다 자연을 치유 주체로 인식하는 일이 필수적이다. 인간적 방식으로 뭘 더하려 하지 말고 다시는 손대지 말아야 할 일이 분명히 있다. 숲에’, 숲인 바다에믿고 맡겨야 하는 일이 훨씬 많을 수 있음을 겸허히 인정해야 한다. 숲이, 숲인 바다가 제국의 반대말이다. 반제국주의 통일전선에서 주축은 인간이 아니라 누룩곰팡이며 버드나무며 미역이다. 그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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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길 걸을 때 돌탑을 보지 못하는 일은 거의 없다. 비단 절집 인근이 아니더라도 있을 만한 곳에는 어김없이 돌탑이 있다. 돌탑을 보며 종교적 의미를 떠올리지 않기란 힘들다. 자그만 돌 하나를 올리며 의식적으로 무슨 소원을 빌지 않더라도 무심코나마 어떤 바람을 싣기 마련이다. 물론 그 바람이 이루어지리라고 확신하는 사람도 있을 리 없다. 그러고 보면 인간에게 주술은 본성에 새겨진 무엇인 듯하다.

 

한 걸음 물러나서 생각해본다. 돌탑 쌓는 목적이 종교성에 국한될까? 합리적으로 추정하면 길에 널린 돌들을 치움으로써 보행에 안전과 편의를 더하려 함이 기본적이고 실질적인 동기라고 할 수 있다. 그다음에 종교적으로 의미가 부여돼 제의 위상으로 굳어졌다고 이해하면 더욱 그럴듯하다. 이성 환원 냄새가 나지만 태초부터 기획한 제의란 존재하지 않으므로 진실에 부합하는 면이 적지 않다고 생각한다.

 

숲에서 길 잃는 일을 자주 겪으면서 한 가지 다른 생각이 떠올랐다. 인적이 지워진 숲을 헤매다 작은 돌탑 또는 그 흔적을 발견하면 바로 그 순간 인적을 복원하는 육감이 생긴다는 사실에서 비롯한 변화다. 돌탑은 사람이 지나갔다는, 또는 지나가고 있다는, 또는 지나가도 된다는 표지로 작용한다. 길은 길로 이어진다는 사실을 더하면 돌탑에는 이정표 의미까지도 얹을 수 있다. 돌 위에 놓인 돌은 비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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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듣는 소리다. 불가 큰 선지식들이라며 나와 한결같이 떠들어대는 저 뜨르르한 참 나말이다. 그 소리 하도 듣기 가소롭기에 나는 십 년 전 이렇게 적었다.

 

대승의 큰 지식이

참 나를 찾으라니

땡초는 나를 보고

중생은 남을 본다

 

얼마 뒤 한 걸음 더 나아갔다.

 

대승의 큰 지식은 참 나를 찾으라네

찾아서 찾아지는 참 나가 어디 있나

 

본디 나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주장이었다. 선객 아닌 사람을 향해 나는 이런 소식을 전해준다. 멀린 셸드레이크 작은 것들이 만든 거대한 세계165쪽에 있는 말이다.

 

생명을 공생 관점에서 본 어느 독창적 논문 저자들은 이 점에 대해 분명한 견해를 밝혔다. 그들은 이렇게 선언했다.

 

개체는 존재했던 적이 없습니다. 우리는 모두 지의류(地衣類)입니다.”(<A symbiotic view of life: we have never been individuals>(Gilbert et al. 2012)>

 

지의류는 광합성을 하지 못하는 대신 유기 영양 섭취에 능한 곰팡이(자낭균+담자균)가 그 반대인 말(조류) 또는 시아노박테리아를 세포 외 공생 관계로 이끌어 형성된 팡이실이 생명체다. 이 이치는 그대로 인간에게 적용된다. 인간 장 점막 바깥에서 살아가는 미소 생명과 인간이 더불어 이루어가는 생명 체계는 말 그대로 지의류다. 이 열린 체계를 여실히 말하면 인간도 미소 생명도 가능 차원이 아니라 긍부(肯否) 차원에서 개체일 수 없다. 나는 없다. 참 나도 없다.

 

인간이 나라는 의식을 지닐 수는 있다. 물론 그런지 이미 오래다. 그 나 개념은 내 뇌가 독자적으로 만들지 않았다. 그 개념 열 중 아홉은 장 점막 바깥에서 공생하고 있는 미소 생명들이 만들어주었다. 나라는 개념 자체가 나 아닌 존재에 대부분 힘입고 있는 주제에 무슨 참 나를 운운하는가. 끝내 그 말을 버리지 못하겠다면 를 복수 명사라고 규정해야 한다.

 

가 복수 명사면 제국이 무너진다. 제국이 무너지면 그 폐허에서 팡이실이 사건을 복원할 수 있다. 이 복원 운동이 녹색 나운동이다. 녹색 나는 아름다운 둘이다. 그 둘이 비인간 생명들로 이루어질 수는 있지만 인간들로만 이루어질 수는 없다. 인간이 위대하다 제아무리 유세 떨어도 유체 이탈 화법에 지나지 않는다. 이 깨침으로 백색 자아를 관통해야 겸손히 엎드려 녹색 세계에서 더불어 살아갈 자격을 얻는다. 부디 해탈하시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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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악산 계곡 가운데 염두에 두었으나 들어가지 못한 곳이 안양시 만안구 석수1동 절터골 계곡과 염불암 계곡이다. 오늘(2013. 9. 17.)은 이곳으로 간다. 시간이 맞는다면 삼성천 건너 비봉산(295m) 허리께 재를 이루는 소곡도 들어갈 생각이다.

 

여느 날보다 조금 일찍 출발해 절터골 계곡을 향한다. 스마트폰 지도를 보며 가는데 숲에서나 도시에서나 그 지도는 그리 세밀하지도 친절하지도 않아 여러 번 길을 잘못 든다. 계곡 입구에서조차 헤맨다그러려니 하고 헤매면서 간다.

 

계곡 풍경이 아연 좋다. 전날 비가 내려서인지 물소리가 기세 좋게 들려온다. 계곡 길은 물과 살짝 거리를 둔 사면을 따라가는데 이 길 또한 소곡을 이루고 있다. 그래서 길도 작은 도랑이다. 군데군데 길을 가로지르는 소곡이 주름져 도랑끼리 수시로 교차한다. 나는 아주 자주 그 작은 물에 손을 맞춘다. 기분이 탱탱하게 맑아진다. 계곡 물소리가 거의 능선에 이르기까지 계속 들려와 기분을 더 맑게 해준다. 처음 겪는 일이다.



 

이리도 작은 계곡이 이렇게나 아금박스럽다니. 능선길을 걸으면서도 염불암 계곡으로 들어서서도 지나온 계곡 향기가 심신에 묻어 있어 사라지지 않는다. 염불암 계곡은 예상한 대로 포장도로와 소란스러운 인파가 풍경을 일그러뜨린다.

 

물소리 시원한 삼성천으로 내려와 식당을 찾는다. 단체 손님 받는 곳들이라 모두 손을 젓는다. 한참 걸어서 겨우 해장국 파는 식당에 닿는다. 안주인이 돈 안 되는손님을 웃는 얼굴로 맞아준다. 맛있게 먹고 명함 한 장 달래서 챙겨 나온다.

 

이번에도 엉성한 지도에 당하다가 가까스로 안양동에서 비산동으로 넘어가는 재넘이 계곡 진입로를 찾아낸다. 아주 좁은 길이지만 특이한 풍경을 연출한다. 능선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나지막한 둔덕인데 좌우 조그만 골짜기에서 물소리가 화음으로 들려온다. 더 깊은 골짜기 물소리가 먼저 끊기고 어디가 시작인지도 알 수 없는 얕은 골짜기 물소리가 거의 잿마루까지 들려온다. 숲이 품은 진실은 언제나 내 상상 저 너머에 있다.

 

이로써 관악산 계곡 16곳을 들고 났다. 이만하면 어디 지성소 삼을만한 데가 나올 법도 하련만 여전히 마음이 허공에 떠 있다. 물론 오늘 지나온 절터골 계곡에 마음이 심하게 끌리기는 하지만 접근성이 떨어진다. 불편은 단념을 부른다.

 

아무래도 가까운 다른 계곡에 더 들어가야겠다. 서울 둘레길 구간 중에 무당골이 있다. 거기서부터 결 지는 작디작은 계곡들을 마지막으로 살피기로 한다. 뭐 꼭 그래야 한다기보다는 거기서 더 갈 곳은 없으니, 숲이 말을 건네리라 믿어서다.

 

나는 반제국주의 전선에서 꼭 똑 숲 군대 척후병으로 살아갈 운명인가 보다. 도시와 인간하고는 도무지 연대할 수가 없다. 저들이 쏟아내는 거대한 강전(强電)은 내게 생명력으로 작동하지 않는다. 숲이 전하는 소소한 약전이 나를 살아 퍼덕이게 만든다. 다른 사람에게는 몰라도 내게 숲은 시시각각 나를 낳아주는 어머니시다. 어머니 묵묵함이 일깨울 때만 나는 천둥 같은 전사가 된다. 나무와 풀과 어깨 걸고 진군할 때만 나는 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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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시우행 2023-09-20 05:2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감사합니다. 일행들과 관악산 등산 다닐 때가 생각나네요.

bari_che 2023-09-20 07:55   좋아요 0 | URL
오, 관악과 인연 있으시군요~
고맙습니다.^^
 


 

찰스 아이젠스타인 이야기를 끝으로 한다. 신성한 경제학의 시대가 내게 준 마지막 선물은 바로 이 말이다.

 

예술가는 그냥 일을 받아들이는 사람이다. 일을 신성하게 여기는 태도는 곧 일을 받아들이고 그 도구가 되는 태도다. 좀 더 정확하고 다소 역설적으로 말하자면, 자기 창조물에 도구가 되는 태도다. 창조물이 물질적이든 인간적이든 사회적이든 이미 존재하나 아직 구현되지 않은 무언가를 위해 자신을 아낌없이 바치는 태도다. 예술가가 자기 작품에 경외심을 가지는 까닭이 바로 그 때문이다.”(447)

 

살면서 입버릇처럼 내가 했던 말이 다시 태어난다면 예술 할 거다.’. 예술이란 문학, 음악, 미술, 연극들을 말함은 물론이다. 예술적 감수성을 지녔다는 뜻뿐만이 아니다. 삶을 대하는 자세 자체가 다른 일을 해서 대박나기와는 거리가 멀다는 자각에서 발원한다. 아픈 사람 치료하는 일을 하면서도 늘 예술에 대한 근원적 그리움이 있었다. 이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치료행위에 예술성을 부여하는 정도였다. 딱 여기까지가 내 수준이었다.

 

전적이지는 않더라도 내가 주체적인 어떤 작위로 예술 치료행위를 한다고 생각했다. 아픈 사람과 함께 아픔과 삶을 숙의하는 과정에서도 자기 창조물에 도구가 되는 태도가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이미 존재하나 아직 구현되지 않은 무언가를 위해 자신을 아낌없이 바치는태도가 아니었다. 나는 내 일을 신성하게 여기는 태도에 다다르기 전에 예술가 정체성에 다다랐다. 신이 가는 길을 가지 않으면서 스스로 신이 앉는 자리에 앉았다.

 

일을 받아들이고 그 도구가 되는 태도는 마치 나사렛 예수가 골고다 길을 받아들이고 기꺼이 십자가를 진 일과 같다. “자기 작품에 경외심을 가지는일은 빈 무덤 앞에서 막달라 마리아에게 나를 만지지 마라.’ 한 일과 같다. 치료, 그것이 내게 왔을(It came to me) , 나는 의자로서 받아들이고 도구가 되면 그만이다. 나는 죽어 마지막 거점조차 지우는 일로 경외를 표하면 그만이다. 의자는 치료 속으로 배어들고, 아픈 사람 변화된 삶에서 배어나는 일로 그만이다. 이 사건이 치료 예술이다. 예술이 아니면 반제국주의 녹색의학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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