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제7장 본문입니다.  

 

子曰 人皆曰予知 驅而納諸網獲陷穽之中而莫之知抗也, 人皆曰予知 擇乎中庸而不能期月守也.   

 

(이기동 역해 본문은 網이 아니라 그물 망 머리 아래 옛 고를 쓴 그물이란 뜻의 '고'이며, 抗이 아니라 避에서 책받침이 빠진 '벽'(뜻이 避와 같아 '피'로 읽어야 한다고 함)입니다. 본문 비평은 능력 밖이고 뜻에 큰 차이가 없으므로 번역은 이기동을 따릅니다.)    

 

공자는 말씀하셨다.  "사람들은 다 '나는 지혜롭다'고 말하지만, 몰아서 그물이나 덫이나 함정에 넣어도 피할 줄을 알지 못하며, 사람들은 다 '나는 지혜롭다'고 말하지만 중용을 골라서 한 달도 지킬 수 없다."  

 

2. 지혜롭다고 자부하는 자의 지혜는 앞에서 말한 小知, 즉 내남을 구별하여 세상을 나누어야 직성이 풀리는 강자, 승자 부류의 기능적 지식을 뜻합니다. 권력, 돈, 전문지식을 독점하는 데 필요한 극단적 프로세스로 작동하는 지식이지요. 대부분 불공정한 경쟁을 통해 획득한 것입니다. 당연히 그 삶 또한 불공정한 틀 속에서 영위됩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스스로 정당하다고 굳게 믿습니다. 이를테면 확신범인 셈입니다.  

 

그들의 확신은 너무나 완벽합니다. 그래서 그물, 덫, 함정으로 몰리는 일조차 강함과 이김의 기운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들의 이런 망상은 권력, 돈, 전문지식을 자신의 인격과 동일시하는 데서 극치를 이룹니다. 힘없고 돈 없고 전문지식 없으면 사람의 격도 없다고 생각하므로 그런 사람들을 "근본 없는 것들"이라고 표현합니다.   

 

어렴풋이 이해할 수는 있을 듯합니다. 권력, 돈, 전문지식을 누릴 때 한껏 고양되는 자신이 얼마나 자랑스러울까.......세상이 '돈짝' 만하게 보이고, 사람이 개미처럼 보이고.......  

 

하지만 그 끝은 파멸입니다. 그 파멸은 소통을 거절했기 때문에 주어지는 형벌입니다. 생명의 영속성은 더불어 살 때만, 관통과 흡수가 일어날 때만 가능한 것입니다. 허깨비에 지나지 않는 것에 의지해 "멀쩡한 사람 산 채로 포 뜨는"(인기 있었던 주말 드라마에 등장하는 대사를 취한 것입니다.) 짓의 대가는 그물이고 덫이고 함정입니다.   

 

죽을 때까지 잘 먹고 잘 살았다는 것이 파멸을 면한 증거일 수 없습니다. 오히려 그렇게 잘 먹고 잘 사는 동안 생명의 진수를 몰랐으니 돌이킬 수 없는 형벌에 처해진 것이지요.  자신들이 누리는 그것만이 최고, 최상이라 착각한 대가로 존재의 숭고함에서 끝내 "왕따" 당한 것입니다. 대롱으로 본 하늘 밖에 흐드러진 별들이 얼마나 찬란한지 "지옥"에 가서 확인하고 나서야 땅을 치게 될 것입니다.  

 

3. 어찌어찌 중용을 고르기는 했는데 한 달도 못 지키는 주제에 스스로 지혜롭다고 한답니다. 아, 물론 중용이 어렵다는 뜻도 되겠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스스로 지혜롭다 함부로 말해서는 안 된다는 경고가 더 큰 무게를 지닙니다.  

 

사실 이 문장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고른다(擇)"는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중용은 선택입니다. 선택이란 말을 생각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반드시 선택하지 않은 무엇이 있다는 사실이지요. 중용을 선택한 군자는 과연 무엇을 선택하지 않았을까요?  

 

길게 얘기할 것 없겠지요. 스스로 지혜롭다고 하면서 결국은 자신을 그물, 덫, 함정으로 몰아넣는 자들이 사는 길을 선택하지 않았습니다. 소통을 거절하는 삶, 독식하는 삶, 군림하는 삶을 선택하지 않았습니다. 그 선택하지 않은 것을 견디는 일이 중용이며, 길이 견디는 사람이 군자입니다.  

 

군자는 찰나찰나 결단하는 용기를 요구 받습니다. 중용은 군자에게 어느 순간 주어진 자격증이 결코 아닙니다. 군자는 중용을 "지켜내야(守)" 이루어지는 길고 긴 과정 자체입니다. 중용 없이 군자 없는 것이지 군자 없이 중용 없는 것은 아닙니다. 선택한 삶을 지키는 만큼이 바로 그 사람됨입니다. 

 

4. 小知의 끝이 파멸이란 사실과 선택한 大知를 지키는 것, 선택하지 않은 바를 견디는 것이 어렵다는 사실을 붙여놓은 까닭은 무엇일까요? 전자의 현실적 힘이 후자의 것을 늘 제압해 왔다는  우리의 경험과 관련이 있다고 판단됩니다. 권력, 돈, 전문지식의 매혹에서 자유로운 자 그 누구이겠습니까? 얼마나 살겠다고 소통을 들먹이며, 생명의 연대성을 운위하느냐, 다 부질없다,  생각  안 해 본 사람이 그 누구이겠습니까?  

 

그럴수록 중용은 가벼이 입에 담을 수 없는 부담으로 작용하고, 또 그럴수록 중용을 관념 세계로 밀어내는 경향은 짙어지고.......그렇습니다. 이쯤에서  공자의 인간적 고뇌가 물결이 되어 독자의 가슴에 전달되기 시작하는 것이지요. 칼날 같은 답이 없는 상황에서 과연 무엇을 지표 삼아 내 삶을 "선택할" 것인가? 어떻게 그 선택을 "지킬" 것인가? 어떻게 선택하지 않은 것을 "견딜"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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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제6장 본문입니다.  

 

子曰 舜其大知也與. 舜 好問而好察邇言 隱惡而揚善 執其兩端 用其中於民 其斯以爲舜乎.   

 

공자는 말씀하셨다. "순(임금)은 크게 지혜로우시다. 순은 묻기를 좋아하시고 평범한 말을 살피기 좋아하시며, 악을 숨기고 선을 드러내시며, 그 두 끝을 붙잡아 그 가운데를 백성에게 쓰시니, 그 이로써 순이 되신 것이다."    

 

2. 제4장에서 이른바 지혜로운 자는 지나쳐서 중용을 실천하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그 이른바 지혜로운 자는 자신이 특별한 존재라는 자의식을 지니고 있어 어리석은 자들과 구별합니다. 그렇게 갈라야 자신의 권위와 기득권이 수호되기 때문입니다. 이런 자가 소인이고, 그 지혜는 小知입니다.  

 

제6장은 군자의 표본으로 순임금을  제시합니다. 대뜸, 그가 大知를 실천한다고 선언합니다. 그리 함으로써 세간의 이른바 지혜로운 자들이 小知임을 알게 하는 것이지요. 小知가 나와 남을 구별/차별하여 "홀로 주체성"을 확보한다면 大知는 나와 남을 하나로 묶어 "서로 주체성"을 펼칩니다. 홀로 주체일 때 남은 대상물이지만 서로 주체일 때 남은 소통하는 인격입니다.   

 

그래서 大知는 묻기를 좋아하고 평범한 말 살피기를 좋아합니다. 묻는다는 것은 듣는다는 것입니다. 듣는다는 것은 자아 중심성을 버린다는 것입니다. 그 상실을 통해 오히려 참된 주체성을 획득합니다. 듣는다는 것은 수동성으로 시작함을 뜻합니다. 왜냐하면 상대방이 말하지 않으면 들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수동성이야말로 서로 주체를 이룩하는 상호능동성, 즉 소통을 낳는 모태입니다. 이 역설이 바로 중용의 요체입니다.  

 

묻는다는 것은, 또한 겸손하다는 것입니다. 묻는 자는 답하는 자 아래 섭니다. 고개를 숙이고 두 손을 모아 기다립니다. 답하는 자를 중심에 놓고 자신은 변두리로 물러섭니다. 자신의 지혜는 답하는 자의 지혜에 "깃들" 따름입니다. 입만 열면 백성을 가르치려 드는 이 땅의 권력자와 얼마나 상반된 모습인지요.  

 

묻는 것은, 그리고 "보는" 것과 다릅니다. 보는 것은 보는 자의 눈에 의존합니다. 기실 보고 싶은 것만 보지요. 무엇보다 밖으로 드러난 현상만을 파악할 수 있으니 소통은 불가합니다. 보는 자는 소통을 거절하는 자입니다. 보는 자는 보이는 사물 위에 섭니다. 고개를 세우고 팔짱을 낍니다. 보이는 사물을 변두리에 세우고 자신이 중심에 섭니다. 자신의 지혜로 보이는 사물을 제압합니다.  

 

저는 한의사로서 우울증을 포함한 마음의 병을 상담/대화를 통해 치료하는 일을 합니다. 서양의 정신의학이나 심리학을 배운 사람들과 달리 한국 문화에 맞는 상담을 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서양 이론에 따르면 의사와 환자는 분리되어야 마땅합니다. 의사는 고치는 주체이고 환자는 고침을 받는 대상일 뿐이지요. 의사가 환자의 말을 듣기는 하지만 사실은 말하기 위해, 즉 가르치기 위해 듣는 것입니다. 그러나 한국적 정서로 보면 의사는 듣기 위해 말을 해야 합니다. 환자를 중심에 세우고 의사는 거기에 깃들어야 합니다.  

 

흔히 한의사는 척 보면 알아야 고수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마치 점쟁이처럼 "잘 보는" 한의사를 "용하다"고 합니다. 한의사 스스로도 대부분 망진(望診)을 우선으로 꼽습니다. 그러나 중용의 맥락에서 살피건대  묻는 것을 선두에 세우는 진단이 더 윗길입니다. 환자의 삶과 인격은 묻지 않으면 알 수 없습니다. 드러난 병이나 고친다면 의사는 그저 기술자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의사의 관심은 병을 넘어 사람 자체에 닿아야 합니다.  

 

묻고, 답하는 말에 귀 기울여 듣는 자가 大知임을 안다면 의사는 더 이상 환자 위에 군림하지 않을 것입니다. 의사와 환자가 서로 주체로서 소통을 이룰 때 진정한 치유가 일어납니다. 이 때 비로소 치유연대가 결성됩니다. 이 치유연대를 사회 전체로 확대하면  그게 곧 大同 세상인 것이지요.  

 

순임금은 大知로써 大同을 이룩했습니다. 大知의 길은 묻는 데서 시작됩니다. 경건하게 듣는 자가 大知의 기수입니다. 이 땅의 지배층은 지금 당장 눈 감고 입 다물어야 할 것입니다, 백성의 소리에 귀 기울이기 위하여.   

 

3. 임금 된 자가 백성 아래 서서 물으니 백성이 "평범한 말"로 답합니다. 저자거리에 흘러 다니는 "쌍스러운" 언어를 날 것인 채로 드러내겠지요. 사는 게 어찌 고달픈지, 정치판을 얼마나 한심하게 여기는지, 어디가 아픈지, 물가는 얼마나 뛰는지, 자식 놈은 무슨 속을 썩이는지.......  

 

장삼이사(張三李四)의 삶을 있는 그대로 듣기 위해 물었고, 들은 다음에는 사회를 통합하는 大同의 정치를 펼쳐낸 것이 舜이  한 일입니다. 백성이 주인이라고 선언하는 오늘날 권력자도 하지 않는 일을 전제군주가 했으니 가히 군자의 도요, 그래서 중용이라 일컬은 것입니다.  

 

중용의 뜻이 여기서 다시 한 번 명백해집니다. "특별한" 사람이 "평범함"에 깃들어 함께 "평범함"으로 통합되는 사건이 바로 舜의 중용인 것입니다. 결국 "특별함"은 사라집니다. 舜이 "평범함"에 승복하는데 누가 감히 스스로 높여 "특별하다" 할 것입니까?   

 

舜, 스스로 "특별함"을 버린 마음의 흐름, 몸의 실천이 중용입니다. 중용은 선험적 전제로 존재하는(being) 어떤 실체가 아닙니다. 중용은 구체적 실천을 통해 바야흐로 형성되는(becoming) 운동입니다. 이럼에도 기라성 같은 해석가들은 중용을 만고불변의 실체적 진리로 규정하여 높은 곳에 모시는 일에만 집착하고 있습니다.   

 

중용을 현실과 단절하여 형이상학의 세계로 끌고 감으로써 오히려 "명상"적 시공간에 가두어버리는 우를 범한 것입니다. 중용은 "명상"의 대상이 아닙니다. 중용은 "웰 빙"의 포로가 아닙니다. 중용은 도저한 현실 삶의 울퉁불퉁한 길을 걷는 결단이며 용기입니다.  

 

중용은 어지럽고 더러운 정치판을 혁파하는 에너지로 나타나야 합니다. 돈으로 인격을 사는 천민적 자본 판에 비수를 들이미는 기개로 드러나야 합니다. 전문지식의 독점을 통해 정보사회를 분할통치하는 야비한 엘리트에게 채찍을 드는 의분으로 뿜어져 나와야 합니다.  

 

중용의 언어는 예의 바르며 중용의 실천은 정중해야 한다는 통속 유교의 고정관념에서 중용을 해방하는 일이야말로 오늘을 사는 우리의 중용일 것입니다. 그 "어정쩡함"에 묶인  중용은 주희와 그 아류로서 족합니다. 물론 아직도 이 나라는 노론의 나라라는 자조가 들리지만  세상은 분명 달라져야 합니다.   

 

4. 고대의 파편문서(fragment)적 직관에 따른다면 "악을 감추고 선을 드러내시며, 그 두 끝을 붙잡아 그 가운데를 백성에게 쓰시니" 라는 구절은 후대에 가필한 느낌을 줍니다. 두 가지가 마음에 걸립니다.  

 

하나는 그 위상이 군더더기 같다는 것입니다. 그냥 "순(임금)은 크게 지혜로우시다. 순은 묻기를 좋아하시고 평범한 말을 살피기 좋아하시니, 그 이로써 순이 되신 것이다." 하여 그야말로 질박 명쾌한 제시로 부족함이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다른 하나는 내용이 후대의 통속적인 중용 이해에 터 잡은듯하다는 것입니다. 아이들에게 비유로써 가르치는 국민윤리 교과서 한 구절처럼 보이는군요. 격이 떨어지는 것도 그렇지만 내용 자체도 앞에 나온 "묻기를 좋아하시고......." 하는 부분과 유기적으로 연결되지 않는다는 느낌 또한  확실히 있습니다.    

 

5. 그러나 고증을 거치지 않은 이런 제 느낌을 뒤로 물리고 본문이 가지고 있는 뜻을 앞부분과 격 맞추어 생각해 보겠습니다. 악을 감추고 선을 드러낸다는 것은 얼핏 보면 정확한 대비인 것처럼 보이지만 곰곰 생각하면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선을 드러내는 것은 이의를 달기 어렵습니다. 헌데 악을 처리하는 것은 우리 윤리의식이나 법 감정과 어울리지 않지요. 악을 명백히 밝혀 제거하는 것이  선과의 대칭이라는 측면에서는 명쾌한 선택일 것입니다. 악을 제거하여 선한 세상을 만든다는 것은 인류가 오래 꿈꾸어 온 이상이 아니던가요?  

 

선으로 충만한 세상, 그러나 이것은 또 하나의 기만입니다. 영원히 논리적 가능성으로만 존재할 뿐인 가치입니다. 그 가치를 현실의 경세치용에 그대로 적용하면 독선이 됩니다. 선하기 때문에 악하게 되는 모순을 낳는 것입니다. 까닭은 자명합니다. 소통의 폐기!  

  

순이 악을 제거하지 않고 다만 감추는 차원에 놓아둔 것은 영원한 실체로서 선이 없듯이  영원한 실체로서 악도 없다는 사실을 꿰뚫어 보았기 때문입니다. 선악의 구분도 흘러가는 것입니다. 선이 이른바 "특별함"이 되지 않고 "평범함"이 되려면 악을 자신과 구분하여 떼어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이 바로 순의 大知입니다.   

  

백성에게 묻고 그들의 말에 귀 기울이는 마음으로 판단할 때, 그들의 고단한 삶이 빚어내는 악은 따스하고 너그럽게 "묻어주면" 언제라도 선으로 꽃필  것임을 알 수 있었던 것입니다. 순의 그 마음을 아는 한 "차마" 악을 되풀이 하지는 못했을 수도 있겠고요. 이게 소통이고, 이게 大同이 아닌가 합니다.  

 

좀 더 나아가 보지요. 상당히 많은 경우 악은 그 시대 사람들이 선택하지 않음으로써 버려진 가치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공간적, 공시(共時)적 지평에서는 악으로 규정될지라도 시간적, 통시(通時)적 맥락에서는 선이 될 수 있는 것이지요. 유연하고 다양한 관점을 지닌 사람의 넉넉함이 또한 중용입니다.   

 

6. 두 끝을 붙잡아 그 가운데를 백성에게 썼다는 것은 대칭/대립하는 두 가치/입장을 時中으로 조절하여 원만한 소통, 거래를 이루게 했다는 뜻일 터이니 길게 재론할 일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兩非論의 비겁함을 논급하고 넘어가겠습니다.    

 

딸아이와 일간 신문 사설을 비교해서 읽는 일을 가끔 합니다. 그런데 이른바 재벌언론이라 일컬어지는 거대 일간지 사설에 유난히 양비론이 많아서 그 문제를 집중적으로 이야기한 적이 있었습니다. 피상적으로 생각하면 양측의 단점 또는 악을 모두 비판하는 게 매우 정당해  보이지만 양비론은 두 가지 발톱을 숨기고 있습니다.  

 

자신의 공평함을 과시함으로써 도덕성을 확보하고 현실에서 발을 뺄 수 있는 근거를 남기는 기회주의가 그 하나입니다. 더 나쁜 발톱은 바로 양쪽을 싸잡아 비판함으로써 실제로는 힘 있는 쪽을 돕는 효과를 낸다는 것이지요. 양비론의 눈속임은 이른바 "산술적" 가운데를 중용이라 오해하게 합니다.    

 

제가 "두 끝을......." 운운하는 이 부분을 의혹의 눈초리로 보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순의 중용이라 보기보다는  후대 통속적 중용가의 양비론적 혐의가 짙어 보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 구절을 순의 수준에서 역동적으로 해석하면 그만이긴 하지요. 더 이상 거론하지 않겠습니다.  

 

7. 제가 쓰고 있는 글을 들여다 보던 아내가 결정적인 한 마디를 해주었습니다. "평범은 평등이네." 그렇습니다. 순의 중용은 평범함으로 大同을 이루는 정치경제학적 실천의 중용입니다. 중용은 "평등 원리를 구현함에서 벗어나지 않는" 사회적 덕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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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제5장 본문입니다.  

 

子曰 道其不行矣夫.  

 

 공자는 말씀하셨다. "도는 아마 행하여지지 아니할 것이다."  

 

2. 제4장에서는 현재 중용의 도가 행해지지 않는다는 사실, 그리고 그 연유를 밝혔습니다. 여기서는 미래에도 중용의 도가 행해지지 아니할 것임을 예상하고 있습니다. 이 예상은 다만 예상에서 그치지 않습니다. 탄식으로 슬픔으로 이어질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오호라, 도는 끝내 행해지지 아니할 것이로구나!"   

 

공자의 예상은, 또한  시간 영역에만 머무르는 것이 아닙니다. 춘추전국의 시공간을 관통하는 비판정치학입니다. 강자, 승자로서 정복만을 가치로 삼는 제후의 정치학을 향해 날리는 직격탄입니다. 인간의 상호적 삶을 거절하고 포식동물의 일방적 삶을 맹렬히 추구하는 "특별한" 집단에게 날린 저주의 독설입니다.   

 

아득한 그 옛날 말고 당장 오늘 이 땅의 정치판만 보더라도 공자의 저주는 액면가 이상의 적확성을 구가합니다.  보십시오, 이 땅의 권력자가, 재벌이, 전문지식인 집단이 어떻게 도를 짓밟고 독식의 추한 미학에 골몰하고 있는가를. 공자가 지금 서울에서 중용을 말한다면 "아마도(其)" 대신 "반드시(必)"라고 고쳤을 것입니다.    

 

3. 공자의 예상은 인간 사회의 잔혹함, 그래서 너절함을 통타하는 문명비판이기도 합니다. 자연과 소통하기를 거절하고 개발과 착취의 대상으로만 삼는 인간의 과잉진화 행태를 준열하게 꾸짖는 것입니다. 도가 행해지지 않는 결과 지구의 허파가 사라지고 있습니다. 도가 행해지지 않는 결과 수 만 종 생물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멀리 갈 것 없습니다. 이 땅에서 벌어지고 있는 4대강 사업 문제만 해도 그렇습니다. 국토를 거대한 하수관으로 만들고야 말겠다는 저 반자연적, 반생태적 발상이야말로 중용을 거스르는 소인 행태 의 전형입니다. 막무가내로 밀어붙이는 조폭식 추진력은 가히 무기탄의 상징이 되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이대로 간다면 인간은 머지않아 반드시 멸망해야 합니다. 지구를 지켜 다른 생명들이라도 살게 하려면 암 세포에 지나지 않는 인간은 제거될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이 중용을 거절한 대가는 이렇게 비참한 것입니다. 그 무엇보다도 구체적이고 생생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중용>의 심장을 겨누는 강호의 고수들은 더 이상 <중용>을 비현실적, 관념적, 형이상학적 담론의 준거로 삼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뜬구름 교설로 구원될 세상은 이미 저물어버렸습니다. 범박한 아마추어의 어설픈 고언에 불과하지만 환우를 앞에 놓고 치유의 말, 즉 생명을 일으키는 말을 해야 하는 저로서는, 참고할 만한 <중용> 풀이 책 한 권  마땅치 않은 현실이 그저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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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제4장 본문입니다. 

 

子曰  道之不行也 我知之矣. 知者過之 愚者不及也.

道之不明也 我知之矣. 賢者過之 不肖者 不及也.

人莫不飮食也 鮮能知味也.

공자는 말씀하셨다. "도가 행해지지 않음을 나는 알겠다. 지혜로운 사람은 지나치고 어리석은 사람은 모자란다. 도가 밝아지지 않음을 나는 알겠다. 어진 사람은 지나치고 못난 사람은 모자란다. 사람이 마시고 먹지 않음이 없으나 그 맛을 아는 경우가 드물다."   
 

2. 중용의 도가 실행되기 어려운 이유는 이미 앞 장에서 암시한 바 있습니다. 최고의 경지이니 그것을 인정한다고 해서 대뜸 실천에 옮길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하지만 이 어려움을 신비적, 탈속적 차원에서 논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가령 불가나 선가의 공부 식이라면 처음부터 중용을 말할 까닭이 없어지고 말 것입니다. 아무리 어려워도 그것은 인간의 사회적,  문화적 삶 속에서 행해질 수밖에 없는, 또 그래야 하는 수준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므로 그 어려움은 중용 자체의 경지 문제라기보다는 우리가 형성하는 사회, 문화 관계의 문제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 근가가 제시됩니다.  

 

지혜로운, 또는 아는 사람은 지나치고 어리석은, 또는 모르는 사람은 모자란다고 공자께서 진단하셨습니다. 여기서 知者와 愚者가 대비된 것은 문자 그대로 보면 이상합니다. 우자가 모자란 것은 당연한데 어찌하여 지자는 지나친 것일까요? 참으로 아는 사람이라면 그럴 리 없지 않겠습니까?  

 

결국 여기 知者는 "이른바" 아는 사람이란 뜻이지요. 스스로 그리 여기는 사람이라고 보아도 별 무리는 없겠지만, 제 생각에는 사회적인 의미에서 知者로 여겨지는 집단으로 보는 게 더 나은 이해인 듯합니다. 요즘 잘 쓰는 말로 "사회 지도층"인 셈이지요. 권력, 돈, 지식을 통해 사회를 쥐락펴락하는 지배층이 바로 그들입니다.   

 

그런데 이들의 앎은 어리석은 자들과 선을 그은 상태에서 규정된 정치적 차원을 획득하게 됩니다. 당연히 어리석은 사람들, 즉 일반 백성은 "아랫것"이 되는 것이지요. 하여 그들은 입만 열면 백성을 훈계하려 듭니다. 우리사회에서 그 표본을 너무나 여실히 목격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런 앎은 소인의 앎입니다. 그와 선명한 대비를 이루는 군자의 앎, 곧 大知가 제6장에 나옵니다. 大知는 자신과 어리석은 사람을 구별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여기 知者는 사회를 분열시킴으로써 자신의 권위를 세우고 기득권을 유지하는 천박한 지배층, 즉 약육강식과 승자독식의 정글 법칙을 구가하는 집단인 것입니다.  

 

어리석은 사람 또한 이런 맥락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스스로 패배주의에 빠진 개인들을 의미할 수도 있겠지만 지배집단에서 배제된/분리된 사회정치적 존재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3. 중용의 도가 밝게 펼쳐지지 않는 까닭 또한 이치적으로 동일합니다. 이른바 어질다고 하는 사람은 지나치고 이른바 못났다고 하는 사람은 모자라기 때문입니다.  지자와 현자를 구태여 구분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知와 行을 연결하고 賢과 明을 연결한 것은 어찌 보면 엇갈린듯하지만 오히려 이론과 실천을 통일적으로 이해하는 실사구시적 관점이라고 이해하면 훨씬 선 굵은 읽기가 가능하겠지요.   

 

4. 그러면 지나치다는 것은 어떤 상태를 말하는 것일까요? 앞에서 본 바와 같이 "특별하다"는 뜻입니다. 특별하려면 극단적 프로세스를 써야 하고 극단적 프로세스를 쓰려면 소통을 거절해야 하므로 중용을 어긴 것입니다. 물론 그들은 소통을 거절하면서 "아랫것들"의 무지를 탓하겠지요.  

 

모자란다는 것은 어떤 상태를 말하는 것일까요? "특별한" 자들에게 소외, 억압당하는, 그래서 소통에서 제외된 상태를 뜻합니다. 또한 그것을 문제로 인식하지 못하는 상태를 말합니다.  결국 그 상태는 이른바 어리석고 못난 사람들로 하여금 자기 존재에 반하는 선택을 하도록 몰아갑니다. 지난 세월 동안 우리사회에서 수도 없이 목도한 바 있으니 더 이상 군더더기를 붙일 까닭이 없겠군요.  

 

5. 우리는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마시고 먹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단순히 생명 유지라는 목적을 위해  음식을 수단으로만 여긴다면 구태여 맛을 거론할 이유는 없습니다. 하지만 여기 분위기대로라면 맛과 그것을 아는 것은 중용의 도를 설명하는 데 중요한 구실을 한다고 봐야 합니다.    

 

마시고 먹을 때 그 음식의 맛을 알고, 모르는 것은 어떤 맥락에서 중용의 도를 설명하는 핵심 사례가 되는 것일까요? 아마도 맛에 탐닉하는 자들과 맛조차 모른 채 허겁지겁, 또는 딴 생각에 사로잡혀 마시고 먹는 자들의 극단을 염두에 두면서 한 말이었을 것입니다.  

 

"특별한" 자들은 자체생명인 음식의  고유한  향미를 넘어선 즐거움을 탐하므로 중용을 어겼습니다. "아랫것"들은 맛은커녕  자기 연명에 급급하여 생명인 음식의 가치로움에 미치지 못했습니다.  둘 다 음식의 형태로 마주선 생명과 소통하지 못했습니다.    

 

수운 선생의 가르침 식으로 말한다면 음식은 하늘입니다. 하늘이 하늘을 기르는 거룩한 사건이 마시고 먹는 것입니다. 이런 어법대로라면 음식의 맛을 아는 것은 바로 그 거룩함을 알아차리는 일입니다. 마시고 먹는 사건의 거룩함은 유미주의와 실용주의를 가로지르는 경계에서 피는 꽃입니다. 

 

6. 마시고 먹는 일상의 사소한(!) 일을 예시하신 공자의 의중은 무엇일까요? 길고 깊게 수런거릴 일 없겠지요. 중용 자체가 평범함에서 벗어나지 않는 것이니 그렇고, 그 평범함이 극명하게 드러나는 시공간이 바로 사소한 일상이니까 그렇습니다. 사소함은 과소평가된 위대함이란 사실을 간파한 통찰이 숨 쉬고 있습니다.  

 

마시고 먹는 일은 관통과 흡수로 요약되는 중용의 본령이 가장 구체적 현실로 드러나는 장(場)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일(놀이)과 잠, 대화, 性, 호흡 등도 동일한 중용 도량(道場)임에 틀림없습니다. 사실 눈에 보이는 이런 일상의 거룩함에 터 잡지 않은 가치, 즉 눈에 보이지 않는 이념, 사상, 종교 따위의 이른바 거룩함은 죄다 뜬 구름일 뿐입니다. 그야말로 사소한 예 하나로 大小, 聖俗 이분법이 최종 부도 처리됩니다. 知愚, 賢不肖 이분법은 더 이상 숨 쉴 수 없습니다.     

 

7. 그러나 세상은 이분법 세상입니다. 공자의 절망, 중용의 좌절은 바로 세상을 둘로 갈라야 이익을 극대화할 수 있는 "특별한" 소수 집단이 권력, 돈, 지식을 독식한 데서 연유합니다. 그들의 지나친 독단은 바야흐로 도를 넘어섰습니다. 공자의 시대는 물론이거니와 오늘 우리 앞에서도 그러합니다.  

 

백성은 죽어나가는데 연일 웃는 얼굴 아니면 짐짓 엄숙한 얼굴로 대문짝만 하게  신문, TV에 나는 사람들이  나라를 '말아먹고' 있는 장본인인데 아랑곳하지 않고 그들은 도리어 백성에게 끊임없이 뭔가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복종이든, 희생이든, 표든.......닥치는 대로 취하려 합니다. 음식 맛 아닌 제 입맛에 맞추어 거리낌 없이 욕설을 퍼부으면서 독식사회를 구축해 갑니다. 걸핏하면 편향, 변덕, 무지를 들먹이며 백성을 꾸짖습니다. 자신들만이 중용의 도를 실천한다고 스스로 속이면서 이 순간도 세상을 갈라놓는 일에 몰두하고 있습니다. 지금 여기서 무엇을 해야 참된 중용의 실천일까요? 어찌 살아야 군자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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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제3장 본문입니다. 

子曰 中庸 其至矣乎 民鮮能久矣.

공자는 말씀하셨다. "중용은 최고의 도리이다. 백성들은 오래 지속하기 어렵다."
 

2. 평범함에서 늘 벗어나지 않는 일이야말로 가장 어려운 실천의 덕목입니다. 자신의 기득권에 대한 애착과 집중을 버려야 하기 때문입니다. 자신과 같은 정도로 대우해야 하는 상대방과 소통하려면 필승의 전략이 아닌 공감의 진정성을 지녀야 하기 때문입니다. 진정성으로 세상을 살기 얼마나 어려운가, 그런 자세로 살면 백전백패할 것인데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영혼 깊숙히 동의하기가 여간 힘들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제2장에서 보았듯이 "특별한" 존재로 인정 받고, 거리낌 없이 사는 사람들이  세상의 권력, 돈, 지식을 거머쥐고 있는데 그들 밑에서 힘 없이, 궁핍하게, 더듬거리며 한 평생을 살고싶은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아무리 애쓰며 살아도 고작 백년 안쪽인데  도덕이며, 가치며, 아름다움이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이런 생각에 누군들 빠져들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소인에 맞서 상생의 세상, 대동세상을 만들고자 하는 군자의 길에 선뜻 나서 내내 갈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아마도 여기 백성(民)이라 함은 소인적 삶의 자연(Sein)적 매력과 군자적 삶의 당위(Sollen)적 기품 사이에서 흔들리는 다수 시민을 가리킬 것입니다. 이들은 한편으로는 "특별한" 자들에게 일방적으로 당하는 존재이므로 참 소통의 길, 즉 군자의 길에 목말라 있으나, 다른 한편으로는 소인의 저 "특별한" 소유도  가없는 열망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는 사람들입니다. 


어느 순간 분연히 떨쳐 일어나 군자의 결기를 세워 보지만 이내 주저앉게 됩니다. 자긍심에 상처 입은 처자식의 슬픈 눈망울을 뿌리치는 일이 권력, 돈, 지식을 뿌리치는 일보다 쉽다고 주장할 수 있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자신의 남편이, 자신의 아버지가 중용의 삶을 살아갈 때 흔쾌히 동의하고 동참할 아내와 자식이 있다손 치더라도 그 길을 모델로 제시하며 따르도록 강요할  권리를 가진 사람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일반 백성들은 오래 지속하기 힘듭니다. 그들은 하루하루를 눈물겹게 살아가기에도 버거운 몫을 지니고 있습니다.  중용의 도를 지속시키는 것은 군자의 몫입니다.  군자는 그 길을 자발적으로 선택한 사람입니다. 누구든 그가 선택한 만큼이 그의 삶이니 그로써 군자 되는 것이 군자의 숙명입니다.
 

3. 비록 오래 지속할 수는 없으나 백성은 때때로 화산이 됩니다. 짧은 순간 집중된 결기로 중용이 탄젠트적 성취를 이룰 수 있게 하는 거대한 힘이 된다는 말입니다. 사실 이것만으로도 백성의 존재는 숭고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중용의 도를 오래 지속하지 못하는 백성을 두고 한탄하는 것은 도리가  아닙니다. 참으로 군자라면 늘 그 백성 속에서 그들과 소통하여 변혁의 여울목으로 함께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백성과 군자는 결코 분리된 존재가 아닙니다. 크게 하나(大同)입니다. 백성을 자신과 구별하는 자들은 소인입니다. 여기 백성에 대한 공자의 시각은 어떤 것일까요? 곰곰히 생각해 볼 필요가 있겠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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