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듣는 소리다. 불가 큰 선지식들이라며 나와 한결같이 떠들어대는 저 뜨르르한 참 나말이다. 그 소리 하도 듣기 가소롭기에 나는 십 년 전 이렇게 적었다.

 

대승의 큰 지식이

참 나를 찾으라니

땡초는 나를 보고

중생은 남을 본다

 

얼마 뒤 한 걸음 더 나아갔다.

 

대승의 큰 지식은 참 나를 찾으라네

찾아서 찾아지는 참 나가 어디 있나

 

본디 나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주장이었다. 선객 아닌 사람을 향해 나는 이런 소식을 전해준다. 멀린 셸드레이크 작은 것들이 만든 거대한 세계165쪽에 있는 말이다.

 

생명을 공생 관점에서 본 어느 독창적 논문 저자들은 이 점에 대해 분명한 견해를 밝혔다. 그들은 이렇게 선언했다.

 

개체는 존재했던 적이 없습니다. 우리는 모두 지의류(地衣類)입니다.”(<A symbiotic view of life: we have never been individuals>(Gilbert et al. 2012)>

 

지의류는 광합성을 하지 못하는 대신 유기 영양 섭취에 능한 곰팡이(자낭균+담자균)가 그 반대인 말(조류) 또는 시아노박테리아를 세포 외 공생 관계로 이끌어 형성된 팡이실이 생명체다. 이 이치는 그대로 인간에게 적용된다. 인간 장 점막 바깥에서 살아가는 미소 생명과 인간이 더불어 이루어가는 생명 체계는 말 그대로 지의류다. 이 열린 체계를 여실히 말하면 인간도 미소 생명도 가능 차원이 아니라 긍부(肯否) 차원에서 개체일 수 없다. 나는 없다. 참 나도 없다.

 

인간이 나라는 의식을 지닐 수는 있다. 물론 그런지 이미 오래다. 그 나 개념은 내 뇌가 독자적으로 만들지 않았다. 그 개념 열 중 아홉은 장 점막 바깥에서 공생하고 있는 미소 생명들이 만들어주었다. 나라는 개념 자체가 나 아닌 존재에 대부분 힘입고 있는 주제에 무슨 참 나를 운운하는가. 끝내 그 말을 버리지 못하겠다면 를 복수 명사라고 규정해야 한다.

 

가 복수 명사면 제국이 무너진다. 제국이 무너지면 그 폐허에서 팡이실이 사건을 복원할 수 있다. 이 복원 운동이 녹색 나운동이다. 녹색 나는 아름다운 둘이다. 그 둘이 비인간 생명들로 이루어질 수는 있지만 인간들로만 이루어질 수는 없다. 인간이 위대하다 제아무리 유세 떨어도 유체 이탈 화법에 지나지 않는다. 이 깨침으로 백색 자아를 관통해야 겸손히 엎드려 녹색 세계에서 더불어 살아갈 자격을 얻는다. 부디 해탈하시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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