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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모를 땋으며 - 토박이 지혜와 과학 그리고 식물이 가르쳐준 것들
로빈 월 키머러 지음, 노승영 옮김 / 에이도스 / 2020년 1월
평점 :
절판
서구 전통에서는 모든 존재가 서열이 있다고 믿는다. 당연히 진화의 정점이자 창조의 총아인 인간이 꼭대기에 있고 식물은 밑바닥에 있다. 하지만 토박이 지식에서는 인간을 곧잘 '창조의 동생'으로 일컫는다. 우리는 말한다. 인간은 삶의 경험이 가장 적기 때문에 배울 것이 가장 많다고. 우리는 다른 종들에게서 스승을 찾아 가르침을 청해야 한다.(025쪽)
통속한 눈에는 통속진화론과 통속창조론이 정반대로 보이겠지만 실은 한통속이다. 겉으로는 거칠게 싸우면서 속에서는 인간지상주의 직선시공간관으로 굳게 동맹하고 있다. 이 둘의 동맹은 엄밀히 말하자면 호혜적 기생이다. 진화론은 과학어법을 전유하고 창조론은 직관어법을 전유함으로써 ‘쌍끌이’ 두 축이 되어 일극집중구조 세계관을 수호하는 기제다.
인간은 진화의 정점이 아니다. 종점이다. 인간으로 말미암아 지구생태계가 종말을 맞을 위기에 처해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창조의 총아가 아니다. 충아蟲牙다. 고통을 일으킬 뿐더러 제 구실 못하면 결국 뽑아버려야 하기 때문이다. 지구생태계를 지키려면, 더 이상 고통을 일으키지 않고 제 구실 하려면, ‘창조의 동생’이라는 본디 자리로 돌아가야만 한다.
동생은 가르침을 청해 배워야 할 존재다. 배워야 함에도 인간은 그저 가르치려 든다. 가르칠 수 있는 지성이 형에게서 왔다는 진실을 한사코 부정한다. 부정은 배움을 이용으로 왜곡한다. 이용하는 능력마저 고유하다고 굳게 믿는다. 확신 범인은 전향 불가다. 전향하지 않고 쭉 가면 뽑혀버리는 종말을 맞으리라. 그런 종말은 형이 원하는바 아닌데 말이다.
형은 동생과 아름답고 거룩하게 공감·공생하기를 원한다. 이미 공감·공생 세포가 폐사된 망가진 안와전두엽을 지닌 동생은 오히려 형을 하등 생물로 취급해, 대놓고 조작하며 함부로 살해한다. 임계점을 넘어섰다는 느낌이 맹렬하게 든다. 거대한 파국을 맞고서야 각성이 찾아오려나. 그러나 대중이 갑자기 각성할 가능성은 항상 남아 있다(펠릭스 가타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