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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란
이현수 지음 / 문학동네 / 2020년 12월
평점 :
<토란>은 새 옷을 입고 조금 다듬어져 재출간 된 책이다. 표지 그림은 단편 <불두화>를 그린 것이고 표제작 <토란>은 이 책의 첫 번째 단편이다. 보통 표제작 -내가 본-은 중간 아니면 거의 끝나갈 즈음 등장하기 마련인데 <토란>이 제일 먼저 등장한다. 열 편의 단편 중에서 단연 <토란>이 압도적이긴 했다. 부엌에서 한바탕 벌어지는 요리의 소음과 그녀의 구수한 사투리에 들러붙은 한恨. 거기에 거실에서 울려 퍼지는 음악소리까지 더해져 묘한 합주를 이룬다. 그 소음들 사이사이에 놓인 보이지 않는 신경전. 라디오 구성작가였고 요리 좀 한다고 알려진 작가여서인지 세밀한 직관과 어우러진 능숙한 말놀림이 돋보인다. '아. 이런 관찰력을 지녀야 이런 글이 나올 수 있구나'를 틈틈이 되새겨가며 읽었다.
마지막 단편을 제하고 아홉 편의 단편들은 여성의 삶을 이야기한다.
<토란>과 <도마령>에서 비치는 오래전 엄마들의 삶은 무능한 남편 때문에 더욱 억척스럽다. 그녀(아내)들은 시집살이의 설움보다 그(남편)에 대한 원망과 분이 끓어넘친다. <토란>속 그녀는 싹수없는 그의 비화를 들춰내어 헐뜯고 또 뜯는다. 그럼에도 분을 삭이지 못하고 결국 밥상을 엎어버린다. 그녀는 그렇게라도 자존심을 지키고 싶었다.
반면 <도마령>속 그녀는 그에 대한 기억을 윤색하고 미화하는 데 평생을 바친 사람-p.228으로 그려진다. 방식은 달라도 그녀는 끝까지 그를 추켜세움으로써 그녀의 존재감을 지켰다. 그녀는 그의 죽음 뒤에 온 연민으로 그녀의 삶을 긍정적으로 끌고 나갔다. 그러면 된 것이다. 그것이 내 삶을 사랑하는 길이었다면.
<토란>은 평생 원수지간처럼 살아온 시모와 시부의 화해를 위해 며느리가 조촐한 식탁을 차려내는 것으로 시작한다. 미운 놈은 떡 하나도 더 준다는데 시모는 시부의 입으로 자꾸만 들어가는 새우가 못마땅해 결국 폭발하고 만다. ㅋㅋ
이처럼 절대 살아서 풀어내지 못할 사이도 있다. 가려워 견딜 수 없는 토란의 독처럼 그와 그녀는 끝까지 가려운 곳을 긁어 줄 수 없는 사이일 뿐이다. 어찌 되었든 불협화음 끝에 폭발해버린 현장에서 꿈을 잃은 자의 눈빛이 되어 퇴장한 그에게서 사뭇 안쓰러움이 밀려온다.
<마른 날들 사이에>와 <비하리에서,나는>에는 짐승만도 못한 놈 때문에 마음의 문을 닫아 버린 여자들이 등장한다. <마른 날들 사이에>속 여자는 갈보년의 딸이라는 놀림과 청소년기에 맞닥뜨린 짐승만도 못한 관계(엄마와 내연남)로 인해 인생이 까슬까슬하게 메말라버렸다. 여자는 마시고 마셔도 늘 갈증에 시달린다. 마치 의문이 해결되지 않아 목마른 사람처럼. 그랬던 여자는 자신이 운영하던 산장의 투숙객으로 인해 예전부터 떠안고 있던 의문을 풀게 된다. 동전의 앞면과 뒷면이 따로 존재할 수 없다는. 모든 이치가 양립된 채로 하나의 존재를 이룬다는 사실을 깨닫자 무책임했던 엄마에 대한 원망을 지워버린다.
<비하리에서, 나는>속 짐승은 좀 더 강력하게 여자의 삶을 옥죈다. 탄광촌의 음침하고 우울한 분위기와는 달리 풋풋한 시절을 지나고 있던 나경은 그날도 절친과 함께 더위를 피하기 위해 밤마실을 감행한다. 우중충한 비하리의 삶에 진저리를 친 건 친구 경옥이었건만 떠난 건 나경이었다. 한 여름, 굶주린 욕망을 주제하지 못한 짐승 같은 놈이 나경을 지목했기 때문에. 나경은 비하리를 등지고 떠났음에도 비하리 밖에서조차 등을 돌리고 결국 비하리로 돌아온다. 하지만 그녀가 돌아온 날. 그날과 똑같은 일이 벌어진다. 그렇지만 이번은 달랐다. 오래전 자신을 옭아매던 과거와 다시 마주한 그녀는 짐승 같은 놈을 물고 놓지 않는다. 마치 그보다 더한 포악한 짐승이 되겠다고 작심한 것처럼. 사는 것처럼 살고 싶다고 나경을 떠난 남편처럼 그녀도 사는 것처럼 살 수 있을까.
사랑은 아프다. 어쩌면 사랑도 병이다. 그것이 더더욱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라면. 젊은 베르테르도 죽음으로 사랑의 완성하지 않았던가. <불두화>속 서경은 어느 날 불쑥 찾아온 사랑 때문에 죽을 만큼 아팠고 여전히 힘들다. 그가 아니라 그녀였기 때문에. 서로의 마음을 확인했고 서로를 안았음에도 세상의 시선을 감당할 수가 없어 관계를 끊어 버린 건 서경이 아닌 그녀가 먼저였다.
그녀는 살 의미를 잃은 사람처럼 무너져 갔지만 정신을 차리고 보니 자신 때문에 한 남자아이가 죽어버렸다. 정작 죽겠다고 삶을 내려놓은 건 자신이었는데 자신을 좋아하던 남자가 죽은 것이다. 이 얼마나 아이러니하고 어처구니없는 일인가. 향기가 없는 꽃 불두화를 보며 세상의 덧없음을 떠올린 그녀. 그럼에도 이 <불두화>의 꽃말은 제행무상(우주의 모든 사물은 늘 돌고 변하여 한 모양으로 머물러 있지 않다.)이다. 살아 있는 한 그녀는 한 모양으로만 머물러 있지 않을 것이다.
<파꽃>과 <미노>는 짝사랑 이야기라는 공통점이 있지만 <미노>편이 좀 더 냉정해 보인다.
<파꽃>의 첫 문장만으로도 이야기의 의미를 짐작할 수 있다. 자기도 모르게 지나간 순간을 뒤늦게 깨달았을 때 내지르게 되는 한마디. 파······ 그는 그저 대전 전파사 작은 총각이라 불리며 정확한 이름도 나이도 모르는 친한 이웃일뿐이었다. 여자의 집안 곳곳 그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었음에도 여자는 주위를 맴돌던 그의 마음을 전혀 눈치채지 못한 채 세월을 보냈다. 오래전 파꽃도 꽃이냐고 묻던 남자. 여자에게서 들었던 파꽃의 의미를 들으며 스스로를 파꽃 같다고 여겼을 남자의 순정이 안타까워 내 입에서도 그 단어가 절로 나온다. 파······꽃.
십오 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음에도 경마장에서 <미노>를 단박에 알아 본 여자는 어린 시절 미노와의 추억을 상기한다. 어쩔 수 없이 마을을 떠나버린 건 미노네였지만 텅 빈자리에서 솟아난 아픔은 오로지 그녀 몫이었다. 미노를 다시 마주한 여자는 그리움보다 그때의 기억이 불쑥 떠올랐나 보다. 꼭 기다려달라던 미노에게 무슨 심술이 발동한 걸까. 하지 못한 말들만 둥둥 떠있을 것만 같은 그 자리가 몹시 서늘하다.
<거미집>을 읽고 있으니 속에서 천 불이 난다. 아들 아들 하지만 정작 늙은 어미를 거두는 건 죄다 딸 몫이다. 늙은 어미와 맏딸 양지뜰댁의 사이는 이제 동지 같은 존재가 되었다. 맏딸은 여전히 어미의 아들 사랑이 눈꼴 시리고 양지뜰댁은 시엄니의 눈엔 딸만 둘 낳은 죄인이다. 이놈의 아들 아들 문화는 여자들이 한 술 더 떠서 만든 게 아닐까 싶다. 그놈의 아들 병. 대한민국이 앓고 있는 중병. 두 아들 보고 살겠다던 늙은 어미의 눈치도 이미 빤하다. 결국 자신의 곁을 지킬 사람은 맏딸이라는걸.
마지막 단편 <그 재난의 조짐은 손가락에서 시작되었다>는 한편의 우화를 본듯하지만 징한 감동이 있었다. 인간을 위해 실험대에 오르는 비참한 생쥐를 화자로 내세워 생명경시와 인간의 이기를 돌아보게 한다. 실험실에서 탈출해 인간에게 복수를 다짐하고 인간의 파멸을 다짐했건만 한 여자 때문에 희생의 길을 택한다. 그는 인간의 뇌세포를 지닌 슈퍼 생쥐다. 생각을 한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생쥐는 모든 인간이 그렇지 않다는 걸 경험했다. 자의에 의한 희생정신이 눈물겹도록 아름답다. 인간은 지독스럽게 이기적이지만 모든 인간이 그렇지 않다는 사실에 안도감을 느끼게 된다.
<토란>부터도 좋았지만 어느 하나 버릴 이야기가 없었다. 그만큼 여성으로부터 뻗어 나온 다양한 관계에 집중하고 되짚어 볼 수 있어 좋았다. 특히 <이 땅의 낯선 자>편에서 여자를 납치한 납치범들의 대화가 정곡을 찔렀다. 여자의 몸값을 계산할 때마다 여자는 점점 자신이 없어진다. '남편의 사랑=몸값'이라는 계산에 자존심이 상하기 시작하고 애도 없고 결혼 오 년차에 몸값은 똥값이 될 수도 있다는 논리. 전혀 틀린 말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에 이르자 실소가 터진다. 위기를 모면한 뒤 그녀가 한 행동에는 그닥 공감이 되지 않지만 각자의 욕망이라는 가면 뒤에 감춰진 진실의 얼굴이 이렇겠구나라는 생각을 했다.
<토란>편을 읽다 총각 무와 파전이 훅 당겼다. 그리고 며느리의 생각처럼 총각 무와 파전은 그냥 내놓는 게 맞는다고 본다. 무는 통째로 베어 먹어야 제맛이고 파전 또한 젓가락으로 찢어 먹어야 더 맛나는 법. 먹는 사람의 노고보다 만든 사람의 노고를 더 생각해야 하지 않나. 집 밥이니까^^