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별다른 생각 더 하지 않고 그냥 광장으로 간다. 집회 시각을 염두에 두고 여느 때처럼 김치찌개 집으로 향한다. 늘 혼자라서 우그러진 구석 자리에 앉는다. 지난주 건너편 구나방이 앉았던 자리에 오늘도 몇이 앉아 밥을 먹고 있다. 조용하다. 얘기 소리가 무슨 내용인지 알 수 없을 만큼 나지막이 두런두런 들려올 뿐이다. 내가 한창 식사를 하는 중에 그 일행이 일어서 나간다. 누군가 주인장을 보며 역시 나지막이 말한다. “나라 구합시다.”

 

손이 사라진 직후 식당 직원 하나가 말한다. “우리는 못 구하지.” 내가 짐짓 궁금증을 일으켜 주인장에게 묻는다. “나라 구하자는 말이 무슨 뜻입니까?” 주인장이 시큰둥하게 답한다. “낸들 아나요.” 더는 말을 섞을 수 없다. 촛불 대행진 참여자일 가능성이 큰데 그동안 이런 사람들을 수없이 겪었을 광화문 사람들은 자신과 다른 부류로 여기고 있는 듯하다. 개독 패거리에 대해서도 같은 반응을 보이려나. 글쎄, 이런 의문 자체가 부질없다 싶다.

 

집회는 최근 한국인 체포 감금 사태 때문에 반제국주의 외침으로 크게 쏠려 있다. 때마침 남미 활동가가 연대 발언하는 중이다. 세부 상황이 사뭇 다르겠지만 제국 USA가 저지르는 깡패짓에 피해당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남미 여러 나라와 우리는 같다. 함께 손잡아야 할 이유가 충분하다. 일반인에게 익숙하지도 않은 베네수엘라에서 여기까지 날아왔으니 말이다. ‘베네수엘라 사람광화문 사람보다 얼마나 더 가까운 거리에 있어서 여기 왔나.


 

연대란 말을 들으면 운동권을 떠올리며 무슨 부가된 행위처럼 여기지만 연대는 문화가 아니다. 자연이며 본성이다. 포유류 생존 전략이자 무기다. 연대 없이 살아갈 수 있다는 자신감은 파충류에게나 가당하다. 먹고사느라 정치에 신경 쓸 여유가 없다는 말은 실상 자기기만이다. 예술가는 정치 백치일 수밖에 없다는 말과 동일하다. 정치가 바로 먹고사는 문제 자체며 살벌한 예술 행동 본진인데 그 무슨 맹랑한 소린가. 위장된 자학과 자만일 뿐이다.

 

정색하고 집회 참가자 한 사람 한 사람 얼굴과 행색을 살핀다. 도저히 이런 데 나올 수 없는 얼굴과 행색들이 각막을 가르고 들이닥친다. 따지고 보면 내 얼굴 내 행색은 뭐 그리 다르겠나. 다들 시난고난 앓으면서 그나마 눈 마주치는 길을 찾아 더듬더듬 오지 않았나. 누군들 여유 있어 능력 좋아 열정 뻗쳐 의분 넘쳐 여기 왔겠나. 장삼이사 무지렁이들이 살고 싶어서 종주먹 불끈 쥐고 오늘을 기다리지 않았나. 그렇게 살아서 연대가 연애일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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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특별시 성북구 정릉동에 있는 정릉은 조선 태조 계비인 신덕왕후를 모신 조선 최초 능이다. 정릉은 본디 중구 정동에 있었다. 부부 사이가 남달랐던 태조는 신덕왕후가 승하하자 법을 어겨가면서까지 능을 사대문 안에 조성하고 수시로 드나들며 애틋함과 그리움을 표했다. 생전에 신덕왕후 정적이었던 이방원이 왕위에 오르자 곧 정릉을 지금 자리로 옮겨 폐릉(廢陵) 상태로 만들었다. 후대 송시열 상소로 복권되어 오늘날에 이르렀다.

 

이런 역사를 알고 있었던 나는 정릉에 각별한 애정을 지닌 채 60년 동안 수도 없이 드나들었다. 최근 어떤 글을 읽다가 본디 정릉이 덕수궁 안 어디에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실제 장소가 부쩍 궁금해졌다. 다른 자료를 찾아보니 지금 미국대사 관저쯤이라는 이야기가 있었다. 나는 직접 거기로 찾아가 보기로 작정했다. 토요일과 일요일 오후 시간에 덕수궁길을 서로 반대 방향으로 걸어서 두루 살폈다. 마침내 한 장소를 특정했다.

 

덕수궁 돈덕전과 중명전 사이 미국대사 관저는 덕수궁길을 가로지르는 나지막한 능선 위에 있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능선 정상에서 남서쪽 아래로 살짝 내려온 곳이다. 그 반대편 북동쪽 아래로 살짝 내려온 곳은 그 방향에서 직선으로 경복궁이 보인다. 이를테면 신덕왕후의 시선이다. 경복궁에서 서남쪽을 보아 가장 가까운 산 능선 바로 아래 아늑한 영면 터전이 보인다. 이를테면 태조의 시선이다. 바로 여기가 본디 정릉 자리다.


덕수궁길-고개마루 직전 오른쪽에 돈덕전, 왼쪽에 미국대사 관저가 보인다


신덕왕후의 시선


태조의 시선

 

태조의 시선을 기준 삼고 광화문을 나서 세종대로를 따라가다가 오른쪽으로 틀어 새문안로로 들어선다. 조금 가다가 왼쪽 덕수궁길로 접어들어 완만한 산길을 오른다. 능선을 넘어가기 직전에 넓고 안온하게 들어앉은 정릉이 한눈에 들어온다. 이 길이 바로 신덕왕후를 찾아오던 태조의 길이다. “태조의 길은 명성황후를 잃고 러시아 공사관으로 향했던 고종의 길에 상응해 역사가 지닌 절묘한 서사성을 의식하며 내가 붙인 이름이다.


태조의 길


정릉 본디 자리-신덕왕후와 태조가 처음 만난 버들잎 서사를 떠올리게 하는 버드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하필 두 길은 거의 직각을 이루며 맞닿는다. 조선을 일으킨 왕이 왕후를 잃고 걷던 길과 조선을 사실상 무너뜨린 왕이 왕후를 잃고 걷던 길이 이렇게 만난다. 태조의 길은 흥륭(興隆) 시대를 열었고, 고종의 길은 멸망으로 이어졌다. 나는 오늘 태조의 길을 따라 고종의 길을 가로지른다. 토착 왜구들이 다시 한번 나라를 팔아먹으려 총궐기 반란을 일으킨 통렬한 세월을 사는 동안 이 길은 내게 인생 순례길일 수밖에 없다. 오늘이 첫걸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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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관음도/김홍도


나는 그리 살가운 사람이 못되기에 그리도 살가운 사람을 꿈꾸지만, 여전히 나는 그리 살갑지 못한 사람을 한 모퉁이 단 위에 모셔두고 살아갈 작정이다. 이는 살갑다는 인간적 범주 그 너머 생명과 비생명에 대해 예의를 갖추기 위해서다. 물론 내 살가움이 그들에게 어떻게 아름답게 번역되어 전달될지 안다면 이 작정은 취소다.

 

거의 한평생 나는 스스로 사람을 아껴서 사람이 된 나무로 여기며 살아왔다. 하필 그 나무가 버드나무다. 버드나무는 나무를 사랑해서 나무가 된 물이라 여겨진다. 그래서 결국 나는 그렇게 나를 물로 여기면서 살아간다. 내가 버드나무며 물일 때, 내 살가움이란 무엇일까? 버드나무와 물에 의인법을 쓰면 모독이다; 의연법 며리.

 

인간에게 살가움은 있으면 더 좋고 없어도 그만인 무엇인가? 만일 그렇다면 나무나 물에는 존재할 수 없다. 나무나 물에는 그런 구분 자체가 성립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살가움이 만일 인간 본성에 속하거나 참여한다면 나무나 물에도 존재할 수 있다. 결국 나무나 물 본성을 번역해야 살가움 실재가 드러나지, 그 반대는 아니다.

 

나무 본성 요체는 팡이실이(네트워킹)고 물 본성 요체는 녹여 담기(융해). 내가 인간으로서 인간에게 행하는 살가움은 그러므로 인간 생명 팡이실이(네트워킹) 자체 또는 거기 참여하는 방편이며, 내 삶에 타자를 녹여 담기(융해) 자체 또는 거기 참여하는 방편이다. 나무나 물 본성을 인간 언행으로 번역한 한 양태가 살가움이다.

 

단도직입. 내 작정은 취소다. 내가 나무와 물에 인간적 범주를 강요해서는 안 되기 때문에 그리 살갑지 못한 사람을 한 모퉁이 단 위에 모셔두고 살아가기로 작정했지만 내 예의가 도리어 주제넘은 짓임이 드러났다. 나무가 살가우며 물이 살갑다. 내 생명이 거기서 왔으니 나 또한 의당 살가워야 한다. “천지불인(天地不仁)”은 몽매다.

 

의연법(擬然法)은 의인법을 뒤집은 내 표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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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리 살가운 사람이 아니다. 아니다. 나는 그리 살가운 사람이 못 된다. 왜일까?

최근 나는 내 영혼에 금가는 감각-이 감각은 후·미·촉·청·시각과 무관한 제6감-을 미세하나 예리하게 느끼면서 스스로 물었다: 나는 살가운 사람인가? 뜻밖에 한 치 망설임 없이 나는 아니라고 스스로 대답했다. 그런데 왜 이 진실에 철저히 유념하지 않은 채 죽음이 30cm 이내 거리에 있는 나이까지 살아왔을까? 앞으로도 살가움은 남 일로 남아 있을 수밖에 없을까?

나를 가장 잘 아는 주위 사람들은 내 질문과 대답을 이상하게 여길는지도 모른다. 특히 내게 마음 치료를 받은 사람이나 가까운 제자들은 선생님은 단정하면서도 다정한 분이라고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을 테니 말이다. 물론 그들 인식은 맞다. 치료자나 선생으로서는 그렇다. 어떤 특정 목적을 계기로 맺어진 두터운 인연에서 내가 보이는 태도는 근본과 기본에서 살갑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이렇다: 어떤 목적에 걸맞은 특화된 인격에서 배어나는 언행은 살갑다.

이런 살가움은 내 정체성 작은 일부일 뿐이다. 특정 목적 넘어 전인격, 그러니까 자연으로서 나는 살가운 사람이 아니다. 살가움이란 근원적으로 시생대 학습에서 형성되는 감성을 밑절미로 하는 태도며 능력이다. 그러나 내 시생대는 어머니하고 접촉이 거의 되지 않았고, 아버지가 온전히 부재한 시기였다; 살가움을 배울 기회가 거의 송두리째 사라진 시기였다. 어머니는 유년기에 완전히 사라졌고, 아버지는 차갑고 무서운 존재로 소년기 10년을 결빙시켰다.

아기답게 아이답게 부모한테서 살가움을 익히고 주고받지 못한 채 앞당겨 어른이 돼버린 나는 무뚝뚝한 점잖음을 탑재한 어른으로 살아왔다. 실제로 너덧 살 무렵 내 별명이 “영감”이었다. 결정적 이유는 혼잣말이었다. 사실 혼잣말이라기보다는 늘 마주하는 풀과 나무가 이야기 대상이었다. 그렇게 혼자 산들로 냇가로 쏘다니며 놀았다. 늘 뒷짐을 지고 다녔으며 보채는 일도 뭘 달라는 일도 없었다. 결핍, 특히 사람, 무엇보다 부모 결핍을 묵묵히 무심히 견뎌냈다.

내게 살가움이 한 톨이라도 있다면, 필경 그리움이 응결된 것일 테다. 그 한 톨 살가움으로 나는 한 여자 사람과 결혼해서 살아냈고, 딸 하나 낳아서 키워냈다. 부족했음은 두말할 나위조차 없다. 그래, 아직도 시간은 남아 있다. 조금 더 따스해지고, 더욱더 상냥해지기로 한다. 그래서 이룰 변화가 다른 생명, 그 너머 비생명에도 번져간다면 다시 무슨 발원을 하랴.

나는 그리 살가운 사람이 못 된다. 그렇다. 그래서 나는 그리도 살가운 사람을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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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란 바지 수괴변호인인지 멘토인지 하는 자가 면회 때 들었다며 이 정권 1년 안에 무너진다고 한다. 처음엔 아직도 현·타가 안 오나보다 했는데 하는 짓들 보니까 근거 없는 말도 아닌 성싶다. 날이 갈수록 해괴하고 섬찟하게 드러나는 제국 주구들 협잡질이 얄망궂고 모질고 사악하다. 저 야차 무리와 지루한 싸움을 앞으로도 여러 날 동안 계속할 수밖에 없을 테니 긴 호흡으로 끝까지 맞서야겠다는 생각이 서늘하게 등골을 타고 올라온다. 근혜 때 25, 명신이 때 35, 합해서 60번 광장에 섰는데, 이젠 그만 가야지 하는 생각을 도무지 할 수 없게 만든다. 그래. 가자.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달리 뭐 있겠나.

 

156차 촛불 대행진 집회 시각보다 한 시간가량 일찍 광화문에 도착한다. 미리 저녁을 먹기 위해서다. 노포 분위기 물씬 풍기며 김치찌개 잘하는 단골 식당 한쪽 구석에 자리 잡는다. 앉자마자 반대편 끝자리에 앉은 내 또래 늙은이 셋이 귓바퀴를 확 잡아챈다. 그 가운데 등을 돌리고 앉은 자가 단연 청신경을 거칠게 긁어댄다. 역대급 구나방으로 앞에 앉은 지인도 옆자리 다른 손님도 전혀 아랑곳하지 않은 채 화차 삶아 먹은 울대로 왜장독장치고 있다. 돈 자랑을 한참이나 하더니 지인은 입도 뻥긋 못 하게, 이번에는 이재명 욕을 냅다 해댄다. 그래. 맞다. 내가 광장으로 계속 나오는 며리에는 저런 종자들 몫도 있구나.

 

더는 참지 못해 한마디 하려고 벌떡 일어섰는데 바로 그때 거기 지인이 계산하고 자리를 접는다. 끝없이 혼자 떠들며 나가는 뒷모습을 보다가 문득 부질없는 질문 하나 던진다. “50억이나 된다며 돈 자랑한 인간이 왜 김치찌개 막걸리 한 통 계산은 밀각질로 뭉갰나?” 물론 이 질문은 당최 잘못됐다. 부잔데도 그러는 게 아니라 부자니까 그러는 건데 말이다. 여전히 제국 자본주의에도 윤리가 존재한다는 미망을 전제로 사고하는 내가 슬푸습다. 30분 만에 소주 2병 해치우고 일어서는 내가 낯설지 않은 <광화문집>을 뒤로 하고 나는 뜨거운 광장으로 향한다. 늘 그런 사람들, 늘 그런 구호들, 늘 그렇지 않은 풍경들.

 

노래와 구호에 발 구름으로 장단 맞추며 돌아다니다가 수시로 각 잡아 사진으로 찰나 역사를 기억해 둔다. 스마트폰에 저장된 3만여 컷 사진은 그대로 내 궤적이다. 생활 주변, , 광장, 그리고 SNS 이슈 모두가 어우러져 빚어내는 영상 서사들이 글과 함께 내 삶을 증언한다. 누가 이 알량한 증언에 귀 기울이랴만 세계 네트워킹 참여 주체로서 나는 익명에 저항하는 천명을 이렇게 수행할 수밖에 없다; 돈이든 목소리든 뜨르르한 명망 없기에 또한 익명일 수 없는 길 걸어 팽한 삶을 살아간다; 선무당 명신이나 50억 구나방이 설치는 이 땅에서 익명일 수 없는 길은 익명끼리 손을 잡는 일이다. 그렇게 흐르는 광장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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