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처럼 생각하기 - 나무처럼 자연의 질서 속에서 다시 살아가는 방법에 대하여
자크 타상 지음, 구영옥 옮김 / 더숲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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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간은 고정관념에 빠지는 경향이 있지만, 나무는 형태, 장소, 변화에서 거의 고정된 것이 없다. 나무는 확고한 이데아가 없다.......세계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나며 변화, 우연과 필연의 결합을 따른다.

  식물은 형태, 크기, 색의 변화와 함께 동물보다 매우 고등한 형태적 유연성을 지니고 있다. 특정 서식지와 관련된 지표식물이 아닌 한, 일반적으로 식물은 매우 폭넓은 환경에서 성장한다.(93~94)



인간은 동물 본성상 고정된” “확고한 이데아DNA에 심어져 있다. 종교, 과학, 국가 삼각동맹이 유연성을 증오하는 까닭이다. 인간은 그 경직성 때문에 도망질을 생명 종지로 삼는다. 도망질 말고 달리 방도가 없다. “세계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나” “변화, 우연과 필연의 결합을 따르기에는 너무나도 불안하고, 탐욕스러우며, 어리석으니 인간 어쩔

 

丈夫自有衝天氣장부자유충천기

不向如來行處行불향여래행처행

 

뜨르르한 불교 경구. 세계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나 변화, 우연과 필연의 결합을 따르는 장부는 부처 이데아를 거절하고 하늘을 바로 찔러간다는 말이다. 나무 기상이 아니고 무엇이랴. 그 살아 있는 나무 기상을 폭넓은 환경에서 성장하는 지혜로 삼지 못하고, 나무 베어 불상이나 만들어 절하느라, 접힌 유연성을 끝내 온전히 펴지 못하니 불교 어쩔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뜨르르한 신약 구절. 이신득의 이데아 고정관념에 편승하는 자가 하느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세계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나 변화, 우연과 필연의 결합을 따름으로써 하느님나라 본성을 구현하는 자만이 들어간다는 말이다. 나무 기상이 아니고 무엇이랴. 접힌 유연성조차 없이 석탄절 봉축법요식장 쫓아가 오직 예수나 떠벌이니 개신교 어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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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삶과 죽음은 같은 속도로 서로 나아가며 나무 안에서 공존한다.(89)

 

나무는 죽음과 함께하지만, 죽음에 이르지 않는다.

  .......물관은 끝을 맞댄 죽은 세포로 이뤄진다. 물관이 형성되는 동안, 그리고 죽어가는 시간에 물관부 세포 내벽은 리그닌이 풍부해진다. 리그닌은 나무에게 구조적 저항력을 심어준다. 그 뒤 이 세포는 텅 빈다. 나무 형상은 계획된 죽음으로 생성된다.(91)

 

멋진 말 잘 만드는 누군가가 이렇게 멋진 말을 만들었다.

 

죽음은 삶의 또 다른 방식이다.” 과연 멋지다. 이 말은 어떤가? “삶은 죽음의 또 다른 방식이다.” 멋진가? 대부분 그렇게 느끼지 못한다. 삶과 죽음을 인식하는 데 존재하는 비가역 편향 때문이다. 그러나 이렇게 번역하면 금방 멋진 말로 느낄 수 있다. “생명은 비생명의 또 다른 방식이다.” 다시 번역이 필요한 사람은 다시 번역해줘도 느낄 수 없다. 예서 멈춘다.

 

단도직입으로 말하건대, 죽음이 삶을 창조하고 지탱하며 확산한다.

 

죽은 세포로 물관이 형성되고 죽어감으로써 같은 속도로 서로 나아가며 나무 안에서 공존하는 삶을 부름켜가 일으킬 수 있다. “부름켜는 영구적인 배아 상태여서 늘 분열하여 나무 둘레를 늘인다.”(로빈 월 키머러 향모를 땋으며213) 늘어나는 나무 둘레, 그러니까 표면 형상은 계획된 물관 죽음으로 생성된다.(물관-인용자 덧붙임) 구조적 저항력없는 둘레 늘임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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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는 한 장소에 억류되지 않은 채, 시간 속에서 미완성으로 영속한다.(83)

 

불교계에서 살아 있는 부처生佛로 추앙하는 고승이 더러 있다. 매우 높은 경지에 올랐다는 상징 정도라면 그렇기도 하겠구나, 하고 넘어갈 수 있지만, 정색하고 부처 액면가를 매긴 정도라면 그냥 넘어갈 문제가 아니다. 본인과 주위 신자들이 어찌 믿든 그런 부처는 없다. 있다면 불상이다. 저들이 이를 받아들이지 못할 경우, 불교는 삿된 가르침이다.

 

삿되다고 얘기하는 근거는 둘이다. 생불이라는 자들의 사회적 언행을 보면 무엇을 깨쳤다는 겐지 도통 알 수 없을 만큼 엉성하다는 점이 하나다. 부처라는 완성을 전제하고 통속하게 누군가한테 헌정한다는 점이 다른 하나다. 전자는 한심하고 후자는 부박하다. 아니라고 하지만 불교 또한 공포불안과 탐욕, 그리고 어리석음을 볼모로 중생을 네오테니즘에 묶어두는 속임수다. 불성은 아이다움을 품어 안은 어른다움이다. 이 어른다움은 한 장소에 억류되지 않은 채, 시간 속에서 미완성으로 영속한다.통속불교의 가르침은 거꾸로다. 충분히 삿되다.

 

삿되지 않은 불자와 불승이 있다고 말하고 싶은 사람은 스스로 이 질문을 해보면 된다. “나는 부처를 사람 아닌 나무에게서 찾은 적이 있나?” 아니면 아니다. 부처는 한 장소에 억류되지 않은 채, 시간 속에서 미완성으로 영속하는 존재다. 부처는 나무다. 같은 말로 반복한다. 나무가 아니면 부처가 아니다. 나무 불자 본 적 있나? 나무 불승 본적 있나?

 

나무는 한 장소에 억류되지 않은 채. 시간 속에서 미완성으로 영속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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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나무를 몸통 하나로 착각하면서 식물계에 동물성을 투사해 동물중심주의로 넘어간다. 나무가 일원적이면서도 다원적인 삶의 방식 덕분에 분산하는 반면, 인간은 나무가 단일하고 응집된 총체 하나로 수렴한다고 생각한다.(81)

 

동물 인간 현실에서는 하나이자 여럿이거나, 또는 하나도 아니고 둘도 아닌 나무 능력을 상상할 수 없다. 식물과 동물 사이 이러한 체계적 불일치는 인간 사유를 넘어선다. 인간은 나무에게서 몸통, 머리, 발, 심지어 눈까지 인식하더라도 육체는 결코 보지 못한다. 그래서 인간 모습에서 나무 모습을 찾고자 하는 욕망은 항상 강렬하다.

  발현하는 과정에서 하나 또는 여럿으로 양립함으로써 나무는 더욱 강해진다. 나무는 개체와 전체가 자기를 넘어서서 더불어 약동하며 세계에 몰입하기로 서로 동의한 뒤로는 서로 대립하지 않는다. 반대로 인간 세계에서 개인과 공동체는 조화롭게 공생하지 못한다.(82)

 

나무에게서 단일과 다원은 공존 개념이기 때문에, 나무가 다른 존재보다 우위에 서는 일은 없다.(81)

 

나와 남은 둘이 아니다自他不二처럼 다자와 일자는 둘이 아니다個全不二는 진부하다. 진부해서 거론하기 시시하다 하는 냉소보다 인간 현실에서 아득히 먼 진실이구나 하는 탄식 때문에 오늘도 나는 거론한다. “인간 세계에서 개인과 공동체는 조화롭게 공생하지 못한다.

 

맞다. 인간은 일원적이면서도 다원적인 삶의 방식을 이해할 수 없다. 인간은 단일하고 응집된 총체 하나로 수렴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다른 존재보다 우위에 서는 일을 결코 포기하지 못한다. 인간은 공동체를 전시 목록에 넣어둬 본색을 가리는 무엇, 그러니까 조//동 문화면 정도로나 여길 뿐이다. 나는 그런 인간이 아니라고 나 자신이 말할 수 없으므로 굳이 입을 연다.

 

다자가 일자고 일자가 다자다多卽一一卽多.특히 서구 주류는 대부분 다자도 일자도 허무에 떨어지는 결과 앞에서 속수무책이다. 서구 주류가 지배하는 세상이니 결국은 세상 모두 속수무책이다. 실제로 엄존하는 일자는 돈이므로 허무아미타불이다. 돈을 숭배하면서도 무신론자로 속이는 다자는 클론인간이므로 허무무인지경이다. 허무를 깨고 실재 세계로 나아가는 길은 오직 나무에게 있다.

 

나무에게서 단일과 다원은 공존 개념이기 때문에, 나무가 다른 존재보다 우위에 서는 일은 없다.개체는 전체 생명 이치를 온전히 실행하므로 예속된 부품도 아니고, 상호간 차별도 없다. 전체는 모든 개체가 제각각 이름으로 참여하는 통짜 창발 네트워킹이므로, 개체 집합도 아니고 군림하는 초월신일 수도 없다. 이 비대칭인 대칭 운동으로만 개체주의 허무와 전체주의 허무를 한칼에 벤다.

 

이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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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는 마치 예민한 표면과 일치하듯 세계하고 맺는 관계와도 일치한다. 세계를 마주보고 세계에 적응하고 세계 속에서 영속한다. 또한 자기 경계를 넘어 밖으로 끌어내는 원심적 약동에 순응하며 변화한다.

  나무 약동이 나무를 만들고 뻗어나가게 하며 자기중심에서 벗어나도록 한다.(79)

 

  이렇듯 나무 형태는 모듈 원심력과 환경 구심력이 일치한 결과다. 나무는 자기 환경을 직접 만들기 때문에 두 힘 작용은 일반적으로 분리할 수 없다. 둘은 한 시스템이다. 나무와 환경은 서로 의존하고 가역적 감각에 따라 화합한다.(80)


 

대중적으로 잘 알려진 신영복 선생 글씨 가운데 <천하무인天下無人>이 있다. 고등학생 딸아이가 처음 보고 하늘 아래 사람이 없다고? 뭐 그런 걸 가지고 애써 글씨를 쓰지?” 하던 기억이 난다. 자는 열 가지도 훨씬 넘는 의미로 쓰이는데, 그냥 사람이란 뜻 다음으로 중요한 의미가 바로 ”, 즉 다른 사람이다. 그러니까 <천하무인天下無人>은 나와 남을 상호 고립된 존재 아닌 상호 연속된 관계로 인식한다는 철학이 담긴 글씨다.



 세계라 하든, “환경이라 하든, 모두 자기 경계를 넘어 밖에 있는 남을 가리킨다. 나무는 남인 공기, , 박테리아, 다른 나무, 동물 모두를 마주보고그들에게 적응하고그들 속에서 영속한다.마주보고 적응하고 영속하는 관계와 자기를 일치시킨다. 원심적 약동이 나무를 자기중심에서 벗어나도록 한다.공기, , 박테리아, 다른 나무, 동물 모두는 약동하는 나무 원심력과 가역적 감각에 따라 화합하는 구심력으로 맞물려 한 시스템을 이룬다. 그래서 세계에 남은 없다天下無人. 나와 남은 둘이 아니다自他不二.

 

신영복 선생이 생전에 이 철학 주체와 객체로 나무를 포함시키셨는지는 잘 모른다. 내 과문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다만, 시대 현안을 첨예육중하게 가리키는 사표성師表聲이 간절하다는 말을 하고 싶다. 나무스승 또는 스승나무 기다리느라 내 목이 길어지고 있는 와중에 天下無人天下廡人, 그러니까 세계에 남만 득실거린다.”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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