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의 마치
정한아 지음 / 문학동네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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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와주세요!

여기 아무도 없어요?


만약 인생이 시간의 흐름대로 쌓아 올린 페이스트리 같다면 나는 어느 지점에 잠시 들르고 싶을까. 좋았던 시절? 혹은 무언가 바로잡고 싶은 시절? 혹은 망각의 기억 속에 꽁꽁 묻혀 있던 어느 지점?

소설 속 가상 프로그램처럼 무의식이 끄는 대로 가는 거라면 나의 무의식은 어느 지점을 서성거리게 될까.

고작 육십의 나이에 알츠하이머 위험 진단을 받은 이마치 여사는 치료를 위해 대안 치료를 받게 된다. 불치병과도 같은 알츠하이머를 고칠 수 있다고 믿는 의사 제제에게 거액의 돈을 지불한 그녀는 VR이 재생되는 동안 자신의 과거를 마주한다. 아니 진짜 마주한다. 마흔세 살의, 마흔 살의, 서른한 살의, 스물다섯 살의, 열다섯 살의, 아기 때의 이마치를.

이쯤 되니 활성화된 기억을 토대로 남은 기억을 유지하게 된다는 치료의 본래 목적보다는 거울 치료가 되어 그 이상의 성과가 있겠다 싶은 생각이 들게 된다. 기억의 오류와 오해가 낳은 상처에서 새 살이 돋아나지 않을까 하는.

가족에 대한 환상을 무참히 깨준, 오로지 자신의 인생에만 충실했던 어머니로 인해 이마치의 유년기는 두 어둠이 존재했다. 언니의 죽음이라는 어둠을 피해 극장의 어둠으로 숨어들며 삶이 전환된 것이다. 자연스럽게 접하게 된 연극은 환희이자 살아갈 이유가 되고 어린 시절 불행은 독한 거름이 되어 견딜 정신력이 된다. 모든 감정은 오로지 연기할 때만 쏟아붓는다. 정작 현실에서 그녀의 감정은 늙을 대로 늙어 무감각하고 지쳐있다.

이마치는 삶을 마치(march) 행군(march)하듯 밀고 나갔다. 정작 배우로써 커리어와 명성이 쌓여갈수록 진짜 삶에서는 자꾸만 멀어져 간다는 사실을 외면한 채. 그러다 다시 어둠이 찾아온다. 아들의 실종. 거듭되는 가짜 삶 속에서 그녀는 점차 소멸되고 있었다. (눈에 띄지 않는 초라한 노파-p.103)가 되어 혼자서 서서히.



진짜 내 집은 어디죠?


기억은 왜곡투성이다. 게다가 알츠하이머로 인해 이마치의 기억은 구멍투성이다. 출현한 작품을 떠올릴 만큼의 기억력이 있지만 정점에서 그녀의 삶은 텅 비어 있었다. 가상공간이지만 엘리베이터가 고장 난 60층 아파트에서 그녀를 위한 길잡이가 필요했다. 가상세계와 현실이 뒤죽박죽되어 혼란스럽던 시점에서 노아의 등장은 경계의 구분점이 된다. 자신을 몰아붙이던 시간들과 외면하고만 싶었던 시간들과 맥락도 없는 조각조각의 기억들 속에서 갈팡질팡할 때 노아는 그 이상의 존재가 되어간다. 마치 스스로 진화하는 AI처럼.

영화 <원더랜드>가 떠오른다. 출구가 없는 가상공간에서 일어난 결정적 오류가 치유의 길이 돼주던 그런 스토리였던 것 같다. 인간이든 기계든 불완전함을 극복하면서 발전하는 거니까.


인간의 기억은 부정적인 것에 훨씬 더 민감해요. -p.243

가상체험으로 그녀의 기억이 재정비되어갈 때 그녀는 불현듯 자신의 인생이 실상 초라하기 짝이 없다는 것에 부끄러움을 느낀다. 또한 삶이 고통으로 가득했다는 사실도.

지나치게 스스로에게 고약하고 가혹했던 시간들 속에서 진짜 사랑을 놓아버린 사실도. 덕분에 죽이고 싶도록 미워했던 엄마에게는 화끈하게 복수를 한다. 반면 그나마 그녀를 그럴듯한 유년으로 포장해 주었던 마치라는 이름에 얽힌 이야기마저도 거짓이었다는 사실에 씁쓸히 발걸음을 옮긴다. 낭만이 낭설이었다니.

연기는 그녀를 살게 했지만 진짜 삶은 놓치고 살았다. 패턴화된 삶을 현실에까지 끌어다 놓은 것이다. 가상현실도, 꿈도 내가 원하는 대로 재정립이 가능한데 왜 진짜 삶도 가능하단 걸 모르고 살았을까.

이마치's life March. 차가운 이마치의 내면을 서서히 깨운 건 K의 존재였다. 봄빛의 따스함처럼 되살아나 그녀의 마음이 녹아가는 과정이 아름답다. 특히 가상공간에서 느낀 삶의 허기는 긍정적 신호다. 이성이 사라진 자리에 남는 건 본능뿐이다. 한때 라파트멍 60층 그녀의 공간을 가득 채운 빵 냄새. 진짜 집에서 딸은 작은 머핀으로 변한다. -p.281 그마저도 쇠맛이 되어 사라질지라도.

무엇보다도 머릿속에 그려지는 이미지가 즐거웠다. 상상의 완결판은 나의 마치편이란 생각이 든다. 영상화하기 완벽한 소설이다.



*출판사 제공도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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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진 것들
앤드루 포터 지음, 민은영 옮김 / 문학동네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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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사소한 것들이 얼마나 많이 내 머릿속에서 사라져버렸을지. -p.126


새로운 것에 대한 기대감보다 추억을 곱씹는 횟수가 늘면 늙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이 그리움이든 회환이든 시절이 불러오는 감각은 어딘지 모를 쓸쓸함을 동반하니까.

작가님도 늙으셨나 보다. 이번 단편들은 중년 남자의 일기장을 들춰본 기분이다. 여전히 문체는 덤덤하고 감정의 높낮이도 없다. 아마도 시선의 깊이감 때문이리라.

익숙함 속에 불현듯 솟아나는 낯섬(오스틴)과 오래된 그림 한 점으로 되살아난 의문들(넝쿨식물)과 점점 희미해지는 기억으로 혼란스러워지는 감정(라인벡)과 기쁨과 희열 뒤로 전류처럼 빠져나가는 불안(숨을 쉬어)과 오해와 비겁함으로 끊어진 관계(실루엣)와 존재를 자각하게 해 주는 존재에 관한 이야기 (히메나)까지.

각각의 단편들은 소중함을 자각하게 만든다. 사라지는 것들뒤로 더 생생해지는 기억들이 있다. -p.127 는 사실도 덩달아 일깨운다. 영원하지 않은 것들 속에서 이건 영원히 살 거야. -p.67 라며 라임나무를 건네며 희망을 속삭이던 순간이나 누군가를 떠올릴 때마다 떠오르는 유쾌한 이미지가 있다는 것도 즐거운 일이다.

문득 인생의 단순한 즐거움 -p.20 만 잘 찾는다면 그것이야말로 안정감을 위한 충분조건이 아닐까. 단골 식당이란 개념이 사라진 자리에 단골 브랜드가 자리를 잡은 요즘. 그런 것조차 하나 없다는 생각에 하나쯤 만들어도 좋겠다 싶다.

일생 동안 겪게 되는 삶의 변화에서 우리는 수많은 선택의 갈림길에서 고뇌하고 있는듯하지만 정작 큰일은 의지와 상관없이 일어난다. 그럴 때마다 시간은 일깨운다. 살인과 죽음 같은 문제라면 그저 다 슬플 뿐 -p.14 이라는 말속에 깃든 측은함으로 삶을 견뎌내야 한다는 것을. 무심이라기보다는 무리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기도 하다. 반면 닥칠 변화 앞에 마음을 단단히 먹-p.230어야 된다는 걸 깨닫는 때도 온다. 더 이상 이전의 나로 살 수 없음을 받아들여야 하는 [첼로]의 나, 아내의 기약 없는 기다림을 받아들여야 하는 [벌]의 남편, 실종인지 사고인지 자살인지 모른 채 견뎌야 되는 [사라진 것들]의 그들은 당장 혹은 훗날의 시간에 대한 마음을 준비해야 한다.


너 어디로 간 거야? -p.24


늙어간다는 게 그닥 유쾌한 일이 아니다.

나도 최근까지는 젊다는 게 아니라 아직은 그런 척할 수 있다는-p.111 감각이 살아있다고 느끼지만 어느 날 어느 순간 갑자기 멈춰 버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서글픔이 밀려온다. 그 시절의 점과 점으로 선을 잇고 살아온 나를 추억하다 미래의 어느 시점에 있을 나를 떠올려본다. 분명한 건 지금보다는 쿰쿰해지고 마르고 쪼그라 -p.28 들어 있겠지만 섬세한, 서정적인, 부드러운-p.21 나는 남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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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번째 천산갑
천쓰홍 지음, 김태성 옮김 / 민음사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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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은 게으름을 피우며 늦게까지 더위를 붙잡고 있던 여름을 한방에 밀어버렸다. 계절의 변화는 마치 날카로운 조각도 같았다.-p.74 나의 잠자던 감성이 드러나자 문득 파리의 가을 풍경이 궁금해진다. 하지만 '그'가 선택한 파리와 '그녀'와 '그'가 재회한 파리는 고독하기 그지없다. 그들과 더불어 나 역시 핫초콜릿이 절실해진다.

천쓰홍 작가는 본인의 이야기를 문장화하는데 귀신이다. 더불어 여성 이야기도 잘 쓴다.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차별과 혐오, 냉대와 조롱에 누구보다 감각이 열려 있고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대변할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초반에 들었던 직설적이고 자극적인 묘사에 대한 거부감이 오히려 그의 절실함과 간절함을 증폭시켰고, 중첩된 시간들이 하나 둘 풀려가자 캐릭터를 향한 나의 공감 능력이 최대치로 향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67번째 천산갑>은 <귀신들의 땅>과 어느 정도 연장선에 놓여 있다고 보인다. 보수적이고 지독한 대만 사회에서 여성과 성소수자로 살아가는 일이 얼마나 고난의 연속인지를, 존재하지만 귀신처럼 존재하지 않는 존재로 살아가는 일이 얼마나 고독하고 외로운 것인지를 말이다. 하지만 울분만 토해내지 않는다. 여기엔 성장이 있었다.

<67번째 천산갑>은 제목부터 낯설었다. 천산갑이라는 단어를 처음 접했다. 천산갑의 생김새를 처음 본 느낌은 마치 오리너구리를 보았을 때의 느낌과 비슷했다. 특이한 생김새를 보며 종의 다양성에 경이감도 느껴진다. 작고 까만 눈동자가 참으로 사랑스럽다. 그렇다면 왜 천산갑일까.

대만과 천산갑의 연결고리는 작가의 인터뷰 기사를 참고했다. 천산갑에서 갑의 발음이 게이를 의미하는 뜻으로 변질되어 혐오 표현으로 많이 쓰인다고 한다. 과거에는 천산갑 비늘이 정력에 좋다는 이유로 엄청나게 죽어나갔다는데 최근 기사에는 멸종 위기종인 천산갑을 밀수하다 적발되는 사례도 접했다. 그런 이유로 작가는 천산갑의 이미지를 '그'에게 투영했다. "천산갑들도 그러거든" -p.122 소설에 언급된 동일시 말고도 천산갑은 자신의 환경에 매우 민감하지만 매우 수줍음이 많아서 인간을 포함한 다른 동물들과의 접촉을 피하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즉 독립적이며 혼자서도 잘 논다는 얘기다.

<귀신들의 땅>보다는 읽기가 편했다. '그녀'와 '그'만 바라보면 되기 때문이다. 역시나 뒤죽박죽이다. 현재가 먼저 열리고 영화 기법처럼 화자와 시간 전환이 수시로 있다 보니 좀 더 집중력이 필요했다. (영화화하려면 천산갑 장면은 CG로 대체하여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각자의 어린 시절부터 현재까지의 생을 따라가는 과정이 마치 실내에 어둠에 적응하면서, 흐릿했던 사람들의 모습이 점점 선명해-p.84 지는 기분과도 같았다. <귀신들의 땅>에서 보여준 화끈한 농담은 없지만 '그녀'와 '그'의 오래된 우정이 복원되는 과정만큼은 화끈해서 좋았다. 특히 샤넬백씬이 눈물 나게 통쾌했다.

여섯 살이던 그와 그녀는 한 매트리스 광고의 모델로 만나 영화까지 찍으며 우정을 쌓아가지만 '잠'이 지니는 너저분한 속성으로 인해 두 사람을 향한 잣대와 평가는 엇갈린다. 특히 어른들의 언어폭력(차별 언어)은 소름 그 자체다. 그렇게 그녀가 바라던 관계는 반 토막 우정으로 막을 내린듯했으나 오래전 영화가 복원되어 재상영된다는 소식은 그와 그녀를 낭트행으로 이끈다. 하지만 낭트행을 향한 두 사람의 목적은 달랐다. 그는 오래전 자신의 천산갑이 그리웠고 그녀는 그가 그리웠다. 그녀에게 기다림은 살아가는 동력이었고 그와의 만남을 통해 그녀는 복원되길 바랐다. 그녀는 오래전 함께여서 편안했던 그 기억을 다시 찾고 싶었다. 먼저 잠부터 푹 잔 뒤 산책을 하고 싶었다. 하지만 가을의 파리는 두 사람에게 자꾸만 여름의 기억을 들추게 한다.



아역배우 시절부터 온갖 시기와 질투, 비아냥과 냉대뿐 아니라 엄마의 무심함과 이성의 폭력에 노출된 채 성장하고 결혼한 '그녀'는 한 번도 짜릿했던 적이 없었던 자신의 생이 억울하기 그지없다. 듣지 않아도 될 말과 듣고 싶지 않은 말들이 여과 없이 그녀의 혈관을 타고 온몸을 메마르게 한다. 한물간 그리고 천박한 배우라는 낙인은 불면의 밤 속에서 그녀를 서서히 죽여간다. 그녀는 현 남편의 선거용 조끼에 담긴 위선이 징글징글하고 잠자는 그녀의 모습을 들여다보는 남편의 괴상한 취미에 혐오가 인다. 무엇보다 연쇄살인마(아들을 얻기까지 저지른 낙태)인 자신을 용서할 수가 없다.

눈물이 언어였 -p.146 고 요란한 구급차를 두려워하는 '그'에겐 정원 한구석 패배의 산을 쌓아놓을 만큼 일을 벌이는데 도가 트고 끊임없이 여자를 갈구했던 아버지와 그런 아버지의 불륜 현장을 찾아다니던 어머니가 있었다. 두 사람의 불협화음은 그를 침묵 속에 가둔 것도 모자라 아예 버려 버린다. 그와 그녀는 그렇게 흐릿하고, 흔들리고, 결함이 있고, 잊히고, 초점을 잃고, 색감이 없어지고, 일그러지고, 잡음이 섞인-p.135 과거를 안고 파리를 걷고 낭트로 달린다.

잘 자요~~ 잠을 잘 자는 것이 잘 사는 것이다. 소설에서 매트리스는 중요한 소재이자 다양한 의미로 작용한다.

신형 매트리스는 그와 그녀를 잇는 매개체였고 낡은 매트리스는 억눌린 분노를 잠재우는 편안함이 된다. 아마도 그것은 오래전 그와 그녀가 버려진 후 낯선 곳에서 만난 매트리스에서의 '잠'에 기억 때문일 것이다. 제대로 된 집이 없던 그들에게 매트리스는 집이자 쉼이었다. 또한 낡은 매트리스는 그와 J와의 연결고리로 작용한다. 빨간 립스틱이 잘 어울리던 J의 죽음으로 방향을 잃은 그에게 그녀의 등장은 침묵과 소란을 뒤섞어 반쪽자리 우정을 회복하게 한다. 무엇보다 질문이 많았던 그녀의 눈빛과 말을 자꾸만 삼키는 그와의 신경전은 그녀의 아들이 남기고 간 빵부스러기(안경)로 인해 극에 치닫다 단숨에 녹는다. 결정적인 사건은 그녀의 억눌린 고통이 낳은 담석 때문이기도 했다. 그렇게 그와 그녀의 낭트행의 목적은 엉뚱한 방향의 합의점에 이른다.

너는 나의 게이미야. -p. 467

나 역시 오래전 미드 <섹스 앤 더시티>를 보면서 게이 친구에 대한 바램을 품은 적이 있었다. 그 넉넉한 관계가 부러워서.

가부장적 사회에서의 차별과 억압, 데이트 폭력과 협박까지 그녀에게 이성들은 한 번도 그녀를 진심으로 대한 적이 없었다. 누구에게나 메워지지 않는 구멍이 있다. 그는 그녀의 모든 순간에서 가장 고마운 존재로 그녀의 구멍을 메운다. 그에 대한 불신을 거두고 아들을 끌어안는 과정이 갑자기 일어난 일이 아니다.

아무러면 어때.-p. 444 라는 그녀의 한마디에서 자포자기가 아닌 시각의 유연함이 느껴져서일까. 이것이야말로 두 사람의 낡고 지난한 삶을 복원할 수 있는 생의 기술이지 않을까 싶다. 무엇보다 이 소설에서는 <귀신들의 땅>에서 다소 불편했던 성소수자의 고뇌를 한층 더 포용하게 된다. '페트리쇼르' 그 익숙한 슬픔의 냄새에 더 이상 두려움이 깃들지 않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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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를 건너 너에게 갈게 - 제8회 문학동네청소년문학상 대상 수상작 문학동네 청소년 39
이꽃님 지음 / 문학동네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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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년 전 중학생 딸아이는 서서히 가족에서 친구라는 세계를 옮겨가며 제법 내 속을 썩였었다.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한 아이의 문은 단단했다. 비움과 기다림의 시간을 견디던 그때 눈에 들어온 책이 <세계를 건너 너에게 갈게>였다. 제목에 내 감정을 담아 이 책을 선물하면서도 반신반의했다. 과연 책을 펼치기나 할까 하는. 다행히 책을 읽었고 다음 책인 <행운이 너에게 다가오는 중>도 <죽이고 싶은 아이>도 밀어내지 않았다. 휴대폰에 모든 관심사가 쏠린 딸아이에게 이번 작가의 신작이 반가운 건 당연할 터. 이참에 미처 읽지 못했던 첫 번째 책을 꺼내보았다.

며칠 전 채널을 돌리다 <응답하라 1988>의 한 장면을 보며 이런 생각에 잠겼었다. 아날로그 정서가 그립다는. 나는 미니멀리즘을 추구함에도 여전히 버리지 못하는 박스가 있다. 상자 가득 담긴 편지와 쪽지들은 마치 누군가의 영혼이자 그 시절의 나를 유일하게 떠올려주는 매개체이기 때문이다. 문명은 가속도를 내며 편리함이라는 장점을 자랑했지만 그만큼 우리의 정서는 속도에 반비례하여 일그러진 채 관계의 틈을 심하게 벌려 놓았다.

<세계를 건너 너에게 갈게>는 그런 아날로그적 감성에 타임슬립을 더한다. 현재의 편지가 과거의 어느 시점에 도달한다는 플롯은 영화 <시월애>와 책 <나미야의 잡화점>의 감성을 닮아 있지만 가족이라는 존재는 더 많이, 더 자주 이해해야 137.p 한다는 점에 주목한다. 누군가에게 나의 마음을 전하기까지 그 느린 시간의 틈에서 조바심 나는 설렘을 떠올린 채 지금은 쓰지 않는 편지의 정서를 즐기며 은유가 은유에게 보낸 편지를 읽어나갔다.

은유는 엄마의 이름조차 들은 바가 없이 15년을 지나고 있다. 입을 닫아버린 어른들 때문에 은유는 중2병을 넘어 반항의 수위가 높아져만 간다. 그러다 난데없는 새엄마의 등장에 시한폭탄이 되어가던 중 아빠는 뜬금없이 미래의 나에게 편지를 쓰라는 제안을 한다. 아빠를 흉보고 가출 결심까지 적어놓은 편지는 은유에게 도착한다. 1년 뒤의 미래가 아닌 500원의 동전이 탄생하고, 연탄가스를 걱정하고, 습니다를 읍니다로 쓰던 1982년 과거의 은유에게 말이다.

자칫 작위적 설정(과거를 바꾸려는 어설픈 시도)에 식상해지지 않을까 걱정했지만 작가는 그 지점을 조심스레 비껴가며 운명의 접점으로 향한다. 침묵과 무관심에서 기인한 은유의 투정과 하소연은 10살이었던 은유에게, 12살인 은유에게, 16살인 은유에게, 대학생인 은유에게 껑충껑충 전해지며 세상의 중심에 서 있던 은유를 더 너른 공간으로 이끈다. 과거의 은유는 누구보다 미래의 은유에게 적극적이다. 그 노력이 때로는 무모하다 못해 저돌적이라 웃음이 났지만 진심이 흘러가는 방향에 마음이 달콤해진다.

요즘 사회에서 꼭 필요한 화두는 '다정'이다. 가장 따스한 안도감에 마음이 일렁이던 지점이 새엄마의 이름이 등장했을 때였다. 다정씨덕에 아빠는 뒤늦게 잃어버린 미소를 되찾는다. 다정씨덕에 편지의 기적이 탄생했다. 어쩌면 과거의 은유가 보낸 선물이 다정씨가 아니었을까 싶을 만큼 다정씨는 특별한 존재다. 아날로그적 다정함으로 관계의 꼬인 실타래가 풀려가는 과정을 보며 회복하지 못한 채 끝나버린 아빠와의 시간이 떠올라 마음이 아려온다. 그땐 나도 어렸다. 선을 긋는게 최선이고 합리적인 삶이라고 자만했다.

그때로 돌아갔을 때 혼자가 아니었다면 달라졌을지도.

'1년 뒤 나에게, 1년 전 내가'보낸 편지에서 확신했듯 모든 게 바뀌었다. 은유는 아빠를 이해하는데 기적이 필요했지만 기시적 삶 속에서 필요한 건 대화다. 짐작은 쓸데없는 오해를 낳고 오해는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남기기도 한다. 비록 현재를 치유하기위해 세계를 건널 수 밖에 없었지만 편지가 흐릿해져갈수록 선명해지는 진실에 은유의 성장통을 보상받는 기분을 느꼈다.

아빠가 이제라도 딸에게 게으른 안부를 물을 수 있어 얼마나 다행인지.

이것이 기적이 아니고 무어란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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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최초의 수렴청정 정희왕후 여성 인물 도서관 1
이규희 지음, 이로우 그림 / 청어람주니어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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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여성들의 사회활동이나 목소리가 자유로운 시대다. 여성 정치인은 물론이고 영향력 있는 여성 CEO도 많다. 하지만 역사 속으로 들어가 보면 뛰어난 여성 인물을 찾아보기 쉽지 않다. 특히나 조선시대 유교사상은 여성들의 적극적인 활동에 걸림돌이었다. 그럼에도 뛰어나고 특출난 여인들은 그러한 차별과 불평등한 대우를 이겨내며 존재감을 드러냈다. 그렇기에 남성 중심의 역사 속에서 주어진 소명을 다한 여인들의 이야기는 흥미로울 수밖에 없다.

조선왕조 500년. 태동태세문단세 라고 흥얼거리며 조선왕조 계보를 외운 기억을 끄집어 내어 세조 때로 다시 돌아가 본다. 책 표지 기품 있는 정희왕후를 기억해 보기 위해서 말이다. 수양대군의 이미지를 떠올리면 그리 좋은 이미지가 아니다. 그랬기에 정희왕후의 삶에 대해서는 그리 아는 바가 없다. 마침 만화로 된 조선왕조실록을 뒤적여 보아도 정희왕후의 등장이 짧다. 대체 이 여인의 어떤 점이 특출났기에 여성 인물 도서관의 첫 번째 주인공이 되었을까.






인물 소개만 보면 정희왕후의 삶에는 희로애락과 기승전결의 굴곡이 심해 보인다. 열한 살에 제 짝을 만나 좋은 시절을 보낸 듯 하나 가족의 죽음이 그녀를 불행으로 내몰고 만다. 허나 정희왕후는 역경에 휘둘리지 않고 정신을 바짝 차려 조선 최초의 수렴청정이라는 업적을 남기게 된다.

역사 동화에서 인물을 그릴 때 주요한 사건보다는 인물의 에피소드를 기준으로 짚어 나가며 사건을 이해하는 편이 더 흥미롭다. 이 책도 아이들의 눈높이에 걸맞게 정희왕후의 어린 시절과 두드러졌던 행동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그녀의 운명을 뒤바꾼 결정적 요인은 당차고 쾌활한 성격이지만 어떤 자리에 있든 어떤 순간이든 도리를 다하는 모습이 인상 깊게 다가왔다. 반면 세조에게 갑옷을 내밀 때는 진정 야심가의 면모도 보인다.

세조의 잘못이 낳은 결과는 처참했다. 정희왕후의 올곧은 내조에도 세조의 오만방자를 막을 수는 없었다. 모든 고통을 감내하며 비극의 세월을 지나는 동안 정희왕후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불공을 드리며 억울하게 죽은 이들의 넋을 기리는 것뿐이었다. 더군다나 예종의 죽음 앞에서는 한시라도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나라의 기강을 바로잡기 위해 정희왕후는 슬픔을 거두고 새로이 마음을 다잡아야 했다.

나였다면 권력 암투에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조정에서 뛰쳐나갔을지도 모르겠다. 그런 의미에서 정희왕후는 강단이 세고 심지가 굳은 여인임에는 틀림없다.






시대가 정희왕후에게 기회를 주었다면 정희왕후는 그 어떤 이보다 그 기회를 잘 이용했다. 그녀의 성품을 믿었기에 대신들 역시 믿고 따르지 않았을까. 정희왕후는 앉아서만 하는 정치가 아닌 직접 나서서 서민들의 삶도 살폈다. 수렴청정을 하는 동안에도 성종이 성군이 될 수 있게끔 든든한 조력자가 되는 일에만 신경을 썼다. 진정 현명하고 바른 정치인의 표본이 되는 사건은 그 뒤에 있었다. 이것이야말로 현대 정치인들이 더욱 본받아야 될 자세가 아닐까 싶다.

정희왕후야말로 그림자로 머물다 빛이 된 여인이다. 그녀가 중심을 잡지 않았다면 조선 역사에 또 한 번의 참혹한 비극이 있었을지도.






독후활동지를 보면서 정희왕후의 성품을 짐작할 수 있는 지문들을 읽다가 정희왕후에 대한 이야기를 더 찾아보았다.

그녀의 성품은 집안 내력으로 보인다. 집안 대대로 구설수가 없었다고 하는 점에서 말이다.




이번 도서에서 준비한 굿즈는 한복 카드다. 신년에 쓸 일이 있을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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