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철학의 역사 프라즈냐 총서 1
D. J. 칼루파하나 지음, 김종욱 옮김 / 운주사 / 2008년 12월
평점 :
품절


1. 제 독서의 흐름에서 불교사상은 매우 중요합니다. 종교로서 불교에 관심이 있어서가 아니라 붓다의 생각을 제대로 알기 위해서입니다. 붓다에 대한 관심은 원효에서 비롯하였습니다. 원효에 대한 관심은 한국적 상담의 틀과 내용을 찾는 과정에서 생겼습니다. 한국적 상담의 틀과 내용에 대한 관심은 제 인생 전체가 걸린 화두의 구체적 소산입니다.  

서양 논리에 터 잡은 사회과학 가녘에서 서성인 20대, 서양 논리의 정점이라 할 수 있는 신학 언저리에서 서성인 30대, 그 20년 세월을 거쳐, 40대부터 우리 논리를 직접 찾아 나서면서 이제 50대 중반을 넘어가고 있습니다. 20대부터 누군가에게 상담자 노릇을 하면서 살아 왔고 지금도 여전히 그러하기에, 상담은 말이고, 말은 생각이고, 생각은 논리라는 사실에 깊이 연루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하여 가능한 모든 길을 걸어가면서 제 자신과 생태적으로 같은 사람들의 생각과 논리와 말을 물었습니다. 그러다 최근 몇 년 사이, '폭풍' '종결자'를 찾았습니다. 다름 아닌, 원효!   

원효만으로, 사실, 저는 족합니다. 그는 세계성을 지닌 존재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붓다를 넘어선 '붓다'입니다. 다만, 우리사회도, 또 대부분의 우리 불자들도, 더군다나 세계 불자들도 이를 모를 뿐이지요. 이런 상황에서 제가 붓다를 면밀하게 찾는 까닭은, 이미 세계성 또는 보편성을 인정받고 있는  붓다 사상의 진실, 그 타당성이 어떻게 원효와 만나는지 보기 위해섭니다.  

그 목적을 위해 불교 경전 자체는 물론, 그것을 철학적으로 해석한 문헌, 인도 사상 전체 맥락에서 살피는 문헌 등을 읽어 왔습니다. 그들 가운데 몇 가지는 이미 소개한 바 있습니다. 최근에 발견한 칼루파하나의 이 <불교철학의 역사>는 그 무엇보다 초기 경전에 터 잡아 붓다의 철학의 성격과 내용을 명확히 드러내고, 붓다 이후 나타난 사상들의 흐름을 붓다 철학과 부합하느냐 여부에 따라 연속과 불연속으로 나누어 살피고 있어, 최근 불교 내부에서 일어나 번지고 있는 대승불교 비불설, 초기불교 소승 논쟁을 일정 정도 교통정리 해줄 근거 지식으로 삼을만하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이른바 초기불교를 지지하면서 대승불교 전반에 적대적이기까지 한 비판적인 견해를 숨기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필독의 책임에 틀림없습니다. 물론 대승불교 쪽 사람들도 초기경전에 입각하여 붓다의 철학이 대체 어떤 것인지, 자신들의 생각과 전혀 다른 점은 없는지, 살피기 위해서, 이 책은 꼭 읽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한계도 있습니다. 중국을 거쳐 우리나라, 그리고 일본으로 들어와 널리 자리 잡은 대승불교 전반에 대한 연구가  이 책에는 포함되어 있지 않습니다. 저자 자신이 이 점은 솔직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선불교 가운데 임제종을 제외하고는 붓다의 철학과 부합하는 면모를 지닌 게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대표적인 대승경전으로 법화경, 능가경, 화엄경을 꼽고, 이에 터 잡아 일어난 불교 유파에 대해서는 논급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고 합니다. 화엄경에 대한 이야기는 전혀 없으니 제쳐두고, 이 책에서 행한 법화경과 능가경에 대한 그의 분석이 옳다면 구태여 이 문제를 가지고 왈가왈부 할 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아쉬움이 있다면 조동종과 임제종의 차이를 저자가 설명한 방식으로 이해할 수 있는가, 동아시아 3국의 불교에 대한 이해가 일본 중심이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저로서는, 저자가 원효를 전혀 모르고 있다는 사실이 안타깝지만, 그 또한 그의 삶의 맥락에서 오는 필연이라 생각하고, 그저 유익한 부분만 흔쾌히 받기로 했습니다.  

2. 제1부에서 저자는 궁극적 객관성의 탐구와 인도철학, 붓다의 생애, 인식과 이해, 경험과 이론, 언어와 의사소통, 인간의 주체성, 대상, 괴로움의 문제, 자유와 행복, 도덕생활, 대중의 종교 사상 등으로 주제를 설정하여 치밀하게 붓다의 사상을 돋을새김 하고 있습니다. 

우선 전체 서론, 또는 도론(導論) 격인 제1장, 궁극적 객관성의 탐구와 인도철학 부분에서, 저자는 브라흐만교에서 자이나교에 이르는 제 사상을 두루 살핀 후, 붓다의 사상을 이렇게 정향(定向)합니다. 

"철학적 담론을 통해 궁극이 객관성에 도달하려는 시도의 결과가 절대주의라면, 그리고 그러한 시도가 실패한 이유를 보여주는 것이 극단적인 회의주의라고 한다면, 붓다가 인간의 경험에 관해 설명한 것은 그러한 객관성의 갈구 자체를 파기하고 중도를 통해서 절대주의와 극단적 회의주의 모두를 지양하려 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26쪽)

붓다 사상은 중도사상이다, 그 중도는 인간의 경험을 말하는 것으로 이루어진다, 이런 내용이지요. 이 결론에 앞선 표현을 보면 조금 더 명확한 이해를 얻을 수 있습니다. 즉, 

".......붓다는 인간 인식의 한계를 기꺼이 받아들여, 궁극적 객관성을 갈구하지 않으면서도 진리와 실재에 대해 타당한 설명을 제시할 수가 있었다. 이러한 접근 태도로 말미암아 그는 존재론적이고 형이상학적인 입장에 매이지 않고도 언어를 보다 더 의미 있는 방식으로 다룰 수 있게 되었다. 이런 이유들 때문에 붓다는 인도의 철학자들을 수세기 동안 괴롭혀 온 궁극의 기원이나 운명에 관한 문제에 대해서 물음을 제기하거나 혹은 답변을 제시하는 것을 삼갔다......."(25쪽)  

사실 여기서 이미 붓다 사상의 근본 성격이 드러납니다. 그것을 도처에서 이런 두 용어로 반복 언급하면서 결을 잡아 나아갑니다.  

첫째, 근본적 경험주의(radical empricism) 

둘째, 실용주의(pragmatism) 

사실, 우리는 고등학생 수준에서 이미 알고 있는 경험주의와 실용주의란 말에, 아니 그 말의 인플레이션에 따른 피상성에 일정 정도 중독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응~, 붓다 사상, 뭐, 별 거 아니네, 이럴 가능성이 높지요. 그러나 이 말은 진실의 적인 양 극단을 부정하고, 또는 놓아버리고 중도를 취하는 데, 더 이상의 무게를 지니는 다른 태도가 없을 만큼 기품 있고 옹골찬  내용을 지닙니다. 그러므로 우리 상식을 비우고 그 내용을 붓다를 통해 다시 배워야 합니다. 

중도로서 근본적 경험주의와 실용주의를 철학적 지평에서 공시적으로 말하면 이렇게 나타납니다. 

".......인식론적으로는 절대론과 회의론 사이.......존재론적으로는 영원론과 허무론 사이.......윤리학적으로는 의무론과 정의(情意)론 사이.......언어 철학적으로는 실재론과 유명론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들 사이의 중도......."(488-489쪽) 

이 것을 다시 통시적 논리 과정으로, 역자의 표현을 빌어, 말하면 이렇습니다. 

".......해체와 재건이다. 무상(無常)과 무아(無我)와 공(空)은 변화하는 세계의 근저에 놓인 영원불변의 기초나 본질이나 실체를 부정하는 비토대주의, 비본질주의, 비실체주의라는 점에서, 항구적 절대자를 정점으로 축조된 형이상학적 건축물을 허물어뜨리는 반절대주의적 해체의 과정이다. 그러나 모든 구조물이 철거된 황량한 허무의 공터가 종착점은 아니다. 고정불변의 일방적 시각을 떠난 중도의 입장에서, 상호간의 맥락에 따라 모든 구성요소들의 관계성을 복원하는 연기(緣起)가 새로운 재건의 과정으로서 남아 있는 것이다......."(524쪽) 

그리고 보면 붓다의 이러한 사유와 실천은 세계 구조가 비대칭적 대칭성으로 되어 있으며, 실제 상황은 그 대칭구조를 자발적으로 깨뜨리는 운동으로 나타난다는 현대과학적 발견을 정확하게 선취한 것입니다. 대칭구조는 두 극단이 마주서 있는 것을 가리키는데 그 극단이라는 것은 현실에서 존재하지 않는 이론, 또는 관념의 존재이므로 그 어떤 극단의 옹호도 사실은 허구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허구는 무조건의 신념입니다. 무조건의 신념은 경험 밖의 이야기이며 결과적으로 실용성도 없습니다. 바로 이런 진실을 꿰뚫어 본 붓다는 그 미망을 흔들어 격정을 가라앉히고 잔잔한 자유, 저 닙바나와 행복으로 나아가는 길을 제시한 것입니다.   

3. 이런 붓다의 가르침을 바탕으로 하여 후대 사상을 조명하는 제2부, 바로 여기가 실제로 불자들이 주의를 바짝 기울여야 할 부분입니다.  

붓다 사상과 연속을 이루는 경전과 사람들로는 금강경, 목갈리풋다 팃사, 나가르주나(용수), 바수반두(세친), 디그나가(진나), 혜능(임제선)이 있습니다. 불연속을 이루는 경전과 사람들로는 법화경, 능가경, 붓다고사, 찬드라키르티(나가르주나 주석자), 스티라마티(바수반두 주석자), 다르마키르티(디그나가 주석자), 신수(조동종)가 있습니다. 

이른바 초기불교 신봉자들 가운데 다수가 나가르주나, 바수반두, 디그나가, 혜능 모두가 비불설이라고 여깁니다. 저자는 세밀하게 이런 오해를 반박하고 있습니다. 더욱 흥미로운 반전은 바로 붓다고사입니다. 그가 쓴 청정도론은 대부분의 초기불교 신봉자들에게 존숭 대상이 되는 텍스트입니다. 비록 조화라는 부드러운 표현을 쓰고 있지만, 붓다고사는 전략적 절충주의자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교묘하게 절대주의를 끼워넣고 있음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현재 우리나라 불교 상황에서 보면 매우 중대한 논쟁을 일으킬만한 내용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저자의 견해가 다 옳은 것은 아닐 테지요. 그러나 적어도 이런 정도의 학문적 치밀성과 정직성을 지닌 사람이 우리나라에 거의 없는 게 사실이라면 겸허하게 이 논점을 받아 자기성찰의 토대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제삼자의 처지에서 보면 목하 초기불교 신봉자들은 말로는 절대주의 초일극구조 종교집단을 비판하지만 실제로 초기불전이나 청정도론 대하는 태도를 보면 그런 종교인이 그들의 경전을 대하는 태도와 다를 바가 거의 전혀 없습니다. 매우 경직된 축자주의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가 하면, 기본적인 언어이론, 문헌비평도 안 된 상태에서 특정 연구자의 이론에 기대어 상대방을 몰아세우기 일쑤입니다. 이런 유아기적 태도 자체가 붓다의 가르침에 배치된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는 모양입니다. 안타깝고 슬픈 일입니다. 물론 여기서 그냥 끝나지는 않겠지요. 이런 시기도 있기 마련일 테지요. 마음을 다한 기다림으로 지켜보겠습니다.  

4. 개인적으로 상담을 통해 사람의 마음을 만지는 일을 하는 자로서 주의 깊게 본 한 부분을 말씀드려 보겠습니다. 붓다가 설법을 통해 사람과 소통하고, 그 생각과 삶을 바꾸어 내는 과정에 관한 것입니다. 

"우리는 붓다가 설법을 시작하고 끝맺을 때 네 가지 단계를 거치고 있음을 자주 보게 된다. 첫 번째 단계는 '보여줌', 즉 문제를 제시하는 것이다.......그 사람의 현재 상황을 설명하고자 하며.......그것을 실제 있는 그대로 설명하고자 한다. 두 번째의 단계에서.......사물이나 현상이 지닌 비실체성을 강조함으로써, 어떤 '동요'를 유발시키려고 한다.......세 번째의 단계에서는 문제에서 벗어나는 방법이 제시됨으로써 동요가 곧 가라앉게 된다.......마지막 단계에서 붓다는 설법을 듣는 사람을 굳이 자신의 사유방식으로 전환시키고자 하지 않는데, 그 이유는 듣는 사람이 구태여 애쓰지 않아도 그의 설명을 받아들이기에 이르기 때문이다."(151-152쪽) 

매우 놀랍게도 붓다의 이런 방식은 제가 상담 치료를 8단계로 나누어 '한 요법'이라 이름 한  내용과 정확히 일치합니다. 물론 저는, 초기 불전에 나타난 붓다의 설법 방식을 전혀 모른 채, 원효 사상에 터 잡아 큰 얼개를 잡고 그것을 다시 세분화하여 나름대로 틀을 만들었습니다. 그럼에도 이렇게 일치하는 것을 보면서, 원효 사상과 붓다 사상의 근본적 일치를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아니, 당연한 거 아니냐, 하실 분도 계시겠지만,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대승불교 전승의 흐름 속에 있는 원효가 초기불전에 나타난 붓다의 '원음(原音)'을 접했을 가능성은 거의 없을 테고, 오히려 초기불교 신봉자들이 백안시하는 대승경전에 의거해 사상을 펼쳤을 테니, 어떻게 두 분의 사상이 일치할 수 있느냐, 이렇게 물어야 더 자연스러운 것이지요. 

그렇게 질문해 보지요. 자, 어떻게 두 분의 사상이 일치할 수 있었을까요? 둘로 나누어 생각하겠습니다. 우선 보편적 이치를 염두에 둘 때 한 사회의 패권을 쥐고 있는 이른바 헤게모니 블록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영속화하기 위해 실체, 본질, 토대 개념으로 구성된 절대주의를 구축하게 마련이고 문자 또한 거기에 복무하도록 구성하게 되어 있습니다. 붓다 당시 아리안 기원의 베다-우파니샤드에 기댄 브라흐만 사상, 그것을 기록한 고급 산스크리트어가 바로 그런 예이고, 원효 당시 흉노적 기원을 가진 김씨 신라와 대당 유학승 중심의 대승불교 사상, 그것을 기록한 의상 류의 시(詩)적 한문이 바로 그런 예입니다. 이 절대주의에 정면 도전을 감행하며 비실체주의, 비본질주의, 비토대주의 사상을 펼친 것이 붓다이며 원효입니다. 붓다는 동북 인도 지방의 토속어로 설법했으며, 원효는 소(疎) 로써 민중지향의 글을 썼습니다. 이런 공통점 때문에 두 분의 사상은 근본적으로 일치할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다른 하나는 원효를 중심으로 한 이야깁니다. 원효 사상은 단순히 중국 계통의 불교 사상만의 영향을 받은 게 아닙니다. 그보다 더 오랜 근원을 지닌 생태공동체의 토속적인 사상의 영향도 받았습니다.  오히려 후자의 영향이 더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 토속 사상이란 다름 아닌 '한' 사상이지요. '한' 사상은 그 어떤 사상보다 절대주의를 거부합니다. 비실체주의, 비본질주의, 비토대주의가 생명감각 전반에 두루 퍼져 있습니다. 이 '한' 사상을 바탕에 깔고 있었기 때문에 '대승경전'을 보면서도(!) 원효는 붓다 사상의 정수를 간취할 수 있었습니다. 붓다의 생태공동체도 우리와 유사한 생명감각을 지니고 있었을 것이라고 추정하지만 이는 제 능력 밖의 문제라 그냥 원효를 중심으로 이야기하였습니다. 

그러면 왜 원효를, 붓다를 이리도 공들여 붙잡은 것일까요? 오늘 우리의 상황과 맞물려 있기 때문입니다. 붓다까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적어도 원효의 상황은 거의 정확히 오늘 우리의 그것과 같습니다. 통일을 둘러싼 이데올로기적 대립, 통치집단의 행태, 지배 엘리트의 학문적 정체성과 그 어법, 바람직한 대안.......이 모든 문제에서 우리는 원효를, 그리고 붓다를 소환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저 같은 무명의 의자(醫者)야 이렇게 큰 담론을 견딜 수 없고 다만 마음 아픈 사람 상담으로 치료하는 일이나마 원효의 길, 붓다의 길을 실천함으로써 나름의 기여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5. 종교로서 불교에 관심 없으신 분께 종조(宗祖)로서 붓다를 말씀드리려는 의도는 전혀 없습니다. 절대주의를 해체하고 경험과 실용으로 참된 삶의 결을 세운 큰 스승으로서 붓다를 우리 앞에 세우려는 것입니다. 누군가, 그럼, 예수는 어떠신가?, 물어 올 텐데, 저는 개인적으로 지금의 통속 기독교인의 생각과 달리, 깊이 들어가 보면 예수 또한  붓다처럼 절대주의를 거부하고 정도(正道)로서 중도(中道)를 산 스승임을 알게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우리가 간절하게 찾는 스승은, 그 이름이 무엇인가와 상관 없이, 초일극집중구조로서 절대주의가 일으킨 인류 멸절의 위기에 당당히 맞설, 그런 분이어야 합니다. 이 문제의식을 벼리기 위해서라면 500쪽이 넘는 이 학문적인 책도 한 번 품어봄 직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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