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년 8개월 28일 밤
살만 루슈디 지음, 김진준 옮김 / 문학동네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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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야의 작품 <이성이 잠들면 괴물이 눈뜬다>는 18세기의 시대상(격동하는 유럽)을 반영하고 있다. 인간의 어둡고 추악한 면을 자각하여 인간의 어리석음을 강조한다. 계몽주의가 눈을 뜨고 있었으나 혁명과 전쟁으로 혼란을 겪고 있는 시대 속에서 합리적 이성이 잠들면 그러한 무의식 속에 잠들어 있던 인간의 추한 본능이 깨어날 수도 있음을 경고한다.

이 그림의 주석은 다음과 같다. '이성에 버림받은 상상력은 불가사의한 괴물을 낳는다. 이성과 하나로 합쳐지면, 상상력은 모든 예술의 어머니가 되고 경이의 원천이 된다.' 잠든 인간을 깨우려는 부엉이. 그는 인간에게 펜을 쥐여주며 계속 글을 쓰라고 한다. 상상과 이미지가 언어를 만나면 예술이 된다. 이는 다시 언어로 남는다. 그것이 이야기다. (이야기가 현실을 비춰주는 참다운 거울이 되었다고 이븐루시드는 생각했다.-p.27) 살만 수류디의 개인사와도 맞닿아 있는 이 책은 그가 종교와 이성과 비이성에 관한 통찰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책을 덮고 나서야 이 그림이 왜 맨 앞자리를 차지하고 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인류는 이 이성이라는 무기로 세계를 이끌어 왔다. '내가 제일 잘 나가'를 부르짖으면서. 그럼에도 여전히 세계는 전쟁 중이다. 이성과 비이성의 경계에서 아슬아슬 줄타기를 한다. 조금만 선을 넘으면 총알이 날아가고 폭탄이 터진다. 그 중심엔 종교가 있다. 여전히 종교는 논란의 중심에 서 있다. 종교인들의 집단이기주의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우주가 10차원이나 되는 31세기쯤이라면 아마도 막을 내리게 되지 않을까.

그렇기에 책에서 눈여겨볼 것이 두 철학자의 논쟁이다. 12세기를 주름잡던 위대한 철학자 이븐루시드와 그의 적수 가잘리와의 종교 논쟁에서 작가의 확고한 종교관이 드러난다. 종교 때문에 큰 위기를 겪은 바 있던 그가 이븐루시드를 통해 하고픈 이야기를 맘껏 떠든다. 얼마나 속이 후련했을까. 비록 『천일야화』의 셰에라자드처럼 목숨을 구하기는커녕 또다시 위험에 빠질는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마족.

오래전 연기 없는 불로 이루어진 존재이자 천사도 아닌 악마도 아닌, 인간의 속성과 어딘가 닮아 있지만 인간도 아닌, 불 없는 연기 혹은 그림자 같은 존재가 있었다. 그들은 장난과 폭력과 무질서도 좋아한다. 이 재앙의 시대가 마족 때문에 시작된 건지 아닌지 확실하진 않지만 마족의 광기와 인간 내면의 광기의 합작품임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쯤 마음속에 깊고 슬픈 상처(그는 모든 글에서 이성, 논리. 과학 같은 말과 하느님, 신앙, 쿠란 같은 말을 서로 화해시키려 노력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p.24)를 받고 귀양살이 신세가 된 이븐루시드에게 마족 공주가 찾아온다. 태초의 운명처럼 인간세계와 인간 남자를 향한 끌림을 거부하지 못하고 마족의 본성(끓어오르는 욕정)을 마구 발산한다. 늙은 이 철학자는 매일을 감당할 수 없자 그녀에게 이야기를 들려주기 시작한다. 그들이 함께한 2년 8개월 28일 동안 밤마다 수많은 이야기가 오갔고 수많은 아이들도 태어난다. 어느 나그네가 지어주었다는 그녀의 이(두니아-세계)처럼 그녀의 자손은 세계로 퍼져 나간다.

 

내 몸에서 세계가 태어날 테니까, 그리고 내가 낳은 아이들이 세계로 퍼져나갈 테니까.

-p.19

 

그로부터 한참 뒤 어느 날 갑자기 폭풍우가 몰아쳐 세상이 어둠에 잠긴다. 이 재앙의 시간도 2년 8개월 28일이다. 이 무슨 저주의 숫자도 아니고.ㅋㅋ 하지만 우습게도 저주 같은 일들이 벌어진다. 이는 두니아의 후손들에게서 발견된다.(그들은 귓불이 없다고 한다.)서서히 공중부양을 하고, 그림이 깨어나 살아 숨 쉬고, 진실을 구별하는 능력이 생기고, 손끝에서 번개가 튀어나온다. 그럼에도 이미 세상은 비이성이 난무하는 시대였기에 그들의 능력 또한 괴현상의 하나로 치부한다. 마족이 인간세계를 간섭할 때처럼 일어나는 일들 혹은 인간의 귓속을 간지럽혀 정신세계를 어지럽히는 일들 중 하나라고.

 

게다 폭풍우로 인해 벌어진 틈새를 타고 흑마족들의 활개로 세상은 더욱 더욱 뒤죽박죽이 된다. 프랑스의 한 도시에서는 시민들이 코뿔소로 변해가고(외젠 이오네스코가 집필한 희곡 '코뿔소') 어느 벨기에 남자는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뒤통수를 보았으며 러시아의 한 공무원은 코를 잃어버린다.(니콜라이 고골의 '빼째르부르그 이야기')

처음엔 이게 뭐지? 이거 다 소설 속 얘기잖아! 하면서도 작가가 너무나 그럴싸하게 현실 속에 버무려놓아서 웃음이 났다. 어떤 내용은 어느 소설의 일부인지 도무지 알 수 없어 더 궁금해 미치겠다.^^ 누가 좀 알려줘요!!

 

 

인류의 생존을 위한 최고의 희망은 그들의 회복력, 즉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낯설고 터무니없는 일을 직시하는 능력이다. -p.117

 

인간을 사랑한 두니아. 시간이 흘러 이븐루시드를 다시 찾은 그녀는 그로부터 혼란에 빠질 인간세계를 구해 줄 것을 부탁받는다. 영혼의 삶을 중시하는 종교가 인간의 이성을 흔드는 꼴을 더는 두고 볼 수 없었다. 그녀는 운명을 고리를 엮듯 후손들을 찾아 그들의 본성을 깨워 그 힘을 하나로 모은다. 그중엔 이븐루시드의 복사본인 정원사 제로니모도 있었으니 이 두 번째의 만남을 통해 진정한 사랑도 인류애도 깨닫게 된다. 물론 흑마족을 향한 복수심에 불타긴 했지만.

 

이븐루시드와 가잘리. 그 둘의 관계는 흑마족과 백마족의 싸움으로 또 갈린다. 오랜 시간 병에 갇혀있던 흑마족 거마 주무루드는 그를 꺼내준 가잘리의 마지막 부탁을 실행에 옮긴다. 하지만 그들을 비웃듯 더 잔악해진다. 두려움으로 가득 찬 세계를 구할 수 있는 것은 히어로인가, 신인가!

 

두려움은 두려워하는 자를 변모시키는구나.-p.245

 

이 책에는 정말 수많은 이야기가 등장한다. 작가는 이 세기에 널린 이야기 속 다양한 캐릭터와 모티브를 끌어와 재미와 풍자를 더한다. 풍성한 이야기에 저자의 이야기가 더해져 더욱 매력적인 이야기가 되었다. 뭔 말도 안 되는 소리야(마신들의 성욕을 억제한 대가가 인류의 재앙이라니.ㅋ) 하다가도 지금의 현실을 직간접적으로 반영하고 있어 한 문장도 놓칠 수가 없다. 피에 굶주린 주무루드와 그의 일당들이 벌이던 정복전쟁의 양상과 마족이 인간에게 옮아와 벌이는 싸움판 뿐만 아니라 여성을 겨냥한 전쟁 등은 과거이자 현재의 모습이다.

 

광기는 결점에서 발생하고 분노는 동기 없는 복수극만 낳는다. 두려움으로 인해 가짜 신을 만들어 낸 자들은 또한 실체가 없는 개념들로 전쟁을 벌인다. 그럼에도 인간은 다시 평화를 찾는다. 이븐루시드가 말했듯 육체 없는 삶은 의미가 없고 죽음에 가까워질수록 사랑의 크기는 커진다. 제로니모는 그가 공중으로 떠오를 때마다 어두운 기억을 직시했다. 그는 그의 비밀 자아가 눈을 뜸으로써 다시 내려올 수 있었다고 믿는다. 즉 두려움의 실체는 두려움을 두려워하는 본인 자신임을 깨달은 것이다. 그리고 생성의 시간을 살고 있는 우리에겐 세계를 다시 열어줄 이성의 시대가 필요하다. 열려라 참깨!

 

사랑은 겨울 뒤에 찾아오는 봄이다. 사랑은 인생의 혹독한 추위가 남긴 상처를 치유해 준다. -p.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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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1-01-28 23:2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광기는 결점에서 발생하고 분노는 동기 없는 복수극만 낳는다. 두려움으로 인해 가짜 신을 만들어 낸 자들은 또한 실체가 없는 개념들로 전쟁을 벌인다.]이구절은 지금현실세계하고 딱 맞아 떨어지네요[사랑은 겨울 뒤에 찾아오는 봄이다. 사랑은 인생의 혹독한 추위가 남긴 상처를 치유해 준다] 코로나 백신이 마스크속에 갇혀 살고 있는 우리들을 구원해주길 바래요 사랑보다 더중요한 백신 ㅋㅋㅋ건빵님 살만 작가에 끝없이 펼쳐지는 이야기 갈래 다음편이 기다려질정도로 끝이 없는것 같아요 ^0^

건빵과 별사탕 2021-01-28 23:24   좋아요 1 | URL
살만 작가 처음 만나는 작품인데요. 진짜 이야기를 주무르고 버무리는 능력이 대단하네요.ㅎ 한밤의 아이들 모셔두고 있는데 담달 들어갈까합니다. 편안하고 따수운 밤 되시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