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알라딘 글쓰기에서 멀어졌던 시간 동안 트위터 글쓰기를 했습니다. 그렇게 쓴 140자 글 모음 일부를 올립니다. 

 

마음병 로드맵(1) 모든 마음병의 진원, 그 둥근 경계에는 공포와 불안이 자리 잡고 있다. 공포와 불안은 인간 존재의 숙명적 표지다. 無에서 有로 빚어지는 찰나 엄습하는 최초의 감정이자 에너지다. 공포는 有의 느낌을, 불안은 無의 느낌을 반영한다.


마음병 로드맵(2) 공포는 특정 경험을 해석적으로 기억하기 때문에 일어나고 불안은 그 기억을 일반화하기 때문에 일어난다. 일부/개체의 공포는 전부/전체의 불안으로 확산된다. 이 공포와 불안에 어떻게 반응하느냐에 따라 마음병은 서로 다른 길을 간다.


마음병 로드맵(3) 공포와 불안을 피하는 병적 반응은 시간의 맥락과 공간의 지평, 두 축으로 전개된다. 시간의 맥락은 항상성(常)의 문제다. 즉, 변할 거냐 말 거냐 하는 문제다. 공간의 지평은 경계성(我)의 문제다. 즉, 나냐 남이냐 하는 문제다. 


마음병 로드맵(4) 공포와 불안을 피하려고 시간의 맥락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극단적으로 부정하면 [강박]의 길로 간다. 규칙과 반복 뒤에 숨는 것이다. 변화를 극단적으로 긍정하면 [전환]의 길로 간다. 일탈과 즉흥 뒤에 숨는 것이다.


마음병 로드맵(5) 공포와 불안을 피하려고 공간의 지평에 세운 자아경계를 극단적으로 긍정하면 [분열]의 길로 간다. 자아의 성에 고립되는 것이다. 자아경계를 극단적으로 부정하면 [우울]의 길로 간다. 자아를 송두리째 해체하는 것이다.


마음병 로드맵(6) 마음병을 이렇게 한눈에 보는 발상은 苦, 無常, 無我를 설파한 세존의 가르침과 포개진다. 물론 원효의 一心, 和諍, 無碍 길이 그 사유를 넘어서고 치유까지 완성했다. 잡다한 미국식 정신의학으로는 당최 접근 불가능하다.


마음병 로드맵(7) 마음병도 결국은 생명 안에서 일어난다. 다만 생명을 지키기 위해 죽음의 일부를 부득불 도입하기에 병이라 이름 한 것이다. 이런 점에서 우울증은 가장 깊고 독한 마음병이다. 죽음을 단도직입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마음병 로드맵(8) 깊고 독해서 죽음과 도저한 상면을 하는 바로 그만큼 우울증은 세상 이치를 꿰뚫는 비수가 된다. 삶과 죽음의 경계를 가로지르는 관문이 될 수 있다. 無에서 有로, 다시 無로 가는 차원변이의 칼날 위에 선 역설미학이다.


마음병 로드맵(9) 대한민국은 우울공화국이다. 깊고 푸른 절망이 드리워져 있다. 바.로. 그.래.서. 희망이 엄존한다. 매판의 야차들이 죽음을 들이밀 때 그 죽음을 품어 안고 절망을 꿰뚫어 간다. 피눈물로 역설의 자유를 연다.


마음병 로드맵(10) 죽음은 다만 병의 귀착점이 아니다. 죽음은 병의 소실점이기도 하다. 마음병이 번져갈 때 죽음을 피하려 함으로써 죽음을 문제 중심에 놓지 마라. 마음병은 삶과 죽음의 경계를 가로지르는 이치를 깨닫게 하는 도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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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래블 테라피 - 심장의 속도로 걸어온 천일간의 치유 여행
권혁란 지음 / 휴(休) / 2011년 4월
평점 :
절판


 

저자는 제주도 법환 포구에 카페 나비오리를 차려 놓고 함초롬히 살고 있습니다. 해군기지 건설 반대운동을 4년째 하고 있는 강정마을 응원차 침놓으러 갔다가 잠시 들려 저자한테서 직접 책을 받았습니다. 처음 보았는데 아주 오랜 친구 같은 느낌을 받은 매우 드문 느낌의 사람이었습니다. 아이와 현자가 공존하는 매혹이랄까....... 해맑은 웃음과 부끄러움의 표시로 혀를 쏙 내미는 행동은 천상 소녀입니다. 꾸밈없이 붙여오는 말과  그 울림은 필경 현자입니다. 한 시간 남짓 머물다 왔는데 여운이 오래 남아 있습니다.  

삶이 송두리째 암흑으로 곤두박질치는 시공에서 출발한 치유의 여로. 다양한 형태와 내용의 여행을 통해 저자는 상처를 아물리고 삶의 결을 다시 세워 갑니다. 치유를 넘어선 깨침이 있습니다. 하여 저는 이 책을 내려놓으며 여행(旅行)이 곧 수행(修行)이란 표현이 더 맞다고 생각했습니다.  따라서 여행이야말로 저자의 삶의 고갱이가 아닐까 싶었습니다.  

고행처럼 행한 여행을 정리하며 저자는 한라산 자락 나지막한 삶의 자리로 돌아갔습니다. 이는 책 제7장, 나를 부르는 숲 부분에서 나오는 한국 최초의 여성 에베레스트 대장 남난희의 말로 대신 요약할 수 있습니다.  

칠십육일 동안 내내 한겨울 백두대간을 혼자 걸었다. 그때가 스물일곱. 세상은 놀랐고 나는 울었다.  여자 나이 스물아홉에 세계 최초로 히말라야 강가푸르나 봉에 올랐다. 세상은 놀랐고 나는 외로웠다. 삼십대 한가운데서 욕망의 산을 내려왔다. 지리산에서 차 향기를 나누고 조양강에서 자연학교를 꾸렸다. 이제 화개골에서 찻잎을 따고 된장을 쑤니 낮은 곳의 편안함이 너무 고맙다. 

남난희의 책 제목이 <낮은 산이 낫다>라고 합니다. 이는 저 붓다의 회향을 떠올리게 합니다. 물론 권혁란도 십분 공감했을 테지요. 인제 그 또한 제주의 오름을 흐르며 남난희의 이런 삶으로 가겠지요. 

언제부턴가 나의 삶은 아무것도 가지고 싶은 것이 없고, 아무것도 바라는 것이 없고, 아무것도 기다리지 않고, 아무것도 궁금하지 않다. 또 어느 곳도 가고 싶지 않고, 만나고 싶은 사람도 없게 되었다. 풀기가 다 빠진 풀처럼 가벼운 마음이다. 참 좋다. 

이는 저 붓다의 닙바나를 떠올리게 합니다. 물론 권혁란도 십분 공감했을  테지요. 한라산 노지 소주 한 잔을 부딪치며 온 몸으로 웃던 그 웃음이 왈칵 그리워집니다. 섬세한 수다(!) 갈피마다 들꽃처럼 피어있는 깨달음 가운데 제 영혼을 길게 끌어당긴 한 부분을 소개합니다. 

 .......걸어가는 풍경 속으로 휘익, 휘익, 계절이 지나간다.

그러니 살면서 잠시 마주친 사람에게, 한때 사랑한 사람에게 '당신에게 나는 무엇이냐'고 소리쳐 물을 필요가 없었던 것을. 당신에게 나는 한때 봄이었고, 가을이었고, 겨울이기도 했을 테니. 또한 한때 웃음이었고, 눈물이었고, 사랑이었고, 애인이었을 테니.

그저 '고마워요'라고 말하기만 하면 되었을 것을. 

그렇네요, 그렇습니다.  여행이 그렇듯 인생도 지나갑니다. 계절이 그렇듯 사람도 지나갑니다. 눈물도 웃음도....... 이 시각 권혁란이 무슨 일로 울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또 다른 시각엔 웃을 것이니 괜찮습니다.  

이 책 한 권 들고 훌쩍 떠나 나비오리 앉아 있는 저자를 만나러 가 보는 것, 어떠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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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박사 2011-10-19 17: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원장님
우연히 서평을 읽다가 원장님 블로그에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좋은글 감사히 잘 읽어보았습니다.
저도 한의학도인데요...^^
상한론에 관심이 많습니다. 상한론 공부를 어떻게 하셨는지, 어떻게 해야하는지 여쭈고자 합니다. 상한론도 책이 너무 많아서 어떤책들을 읽어야할지 막막합니다.
gollax@hanmail.net로 글을 주시거나, 번거로우시면 여기아래 댓글에 남겨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번거롭게 해드려서 죄송합니다.
늘 건승하시고 행복하세요~
꾸벅^^
 

 

5개월에 걸쳐 <중용>을 읽었습니다. 본디 이 중용 읽기는 2008년 당시 중학교 2학년이었던 제 딸아이와 함께 소박하게 시작한 것을 토대로 하고 있습니다. 그림 그리기 수준인 아이 한자 쓰기부터 시작해서 간단한 낱말풀이, 문장의 기본 뜻, 오늘 우리에게 주는 간결한 메시지 정도로 공부가 진행되었습니다.

 

그런데 읽어가면서 뚜렷하게 깨닫게 된 사실은, 오늘날 우리가 어떻게 오해하건 간에, 이 고대 텍스트는 정치적인 지향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마침 촛불정국이 형성되어 온 나라가 술렁이고 있었습니다. 하여 원칙적이나마 사회정치적 지평에서 <중용>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어떤 경우에는 매우 강하게, 직설적으로 현실 정치 문제를 언급했습니다. 그 내용을 공개적으로 게시했습니다.  

 

사단이 안 생길 리 없지요. 결국 현실 정치 문제를 언급한 부분 모두를 잘라낼 수밖에 없었습니다. 자연히 내용이 이상해졌지요. 그것을 방치해두었다가 작년 10월부터 다시 들여다보면서 고쳐 쓰고, 현실 정치에 대한 언급을 그나마 부드럽고, 모호하게 해서 복원시켰습니다.    

 

게으른 탓도 있지만 각인된 두려움과 맞서는 일이 쉽지만은 않았습니다. 자기검열의 힘, 대단히 무서운 것이더군요. 하여 뒤로 갈수록 미루어지면서 시간이 생각보다 많이 흘러버렸습니다. 이제 그 동안 해 온 독서를 마무리 지으려 합니다.    

 

특별하게 더 강조할 무엇이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우리에게 중용이 그러하듯 우리의 끝맺음도 평범할 것입니다. 중용은 우리, 평범한 사람들이 평등하게 서로 소통함으로써 다함께 행복하게 살아가도록 하는 일상적 실천입니다. 우리의 중용이 특별한 경지에 있기 때문에 시대의 어두움을 걷어내는 함성이 되는 게 아닙니다. 저 어둠이 우리의 소통과 공감을 가로막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요순을 꿈꾸는 게 아닙니다. 저들이 한사코 우리 위에 군림하고자 해서, 그리는 못한다, 바로잡을 따름입니다. 딱, 그뿐입니다.  

 

부디 이 작은 독서가 벗들에게 대승적 자아를 일깨우는 계기가 되었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일어난 자각이 우리사회의 질곡을 걷어내는 데 보탬이 된다면 <중용>은 우리의 <중용>일 것입니다. 물론 바로 그게 중용의 도일 테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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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제1장 본문입니다.  

 

天命之謂性 率性之謂道 修道之謂敎. 道也者 不可須臾離也 可離非道也. 是故 君子戒愼乎其所不睹 恐懼乎其所不聞. 莫見乎隱 莫顯乎微. 故 君子愼其獨也.

喜怒哀樂之未發謂之中 發而皆中節謂之和. 中也者天下之大本也 和也者天下之達道也. 致中和 天地位焉 萬物育焉.  

 

하늘이 명하는 것을 성(性)이라 하고 性을 따르는 것을 도(道)라 하고 道를 닦는 것을 교(敎)라 한다. 道에서는 잠시도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니 떠날 수 있다면 道가 아니다. 이 때문에 군자는 그 보이지 아니하는 곳에서 경계하고 삼가며 그 들리지 아니하는 곳에서 두려워한다. 숨은 것에서 가장 잘 나타나며 미세한 것에서 가장 잘 드러난다. 그러므로 군자는 그 홀로 있을 때 조심한다.

  기뻐하고 성내고 슬퍼하고 즐거워하는 정(情)이 아직 나타나지 아니한 상태를 ('속'이라는 의미로서) 중(中)이라 하고 나타나서 모두 절도에 맞게 된 상태를 화(和)라 한다. 中이란 천하의 큰 뿌리이고 和란 천하에 통하는 도리이다. 中과 和를 이루면 하늘과 땅이 제자리로 돌아가고 만물이 (제대로) 길러진다.  

 

2. 제1장은 주희가 썼다고 합니다. 처음엔 어기와 내용의 기획성을 보고 그냥 후대의 편집 의도 때문에 선두에 놓인 것이라 추정했는데 나중에 대가들의 주석을 보니 주희 작품이라는군요. 그리고 주석들은 대부분 문장의 웅혼함과 압축미에 찬탄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아마도 그런 제압 효과를 염두에 두고 주희는 깊은 고뇌 끝에 이 부분을 <중용> 텍스트의 도론(導論)이자 당당한 본문 제1장으로 배치했을 것입니다.  

 

주희의 의도대로 제1장부터 읽으면 <중용>은 주희의 독법으로 읽게 될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와 같이 그 의도에서 자유로워지기 위해 맨 뒤로 돌리면 전혀 다른 독법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부족하나마 우리는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일관성을 유지하며 여기까지 왔습니다. 그러면 당최 주희의 의도는 무엇이었을까요?  

 

3. 제1장 본문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앞부분은 마치 <중용> 전체의 대미(大尾)인 제33장을 요약, 선취(先取)한 듯한 분위기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性과 道와 敎를 정교한 논리 관계로 제시하여 중용에 단도직입으로 육박해 들어가는 길을 차단하고 있습니다. 더군다나 性과 道와 敎를 수직적 구조로 선명하게 구획함으로써 중용을 중세적 신분 질서 속에서 파악하도록 암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상천(上天)의 작용은 소리가 없고 냄새가 없다는 것이야말로 지극한 것이다(上天之載 無聲無臭 至矣)" 라고 한 제33장의 대승(大乘)적 결론을 비틀고 깎아서  "그 홀로 있을 때 조심한다(愼其獨也)"는 소승(小乘)적 결론으로 축소해버렸습니다. 홀로 있을 때 조심하는 것은 중용의 개별적 성찰이자 전 사회적 실천의 발단입니다. 물론 불가결한 고갱이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결론으로 삼을 수는 없지요. 이 일은 작정하고 그리 한 것이 아니라면 삼척동자도 하지 않을 짓입니다. 이런 사실을 눈치 채지 못한 후대 아류들은 신독(愼獨)을 선비의 최고 덕목으로 삼고 말았습니다. 愼獨은 백성과 쌍방향 소통하기 위한 조건일 뿐이거늘!  

 

뒷부분은 더욱 노골적입니다. 중용을 말하는 텍스트의 도론(導論)에 아예 대놓고 중화(中和)로 못을 쳐버립니다.  후대 사람들이 아무리 中和와 중용을 일치시키려 애를 써도 주희가 구태여 中和란 용어를 쓴 연유를 알지 못하는 한 허깨비 놀음에 지나지 않습니다. 주희의 중용은 그의 중화입니다. 중화는 中을 중세적 관료주의 틀 안에서 실천하는 것(和)입니다. 아니 和는 中을 관철시키기 위한 중세적 관료주의 시스템(節) 자체를 가리킵니다.  中은 천자(天子)이자 중화(中華)적 질서입니다.  

 

그 끈질긴 명사적 어법! 게다가 그 '자랑스런' 이기(理氣)와 체용(體用)의 이분법!  

 

최후로 깔끔하게 정리합니다.  

 

"中과 和를 이루면 하늘과 땅이 제자리로 돌아가고 만물이 (제대로) 길러진다(致中和 天地位焉 萬物育焉)."  

 

그야말로 초안정 시스템입니다. 하늘과 땅은 그저  제자리를 지킵니다(位)! 만물도 中의 뜻대로 사육됩니다(育)! 우리는 맨 마지막 문장에도 주희의 주도면밀한  의도가 개입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새로이 빚어짐, 즉 화(化)를 빼버리고 育만을 남긴 것은 변화를 불온하게 여기는 정치적 선택의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4. 우리는 제1장을 제33장 뒤에 읽음으로써  이런 자유, 이런 통찰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이 사실은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교훈을 던져줍니다. 사회정치적 헤게모니 블록이 제공한 인지(認知) 도식(scheme)에 갇혀 사고하면 결국 그들이 기획하는 그들만의 안정체제 안에서 꼼짝 없이 부품으로 전락하고 만다는 것입니다.  

 

<중용>은 주희로 말미암아 공자의 손을 떠났습니다. 오늘의 우리는 <중용>을 주희의 손에서 떠나게 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과제를 안고 <중용> 앞에 서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오늘 한국 사회를 사는 우리가 말하는 중용은 무엇일까요? 직접적인 답을  뒤로 미루고 최근 마주한 에피소드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답이 자명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헤게모니블록의 핵심에서 방사능 위험성을 퍼뜨리는 '좌빨'이 있다는 어처구니 없는 말이 흘러나왔지요. 그들은 대체 뭐가 무서운 걸까요? 그들에게 주희의 中和를 들이밀어 보면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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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철학의 역사 프라즈냐 총서 1
D. J. 칼루파하나 지음, 김종욱 옮김 / 운주사 / 2008년 12월
평점 :
품절


1. 제 독서의 흐름에서 불교사상은 매우 중요합니다. 종교로서 불교에 관심이 있어서가 아니라 붓다의 생각을 제대로 알기 위해서입니다. 붓다에 대한 관심은 원효에서 비롯하였습니다. 원효에 대한 관심은 한국적 상담의 틀과 내용을 찾는 과정에서 생겼습니다. 한국적 상담의 틀과 내용에 대한 관심은 제 인생 전체가 걸린 화두의 구체적 소산입니다.  

서양 논리에 터 잡은 사회과학 가녘에서 서성인 20대, 서양 논리의 정점이라 할 수 있는 신학 언저리에서 서성인 30대, 그 20년 세월을 거쳐, 40대부터 우리 논리를 직접 찾아 나서면서 이제 50대 중반을 넘어가고 있습니다. 20대부터 누군가에게 상담자 노릇을 하면서 살아 왔고 지금도 여전히 그러하기에, 상담은 말이고, 말은 생각이고, 생각은 논리라는 사실에 깊이 연루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하여 가능한 모든 길을 걸어가면서 제 자신과 생태적으로 같은 사람들의 생각과 논리와 말을 물었습니다. 그러다 최근 몇 년 사이, '폭풍' '종결자'를 찾았습니다. 다름 아닌, 원효!   

원효만으로, 사실, 저는 족합니다. 그는 세계성을 지닌 존재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붓다를 넘어선 '붓다'입니다. 다만, 우리사회도, 또 대부분의 우리 불자들도, 더군다나 세계 불자들도 이를 모를 뿐이지요. 이런 상황에서 제가 붓다를 면밀하게 찾는 까닭은, 이미 세계성 또는 보편성을 인정받고 있는  붓다 사상의 진실, 그 타당성이 어떻게 원효와 만나는지 보기 위해섭니다.  

그 목적을 위해 불교 경전 자체는 물론, 그것을 철학적으로 해석한 문헌, 인도 사상 전체 맥락에서 살피는 문헌 등을 읽어 왔습니다. 그들 가운데 몇 가지는 이미 소개한 바 있습니다. 최근에 발견한 칼루파하나의 이 <불교철학의 역사>는 그 무엇보다 초기 경전에 터 잡아 붓다의 철학의 성격과 내용을 명확히 드러내고, 붓다 이후 나타난 사상들의 흐름을 붓다 철학과 부합하느냐 여부에 따라 연속과 불연속으로 나누어 살피고 있어, 최근 불교 내부에서 일어나 번지고 있는 대승불교 비불설, 초기불교 소승 논쟁을 일정 정도 교통정리 해줄 근거 지식으로 삼을만하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이른바 초기불교를 지지하면서 대승불교 전반에 적대적이기까지 한 비판적인 견해를 숨기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필독의 책임에 틀림없습니다. 물론 대승불교 쪽 사람들도 초기경전에 입각하여 붓다의 철학이 대체 어떤 것인지, 자신들의 생각과 전혀 다른 점은 없는지, 살피기 위해서, 이 책은 꼭 읽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한계도 있습니다. 중국을 거쳐 우리나라, 그리고 일본으로 들어와 널리 자리 잡은 대승불교 전반에 대한 연구가  이 책에는 포함되어 있지 않습니다. 저자 자신이 이 점은 솔직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선불교 가운데 임제종을 제외하고는 붓다의 철학과 부합하는 면모를 지닌 게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대표적인 대승경전으로 법화경, 능가경, 화엄경을 꼽고, 이에 터 잡아 일어난 불교 유파에 대해서는 논급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고 합니다. 화엄경에 대한 이야기는 전혀 없으니 제쳐두고, 이 책에서 행한 법화경과 능가경에 대한 그의 분석이 옳다면 구태여 이 문제를 가지고 왈가왈부 할 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아쉬움이 있다면 조동종과 임제종의 차이를 저자가 설명한 방식으로 이해할 수 있는가, 동아시아 3국의 불교에 대한 이해가 일본 중심이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저로서는, 저자가 원효를 전혀 모르고 있다는 사실이 안타깝지만, 그 또한 그의 삶의 맥락에서 오는 필연이라 생각하고, 그저 유익한 부분만 흔쾌히 받기로 했습니다.  

2. 제1부에서 저자는 궁극적 객관성의 탐구와 인도철학, 붓다의 생애, 인식과 이해, 경험과 이론, 언어와 의사소통, 인간의 주체성, 대상, 괴로움의 문제, 자유와 행복, 도덕생활, 대중의 종교 사상 등으로 주제를 설정하여 치밀하게 붓다의 사상을 돋을새김 하고 있습니다. 

우선 전체 서론, 또는 도론(導論) 격인 제1장, 궁극적 객관성의 탐구와 인도철학 부분에서, 저자는 브라흐만교에서 자이나교에 이르는 제 사상을 두루 살핀 후, 붓다의 사상을 이렇게 정향(定向)합니다. 

"철학적 담론을 통해 궁극이 객관성에 도달하려는 시도의 결과가 절대주의라면, 그리고 그러한 시도가 실패한 이유를 보여주는 것이 극단적인 회의주의라고 한다면, 붓다가 인간의 경험에 관해 설명한 것은 그러한 객관성의 갈구 자체를 파기하고 중도를 통해서 절대주의와 극단적 회의주의 모두를 지양하려 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26쪽)

붓다 사상은 중도사상이다, 그 중도는 인간의 경험을 말하는 것으로 이루어진다, 이런 내용이지요. 이 결론에 앞선 표현을 보면 조금 더 명확한 이해를 얻을 수 있습니다. 즉, 

".......붓다는 인간 인식의 한계를 기꺼이 받아들여, 궁극적 객관성을 갈구하지 않으면서도 진리와 실재에 대해 타당한 설명을 제시할 수가 있었다. 이러한 접근 태도로 말미암아 그는 존재론적이고 형이상학적인 입장에 매이지 않고도 언어를 보다 더 의미 있는 방식으로 다룰 수 있게 되었다. 이런 이유들 때문에 붓다는 인도의 철학자들을 수세기 동안 괴롭혀 온 궁극의 기원이나 운명에 관한 문제에 대해서 물음을 제기하거나 혹은 답변을 제시하는 것을 삼갔다......."(25쪽)  

사실 여기서 이미 붓다 사상의 근본 성격이 드러납니다. 그것을 도처에서 이런 두 용어로 반복 언급하면서 결을 잡아 나아갑니다.  

첫째, 근본적 경험주의(radical empricism) 

둘째, 실용주의(pragmatism) 

사실, 우리는 고등학생 수준에서 이미 알고 있는 경험주의와 실용주의란 말에, 아니 그 말의 인플레이션에 따른 피상성에 일정 정도 중독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응~, 붓다 사상, 뭐, 별 거 아니네, 이럴 가능성이 높지요. 그러나 이 말은 진실의 적인 양 극단을 부정하고, 또는 놓아버리고 중도를 취하는 데, 더 이상의 무게를 지니는 다른 태도가 없을 만큼 기품 있고 옹골찬  내용을 지닙니다. 그러므로 우리 상식을 비우고 그 내용을 붓다를 통해 다시 배워야 합니다. 

중도로서 근본적 경험주의와 실용주의를 철학적 지평에서 공시적으로 말하면 이렇게 나타납니다. 

".......인식론적으로는 절대론과 회의론 사이.......존재론적으로는 영원론과 허무론 사이.......윤리학적으로는 의무론과 정의(情意)론 사이.......언어 철학적으로는 실재론과 유명론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들 사이의 중도......."(488-489쪽) 

이 것을 다시 통시적 논리 과정으로, 역자의 표현을 빌어, 말하면 이렇습니다. 

".......해체와 재건이다. 무상(無常)과 무아(無我)와 공(空)은 변화하는 세계의 근저에 놓인 영원불변의 기초나 본질이나 실체를 부정하는 비토대주의, 비본질주의, 비실체주의라는 점에서, 항구적 절대자를 정점으로 축조된 형이상학적 건축물을 허물어뜨리는 반절대주의적 해체의 과정이다. 그러나 모든 구조물이 철거된 황량한 허무의 공터가 종착점은 아니다. 고정불변의 일방적 시각을 떠난 중도의 입장에서, 상호간의 맥락에 따라 모든 구성요소들의 관계성을 복원하는 연기(緣起)가 새로운 재건의 과정으로서 남아 있는 것이다......."(524쪽) 

그리고 보면 붓다의 이러한 사유와 실천은 세계 구조가 비대칭적 대칭성으로 되어 있으며, 실제 상황은 그 대칭구조를 자발적으로 깨뜨리는 운동으로 나타난다는 현대과학적 발견을 정확하게 선취한 것입니다. 대칭구조는 두 극단이 마주서 있는 것을 가리키는데 그 극단이라는 것은 현실에서 존재하지 않는 이론, 또는 관념의 존재이므로 그 어떤 극단의 옹호도 사실은 허구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허구는 무조건의 신념입니다. 무조건의 신념은 경험 밖의 이야기이며 결과적으로 실용성도 없습니다. 바로 이런 진실을 꿰뚫어 본 붓다는 그 미망을 흔들어 격정을 가라앉히고 잔잔한 자유, 저 닙바나와 행복으로 나아가는 길을 제시한 것입니다.   

3. 이런 붓다의 가르침을 바탕으로 하여 후대 사상을 조명하는 제2부, 바로 여기가 실제로 불자들이 주의를 바짝 기울여야 할 부분입니다.  

붓다 사상과 연속을 이루는 경전과 사람들로는 금강경, 목갈리풋다 팃사, 나가르주나(용수), 바수반두(세친), 디그나가(진나), 혜능(임제선)이 있습니다. 불연속을 이루는 경전과 사람들로는 법화경, 능가경, 붓다고사, 찬드라키르티(나가르주나 주석자), 스티라마티(바수반두 주석자), 다르마키르티(디그나가 주석자), 신수(조동종)가 있습니다. 

이른바 초기불교 신봉자들 가운데 다수가 나가르주나, 바수반두, 디그나가, 혜능 모두가 비불설이라고 여깁니다. 저자는 세밀하게 이런 오해를 반박하고 있습니다. 더욱 흥미로운 반전은 바로 붓다고사입니다. 그가 쓴 청정도론은 대부분의 초기불교 신봉자들에게 존숭 대상이 되는 텍스트입니다. 비록 조화라는 부드러운 표현을 쓰고 있지만, 붓다고사는 전략적 절충주의자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교묘하게 절대주의를 끼워넣고 있음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현재 우리나라 불교 상황에서 보면 매우 중대한 논쟁을 일으킬만한 내용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저자의 견해가 다 옳은 것은 아닐 테지요. 그러나 적어도 이런 정도의 학문적 치밀성과 정직성을 지닌 사람이 우리나라에 거의 없는 게 사실이라면 겸허하게 이 논점을 받아 자기성찰의 토대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제삼자의 처지에서 보면 목하 초기불교 신봉자들은 말로는 절대주의 초일극구조 종교집단을 비판하지만 실제로 초기불전이나 청정도론 대하는 태도를 보면 그런 종교인이 그들의 경전을 대하는 태도와 다를 바가 거의 전혀 없습니다. 매우 경직된 축자주의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가 하면, 기본적인 언어이론, 문헌비평도 안 된 상태에서 특정 연구자의 이론에 기대어 상대방을 몰아세우기 일쑤입니다. 이런 유아기적 태도 자체가 붓다의 가르침에 배치된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는 모양입니다. 안타깝고 슬픈 일입니다. 물론 여기서 그냥 끝나지는 않겠지요. 이런 시기도 있기 마련일 테지요. 마음을 다한 기다림으로 지켜보겠습니다.  

4. 개인적으로 상담을 통해 사람의 마음을 만지는 일을 하는 자로서 주의 깊게 본 한 부분을 말씀드려 보겠습니다. 붓다가 설법을 통해 사람과 소통하고, 그 생각과 삶을 바꾸어 내는 과정에 관한 것입니다. 

"우리는 붓다가 설법을 시작하고 끝맺을 때 네 가지 단계를 거치고 있음을 자주 보게 된다. 첫 번째 단계는 '보여줌', 즉 문제를 제시하는 것이다.......그 사람의 현재 상황을 설명하고자 하며.......그것을 실제 있는 그대로 설명하고자 한다. 두 번째의 단계에서.......사물이나 현상이 지닌 비실체성을 강조함으로써, 어떤 '동요'를 유발시키려고 한다.......세 번째의 단계에서는 문제에서 벗어나는 방법이 제시됨으로써 동요가 곧 가라앉게 된다.......마지막 단계에서 붓다는 설법을 듣는 사람을 굳이 자신의 사유방식으로 전환시키고자 하지 않는데, 그 이유는 듣는 사람이 구태여 애쓰지 않아도 그의 설명을 받아들이기에 이르기 때문이다."(151-152쪽) 

매우 놀랍게도 붓다의 이런 방식은 제가 상담 치료를 8단계로 나누어 '한 요법'이라 이름 한  내용과 정확히 일치합니다. 물론 저는, 초기 불전에 나타난 붓다의 설법 방식을 전혀 모른 채, 원효 사상에 터 잡아 큰 얼개를 잡고 그것을 다시 세분화하여 나름대로 틀을 만들었습니다. 그럼에도 이렇게 일치하는 것을 보면서, 원효 사상과 붓다 사상의 근본적 일치를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아니, 당연한 거 아니냐, 하실 분도 계시겠지만,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대승불교 전승의 흐름 속에 있는 원효가 초기불전에 나타난 붓다의 '원음(原音)'을 접했을 가능성은 거의 없을 테고, 오히려 초기불교 신봉자들이 백안시하는 대승경전에 의거해 사상을 펼쳤을 테니, 어떻게 두 분의 사상이 일치할 수 있느냐, 이렇게 물어야 더 자연스러운 것이지요. 

그렇게 질문해 보지요. 자, 어떻게 두 분의 사상이 일치할 수 있었을까요? 둘로 나누어 생각하겠습니다. 우선 보편적 이치를 염두에 둘 때 한 사회의 패권을 쥐고 있는 이른바 헤게모니 블록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영속화하기 위해 실체, 본질, 토대 개념으로 구성된 절대주의를 구축하게 마련이고 문자 또한 거기에 복무하도록 구성하게 되어 있습니다. 붓다 당시 아리안 기원의 베다-우파니샤드에 기댄 브라흐만 사상, 그것을 기록한 고급 산스크리트어가 바로 그런 예이고, 원효 당시 흉노적 기원을 가진 김씨 신라와 대당 유학승 중심의 대승불교 사상, 그것을 기록한 의상 류의 시(詩)적 한문이 바로 그런 예입니다. 이 절대주의에 정면 도전을 감행하며 비실체주의, 비본질주의, 비토대주의 사상을 펼친 것이 붓다이며 원효입니다. 붓다는 동북 인도 지방의 토속어로 설법했으며, 원효는 소(疎) 로써 민중지향의 글을 썼습니다. 이런 공통점 때문에 두 분의 사상은 근본적으로 일치할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다른 하나는 원효를 중심으로 한 이야깁니다. 원효 사상은 단순히 중국 계통의 불교 사상만의 영향을 받은 게 아닙니다. 그보다 더 오랜 근원을 지닌 생태공동체의 토속적인 사상의 영향도 받았습니다.  오히려 후자의 영향이 더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 토속 사상이란 다름 아닌 '한' 사상이지요. '한' 사상은 그 어떤 사상보다 절대주의를 거부합니다. 비실체주의, 비본질주의, 비토대주의가 생명감각 전반에 두루 퍼져 있습니다. 이 '한' 사상을 바탕에 깔고 있었기 때문에 '대승경전'을 보면서도(!) 원효는 붓다 사상의 정수를 간취할 수 있었습니다. 붓다의 생태공동체도 우리와 유사한 생명감각을 지니고 있었을 것이라고 추정하지만 이는 제 능력 밖의 문제라 그냥 원효를 중심으로 이야기하였습니다. 

그러면 왜 원효를, 붓다를 이리도 공들여 붙잡은 것일까요? 오늘 우리의 상황과 맞물려 있기 때문입니다. 붓다까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적어도 원효의 상황은 거의 정확히 오늘 우리의 그것과 같습니다. 통일을 둘러싼 이데올로기적 대립, 통치집단의 행태, 지배 엘리트의 학문적 정체성과 그 어법, 바람직한 대안.......이 모든 문제에서 우리는 원효를, 그리고 붓다를 소환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저 같은 무명의 의자(醫者)야 이렇게 큰 담론을 견딜 수 없고 다만 마음 아픈 사람 상담으로 치료하는 일이나마 원효의 길, 붓다의 길을 실천함으로써 나름의 기여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5. 종교로서 불교에 관심 없으신 분께 종조(宗祖)로서 붓다를 말씀드리려는 의도는 전혀 없습니다. 절대주의를 해체하고 경험과 실용으로 참된 삶의 결을 세운 큰 스승으로서 붓다를 우리 앞에 세우려는 것입니다. 누군가, 그럼, 예수는 어떠신가?, 물어 올 텐데, 저는 개인적으로 지금의 통속 기독교인의 생각과 달리, 깊이 들어가 보면 예수 또한  붓다처럼 절대주의를 거부하고 정도(正道)로서 중도(中道)를 산 스승임을 알게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우리가 간절하게 찾는 스승은, 그 이름이 무엇인가와 상관 없이, 초일극집중구조로서 절대주의가 일으킨 인류 멸절의 위기에 당당히 맞설, 그런 분이어야 합니다. 이 문제의식을 벼리기 위해서라면 500쪽이 넘는 이 학문적인 책도 한 번 품어봄 직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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