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찾을 수 있다면 어떻게든 읽을 겁니다 - 삶과 책에 대한 사색
어슐러 K. 르 귄 지음, 이수현 옮김 / 황금가지 / 2021년 1월
평점 :
내가 어슐러K르귄이라는 작가를 처음 알게 된 건 방탄소년단 때문이었다. 그들의 뮤직비디오 <봄날>을 유심히 보면 오멜라스라는 간판이 짧게 지난다. 지금도 오멜라스를 검색하면 이 뮤직비디오와 연관된 컨텐츠가 제일 상위에 노출된다. 그만큼 노래의 성공은 잘 모르던 SF 작가의 책을 나의 서가에 꽂아놓게 한 셈이다. 오멜라스는 그녀의 단편 <오멜라스를 떠나는 사람들>속 가상도시다. 당시 단편을 그리 즐겨 읽지 않던 나는 단편에 담긴 묵직한 메시지에 충격을 받았고 그 뒤 작가의 에세이집도 망설임 없이 들였었다. 하지만 소설을 주로 읽다 보면 에세이집이 자꾸 밀린다. 결론은 아쉽게도 에세이집을 건너 뛰고 그녀의 산문집을 먼저 읽게 되었다.
책에 대해 언급하기에 앞서 먼저 이 책은 내게 위험했다. 그녀와 함께한 삼 일 동안 내 지갑이 무진장 털렸다. 작가의 산문집. 특히 이렇게 노골적으로 그녀의 서평과 서문을 메뉴로 하고 있는 책이라면 어떤 독자든 털리지 않고는 못 베길 것이다. 행복한 비명이지 않냐고? 확실한 건 당분간은 손가락에 붕대를 감아둬야 할 것 같다는 것이다.^^
비록 지름신이 강림해 힘들긴 했어도 이 책을 읽는 동안만큼은 너무나 즐거웠다. 몰랐던 작가를 향한 궁금증은 당연하거니와 알고 있는 작가에 대한 새로운 시선과 그간 내가 막연히 SF라는 장르에 가지고 있던 편협함까지 깨부술 수 있어 유익했다.
상상은 현실을 알고, 현실에서 출발하고, 돌아가서 현실을 풍성하게 만들어요. -p.192
SF는 그 상상의 세계에서 닫혀버릴 이야기가 아니다. 판타지는 어린이 문학이 아니다. 더더욱 상업성에 휘둘려 가벼이 치부되고 소비되고 말 이야기가 아니다. 아직 그 진중한 세계에 발도 들여놓지 않고 마치 다 아는 것처럼 생각을 접어버릴 이야기가 아니다. 가공의 세계에서 만난 낯선 언어를 다시 배우고 동물과 언어로 교감하고 무한한 초능력과 마법의 세계 속에서 우리는 더 강력한 깨달음을 얻기도 한다. 저자가 말한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것들의 정신적 재현"을 통해 우리의 정신을 깨울 수 있다. 꿈의 어둠이 아닌 상상의 빛 속에서.
저는 엄지손가락 없는 삶을 상상할 수 있지만, 상상력이 없는 삶은 상상할 수 없습니다. -p.22
1장에서는 다양한 분야에 관한 저자의 에세이를 만날 수 있다. 나처럼 작가의 글을 접하기 전이라면 저자의 매력에 푹 빠질는지도 모르겠다. 기업 출판사와 서점 체인의 몹쓸 구조와 행태 그리고 남성우월주의에 빠진 문학계에 쓴소리를 아끼지 않는다. 그 외 장르문학에 대한 견해, 시, 언어, 자연, 책의 운명, 상상 등을 통해 문학이 삶에 끼치는 영향과 가치에 초점을 맞춘다. 특히 저자는 열일곱 살에 버지니아 울프의 의식의 흐름 속에서 아주 색다르고 극적인 세상을 발견한다. '완전히 다른 어딘가'로 실려가는 설렘을 느꼈다고 하는데 역시 작가는 떡잎부터 다른가 보다.
당연한 말이겠지만 작가는 글을 잘 써야 한다. 의도적 글쓰기가 아닌 이야기를 쓰는 것. 쓰면서 작가 스스로도 진실을 발견하고 독자 또한 또 다른 진실을 찾는다면 그것이야말로 잘 쓰인 글이라는 의견에 이견은 없다. 저자는 그 의견에 아름다움이라는 관점을 더한다. 저자에게 아름다움이 무엇인지 일깨워 준 건 어린 시절의 집이었다. 빛과 공기가 내려앉던 레드우드 계단. 기막힌 풍경을 바라보며 하는 설거지. 실내 가득한 레드우드 향. 자연과 조화롭게 살아 숨 쉬는 그런 집에서라면 아름다움에 관한 감각이 그 어떤 이들보다 더 열려 있을 것이다. 글 속에는 그런 아름다움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그 맛을 찾아낼 독자들을 위해서.
요즘 나는 아이들과 매번 충돌한다. 이유는 바로 휴대폰 때문이다. 손끝이 주는 유희에 빠진 아이들은 이미 책을 잊은지 오래다. 책을 읽는 집이라면 아이들도 자연스레 읽을 것이라는 말은 휴대폰이 없던 시절에 나온 말인 것 같다. 아무리 기다려도 휴대폰을 이길 수 없을 것 같아 절망스럽기까지 하다. 그럼에도 저자는 종이책에 대한 희망과 확신을 말하고 있어 위안이 된다. 전기도 필요 없고 기술의 진보도 필요 없는 종이책이 주는 위안. 여기에 이 책의 제목이 등장한다.
우리 손끝에 달린 온갖 유혹에도 불구하고, 나는 책 읽기를 익힌 고집스럽고 내구력 있는 소수가 오랫동안 그러했듯 앞으로도 계속 책을 읽으리라 믿는다. 종이든 화면이든, 찾을 수 있다면 어떻게든 읽을 것이다. -p.183
저자는 자신의 능력에 대한 믿음 덕분에 자신만의 길을 탄탄히 다져왔다. 그 믿음의 증거인 그녀의 책 서문과 서평들은 내게 보석처럼 다가왔다. 2장과 3장을 읽으면서 좋은 서평의 틀이 보였고 앞으로 책 한 권을 읽더라도 어떠한 관점으로 바라보는 게 좋을지 고민하게 된다.
책의 서문에 실린 글들 중 강한 흥미를 끄는 작품들도 여럿 있었으나 책을 구할 수 없거나 국내에 소개되지 않은 작품도 더러 있어 아쉬웠다. 스타니스와프 렘의 <솔라리스>는 정말 읽고 싶은데 책을 구하기가 쉽지 않아 보인다.ㅜ.ㅜ 생각하는, 살아있는 행성이라니.
그래도 찾을 수 있다면 어떻게든 읽을 겁니다.^^
헉슬리의 작품에 관한 견해도 흥미로웠다. 경고성 소설이 갖고 있는 미래 예언을 헉슬리는 '믿음'으로 증명했기에 지금까지도 읽히는 것이다. 불안한 20세기를 대변한 작품임에도 이 불안이 걷히지 않는 한 계속 읽히지 않을까. 그러고 보니 아이들 방에 있는 어린이 고전 전집에 판타지 문학이 제법 있다는 사실을 재차 확인하게 된다. 조지 맥도널드의 <공주와 고블린>뿐만 아니라 읽지 못한 책이 많다. 아이들과 함께 읽을 좋은 묘수를 찾아봐야겠다.
꼭 읽어야 할 책이자 저자가 사랑하는 작품이라고 소개한 파스테르나크의 <닥터 지바고>는 재작년 북 카페 회원들과 함께 읽으려다 포기한 적이 있었는데 아쉬움이 밀려온다. 이렇게라도 다시 언급이 되니 이번엔 꼭 읽어야겠다. 저자가 가장 좋아하는 작품이라고 언급한 주제 사라마구의 <동굴>을 읽을 때쯤 때마침 이 책을 읽는 중이라는 북모임 이웃 덕에 더욱 관심도가 상승한다. 저자도 사라마구 편에서 유독 많은 이야기를 쏟고 있다. 어두운 작품세계 안에 깃든 묵직한 풍자와 현란한 글 솜씨에 깃든 재치들을 엿보고 싶다. H.G. 웰스의 작품들은 제목(타임머신, 투명 인간, 우주전쟁, 달의 첫 방문자)부터가 SF의 시작을 여는 것들이다. 웰스의 세계에서 본 그는 순수한 과학자인듯하면서도 창작욕이 불타는 작가인듯하다. 그의 단편 몇 편은 꼭 만나보고 싶다.
저자의 고민과 확신은 명확해서 신뢰가 간다. 서평에 대한 부담은 곧 작가에 대한 평가로 이어지기 때문에 부담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저자의 서평들은 충분히 예를 갖추고 있다. 지나치게 자기중심적이지 않다. 독자를 충분히 배려한 글솜씨가 맘에 든다.
3장에서는 아는 작가도, 읽은 작품도 제법 있어 글이 더 잘 들어온다. 켄트 하루프, 토베 얀손, 얀 마텔, 살만 루슈디, 주제 사라마구의 서평을 꼼꼼히 읽으면서 기억을 되살렸다. 켄트 하루프의 글은 진실되게 읽힌다는 말과 토베 얀손의 작품에서 느낀 묘사(서두르지 않고 적확하며 선명)에 관한 표현도 백번 공감한다. 얀 마텔의 <포르투갈의 높은 산>을 읽었을 때의 그 기이함이란. 내겐 정말 잊을 수 없는 작품으로 남아 있는데 저자의 마지막 문장을 더해본다. 떨쳐 낼 수 없는 다정함.
살만 루슈디의 <2년 8개월 28일 밤>은 얼마 전에 읽은 책이다. 저자는 결말에 대해 다소 실망스러운 의견을 보인다. 하지만 빛이 어둠을 이길 더 나은 방안이 있을까. 실상은 그러지 못할지언정 소설만이라도 희망적이어야 하니까. 마거릿 애트우드의 신작이었던 <도덕적 혼란>을 들일까 말까 고민했었는데 마지막 문장에서 유혹을 떨치지 못하겠다. 정말이지, 애트우드 같은 작가는 없다.
상상은 손끝과 그 손끝의 주변 환경에 영향을 받는다. 저자는 여자들만 모여있는 칩거처인 헤지브룩에서 노트북이 아닌 종이 노트에 한자 한자 쓰는 일에 의미를 부여한다. 눈앞에서 토끼가 뛰어가고 도마뱀이 등장하는 곳이라면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나 피터 래빗 이상의 상상이 가능하지 않을까.
주제 사라마구와 이탈리 칼비노의 작품 또한 줄줄이 들여놓고 나니 든든하다. 올 하반기는 SF의 세계에 푹 빠져보련다. 그리고 나는 책의 운명을 이어 줄 소수의 한 사람으로 남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