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제6장 본문입니다.  

 

子曰 舜其大知也與. 舜 好問而好察邇言 隱惡而揚善 執其兩端 用其中於民 其斯以爲舜乎.   

 

공자는 말씀하셨다. "순(임금)은 크게 지혜로우시다. 순은 묻기를 좋아하시고 평범한 말을 살피기 좋아하시며, 악을 숨기고 선을 드러내시며, 그 두 끝을 붙잡아 그 가운데를 백성에게 쓰시니, 그 이로써 순이 되신 것이다."    

 

2. 제4장에서 이른바 지혜로운 자는 지나쳐서 중용을 실천하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그 이른바 지혜로운 자는 자신이 특별한 존재라는 자의식을 지니고 있어 어리석은 자들과 구별합니다. 그렇게 갈라야 자신의 권위와 기득권이 수호되기 때문입니다. 이런 자가 소인이고, 그 지혜는 小知입니다.  

 

제6장은 군자의 표본으로 순임금을  제시합니다. 대뜸, 그가 大知를 실천한다고 선언합니다. 그리 함으로써 세간의 이른바 지혜로운 자들이 小知임을 알게 하는 것이지요. 小知가 나와 남을 구별/차별하여 "홀로 주체성"을 확보한다면 大知는 나와 남을 하나로 묶어 "서로 주체성"을 펼칩니다. 홀로 주체일 때 남은 대상물이지만 서로 주체일 때 남은 소통하는 인격입니다.   

 

그래서 大知는 묻기를 좋아하고 평범한 말 살피기를 좋아합니다. 묻는다는 것은 듣는다는 것입니다. 듣는다는 것은 자아 중심성을 버린다는 것입니다. 그 상실을 통해 오히려 참된 주체성을 획득합니다. 듣는다는 것은 수동성으로 시작함을 뜻합니다. 왜냐하면 상대방이 말하지 않으면 들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수동성이야말로 서로 주체를 이룩하는 상호능동성, 즉 소통을 낳는 모태입니다. 이 역설이 바로 중용의 요체입니다.  

 

묻는다는 것은, 또한 겸손하다는 것입니다. 묻는 자는 답하는 자 아래 섭니다. 고개를 숙이고 두 손을 모아 기다립니다. 답하는 자를 중심에 놓고 자신은 변두리로 물러섭니다. 자신의 지혜는 답하는 자의 지혜에 "깃들" 따름입니다. 입만 열면 백성을 가르치려 드는 이 땅의 권력자와 얼마나 상반된 모습인지요.  

 

묻는 것은, 그리고 "보는" 것과 다릅니다. 보는 것은 보는 자의 눈에 의존합니다. 기실 보고 싶은 것만 보지요. 무엇보다 밖으로 드러난 현상만을 파악할 수 있으니 소통은 불가합니다. 보는 자는 소통을 거절하는 자입니다. 보는 자는 보이는 사물 위에 섭니다. 고개를 세우고 팔짱을 낍니다. 보이는 사물을 변두리에 세우고 자신이 중심에 섭니다. 자신의 지혜로 보이는 사물을 제압합니다.  

 

저는 한의사로서 우울증을 포함한 마음의 병을 상담/대화를 통해 치료하는 일을 합니다. 서양의 정신의학이나 심리학을 배운 사람들과 달리 한국 문화에 맞는 상담을 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서양 이론에 따르면 의사와 환자는 분리되어야 마땅합니다. 의사는 고치는 주체이고 환자는 고침을 받는 대상일 뿐이지요. 의사가 환자의 말을 듣기는 하지만 사실은 말하기 위해, 즉 가르치기 위해 듣는 것입니다. 그러나 한국적 정서로 보면 의사는 듣기 위해 말을 해야 합니다. 환자를 중심에 세우고 의사는 거기에 깃들어야 합니다.  

 

흔히 한의사는 척 보면 알아야 고수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마치 점쟁이처럼 "잘 보는" 한의사를 "용하다"고 합니다. 한의사 스스로도 대부분 망진(望診)을 우선으로 꼽습니다. 그러나 중용의 맥락에서 살피건대  묻는 것을 선두에 세우는 진단이 더 윗길입니다. 환자의 삶과 인격은 묻지 않으면 알 수 없습니다. 드러난 병이나 고친다면 의사는 그저 기술자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의사의 관심은 병을 넘어 사람 자체에 닿아야 합니다.  

 

묻고, 답하는 말에 귀 기울여 듣는 자가 大知임을 안다면 의사는 더 이상 환자 위에 군림하지 않을 것입니다. 의사와 환자가 서로 주체로서 소통을 이룰 때 진정한 치유가 일어납니다. 이 때 비로소 치유연대가 결성됩니다. 이 치유연대를 사회 전체로 확대하면  그게 곧 大同 세상인 것이지요.  

 

순임금은 大知로써 大同을 이룩했습니다. 大知의 길은 묻는 데서 시작됩니다. 경건하게 듣는 자가 大知의 기수입니다. 이 땅의 지배층은 지금 당장 눈 감고 입 다물어야 할 것입니다, 백성의 소리에 귀 기울이기 위하여.   

 

3. 임금 된 자가 백성 아래 서서 물으니 백성이 "평범한 말"로 답합니다. 저자거리에 흘러 다니는 "쌍스러운" 언어를 날 것인 채로 드러내겠지요. 사는 게 어찌 고달픈지, 정치판을 얼마나 한심하게 여기는지, 어디가 아픈지, 물가는 얼마나 뛰는지, 자식 놈은 무슨 속을 썩이는지.......  

 

장삼이사(張三李四)의 삶을 있는 그대로 듣기 위해 물었고, 들은 다음에는 사회를 통합하는 大同의 정치를 펼쳐낸 것이 舜이  한 일입니다. 백성이 주인이라고 선언하는 오늘날 권력자도 하지 않는 일을 전제군주가 했으니 가히 군자의 도요, 그래서 중용이라 일컬은 것입니다.  

 

중용의 뜻이 여기서 다시 한 번 명백해집니다. "특별한" 사람이 "평범함"에 깃들어 함께 "평범함"으로 통합되는 사건이 바로 舜의 중용인 것입니다. 결국 "특별함"은 사라집니다. 舜이 "평범함"에 승복하는데 누가 감히 스스로 높여 "특별하다" 할 것입니까?   

 

舜, 스스로 "특별함"을 버린 마음의 흐름, 몸의 실천이 중용입니다. 중용은 선험적 전제로 존재하는(being) 어떤 실체가 아닙니다. 중용은 구체적 실천을 통해 바야흐로 형성되는(becoming) 운동입니다. 이럼에도 기라성 같은 해석가들은 중용을 만고불변의 실체적 진리로 규정하여 높은 곳에 모시는 일에만 집착하고 있습니다.   

 

중용을 현실과 단절하여 형이상학의 세계로 끌고 감으로써 오히려 "명상"적 시공간에 가두어버리는 우를 범한 것입니다. 중용은 "명상"의 대상이 아닙니다. 중용은 "웰 빙"의 포로가 아닙니다. 중용은 도저한 현실 삶의 울퉁불퉁한 길을 걷는 결단이며 용기입니다.  

 

중용은 어지럽고 더러운 정치판을 혁파하는 에너지로 나타나야 합니다. 돈으로 인격을 사는 천민적 자본 판에 비수를 들이미는 기개로 드러나야 합니다. 전문지식의 독점을 통해 정보사회를 분할통치하는 야비한 엘리트에게 채찍을 드는 의분으로 뿜어져 나와야 합니다.  

 

중용의 언어는 예의 바르며 중용의 실천은 정중해야 한다는 통속 유교의 고정관념에서 중용을 해방하는 일이야말로 오늘을 사는 우리의 중용일 것입니다. 그 "어정쩡함"에 묶인  중용은 주희와 그 아류로서 족합니다. 물론 아직도 이 나라는 노론의 나라라는 자조가 들리지만  세상은 분명 달라져야 합니다.   

 

4. 고대의 파편문서(fragment)적 직관에 따른다면 "악을 감추고 선을 드러내시며, 그 두 끝을 붙잡아 그 가운데를 백성에게 쓰시니" 라는 구절은 후대에 가필한 느낌을 줍니다. 두 가지가 마음에 걸립니다.  

 

하나는 그 위상이 군더더기 같다는 것입니다. 그냥 "순(임금)은 크게 지혜로우시다. 순은 묻기를 좋아하시고 평범한 말을 살피기 좋아하시니, 그 이로써 순이 되신 것이다." 하여 그야말로 질박 명쾌한 제시로 부족함이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다른 하나는 내용이 후대의 통속적인 중용 이해에 터 잡은듯하다는 것입니다. 아이들에게 비유로써 가르치는 국민윤리 교과서 한 구절처럼 보이는군요. 격이 떨어지는 것도 그렇지만 내용 자체도 앞에 나온 "묻기를 좋아하시고......." 하는 부분과 유기적으로 연결되지 않는다는 느낌 또한  확실히 있습니다.    

 

5. 그러나 고증을 거치지 않은 이런 제 느낌을 뒤로 물리고 본문이 가지고 있는 뜻을 앞부분과 격 맞추어 생각해 보겠습니다. 악을 감추고 선을 드러낸다는 것은 얼핏 보면 정확한 대비인 것처럼 보이지만 곰곰 생각하면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선을 드러내는 것은 이의를 달기 어렵습니다. 헌데 악을 처리하는 것은 우리 윤리의식이나 법 감정과 어울리지 않지요. 악을 명백히 밝혀 제거하는 것이  선과의 대칭이라는 측면에서는 명쾌한 선택일 것입니다. 악을 제거하여 선한 세상을 만든다는 것은 인류가 오래 꿈꾸어 온 이상이 아니던가요?  

 

선으로 충만한 세상, 그러나 이것은 또 하나의 기만입니다. 영원히 논리적 가능성으로만 존재할 뿐인 가치입니다. 그 가치를 현실의 경세치용에 그대로 적용하면 독선이 됩니다. 선하기 때문에 악하게 되는 모순을 낳는 것입니다. 까닭은 자명합니다. 소통의 폐기!  

  

순이 악을 제거하지 않고 다만 감추는 차원에 놓아둔 것은 영원한 실체로서 선이 없듯이  영원한 실체로서 악도 없다는 사실을 꿰뚫어 보았기 때문입니다. 선악의 구분도 흘러가는 것입니다. 선이 이른바 "특별함"이 되지 않고 "평범함"이 되려면 악을 자신과 구분하여 떼어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이 바로 순의 大知입니다.   

  

백성에게 묻고 그들의 말에 귀 기울이는 마음으로 판단할 때, 그들의 고단한 삶이 빚어내는 악은 따스하고 너그럽게 "묻어주면" 언제라도 선으로 꽃필  것임을 알 수 있었던 것입니다. 순의 그 마음을 아는 한 "차마" 악을 되풀이 하지는 못했을 수도 있겠고요. 이게 소통이고, 이게 大同이 아닌가 합니다.  

 

좀 더 나아가 보지요. 상당히 많은 경우 악은 그 시대 사람들이 선택하지 않음으로써 버려진 가치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공간적, 공시(共時)적 지평에서는 악으로 규정될지라도 시간적, 통시(通時)적 맥락에서는 선이 될 수 있는 것이지요. 유연하고 다양한 관점을 지닌 사람의 넉넉함이 또한 중용입니다.   

 

6. 두 끝을 붙잡아 그 가운데를 백성에게 썼다는 것은 대칭/대립하는 두 가치/입장을 時中으로 조절하여 원만한 소통, 거래를 이루게 했다는 뜻일 터이니 길게 재론할 일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兩非論의 비겁함을 논급하고 넘어가겠습니다.    

 

딸아이와 일간 신문 사설을 비교해서 읽는 일을 가끔 합니다. 그런데 이른바 재벌언론이라 일컬어지는 거대 일간지 사설에 유난히 양비론이 많아서 그 문제를 집중적으로 이야기한 적이 있었습니다. 피상적으로 생각하면 양측의 단점 또는 악을 모두 비판하는 게 매우 정당해  보이지만 양비론은 두 가지 발톱을 숨기고 있습니다.  

 

자신의 공평함을 과시함으로써 도덕성을 확보하고 현실에서 발을 뺄 수 있는 근거를 남기는 기회주의가 그 하나입니다. 더 나쁜 발톱은 바로 양쪽을 싸잡아 비판함으로써 실제로는 힘 있는 쪽을 돕는 효과를 낸다는 것이지요. 양비론의 눈속임은 이른바 "산술적" 가운데를 중용이라 오해하게 합니다.    

 

제가 "두 끝을......." 운운하는 이 부분을 의혹의 눈초리로 보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순의 중용이라 보기보다는  후대 통속적 중용가의 양비론적 혐의가 짙어 보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 구절을 순의 수준에서 역동적으로 해석하면 그만이긴 하지요. 더 이상 거론하지 않겠습니다.  

 

7. 제가 쓰고 있는 글을 들여다 보던 아내가 결정적인 한 마디를 해주었습니다. "평범은 평등이네." 그렇습니다. 순의 중용은 평범함으로 大同을 이루는 정치경제학적 실천의 중용입니다. 중용은 "평등 원리를 구현함에서 벗어나지 않는" 사회적 덕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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