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모를 땋으며 - 토박이 지혜와 과학 그리고 식물이 가르쳐준 것들
로빈 월 키머러 지음, 노승영 옮김 / 에이도스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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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 세상이 상품이라면 우리는 얼마나 가난해지겠는가. 온 세상이 끊임없이 움직이는 선물이라면 우리는 얼마나 부유해지겠는가.(057)

 

다음 단계의 경제는 우리 모두의 선물을 이끌어내는 경제가 될 것이다. 경쟁보다 협력을 강조하고, 쌓아두기보다 나누기를 장려하고, 선형적이 아니라 순환적인 경제가 될 것이다. 돈이 곧 사라지지는 않겠지만, 좀 더 선물에 가까운 속성을 띤 채 지금보다 축소된 역할을 할 것이다. 경제는 축소되지만 우리 삶은 더 확대될 것이다.”

 

찰스 아이젠스타인이 신성한 경제학의 시대에서 한 말이다. 서로 영향을 주고받았는지 궁금하지 않거니와, 로빈 월 키머러와 찰스 아이젠스타인은 지닌 생각이 놀랍도록, 아니 당연히, 본성에서 일치한다. 여기 선물 이야기를 하는 동안 내가 전에 신성한 경제학의 시대주해리뷰 썼던 부분을 여러 번 다시 들여다볼 수밖에 없었던 이유다.

 

결국 같은 말이면서 조금 다른 뉘앙스를 서로 보충해주는 이 말들을 바짝 붙여 다시 음미해 본다. 온 세상이 상품이라면 우리는 얼마나 가난해지겠는가. 온 세상이 끊임없이 움직이는 건물이라면 우리는 얼마나 부유해지겠는가. 경제는 축소되지만 우리 삶은 더 확대될 것이다. 마치 짜 맞추기라도 한 것처럼 두 말은 서로 얼싸안고 있다.

 

그러고 보면 선물 얘기를 하는 두 사람 자체가 서로에게 선물이다. 그 선물들은 또 내게 선물이고 나는 다시 누군가에게 선물이어서 돌아 흘러간다. 돌아 흘러 이뤄내는 네트워킹, 그러니까 영적 공동체가 창발을 일으키면서 장엄선물을 온전하게 한다. 하느님나라라 하든 극락정토라 하든 대동세상이라 하든 우리 비원이자 축제다.

 

온 삶이 비원이라면 우리는 얼마나 슬퍼지겠는가. 온 삶이 끊임없이 넘실대는 축제라면 우리는 얼마나 흥겨워지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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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모를 땋으며 - 토박이 지혜와 과학 그리고 식물이 가르쳐준 것들
로빈 월 키머러 지음, 노승영 옮김 / 에이도스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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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물은 진행형의 관계를 만들어낸다.......선물 경제에서는 누군가가 거저 준 선물이 다른 누군가에게 자본이 될 수 없다.......손에서 손으로 전해지며 그때마다 풍성해지는 선물이다.

  선물의 본성이 그렇다. 선물은 이동하며 그때마다 가치가 커진다........정착민은 원주민에게 선물을 받으면 이를 귀하게 간직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 선물을 남에게 주면 선물 준 사람을 모욕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원주민은 선물 가치를 호혜성에 두었으며, 선물이 돌고 돌아 자기에게 오지 않으면 모욕으로 느꼈다. 우리 옛 가르침 중 상당수는 무엇을 받든 반드시 다시 주어야 한다고 말한다.

  사유재산경제 관지에서 선물이 공짜인 이유는 대가를 치르지 않고 무료로 받기 때문이다. 하지만 선물경제에서 선물은 공짜가 아니다. 선물 본성은 관계 창조다. 선물경제 바탕에 놓인 화폐는 호혜성이다. 서구 사고에서 사유는 권리지만, 선물경제에서 재산은 책임과 결부된다.(049~052)

 

사유재산경제에서 대가를 치르고 상거래가 이루어질 때, 핵심은 대가를 표상하는 돈의 보편성이기 때문에 그 어떤 관계 창조도 일어나지 않는다. 돈이 관계 발생을 제거하는 조건이다. 거꾸로 말하면 돈이 개입되지 않는 선물 수수일 때, 보편성이 제거된 특수 사건을 당사자가 공유한다. 그러고 보면 관계란 마주한 당사자에게 어떤 고유 세계가 형성되는 운동이다. 선물은 세계 네트워킹에 참여하여 다양한 고유 결절을 맺으며 약동하는 모듈이다.

 

선물은 구체적 물질일지라도 그 바깥을 둘러싼 서사를 지닌다. 선물은 서사일지라도 그 행간에 내밀한 물질 실재를 지닌다. 이 비대칭인 대칭성에 힘입어 선물은 전해질 때마다 풍성해지고, 이동할 때마다 가치가 커진다. 이동하며 전해지지 않고 누군가 간직한 자본이 되는 순간 서사도 물질도 선물이기를 멈춘다. 선물이 멈추면 세계 네트워킹도 멈춘다. 네트워킹이기를 멈춘 세계는 자체가 착취다. 그 착취를 이름 하여 사유재산경제체제라고 한다.

 

우리나라 백만-우리 돈으로 113000만원-장자 수가 105만 명이라고 한다. 상위 2%가량이다. 나와는 아득히 멀리 떨어진 이야기다. 그 아득한 거리에서 선물이 우주 근본 범주라느니 영속적 순환이라느니 떠드는 짓은 참으로 물색없다. 물색없기로 치면 낭/풀 이야기만 할까. 하필 선물이 낭/풀 본성에서 나왔으니 곱으로 물색없다. 곱으로 물색없는 얘기를 66살에 떠들고 있는 내 삶이야말로 물색없기 그지없다. 그지없이 물색없게 살아가련다. 물색없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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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빈 월 키머러 지음, 노승영 옮김 / 에이도스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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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물은 내 행위를 통해서가 아니라 거저 온다. 내가 손짓하지 않았는데도 내게 온다. 선물은 보상이 아니다. 나는 선물을 제 힘으로 얻을 수 없으며, 내 것이라 부를 수 없다. 내게 선물 받을 자격이 특별하게 있지 않다. 그런데도 선물은 나를 찾아온다. 나는 다만 눈 뜨고 그 자리에 있는 일을 할 뿐이다. 선물은 겸손과 신비 영역에 우연한 선행으로 존재한다. 나는 선물이 어디서 오는지 알지 못한다.(045~046)

 

받는 사람 관지에서 선물을 정리한 기품 있는 말이다. 당연히 주는 사람 관지를 머금고 있다. 주고받는 사람 모두를 고려해 정리하면, 선물은 이해득실이라는 인과를 좇지 않으므로 우연 세계가 빚는 은총 수수임과 동시에 선의와 감사 없이는 존재할 수 없으므로 필연 세계가 빚는 일상 거래다. 선물은 장엄 세계를 향해 가는 부단한 여정에서 피워내는 존재Sein 우아함임과 동시에 당위Sollen 숭고함이다. 인간이 영적 삶을 천명으로 받아들이고자 할 때, 선물은 그 물질 본성이 된다. 선물이 선물로 되는 이치다.

 

선물 이치를 생명 원리 삼으면 결핍의식이 사라진다. 결핍의식은 상거래에 중독된 인간에게 들러붙은 허위의식이다; 인간이 자신을 세계와 분리할 때 생긴 끌탕(공포불안), 게걸(탐욕), 아둔(무지)이 어울려 일으키는 소음이다. 이를 인간은 내면이라 부른다. ‘내면의 평화를 찾으려 내면으로 들어가는 짓을 구도라 부른다. 구도를 참선·명상·기도, 뭐라 이름 하든 헛짓이다. 헛짓인 이유는 본디 없는 내면을 굳이 만들고 평화 구한다며 다시 내면타령하기 때문이다. 평화는 내 내면아닌 내남 상호작용에서 찾아야 한다. 상호작용에서 누구든 안팎이 분리되지 않으면 평화다. 평화가 결핍의식을 녹인다.

 

결핍의식을 녹이는 평화는 선물이 주는 선물이다. 선물이 어디서 오는지 아는 자 누군가. “태초에 선물이 있었다.”(찰스 아이젠스타인 신성한 경제학의 시대) 선물은 우주 근본 범주다. 그 범주를 지구에 물적으로 펼친 장본인이 낭/풀이다. /풀에서 태어나 끝내 묻어 살아갈 수밖에 없는 주제면서 인간은 지금 상거래 이득에 눈이 뒤집혀 선물거래 낭/풀 원리를 깡그리 무시하고 있다. 상거래 이득을 보지 못하자 선물거래 자체를 부정하는 청년 하나와 오랫동안 숙의치료를 하고 있다. 그는 자신이 빼앗긴 피해자임을 전방위전천후로 선전·선동한다. 고고한 도덕 군주 행세를 한다. 세상 모든 사람과 일에 분통을 터뜨리느라 여념 없어 공감 온도 영하273°C. 한사코 반복한다. 그가 유별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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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는 개체 아닌 집단으로 행동한다. 정확히 어떻게 그러는지는 아직 모른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는 연대가 지니는 힘을 목격한다. 하나에게 일어나는 일은 모두에게 일어난다. 굶어도 더불어 굶고, 먹어도 더불어 먹는다. 모든 번영은 상호적이다.(033)

 

리베카 솔닛은 이것은 이름들의 전쟁이다에서 명명은 해방의 첫 단계다.”라고 말했다. 불의한 권력에 저항하는 삶을 사는 리베카 솔닛이 말했기 때문에 명명은 해방과 연속된 개념이다. 그 반대로, 예컨대 조선일보나 국민의 힘 당이나 검찰 인사가 말한다면 명명은 억압/수탈/살해/조작/왜곡과 연속된 개념이다. 대표적 명명이 공정이다. 공정이란 말을 매판극우가 강탈한 것만으로 우리사회는 촛불 이전으로 단연 퇴행했다.

 

퇴행을 좀 더 근원으로 밀어붙이는 명명이 요즘 준동하기 시작한다. 다름 아닌 네트워크. 매판극우 정치집단의 인맥, 아니 패거리 행태를 그대로 답습하고 있는 연예인 패거리를 처음에는 무슨 라인이니 뭐니 하더니 이제는 네트워크라고 표현한다. 네트워크 본성을 억압/수탈/살해/조작/왜곡한 명명 강도다. 이 강도행각은 머지않아 권력집단 전반으로 확산될 가능성이 크다. 결국 우리사회는 본성을 빼앗긴 가짜 네트워크 사회로 타락하고, 그 가짜 네트워크에 끼지 못한 사람은 존엄을 억압/수탈/살해/조작/왜곡당한 채 비참하게 살아갈 수밖에 없다. 아니. 이미 오래 전부터 그리 되었고, 최종적으로 확정 명명까지 하는 판국 아닐까?

 

저자가 연대라고 표현한 네트워크는 본디 나무에게서 발원했다. 나무는 본성이 네트워크다. 나무 네트워크는 패거리가 아니다. 나무들 사이에는 보스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평등한, 그러니까 수평 쌍방향 소통으로 상호 번영을 이루는 민주적 시스템이다. 그 진면목은 아직 인간에게 미지 영역이다. 그저 이렇게 추정할 따름이다.

 

연대 메커니즘은 공기 중에서가 아니라 땅속에서 전개되는 듯하다.”(040)

 

땅속이라면 뿌리, 근균, 토양, , 공기들이 어우러진 생태계를 말한다. 이 땅속 생태계가 공유하는 정보와 에너지를 통해 분산된 자율주체들은 자발적·능동적으로 연대하고 집단으로 행동한다. 개체는 전체에게 매몰당하지 않으며, 전체는 개체에게 해체당하지 않는다. 개체 사이도 상호적이고 개체와 전체 사이도 상호적이다. 이렇게 미완성으로 영속하며 번영해간다.

 

인간이 배워야 할 집단행동은 나무 네트워크지 패거리 네트워크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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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구 전통에서는 모든 존재가 서열이 있다고 믿는다. 당연히 진화의 정점이자 창조의 총아인 인간이 꼭대기에 있고 식물은 밑바닥에 있다. 하지만 토박이 지식에서는 인간을 곧잘 '창조의 동생'으로 일컫는다. 우리는 말한다. 인간은 삶의 경험이 가장 적기 때문에 배울 것이 가장 많다고. 우리는 다른 종들에게서 스승을 찾아 가르침을 청해야 한다.(025)

 

통속한 눈에는 통속진화론과 통속창조론이 정반대로 보이겠지만 실은 한통속이다. 겉으로는 거칠게 싸우면서 속에서는 인간지상주의 직선시공간관으로 굳게 동맹하고 있다. 이 둘의 동맹은 엄밀히 말하자면 호혜적 기생이다. 진화론은 과학어법을 전유하고 창조론은 직관어법을 전유함으로써 쌍끌이두 축이 되어 일극집중구조 세계관을 수호하는 기제다.

 

인간은 진화의 정점이 아니다. 종점이다. 인간으로 말미암아 지구생태계가 종말을 맞을 위기에 처해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창조의 총아가 아니다. 충아蟲牙. 고통을 일으킬 뿐더러 제 구실 못하면 결국 뽑아버려야 하기 때문이다. 지구생태계를 지키려면, 더 이상 고통을 일으키지 않고 제 구실 하려면, 창조의 동생이라는 본디 자리로 돌아가야만 한다.

 

동생은 가르침을 청해 배워야 할 존재다. 배워야 함에도 인간은 그저 가르치려 든다. 가르칠 수 있는 지성이 형에게서 왔다는 진실을 한사코 부정한다. 부정은 배움을 이용으로 왜곡한다. 이용하는 능력마저 고유하다고 굳게 믿는다. 확신 범인은 전향 불가다. 전향하지 않고 쭉 가면 뽑혀버리는 종말을 맞으리라. 그런 종말은 형이 원하는바 아닌데 말이다.

 

형은 동생과 아름답고 거룩하게 공감·공생하기를 원한다. 이미 공감·공생 세포가 폐사된 망가진 안와전두엽을 지닌 동생은 오히려 형을 하등 생물로 취급해, 대놓고 조작하며 함부로 살해한다. 임계점을 넘어섰다는 느낌이 맹렬하게 든다. 거대한 파국을 맞고서야 각성이 찾아오려나. 그러나 대중이 갑자기 각성할 가능성은 항상 남아 있다(펠릭스 가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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