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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 번째 계절 ㅣ 부서진 대지 3부작
N. K. 제미신 지음, 박슬라 옮김 / 황금가지 / 2019년 1월
평점 :

소설 속에서 우리가 늘 상상하는 미래의 모습이 그리 밝지만은 않다. 뭐 그게 더 흥미를 끌기도 하니까. 어쩌면 그만큼 현재가 불안정하기 때문일런지도 모른다. 하지만 문제는 불안정은 불평등을 심화시킨다는 점이다. 결국 인간성은 파괴되고 그 모든 것을 다시 인간들이 감당해야만 한다. 불합리한 것들로부터 계속 싸워야만 하는 세상. 제어할 수도 제어되지도 않고 제멋대로 흘러가는 삶. 그 끝이 무엇이 되었든 한방 세게 터지고 나면 끝없는 암흑의 세계가 다시 그들을 기다린다. 가도 가도 희망이라곤 보이지 않는 세계. 그렇지만 인류는 그 희망을 찾아 계속 싸워왔다. 생존 그 이상을 넘어서 더 나은 세계를 위해서.
부서진 대지 3부작 시리즈를 드디어 시작한다. 디스토피아 세계를 보고 있자니 살고 있는 지금이 가장 완벽해 보여서 사랑스러울 지경이다. 허나 작가는 지금의 차별과 편견에서 더이상 기댈곳을 찾지 못한듯 하다. “흑인 여성으로서, 나는 현상 유지에 딱히 관심이 없다. 내가 왜 그러겠는가? 지금의 현실은 해롭다. 상당히 인종차별적이고 성차별적인 데다, 그 외에도 바뀌어야 한다고 내가 생각하는 것들이 한가득이다.” (- <가디언>지 인터뷰중에서) 그랬기에 작가의 세계관이 어떻게 그려지고 있을까 궁금했다.
SF 장르를 좋아하나 상상력이 좀 딸려서 영상으로 보는 걸 더 선호한다. 뭐 영상으로 봐도 이해가 잘 안 되는 것들도 많긴하지만.ㅋㅋ 작년 초 이 책이 출간되었을 때 얼핏 본 적이 있다. 이런저런 이유로 놓쳐버렸는데 2020년 남은 한 달을 이 미래 세계에 쏟아부을 수 있어서 행복하다.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종말을 맞이한 세상. 하지만 세상은 끝나지 않았다. 행성은 여전히 존재하니까. 다시 새로운 세상이 열리고 누군가의 삶은 시작된다. 물론 이전 세계와는 많은 것들이 달라졌다. 이곳은 늘 위험이 도사린다. 과거의 흔적이 사라진 대지는 불안정하고 지금의 인류와는 다른 존재도 태어난다. 그들은 태생부터 초인적 힘(오로진)을 지녔다. 미드 <플래시>에 나오는 것처럼 특정 종족들에게 초능력이 주어진다. 하지만 그들의 숫자는 많고 그들은 위험하다. 즉 스스로 욕망을 제어 못하는 자들과 뜻하지 않게 발현되어 주변을 위험에 빠뜨리는 자들로 인해 그들은 스스로 오로진을 관리한다. 펄크럼은 오로진을 육성하고 관리하지만 실상은 철저한 훈련을 통해 이용한다. 그들의 잠재력은 대지를 잠재우고 대지를 뒤흔들 만큼 강력하지만 인간들은 그들을 로가라고 부르며 천대시한다. 마치 불량한 존재를 보듯 혐오하고 배척한다. 확실히 그들은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 같은 존재다. 막강한 힘을 지닌 자들이 영향력을 행사하는 건 당연하겠지만 어찌 된 일인지 이 세계에 진실은 감추어져 있다. 오로진 그들 스스로 자초한 세계에서 그들이 찾는 희망은 무엇일까.
그렇다면 이곳에 인간애는 존재할까. 에쑨의 자식 사랑을 보면 남아 있는 듯하고 에쑨을 돕는 자들을 봐도 언뜻 살아있는 듯하다. 다만 너무나 위험하고 불안정해서 미약해 보인다. 키우던 개가 주인을 무는 상황은 흔하게 벌어진다. 그렇기에
계속되는 두려움과 공포가 내내 소설 전반을 지배한다. 초인적인 힘을 지닌 생명체와 그렇지 못한 생명체 간에 존재하는 간극이 아슬아슬해 보인다. 세계는 뒤집혔으나 차별받는 종족은 여전하다. 대지의 안정을 위해 누군가의 지속적인 희생이 요구되고 죄 없는 사람들은 계속 죽어나간다. 오로진의 힘은 그들을 정상적인 삶의 궤도에 안착할 수 없는 운명을 지닌다.

이야기는 세 여인의 시점으로 돌아간다.
오로진의 힘을 지녔으나 그 힘을 숨긴 채 살고 있는 여인 에쑨.
오로진의 힘을 지녔다는 이유로 부모에게 버림받은 여인 다마야.
이미 펄크럼안에서 임무를 수행중인 여인 시에나이트.
에쑨은 아들을 잃었다. 범인은 다름 아닌 남편. 아이는 처참한 몰골로 파괴되었고 남편은 나머지 한 아이를 데리고 떠나버렸다. 아이에게서 위협적인 힘을 감지한 남편은 그 싹을 잘라버렸다. 이 세상은 인간애보다 더 강한 게 있다. 두려움과 공포. 에쑨의 남편이 끝날 때까지 등장하지 않기 때문에 에쑨의 분노를 흡수한 채 달리는 수밖에 없다. 그녀는 남편을 죽이기 위해 대륙을 지난다.
보통 우리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이 우리를 가장 아프게 하는 법이거든. -p.134
다마야는 부모에게 버려서 수호자의 손에 맡겨진다. 그를 따라 펄크럼으로 향하고 그곳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 그녀는 수호자의 말 한마디 행동 하나하나에서 거짓 없는 신뢰와 믿음을 느낀다. 허나 독자들은 그런 독함에 이유가 있었음을 알게 되면서 소름이 돋는다. 다마야가 스스로의 힘을 통제하고 제어할 수 있어야 하는 이유에 잔악성이 느껴진다.
펄크럼안에서 시엔이 해야 하는 임무는 생산과 신분 상승이다. 그들이 획득해야 하는 반지의 수는 힘을 의미한다. 네 반지 시엔과 열 반지 알라베스터. 그들은 의무적으로 아이를 생산하기 위해 섹스를 하고 서로를 비난하고 증오한다. 시엔보다 알라베스터는 내면의 동요가 심하고 인간애를 갈망하는 인물이다. 그는 최고의 힘을 지녔지만 힘으로 세상을 바꾸고 싶어 하지 않는다. 힘을 쓰면 쓸수록 그가 알던 가치관이 흔들린다. 씁쓸한 비난과 조소 어린 미소 안에서 그의 평범한 욕망이 드러난다. 그저 그에게도 삶이 있었으면 하는 바람. 그것은 결코 이 세상에서는 이루어질 수 없는 운명임을 안다. 그들을 위해 스스로 부서져버린 그가 제일 뇌리에 강하게 남아있다.
에쑨은 그런 능력에 대해 회의적(그건 저주지 재능이 아니에요.)이다. 사랑하는 아들을 잃었기 때문이다. 그전엔 계절을 잃었다. 그녀는 또다시 잃을 것들이 두렵다. 딸만큼은 어떻게든 지켜내고자 한다. 그녀의 분노가 어찌나 강렬한지 남편을 만나면 그 자리에서 찢어 죽일 것만 같다.
"자기 발전을 이룰 수 있으면 재능이지. 스스로를 파멸시킨다면 재주고. 그걸 결정하는 건 바로 너다. 교관도 아니고 수호자도 아니고, 다른 누구도 아니야." -p.552
대지를 쥐고 흔드는 능력은 마을 하나를 집어삼킬 정도의 위력을 지녔다. 에쑨은 그러한 능력 때문에 배척되기도, 환영받기도 한다. 세 여인의 이야기가 하나로 모아지면서 이 세계의 두 번째 시리즈가 열린다.
곳곳에 등장하는 석상의 글귀와 그녀의 수호신 역할이 되어주는 스톤이터는 여러 판타지물에서 유사하게 보아온 플롯이라 다음 편에서 좀 더 명확하게 등장하지 않을까 한다.
방랑의 계절, 광기의 계절(산제 제국), 이빨의 계절(펄크럼), 질식의 계절, 붕괴의 계절
다섯 번째 계절이 어떤 의미인지 생각했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을 지나 인간들앞에 찾아온 계절의 모습 말이다. 그것은 인간들 스스로가 망쳐놓은 대지의 모습이었다. 곧 닥칠 미래라고 생각하니 끔찍하다.
시엔은 곁에 있는 이들을 또 잃었다. 펄크럼과 어떻게든 엮이고 싶지 않아 독한 맘도 먹는다. 슬프다.
2부에서는 그녀의 딸과 그녀의 활약상이 더 두드러지겠지. 좀 더 깊이 있는 해석을 하고 싶지만 머릿속으로 잘 그려지지 않는 것들이 있어서 포기.ㅎ
에쑨 곁을 따라붙은 호야(스톤이너)의 정체가 궁금하다.
아버지 대지의 표면이 달걀 껍질처럼 산산조각 났다. 그의 사납고 맹렬한 분노가 다섯 번째 계절, 즉 붕괴의 계절이라는 최악의 형태로 발현되어 거의 모든 생명들이 죽었다. - p.5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