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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모를 땋으며 - 토박이 지혜와 과학 그리고 식물이 가르쳐준 것들
로빈 월 키머러 지음, 노승영 옮김 / 에이도스 / 2020년 1월
평점 :
절판
선물은 내 행위를 통해서가 아니라 거저 온다. 내가 손짓하지 않았는데도 내게 온다. 선물은 보상이 아니다. 나는 선물을 제 힘으로 얻을 수 없으며, 내 것이라 부를 수 없다. 내게 선물 받을 자격이 특별하게 있지 않다. 그런데도 선물은 나를 찾아온다. 나는 다만 눈 뜨고 그 자리에 있는 일을 할 뿐이다. 선물은 겸손과 신비 영역에 우연한 선행으로 존재한다. 나는 선물이 어디서 오는지 알지 못한다.(045~046쪽)
받는 사람 관지에서 선물을 정리한 기품 있는 말이다. 당연히 주는 사람 관지를 머금고 있다. 주고받는 사람 모두를 고려해 정리하면, 선물은 이해득실이라는 인과를 좇지 않으므로 우연 세계가 빚는 은총 수수임과 동시에 선의와 감사 없이는 존재할 수 없으므로 필연 세계가 빚는 일상 거래다. 선물은 장엄 세계를 향해 가는 부단한 여정에서 피워내는 존재Sein 우아함임과 동시에 당위Sollen 숭고함이다. 인간이 영적 삶을 천명으로 받아들이고자 할 때, 선물은 그 물질 본성이 된다. 선물이 선물로 되는 이치다.
선물 이치를 생명 원리 삼으면 결핍의식이 사라진다. 결핍의식은 상거래에 중독된 인간에게 들러붙은 허위의식이다; 인간이 자신을 세계와 분리할 때 생긴 끌탕(공포불안), 게걸(탐욕), 아둔(무지)이 어울려 일으키는 소음이다. 이를 인간은 ‘내면’이라 부른다. ‘내면’의 평화를 찾으려 ‘내면’으로 들어가는 짓을 구도라 부른다. 구도를 참선·명상·기도, 뭐라 이름 하든 헛짓이다. 헛짓인 이유는 본디 없는 ‘내면’을 굳이 만들고 평화 구한다며 다시 ‘내면’ 타령하기 때문이다. 평화는 내 ‘내면’ 아닌 내남 상호작용에서 찾아야 한다. 상호작용에서 누구든 안팎이 분리되지 않으면 평화다. 평화가 결핍의식을 녹인다.
결핍의식을 녹이는 평화는 선물이 주는 선물이다. 선물이 어디서 오는지 아는 자 누군가. “태초에 선물이 있었다.”(찰스 아이젠스타인 『신성한 경제학의 시대』) 선물은 우주 근본 범주다. 그 범주를 지구에 물적으로 펼친 장본인이 낭/풀이다. 낭/풀에서 태어나 끝내 묻어 살아갈 수밖에 없는 주제면서 인간은 지금 상거래 이득에 눈이 뒤집혀 선물거래 낭/풀 원리를 깡그리 무시하고 있다. 상거래 이득을 보지 못하자 선물거래 자체를 ‘개’부정하는 청년 하나와 오랫동안 숙의치료를 하고 있다. 그는 자신이 빼앗긴 피해자임을 전방위전천후로 선전·선동한다. 고고한 도덕 군주 행세를 한다. 세상 모든 사람과 일에 분통을 터뜨리느라 여념 없어 공감 온도 영하273°C다. 한사코 반복한다. 그가 유별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